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시후는 간단하게 샤워를 끝낸 후 조민과의 약속대로 Safety World에 로그인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눈부심이 사그라지자 익숙지 못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남쪽 입구 맞는데… 저것들은 뭐야?”
오크 부족장 퀘스트를 클리어한 후, 처음 로그인하는 거였다.
그런데 시후가 기억하던 한스텔 마을의 입구와는 상당히 달라진 풍경이 그를 반겼다.
전에는 입구로 나오면 당장 달려들어 때려주고 싶던 근육질 토끼들이 보였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한 초록색 피부의 오크들이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토끼들이 풀을 뜯던 곳에는 울타리가 처져 있었고, 그 안에 여러 개의 천막이 자리했다.
그곳이 오크들의 생활 터전이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밥 먹을 준비를 하는 것인지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어린 오크들이 천막 근처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여기가 한스텔 마을이야, 오크 부락이야?”
착각할 만한 요소가 가득했다.
그런데 시후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려도 오크들은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죽이느니 마느니 하며 전쟁을 치른 사이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싶어 궁금하던 차에 답을 알려줄 이가 나타났다.
“오빠, 거기서 뭐 해요?”
언제 로그인했는지 조민이 걸어왔다.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잘도 찾아왔다.
“그냥, 여기가 많이 바뀐 것 같아서.”
“아, 그건 제가 가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가? 어딜?”
“제가 오빠 캐릭터 보자고 이 새벽에 접속하라고 한 줄 아세요?”
조민은 투덜대며 시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때 오빠가 오크 부족을 돌보라고 하셔서 이곳에 정착시켰어요.”
“저 녀석들을?”
조민은 오크 부족장 퀘스트가 클리어된 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크 부족장 델루가 제압당한 이후 오크들은 유저들의 명령을 따랐다.
정확히는 오크 부족장을 이긴 시후에게서 명령권을 전달받은 조민의 명령을 말이다.
조민은 빠르게 한스텔 마을 영주와 교섭 후 오크들의 처우를 정했다.
우선 오크들을 나누어 머물 영역을 정해주었다.
네 개의 마을 입구에 있는 토끼 영역에 오크들의 거취를 위해 울타리를 쳤다.
아직은 그럴듯한 집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울타리를 통해 영토를 지정해주자 오크 님비 현상이 사라졌다.
그리고 힘이 남아도는 오크들에게 아주 적절한 일자리를 주었다.
“오크들이 케냔 협곡에서 광부 역할을 한다고?”
“네, 거기 케냔 협곡, 타란에게 물어보니 오빠가 주인이라면서요?”
“어.”
“유저들에게 세금을 걷는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좀 바꿨어요.”
“어떻게?”
시후는 케냔 협곡에서 유저들이 채광을 하여 광물을 팔거나 사용할 때 세금을 걷었다.
제법 짭짤한 소득이었는데 조민이 바꿨다고 하니 궁금했다.
조민은 채광을 하던 유저들 대부분이 광부가 아닌 제작 계열의 유저라고 했다.
거래서나 상점에서 광석을 구매하게 되면 골드가 남아나지 않았기에 손재주도 올릴 겸 채광을 한다는 거였다.
“채광하면 손재주 스텟이 올라?”
“네, 제작 계열 유저들에게는 손재주 스텟이라는 게 있는데 손으로 무엇을 하기만 하면 스텟이 올라요. 스킬 숙련도와 비슷한 거죠.”
시후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는 조민이었다.
그렇게 손재주를 올리는 것은 좋은데, 채광을 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으니 물품을 만드는 데 투자하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조민은 오크들에게 채광을 시키고 그것을 유저들이 구매하도록 바꾸었다고 하였다.
제작 계열 유저들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채광하는 것보다 제작하는 것이 손재주 스텟을 더 빠르게 올릴 수 있었다.
즉. 유저들이 오크들을 고용해서 채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판매 수익을 내가 갖고?”
“맞아요. 일정 부분을 한스텔 마을 영주에게 세금으로 줘야 하지만 그래도 10%의 수수료를 받던 때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어요.”
벌써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조민의 말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머리는 쓰던 놈들이 써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아! 그런데 지금은 벌어들인 골드가 얼마 없어요.”
“왜?”
“오빠 때문이죠.”
시후는 조민에 말에 당황스러웠다.
오랜만에 로그인한 거라서 자신이 Safety World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자신 때문에 착착 들어와 쌓여 있어야 할 골드가 없다니.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시후의 표정에 조민은 오크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확실히 아까의 연기는 밥을 짓는 것이었는지 오크들은 커다란 솥단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국을 뜨고 있었다.
오크답지 않게 차례로 줄을 서서 배식받고 있었는데 딱히 문제가 되어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좀처럼 배식받는 줄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한 마을에 있는 오크의 수는 대략 100마리 정도일 텐데 아직도 배식 중이었다.
“뭐야? 왜 배식이 끝나지를 않아?”
“하아…. 저기 꽁지 머리 녀석 보이죠? 방금 받은 녀석, 저 녀석이 어디로 가는지 잘 봐요.”
조민의 깊은 한숨과 함께 시후는 꽁지 머리 오크를 주시했다.
그러자 너무나도 황당한 장면이 보였다.
녀석은 커다란 그릇에 담긴 음식을 걸어가면서 입에 들이부었다.
문제는 몇 걸음 걷기도 전에 텅 비어버린 그릇을 혀로 설거지라도 하듯 싹싹 핥더니 배식받는 줄 맨 뒤로 걸어가 서는 거였다.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오크들은 적어도 3번에서 5번은 더 배식받고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
배가 부르다며 볼록 튀어나온 자신들의 배를 슥슥 문지르는 모습에 시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네 말은 저 먹성 때문에 골드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거야?”
“맞아요.”
“저 녀석들 배를 채우는 데 왜 내 골드를 쓰는 건데?”
“오빠가 오크들을 전부 수하로 삼았잖아요.”
“아….”
시후는 그제야 오크들이 머리를 조아리던 초록 물결의 장관을 기억해냈다.
그때 명성치도 오르고 레벨도 올라 기분이 좋았기에 정작 이런 점은 신경 쓰지 못한 거였다.
저 먹성 좋은 오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니.
인벤토리에 있는 골드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환락탑에서 벌어들이고 있으니….”
“이미 그것도 쓰는 중이에요.”
“뭐?!”
도대체 저 녀석들이 얼마나 처먹길래 그 많은 골드를 쓰는지 궁금해졌다.
그때 어디선가 가래가 섞인 것 같은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륵, 왜 이제야 오냐? 만나고 싶었다.”
델루였다.
델루는 천막에서 식사를 마치고 산책이나 할 겸 밖으로 나왔다가 시후를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달려온 거였다.
이미 시후의 강함을 경험하였고 자신은 시후의 상대가 아님을 인정한 델루였다.
거기에 애초의 목적인 오크 부족의 생존이 해결되었으니 델루로서는 되레 시후에게 감사하는 마음마저 생겨났다.
그리고 냉혈미녀 유라를 통해 오크들을 채광꾼으로 고용한다는 소리에 직업이 생겼다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시후를 만나면 꼭 고맙다는 소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던 시후가 드디어 나타나자 반가워하는 델루였다.
“크륵, 서로 칼을 맞대는 사이였지만, 인정한다. 나 오크 부족장 델루. 그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띠링-
[오크 부족장 델루가 충성을 맹세합니다.]
[델루가 충신으로 등록되었습니다.]
[델루의 충성심은 쉽게 줄어들지 않습니다.]
[성장 가능한 NPC입니다.]
시후는 대뜸 나타나 혼자 중얼거리더니 충성을 맹세한다는 델루를 노려보았다.
오크 부족장인 델루의 추정 레벨은 Lv. 300대가 족히 넘어 보였다.
그런 NPC가 성장까지 할 수 있고 맹목적인 충성을 한다고 하면 기뻐서 춤이라도 추는 게 정상일 터였다.
하지만 시후의 행동은 전혀 달랐다.
“이 식충이 같은 녀석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크, 크륵? 왜? 왜 그러냐? 커헉!”
퍽- 퍽-
시후는 델루의 다리를 걷어차 자빠트리고는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델루의 정확한 레벨은 Lv. 324.
그에 걸맞은 전투 능력과 동체 시력을 지녀 웬만한 주먹의 궤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들어오는 시후의 주먹은 막을 수 없었다.
얼굴로 날아오는 것 같아 가드를 올리면 어느새 방향을 틀었는지 턱을 때려오고 있었다.
델루는 맞으면서도 자신이 왜 맞는지 몰랐지만, 그보다 못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실력이 확 달라진 시후의 모습에 경악했다.
그렇게 델루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시후의 모습은 마치 악귀처럼 보였다.
자신이 어떻게 모으던 골드인데 그 골드를 허무하게 날리는 것에 이성의 끈을 놓은 거였다.
“내 골드!!!”
쾅-
시후는 골드를 잃었다는 울분을 토해내며 마지막 강타를 델루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델루는 그 한 방에 죽지는 않았지만, 생명력이 반이나 깎여나갈 만큼의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에 게거품까지 물고 기절한 델루를 본 시후는 한결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델루의 모습을 처음부터 쭉 지켜보던 오크들은 망부석이 된 듯 멈춰 있었다.
그리고 시후가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모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크륵!! 주군께 인사드립니다!!”
오크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시후를 주군으로 인정했다.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델루처럼 묵사발이 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시후는 오크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한숨을 푹 내쉬며 조민을 바라봤다.
“후… 그래서?”
“네?”
조민은 대뜸 자신에게 질문하는 시후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 새벽에 이런 식충이들 소개해 주려고 로그인하라고 한 거야?”
“아, 아니에요. 이건 기본 보고고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이어야 할 거야. 지금 내 기분이 아주 별로거든.”
험악해진 시후의 분위기에 조민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오빠가 한스텔 마을의 영웅이 되면서 디카 영주가 오빠에게 직위를 내렸어요.”
“직위? 그 자식이 나한테 직위를 내려? 이 자식이!”
시후는 한껏 날카로워진 신경 탓에 누가 누구에게 뭘 내리냐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영주성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그런 시후의 태도에 조민은 깜짝 놀라 빠르게 말렸다.
“직위가 나쁜 게 아니에요. 직위를 수여받으면 그에 따라 세금도 받을 수 있어요.”
“세금? 골드?”
시후는 단숨에 한스텔 마을 영주의 성으로 달려가려다가 세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걸음을 멈췄다.
조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직위마다 다르기는 한데, 한스텔 마을 영주의 직위는 백작이에요, 백작은 자신의 영토에 있는 이를 자작이나 남작으로 임명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일부의 세금이 그들에게 지급돼요.”
“오호~ 백작이 주는 월급 같은 거네?”
“뭐, 그렇죠?”
“그래서 얼마인데?”
“한스텔 마을에서 벌어들이는 세금의 5%.”
“……? 그게 얼마인데?”
역시나 숫자에 약한 시후였기에 단순하게 금액을 물었다.
조민은 그런 시후를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앞으로도 이런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할 것 같은 직감이 들어서였다.
“전체 세금에서 5%이니까, 한 달에 약 5백만 골드 정도일 거예요.”
“고작 5%인데 5백만 골드?”
시후는 생각보다 많은 금액에 놀랐다.
물론, 그보다 많은 골드가 물 흐르듯이 줄줄 새어 나가겠지만 일단 매달 5백만 골드가 들어온다는 것은 쌍수를 들고 반길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조민의 얼굴이 살짝 어두웠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네, 있어요. 이 골드를 받으려면 오빠가 디카 영주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왜? 얼굴만 보면 골드가 들어오는데 그 재수 없는 상판대기 좀 보는 것 정도는 참아줄 수 있어.”
“하아… 바로 그거예요.”
조민은 드디어 자신의 진짜 고민을 털어놨다.
“직위를 받으려면 오빠가 직위 수여식을 치러야 하는데 그 절차를 오빠가 싫어할 거라서 고민이에요.”
“에이~ 그럴 리가. 내가 그 디카 영감탱이 앞에 무릎이라도 꿇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거예요, 오빠가 무릎을 꿇어야 해요.”
“…….”
시후는 직위 수여식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천마 시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은 기억은 없었다.
‘아…. 교문 앞에서 슬리퍼 들고 있던 거는 빼고.’
고작 5백만 골드 좀 벌어 보겠다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민은 어두워지는 시후의 표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씀드리기 힘들었어요, 그래도 골드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기에 이 시간에 오빠를 부른 거예요.”
“으흠….”
시후는 조민의 걱정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골드를 버는 거야 닥치는 대로 퀘스트를 하면 될 거였다.
하지만 매달 공짜로 들어오는 5백만 골드를 무시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크륵, 그럴 때는 찾아가서 담판을 짓는 게 제일이다.”
“와씨! 깜짝이야!”
어느새 정신을 차린 건지 델루가 시후의 뒤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이미 델루가 일어난 것은 기척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짝 다가와 속삭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였기에 놀란 시후였다.
살짝 놀란 가슴에 나대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델루를 쥐어박으려던 시후는 갑자기 주먹을 멈췄다.
“그래! 그런 수가 있었어!”
시후는 델루의 말을 듣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민의 눈은 시후의 입꼬리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커졌다.
저 표정은 분명 자신의 상식선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을 벌일 때 짓는 표정이었다.
“오, 오빠?”
“가자!!”
“꺄아악!!”
조민의 허리를 낚아챈 시후가 어느새 하늘을 날았다.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날아가는 바람에 조민은 겨우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자신이 있던 남쪽 입구는 멀어진 지 오래였다.
같이 있던 델루는 미친 듯이 시후를 따르겠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 조민은 어이가 없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포기하니 이렇게 시후에게 매달려 날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저 시후가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하며 시후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릴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