제84화
천마뢰음보(天魔雷音步).
어지러운 난전 속을 헤집고 다니는 천마보(天魔步)와는 달리 장거리 비행을 위한 것으로, ‘천마(天魔)’라는 이름이 붙은 경신술 중에서 가장 느린 경신술이었다.
천마 시절, 이것을 사용했던 적은 중원 무림을 침략할 때뿐이었다.
다른 경신술에 비해 느리면서 장거리 비행만 할 수 있는 이 경신술을 사용한 이유는 단 하나.
천마의 등장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40장 높이에 오른 후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는 그때, 천마뢰음보의 진가가 나타난다.
공기를 뚫듯 지나가며 울려 퍼지는 괴성은 마치 우레와 같았고 300장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들렸다.
‘그 소리로 적들은 두려움에 빠져 사기가 떨어지고 천마신교도들은 사기가 충만해졌지.’
천마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천마신교도들을 떠올린 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펼치는 천마뢰음보로 그때와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성문 입구에서 자신을 막아선 일에 대한 투정을 부리는 거였다.
“다시는 나를 막아서는 일이 없도록 해주지.”
콰과과광-
내공을 일으켜 박차를 가하자 더욱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한편, 시후가 굉음을 내며 날아가자 헤라 왕국 성내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성내에 있던 유저들과 NPC들은 맑은 하늘에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에 혼비백산했다.
“뭐, 뭐야?! 비가 오려는 거야?”
“이렇게 맑은 하늘에 비는 무슨?”
“그럼, 이 천둥소리는 뭔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뭐지? 헤라 왕국 이벤트인가?”
“그런가? 이벤트를 알리는 뭐 그런 전조 현상?”
다들 시후의 심통으로 펼쳐진 천마뢰음보의 위력을 다양하게 각색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잠시나마 Safety World 커뮤니티 검색어 1위가 헤라 왕국으로 바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후는 마음껏 분풀이하며 날아갔다.
왕국 성을 지키는 왕국 기사들은 시후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가까워져 오는 천둥소리에 창을 치켜들었다.
왕국 기사답게 천둥소리의 원인이 시후인 것을 단번에 알아챘고, 그 의도가 곱지 않다는 것을 아는 거였다.
경계 태세를 갖춘 왕국 기사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시후는 천마뢰음보를 거두고 경신술을 펼쳤다.
날아가던 속도가 있던지라 몸을 가볍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왕국 기사들은 새털처럼 훨훨 날아오는 시후의 모습에 식은땀까지 흘렸다.
탁-
“둘러싸라!”
시후가 내려서자 왕국 기사들이 포위했다.
다수에게 포위된 상황이었지만 시후의 표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왕국 기사 중 제법 기운이 거세 보이는 기사가 외쳤다.
아마도 저 녀석이 이 녀석 중 제일 선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녀석들에게까지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기에 시후는 한쪽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여~! 아킬라이! 여기야, 여기!”
성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멀리서 걸어오는 아킬라이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드는 시후였다.
마치 절친을 반기는 듯한 그 모습에 왕국 기사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킬라이에게로 향했다.
헤라 왕국 은빛 날개 기사단장 아킬라이.
번쩍이는 은빛 갑옷과 바람에 휘날리는 금발이 자랑인 미남인 그의 표정이 어째서인지 이상했다.
시후를 볼 때면 미간을 좁히며 더러운 기분을 표현하다가도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여성 유저를 바라볼 때면 바보처럼 헤헤거렸다.
평소답지 않은 아킬라이의 모습은 그렇다 치고 그의 팔을 잡아끄는 여성 유저의 표정은 더 가관이었다.
원수를 향해 걸어오는 전사처럼 잔뜩 성난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 끝에는 방금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유저가 있었다.
시후는 잔뜩 토라진 조민의 표정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조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
남들과는 다른 매력이 살아 숨 쉬는 자신에게 사춘기의 소녀가 연심(戀心)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천마 시절에도 공과 사는 분명하게 구분 지었던 자신이었기에 지금도 그 마음을 그저 모르는 체하기로 했다.
“유라야? 그만 표정 좀 풀지?”
“흥, 몰라요.”
다른 이들이 있어 조민의 게임 닉네임으로 불렀다.
눈치가 빠른 조민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줬으면 해서였다.
하지만 아직 16세 소녀.
조민은 전혀 기분을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후는 하는 수 없이 다른 이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다주힐은 어디 있는 거야?”
자신이 던져버린 진지춘을 찾는 시후의 모습에 다들 어이가 없었다.
“오빠가 던졌는데 저희가 어찌 알아요?”
“으흠, 분명히 이 근처로 던졌는데…. 이봐, 여기 혹시 금발에 덜떨어져 보이는 놈 떨어지지 않았나?”
시후는 자신의 정체를 물었던 왕국 기사에게 물었다.
왕국 기사는 시후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기에 굳게 입을 닫고 있었다.
하지만 시후는 질문과 동시에 독안공을 펼쳤다.
시후의 예상과는 다르게 진지춘은 생각보다 빨리 이곳에 떨어졌었다.
그리고 어찌나 놀랐는지 쉽사리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그 결과 왕국 기사단에 포박당해 지금은 성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라는 것을 읽었다.
눈은 회까닥 뒤집고 질질 끌려갔을 진지춘의 모습을 떠올리자 살짝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내버려 두고 갔을 거였지만 이곳은 신성력을 중요시하는 헤라 왕국이었기에 진지춘을 챙기기로 했다.
“아킬라이, 다주힐이 잡혀간 거 같은데 어디로 갔는지 알아?”
“아마도 집정관에게 끌려갔을 거요.”
“집정관?”
“헤라 왕국의 집정관 하인스 드레이브. 왕국의 행정 및 군사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는 자요.”
집정관 하인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아킬라이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아무래도 집정관 하인스와의 관계가 우호적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후는 고개를 까딱였다.
하인스를 찾아가자는 표현이었다.
아킬라이도 앞뒤 가리지 않는 시후의 태도가 슬슬 익숙해졌다.
헤라 왕국의 프리 패스 카드인 아킬라이답게 그가 왕국 기사단에게 설명을 하자 기사들이 물러났다.
그렇게 아킬라이의 뒤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 몇 번의 통로를 지나자 커다란 연병장이 나왔다.
올림픽체육관에 버금가는 크기의 연병장을 성 내부에 갖추다니, 생각보다 헤라 3세의 스케일이 남다른 것 같았다.
시후는 연병장을 한차례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武)를 연마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작은 돌멩이 하나 없는 바닥은 쓸데없는 상처를 만들지 않을 수 있었고, 구석에는 종류가 다양한 무기들이 즐비해 있어 다양한 무기술을 연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크기가 이만하면 대인 전투를 연습해볼 만하다고 생각할 때 즈음에 멀리서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캬, 하하하, 그래서 제가 말입니다~!”
한껏 들떠 있는 누군가와 연신 수다를 떠는 진지춘.
한쪽 손에는 고급스러운 와인 잔까지 들고 있는 것이 아주 작정하고 즐기는 모습이었다.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까지 안쓰럽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시후였다.
“저 자식이….”
“오, 오빠?”
시후의 표정이 차갑게 내리깔리는 것을 발견한 조민은 다급하게 시후를 잡았다.
하지만 이미 시후의 인영은 그 자리에 없었다.
조민의 손에 닿으려는 찰나 흔들거리며 사라졌다.
시후는 이형환위까지 펼쳐 빠르게 진지춘의 뒤에 자리했다.
그리고 아주 낮은 어조로 진지춘을 불렀다.
“다. 주. 힐.”
“하, 하하, 누구… 히익!”
덜컹-
시후를 발견한 진지춘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놀랐는지 앉아 있던 의자가 쓰러지고 들고 있던 잔은 놓쳐 테이블 위에 와인을 전부 쏟아버렸다.
그런 진지춘의 모습을 보며 일행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매번 똑같은 결과를 겪으시면서도 저리 행동하시는지.”
“저것도 어찌 보면 재주예요, 재주.”
“재능이지. 짧고 굵게 살다 죽으려는 재능.”
모두가 한마디씩 거들뿐 그 누구도 시후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 진지춘과 함께 술을 즐기던 NPC가 벌떡 일어났다.
“무엄하다! 네놈은 누구이기에 이리 오만방자한가?”
“…….”
시후는 며칠 전에 보았던 사극에서 나온 대사를 읊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부진 체격에 굵은 눈썹과 매부리코가 상당히 잘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머리 위에 있어야 할 머리카락이 없는 것이 좀 아쉬웠지만 굵은 눈썹이 시선을 끌고 있어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킬라이가 다가갔다.
“하인스 집정관님. 이들은 헤라 여왕의 부름을 받고 온 손님들입니다.”
“아킬라이? 그대가 데리고 온 자들인가? 그런데 어찌 이리도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인가? 이곳에 오면서 왕실의 예법 정도는 익혀… 웁!”
텁-
침이 튀겨라 나불대던 집정관 하인스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시후가 한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은 거였다.
시후보다 20cm는 커 보이는 하인스는 입이 막혀 오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점점 힘이 빠지며 손님이라는 유저와 눈높이가 맞고 있었다.
“다시 잘 봐라. 네 눈앞에 있는 상대가 아직도 오만방자한지.”
천마 시절에도 자신에게 ‘오만’과 ‘방자’라는 단어를 내뱉던 이들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법정의 손에 죽기 전까지 그들이 살아 숨 쉬는 일은 없었다.
자신을 오만방자하다고 보는 눈은 뽑아주었고 그리 생각했던 머리는 박을 쪼개듯 부수어 줬으니 말이다.
‘아! 생각해보니 몇 놈 남아 있었구나.’
그날, 소림사를 올랐던 날. 천마의 몸에 칼을 찔러 넣었던 이들.
집정관의 말에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거였다.
그때 시후의 팔을 누군가 급히 잡아끌었다.
덥석-
진지춘은 사력을 다해 시후의 팔을 잡아끌었다.
덕분에 하인스의 얼굴을 조이는 손아귀 힘이 줄어들었다.
“도, 도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뭐야, 지금 나 막아서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진지춘은 지금 이곳에서 하인스를 죽이게 되면 헤라 왕국의 척살 대상이 되는 것을 우려한 거였다.
아무리 헤라 3세의 초청을 받고 온 손님이었지만 왕국의 고위 관료를 죽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게 뻔했다.
왕국의 척살 대상이 된다면 앞으로 Safety World를 하는 데 있어 큰 제약이 걸릴 거였다.
우선 시후와 연관된 한스텔 마을부터 왕국의 침략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집정관이라는 직위는 큰 것이었기에 진지춘이 말린 거였다.
하지만 이미 살기가 피어오르는 시후의 눈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잡았던 팔을 놓고 있었다.
대신 고개를 돌려 조민에게 신호를 보냈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조민 또한 이렇게 화가 난 시후를 본 기억은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저 모습은 자신이 연심을 품은 시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평소 잘 굴러가던 머리가 지금은 완전히 멈추었다.
진지춘과 조민이 이럴진대 다른 이들 또한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때 뜻밖의 인물이 시후에게 다가갔다.
챙-
허리춤에 차고 있던 실버 소드인 ‘헤라의 분노’를 뽑은 아킬라이였다.
“그만하세요. 그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당당하게 검 끝을 자신을 향해 치켜세우는 아킬라이를 본 시후는 천천히 하인스를 놓아주었다.
대신에 양쪽 손목을 살짝 부딪치며 앞으로 걸어왔다.
챙-
손목에 체결되어 있던 팔찌의 진짜 모습인 ‘용호쌍검’이 시후의 손에 들려졌다.
후아악-
그와 동시에 시후를 중심으로 기의 폭풍이 몰아쳐 갔다.
일행들은 그 기에 실린 살기를 느끼고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일행들을 향해 시후는 고개를 까딱였다.
한쪽으로 비켜서 있으라는 표현이었다.
그에 일행들은 빠르게 진지춘과 하인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어느새 하인스는 진지춘의 힐을 받아 몸을 회복하고는 일행들 틈에 섞여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연병장에 홀로 남게 된 아킬라이는 시후가 다가옴에 따라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고 보니 네 녀석의 이화접목의 수법이 제법이었지?”
일전에 보았던 아킬라이의 동영상을 떠올린 시후는 그를 칭찬했다.
싸움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넓은 자리로 이동하는 아킬라의 모습까지 말이다.
그렇게 뒷걸음질 치며 연병장 가운데 서게 된 아킬라이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한스텔 마을에서 오크 부족장을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크, 크큭, 오랜만이군요. 이런 긴장감, Safety World에서 이런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 날이 생기다니.”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럼, 그 기분 좀 잡쳐줘 볼까?”
둘은 상대방을 잠시 응시하고는 동시에 검을 내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