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시후는 오랜만에 보는 루프에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케냔 협곡으로 떠나기 위해 퀘스트 여관 마스터에게 루프를 추천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순식간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는 장치였다.
“살짝 울렁거리는 거만 빼면 참 대단하단 말이지. 아! 생각났다.”
루프에 대한 감상에 젖을 때 문득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시후는 빠르게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퀘스트 여관 마스터에게 메시지를 적었다.
- 그때 루프 사용에 대한 설명 아주 고마웠다. 덕분에 오늘은 처.음.부.터. 여럿이 함께 왔다.
메시지 전송을 누르자 바로 답장이 왔다.
- 히익! 후 님!! 그때는 제가 깜빡했었습니다! 이번에 돌아오시면 성대한 환영식을 위해 만찬을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마스터의 답신에는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기억해낸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용서해줄 거였으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 만찬은 이미 즐겼으니 너는 헤라 왕국 다녀와서 보자. 그때까지 건강하도록.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보낸 시후는 스테이터스 창을 닫았다.
시끄럽게 울리는 메시지 알람도 꺼버렸다.
아마도 마스터의 절규가 담긴 메시지일 게 뻔하였으니 무시하는 거였다.
“다녀올 동안 속앓이 좀 해라.”
마스터가 끙끙거리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생각을 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은 군소리 없이 따르자.’
오늘 시후가 하는 일에 괜히 딴지를 걸었다가는 크게 봉변을 당할 것 같았다.
다들 그렇게 의지를 다지는 중에 시후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뭐지? 그 어색한 웃음은?”
“어? 왜? 뭐가?”
시후의 지적에 태산과 인호가 대충 얼버무렸다.
그런 둘의 모습에 독안공을 쓸까도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인간관계에 있어 굳이 상대방의 속마음을 사사건건 읽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그 인간관계라는 테두리에는 시후가 아끼는 이들만 해당하겠지만 말이다.
“준비됐으면 가자.”
출발하자는 시후의 말과 함께 모두가 루프로 걸어 들어갔다.
루프를 이용할 때의 눈부심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빛이 사그라지는 느낌에 한껏 찡그렸던 얼굴을 풀며 눈을 뜨자 보이는 광경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대단한데?”
빈정댈 때가 아니라면 웬만한 것에는 저런 감탄사를 내뱉지 않는 시후였다.
그만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감탄을 자아냈다.
헤라 왕국의 루프는 성내에 있지 않았다.
성문이 콩알만 하게 보일 정도로 먼 곳에 위치했다.
그런데도 시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성문까지 가는 길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한스텔 마을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만 보였다.
우선, 거리에 걸어 다니는 종족부터가 다양했다.
큰 귀에 흰색 장발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엘프하며 짧은 팔다리에 두꺼운 근육으로 똘똘 뭉친 드워프도 보였다.
그리고 진짜 토끼와 여우라고 불려도 될 만큼의 모습인 수인족도 보였다.
한스텔 마을 입구에 있던,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면상의 녀석들과는 달랐다.
이런 모두가 헤라 왕국과 이곳 루프를 오가는 중이었다.
거기에 그들은 이곳에 펼쳐진 노상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다.
말이 노상이지 유저들이 붐비는 것으로만 보면 명동 한복판 같았다.
시후의 그런 촌놈 같은 반응에 태산이 슬쩍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크흑, 우리 시후, 내가 많이 미안해. 좀 더 일찍 이런 곳에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뭐야? 왜 이래?”
다짜고짜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태산이었다.
그런 태산을 어이없어하며 바라보는 시후의 반대쪽 어깨에 또 다른 손이 얹어졌다.
“우리 시후가 순진하고 어리바리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촌놈 같지는 않았는데, 미안하다!”
인호는 평소답지 않게 목 놓아 소리쳤다.
놀림과 걱정의 중간을 오가는 말투였다.
시후가 둘의 반응에 어찌해야 고민하던 때에 뒤에서 조민이 나섰다.
“그런 신파극은 셋이 있을 때만 하시고요, 어서 앞으로 가요. 뒤에 밀리고 있잖아요.”
조민의 말대로 루프 앞에 일행이 서 있으니 다른 유저들이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시후는 머쓱해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거리 노상을 구경했다.
“여기 아이템들이 정말 많은데?”
“당연하죠. 헤라 왕국은 세 개의 왕국 중에서도 상권이 가장 발달한 곳이니까요.”
“상권이 발달한 거는 모르겠고 아이템이 엄청 다양하고 많은 건 알겠네.”
거리에 놓여 있는 판매장마다 같은 아이템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곳에 검(劍) 종류의 아이템이 있다면 건너편 판매대에는 도(刀) 종류의 아이템이 있었다.
“상권이 발달하면서 상도덕이라는 게 생긴 거죠.”
“재미있네. 그런데 생각보다 낮은 레벨의 아이템들뿐이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보인 판매대에 놓여 있는 아이템들은 대부분이 Lv. 70에서 Lv. 150 사이에 착용하는 것들뿐이었다.
종류가 다양하니 보는 즐거움은 있었지만, 아이템을 구매할 마음은 일지 않았다.
드라큘라 백작의 저장고에 있던 아이템들을 인벤토리에 가득 담고 있는 시후였기에 성에 차지 않는 거였다.
“좀 높은 레벨대의 아이템들은 왕국 안으로 들어가면 있어요. 거기에는 이런 판매대가 아닌 매장에서 운영하니까요.”
“좋은 아이템은 비싸 보이는 곳에서 판다 이건가?”
“그렇죠. 그뿐만 아니라 왕국 안에는 비약 상점, 액세서리 상점, 스크롤 상점도 있어요.”
조민의 말에 시후가 눈을 빛냈다.
저것들에 대해서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특히 비약.
레벨업을 위해서는 사냥을 하거나 퀘스트를 클리어해서 경험치를 획득해야 했다.
하지만 예외의 방법으로 Safety world에서는 경험치 비약이 있었다.
성능의 차이는 다른 아이템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했다.
하지만 단시간에 레벨업을 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기에 유저들은 비약을 선호했다.
그래서 그런지 경험치 비약의 가격은 상당히 비쌌다.
‘골드만 넉넉하다면 경험치 비약을 모두 사들이고 싶은 마음이야.’
골드를 축내는 오크들만 아니었으면 이번에 비약을 집중적으로 구매했을 터였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시후는 쓴 입맛을 다셨다.
‘액세서리야 인벤토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스크롤은 다르지.’
스크롤의 종류도 상당히 다양했지만 시후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하나였다.
“그 스크롤 상점에 가면 이동 스크롤도 구매할 수 있겠지?”
“뭐, 당연하죠? 특별히 제약이 걸리는 곳만 아니라면 어디에서든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한 스크롤은 인기니까요.”
“좋았어, 그럼 성에 들어가기 전에 그곳부터 가볼까?”
“가는 건 좋은데 아마 살 수는 없을 거예요.”
“왜?!”
당장이라도 성문을 향해 달려 나가려던 시후는 조민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조민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골드가 없어요.”
“…뭐?”
“말했잖아요, 오크들 밥 먹이느라고 골드가 순삭이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스크롤 살 돈도 없다고?”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시후의 표정에 조민이 빠르게 말했다.
“오빠도 봐서 알겠지만, 녀석들 먹는 게 장난이 아니에요, 거기에 번식력은 어찌나 좋은지? 눈 깜박이면 오크들의 숫자가 늘어나 있어요, 오빠 덕분에 한스텔 마을이 유명해져서 찾아오는 유저들이 늘어 환락탑이 호황이라지만 그거에 맞먹게 오크들의 식비가 장난 아니에요.”
조민의 설명을 들은 시후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크들의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거는 이거였다.
여기까지 와서 눈앞에 보이는 이동 스크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는 시후를 보며 다들 조용히 있었다.
그때 일비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주군,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말해봐.”
딱히 묘수가 떠오르지 않던 때에 일비가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하자 시후는 다그치듯이 물었다.
시후의 그런 모습에 일비는 살짝 긴장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크흠, 주군께서는 인벤토리에 많은 아이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그 아이템 중에서 이제는 주군께 필요 없는 아이템들이 있잖습니까?”
“그래서?”
“그 아이템들을 파는 겁니다.”
“……!”
일비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어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지.
일행 중에 가장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조민조차 생각하지 못한 방안에 다들 박수를 보냈다.
“와! 한 건 했네.”
“그럼,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볼까?”
계획이 나왔으니 조민의 지휘 아래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
거리 앞쪽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공간이 있는 곳이 있어 자리를 마련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비천대 네 명이 판자를 들고 와 뚝딱뚝딱하더니 진열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는 동안 시후는 인벤토리를 열어 아이템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시후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사용할 아이템들은 제외했다.
‘언젠가는 써야 하는 것들이니까.’
때가 되면 선물이라며 아이템을 줄 생각이었기에 유니크나 레전드리 아이템은 제외했다.
“오빠, 다 되었어요.”
“그래. 으흠, 이렇게 아이템을 팔 수 있는 거구나?”
진열대로 다가가자 스테이터스 창이 나타났다.
띠링-
[물건을 팔 수 있는 진열대가 있습니다.]
[진열대를 소유하시고 물건을 진열하십시오.]
나타난 메시지에 따라 진열대에 손을 가져다 대자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진열대를 소유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급조하여 만들었지만 제법 튼튼한 진열대(소)’가 ‘See 후’님에게 귀속됩니다.]
[파실 물건에 가격을 책정하여 진열하십시오.]
[진열이 완료되면 판매가 시작됩니다.]
메시지에 따라 인벤토리에 있는 아이템 중 선별한 것들을 쏟아내었다.
가격에 대해서는 조민에게 물어 싸지도 비싸지도 않게 책정했다.
타다다닥-
빠르게 진열대에 아이템들이 놓이자 주변에 있는 노점들과 비슷한 형색이 되었다.
“좋았어. 어서 팔고 성도로 들어가자고.”
시후는 빠르게 아이템들을 팔고서는 어서 성도로 들어가고 싶었다.
성도에는 자신이 원하는 스크롤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하니 호기심이 인 거였다.
하지만 상황은 시후의 기대감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아이템들을 진열하고 벌써 30분이 지났지만 단 하나도 팔리지 않는 거였다.
“뭐지? 이 파리만 날리는 상황은?”
“여기가 좀 눈에 잘 안 띄기도 하고 새로 생긴 노점은 유저들이 잘 찾지도 않아요.”
“왜? 새로 폈으면 궁금하지 않을까?”
조민의 팩트에 반박하는 시후였다.
“아이템 가격을 후려칠까 봐 걱정하는 거죠.”
“이런 겁쟁이들!”
어서 골드를 벌어 성도로 들어가려던 계획이 무산되는 것 같아지자 초조해져 갔다.
그때 그런 시후의 심기를 건드리는 무리가 나타났다.
“이봐, 누가 여기서 장사하라고 했어?”
제법 레벨 좀 있어 보이는 5명이 일행들 앞에 나타났다.
“뭐지? 이 상투적인 대사는?”
이런 곳에 딱 저렇게 나타나 저런 대사를 내뱉는 녀석들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그런 시후의 반응을 오해한 녀석들은 자신들의 기세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는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자릿세를 내야지, 자릿세!”
“자릿세?”
“그래, 어디 우리한테 허락도 없이 이곳에서 장사판을 벌여?”
“허락?!”
“뭐, 반응을 보니 우리를 잘 모르나 본데? 오늘 첫날인 것 같기도 하니 10골드로 봐주도록 하지.”
하도 어이가 없어 가만히 두었더니 가관이었다.
이쯤이면 다른 이들이 나서서 해결할 만도 했는데 다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미 눈치를 챈 거였다.
시후라는 잠자는 사자의 콧구멍을 간질간질하는 저 날파리들의 운명을 말이다.
시후는 녀석들을 어쩔까 생각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너희들 지금 보니 이곳에 대해 잘 아는가 보다?”
“당연하지, 우리가 여기 터줏대감… 뭐야?!”
대답하던 녀석은 순간 시후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이곳은 분명 Safety World라는 가상현실 게임인데 어떻게 된 건지 오금이 저린 게 현실 세계에서도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려던 녀석들을 향해 시후가 손가락을 튕겼다.
푹-푹-
지풍을 날려 녀석들의 마혈을 눌렀다.
“뭐, 뭐야? 이, 이거 왜 이래?!”
입을 제외한 전신의 자유를 잃은 녀석들은 당황했다.
시후는 여전히 말이 많은 녀석들을 향해 천천히 살기를 흘려보냈다.
“커, 커헉!”
시후의 살기에 숨이 막혀 오는 것인지 녀석들의 입에서 고통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난 내가 하는 일에 누구의 허락도 받아본 적이 없다.”
“크…윽!”
“그런데 너희에게 허락을 구하라? 이걸 어째야 하나? 내가 너희에게 허락을 구해야 할까?”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녀석들은 시후를 카오로 오해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죽으면 24시간 로그인을 할 수가 없었다.
황금 같은 주말에 Safety World를 24시간 동안이나 할 수 없다니.
그건 평일 같은 주말을 보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싹싹 빌고 싶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점점 거세지는 시후의 살기에 숨쉬기만도 벅찼다.
녀석들의 대답이 없자 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이 없는 걸 보니 내가 방법을 제시하지. 너희가 여기 물건을 한 시간 안에 모두 팔면.”
“……?”
“살려는 드릴게.”
어느 조폭 영화에서나 듣던 대사를 여기서 듣게 된 녀석들은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날 이곳에 양아치 짓을 하던 5인조는 뜻하지 않은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