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시후는 당소영을 서울대입구역까지 바래다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아파트 공원에서 남궁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수습하고 있는지 물었더니 생각보다 빠르게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빌딩에서 벌어진 사태에 경찰이 출동했지만 남궁세가와 이미 안면이 있는 경찰들이어서 가벼운 소란으로 끝냈다고 했다.
시후는 남궁진성에게 남궁정도와 남궁태성의 사망 소식은 당분간 비밀에 부치라고 했다.
둘이 죽었다는 소식이 혈교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1주일 후에 만난다는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어서였다.
둘의 공식적인 부재 이유는 폐관 수련이었다.
제왕무적검을 발전시킬 기연을 만나 수련에 들어갔다고 세가에 전달하라고 했다.
그리고 둘의 시신은 남궁세가의 비밀 공간으로 옮겨졌다.
위치를 물어보니 이미 시후도 아는 장소였다.
남궁화성이 혈영수에 몸을 담갔던 그곳.
남궁화성이 한 줌의 핏물로 변해 죽은 곳이었다.
시후는 그곳에 잘린 팔이 있을 테니 그것을 둘의 시신 옆에 잘 두라고 전해주었다.
그 말에 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남궁진성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딱 그 정도가 좋았기에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 공포가 네 목숨 줄이니 잘 잡았으면 좋겠구나.”
자신에게서 느끼는 공포로 부디 남궁진성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길 바랐다.
시후는 오늘 일을 되새겨 보았다.
남궁세가를 찾아가 혈교에 관해 물어보려 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일이 흘러갔다.
뜻하지 않게 도박장을 찾으며 그곳을 인수할 계획을 세웠고 혈영수 같은 쓰레기 물을 만든 남궁화성을 죽였다.
물론, 당소영이 손을 쓰기는 했지만 죽이기 좋게 팔을 자르고 머릿속에 공포심을 불어 넣은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남궁세가에 쳐들어가 가주인 남궁정도와 첫째 아들인 남궁태성을 죽였다.
본래는 혈교와 관련된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지만, 조만간 혈교 녀석들을 만난다는 소식에 남궁진성은 남겨두었다.
“여러 곳을 다녔더니 좀 피곤한 것도 같네.”
시후는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어깨를 주무르며 아파트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버튼을 누르려는데 누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타이밍 좋게 누군가 내려온 거였다.
“뭐야? 돌팔이. 안 자고 어디가?”
“도련님!! 너무하십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나온 이는 진지춘이었다.
나이가 들더니 밤잠이라도 없는 것인지 생각하던 때에 갑자기 너무하다며 울상을 짓는 표정에 어이가 없었다.
이유를 물을까도 했지만, 지금은 피곤했기에 애써 무시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진지춘은 시후의 태도에 더욱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곳을 혼자 다녀오십니까? 예? 제가 얼마 전에 홍대 클럽으로 모신 거 잊으셨습니까? 제가 그때 얼마나 보필을 잘했습니까? 세상에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곳을 가시면서 저를 두고 가실 수가 있으십니까?”
진지춘의 말끝에 붙은 ‘~까?’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귓가에 소름이 쫘악 올랐다.
오늘따라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느린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잠도 안 자고 기다린 거냐?”
“당연하지요! 도련님, 만약 그곳을 저와 가셨다면 아마 그곳의 돈을 모두 쓸어왔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진지춘 이 녀석도 별거 아닌 것에 목숨 거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도박장을 다녀온 것을 어찌 알았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 내가 거기 다녀온 거?”
“그거야~ 도련님에 대한 제 무한한 관심 때문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제갈조민이 알려 주었습니다요.”
헛소리를 내뱉으려던 진지춘은 시후가 인상을 쓰자 즉각 사실을 고했다.
시후는 그 소리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곳은 제갈조민이 있는 층이었기에 진지춘은 입을 꾸욱 닫았다.
자신이 괜한 소리를 해서 이 새벽에 어린 소녀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제갈조민네 집의 초인종을 누르는 시후를 말릴 용기는 없었다.
띵동-
고급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초인종 소리였지만 집주인을 부르기에는 충분했다.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제갈조민이 나왔다.
“너 어떻게 내가 있는….”
시후는 제갈조민에게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문을 열고 나온 제갈조민의 몰골이 그동안 자신이 보았던 총명하고 당찬 영재의 모습이 아니었다.
“뭐지? 이 피골이 상접한 모습은?”
총명하던 두 눈은 흐리멍덩해져 있고 눈 그늘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제갈조민은 자신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는 시후의 눈빛에 울컥했다.
“오빠 때문이잖아요!”
“나? 내가 뭐?”
“내가 오빠 한스텔 마을 영주한테 가라고 했죠? 어?! 그런데 오늘 뭐 하셨어요? 네?! 오빠가 무슨 딱따구리예요?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게?”
평소답지 않게 화까지 내는 조민의 모습에 시후는 눈만 껌뻑거렸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가 천마 시절부터 몇이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태산과 인호 이후로는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조민이 처음이었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입을 꿰매버렸을 거였다.
조민이 버럭버럭하는 것에 즐겁다는 듯이 자신의 뒤에서 두 주먹을 움켜쥐며 응원하는 진지춘 같은 녀석들은 말이다.
푹- 털썩-
“어? 어어?!”
시후는 지풍을 날려 등 뒤에 있는 진지춘의 마혈을 눌렀다.
진지춘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혈일 터였다.
처음 시후가 시험을 명목으로 가격해 진지춘의 왼쪽 전신을 마비시켰던 바로 그 혈이었다.
진지춘의 몸이 힘없이 무너지며 털썩 주저앉았다.
진지춘은 익숙하게 품속에서 금색 침통을 꺼내어 자신의 몸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한 번 당한 전적이 있으니 익숙하게 대처하는 그였다.
아마도 빠르면 10분 안에 마비를 풀 수 있을 터였다.
시후는 마비가 풀릴 때까지는 진지춘이 얌전히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 놓고 조민에게 물었다.
“네가 어떻게 내 행동반경을 아는 거지?”
“당연히 알죠. 제갈세가의 은밀조(隱密組)에게 명령해 오빠의 행적을 지켜보라 했으니까요.”
“은밀조? 어떻게?”
자신을 지켜보는 이들을 붙였다는 말에 궁금증의 방향이 ‘왜?’에서 ‘어떻게?’로 바뀌었다.
지금 자신의 실력이 천마 시절의 3할뿐이라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3리 안에서 누가 눈썹을 꿈틀대는지도 알 수도 있었다.
그런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행적을 지켜보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오빠가 무공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요즘은 미디어의 시대라고요.”
“무슨 소리야?”
“가끔 보면 오빤, 반로환동한 사람이 아닌 과거에서 온 사람 같은 거 알아요? 알려 드릴게요, 들어와요.”
반로환동이라는 말에 뜨끔했지만, 일단은 조민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자신의 몸에 침을 놓는 진지춘을 복도에 내버려 둔 채로 말이다.
“도, 도련님…?”
문이 닫히면서 진지춘의 구슬픈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조민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시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집이 아니라 TV를 파는 매장 같았다.
모니터로 도배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 안 곳곳이 온통 모니터로 꽉 차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모니터 중 시후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저기는 여기 현관이잖아?”
화면에는 진지춘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보다 실력이 좋아진 것인지 벌써 마비를 풀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지춘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더니 현관에 대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 주먹질과 발길질의 대상은 시후일 게 뻔했다.
“저 자식이, 넌 좀 이따 보자.”
조민과의 볼일이 끝나면 오늘 잠은 다 잤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겠다고 다짐하는 시후였다.
그런 시후를 보며 조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 모니터에 보이는 영상은 모두 CCTV나 누군가가 촬영을 하는 것들이에요.”
“그래, 그게 궁금했어. 얼마나 대단한 은신술을 가졌길래 내가 눈치조차 못 채는 거지?”
자신의 이목을 숨기고 촬영을 한다니.
엄청난 은신술을 펼친 거라 생각했다.
조민은 시후의 말에 대답 대신 한쪽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을 터치하자 바닥 면에 또 다른 화면이 나타났다.
아마도 저 많은 모니터 중 하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조민의 두 손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자 영상에 보이던 것이 빠르게 작아지며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오빠를 주시하는 게 근거리에서는 불가했기에 멀리서 촬영했어요. 광학렌즈를 이용한…. 뭐, 그런 거를 사용해서 지켜봤어요.”
조민은 광학 렌즈를 이용하여 촬영하고 거기에 AI 시스템까지 도입하여 정밀 영상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려다가 포기했다.
광학 렌즈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시후의 표정이 멍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오크 부족장을 치는 계획을 설명할 때도 보았던 표정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이니 굳이 듣지 않아도 되겠다는 표정.
조민은 괜히 설명해 봐야 자기 입만 아프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시후 또한 중요한 점은 그것이 아니라 자신을 멀리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 문명의 문물을 이용한 거라, 대단해, 대단은 한데…. 기분은 나쁘네?”
누군가에게 감시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시후의 눈에 아주 옅은 살기가 감돌았다.
보통 이 정도의 살기에도 다른 이들이라면 흠칫하거나 진땀을 빼겠지만 조민은 달랐다.
“이게 다! 오빠 때문이잖아요!”
되레 미간을 좁히며 살쾡이처럼 표독스럽게 다그쳐왔다.
순간 시후는 조민의 태도에 흠칫하여 피어오르던 살기를 거뒀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쏴대는 조민의 말을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조민은 마치 울분을 토해내듯이 그간 있었던 일과 왜 자신이 시후를 감시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오크 부족장 퀘스트를 클리어한 것이 생각보다 여파가 컸다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Safety World의 한스텔 마을은 초보 마을이었기에 왕국 쪽에서는 오크 부족장의 습격에 한스텔 마을의 전멸을 예상했다.
그런데 전멸은커녕 보기 좋게 격파한 것뿐만 아니라 오크들을 마을 주변에 배치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거기에 번식 속도가 빠르고 힘이 좋은 오크들이 채집에 두각을 나타내자 한스텔 마을은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결국, 별 관심도 없던 왕국에서 한스텔 마을의 영주와 이번 오크 부족장의 습격을 막은 영웅을 초대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이 Safety World 커뮤니티에 공지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났다.
정작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인물인 시후는 나 몰라라 하며 오크 부족장을 던져 주고는 그 이후로 접속을 하지 않으니 모든 일은 조민이 떠맡게 되었다.
그래서 조민은 연락도 없고 연락도 되지 않는 시후를 찾았고, 그의 행적을 조사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던 조민의 이야기를 들은 시후는 잠시 멍했다.
Safety World에 벌여 놓은 일이 자신의 생각보다 커져버린 것에 대한 놀라움과 그 모든 일을 잘 처리하고 있는 조민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쓱쓱-
“고생 많았네. 오빠가 미안.”
시후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조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심을 담아 미안함을 표현하는 시후의 모습에 조민의 표정이 점차 풀어졌다.
조민은 한결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감시라 생각하셨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저희에게 오빠는 이미 중요한 분이기에 어쩔 수 없어요.”
“아니야, 이런 일을 당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니 괜찮아.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아.”
사실 시후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했다.
제갈세가에 이미 자신은 중요한 인물이었다.
실전되었던 자신들의 독문무공을 찾아주었고 죽어가던 가주도 살려 주었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 엄청난 후원자였다.
제갈세가의 앞날은 이미 시후의 존재 없이는 그려지고 있지 않았기에 시후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천마 시절에도 지괴 녀석은 언제나 자신을 감시했었다.
그때는 천마의 기감을 피해 감시하는 게 불가능했기에 지괴는 대놓고 말하며 감시했었다.
감시받는다는 게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기에 따돌릴까도 생각했지만, 지괴의 협박 아닌 협박에 내버려 두었다.
‘그때 녀석이 내 안위가 천마신교 천만 신도의 안위라고 했었지?’
천마의 목숨은 이미 천마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는 지괴의 말이 떠올랐다.
제갈세가를 도울 때부터.
아니, 제갈조민을 지괴로 낙점할 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
이미 예상하던 일이었기에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되레 담담하게 시후가 받아들이자 조민은 조민대로 놀랐다.
엄청 매력적인 오빠.
무공이 고강하여 넘사벽인 오빠.
그래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하는 오빠.
그동안 조민은 시후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게 조민의 평가였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자신의 사람을 위하는 대인의 모습이었다.
“으흠! 뭐, 이해해주니 감사해요.”
조민은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투덜대듯 말했다.
시후는 그런 조민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려는 거였다.
그런 시후의 뒷모습에 대고 조민이 말했다.
“아! 오빠 피곤한 거는 아는데 집에 들어가면 Safety World에 잠깐만 로그인해 줘요.”
“알았어, 좀 이따 보자. 무리는 하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나가는 시후였다.
밖으로 나가니 진지춘이 멀찍이 떨어져서 헤헤거리고 있었다.
“도련님, 빨리 나오셨네요?”
“왜? 아예 저기서 살길 바랐냐?”
“에이~ 그럴 리가요, 도련님이 나오셔야 제가 또 투정을… 헙!”
진지춘은 말장난을 하려다가 시후의 눈에 옅게 피어오르는 살기를 느끼고는 입을 막았다.
여기서 한 마디만 더 했다가는 아마 사지가 마비되어 오늘 밤은 복도에서 지내게 될 터였다.
눈치가 빠른 진지춘을 보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헛소리 말고 로그인이나 해.”
“로그인이요? 뭔… 설마?”
“30분 후에 보자.”
Safety World에 접속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시후는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시후가 엘리베이터에 올라 사라질 때까지 진지춘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속으로 이 새벽에 자신이 뭘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시후를 기다렸다가 밤을 새우게 되었는지 깊은 탄성과 반성을 하면서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