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혈교(血敎).
천마 시절 가장 싫어했던 녀석들 중 가장 으뜸인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은 무림의 서쪽에서 등장했다.
풀 한 포기 없고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곳이라 통과하지 못한다고 여기던 사막을 지나 무림으로 들어왔다.
자신들이 지나는 길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
‘사람이건 개, 돼지건 말이지.’
특히, 스스로 혈마(血魔)라 지칭한 녀석의 손속은 잔인했다.
자신들의 교인으로 살아가든지 아니면 죽으라며 포교를 했다.
그렇게 죽음이 두려워 교인이 된 일반인들은 혈교의 특별한 방법으로 단시간에 무림인이 되었다.
또 그것에 혹하여 스스로 혈교에 들어간 이도 있었다.
그렇게 혈교의 세력이 커져갈 때 천마는 중원에 없었다.
‘그때 여름의 무더위를 피해 빙백궁으로 놀러 갔었던 터라.’
그로 인해 정파 무림과 혈교와의 1차 대전이 펼쳐졌다는 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전해 들었다.
결과는 정파 무림의 대패(大敗).
어중이떠중이들이라 생각한 혈교의 전술은 생각보다 체계적이었고, 무엇보다 죽지 않는 시체의 등장에 정파 무림은 당황했다.
사실 혈교가 무림에 발을 들이려면 천마신교의 영역을 지났어야 했다.
지리적인 요건상 사막을 지나면 천마신교의 영토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천마가 떠나면서 자신이 없는 동안 얌전히 있으라는 명(命)을 내렸었고 천마신교의 모든 이들은 자숙했다.
덕분에 천마가 천마신교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선견지명이 어쩌고저쩌고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없는 동안 말썽이라도 부려 ‘그녀’의 귀에 좋지 못한 소문이라도 들어갈까 걱정돼서 한 것뿐인데 말이다.
어쨌든 그 후에 천마는 혈마라는 녀석을 직접 만났었다.
혈마는 천마를 쌍수 들어 반겼고, 둘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우처럼 술을 나눴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천마신교와 혈교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두 세력의 전쟁은 천마와 혈마를 필두로 하여 벌어졌고, 10일 밤낮을 싸웠으며,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전쟁 전에 나누었던 술잔이 마음에 들었는지 목숨만 빼앗지 않으려 손에 사정을 두었던 천마는 마지막 날 혈마의 머리를 두 손으로 짓이겨 죽여버렸다.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천마 시절을 떠올리던 시후는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 혼잣말을 들은 것인지 뒤에서 당소영이 슬쩍 다가왔다.
“그녀가 누군데요?”
“있어.”
“그런데 그녀라는 그분이 저와 많이 닮았나 봐요?”
눈치가 더럽게나 빠른 여자였다.
시후는 굳이 대답하는 대신에 당소영의 허리를 안았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당소영은 순순히 허리를 내어주었다.
그렇게 한 팔에 쏙 들어오는 가느다란 당소영의 허리를 안은 시후는 내공을 일으키며 땅을 박차고 올랐다.
20층짜리 빌딩 벽면을 몇 번 도약한 것만으로 옥상까지 올라섰다.
시후는 건너편 건물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곳에 남궁정도가 있다는 말이지?”
남궁화성을 죽인 후 옆방에 잠재워 놓았던 녀석들에게 들은 정보였다.
생각 같아서는 그곳에 있는 모두를 죽일까도 싶었지만, 자신은 이제 예전의 천마가 아니었기에 생각을 바꿨다.
그곳에 있던 녀석들의 쓰임새는 이미 정해 두었기에 금제만 가하고는 정보를 캐내었다.
덕분에 녀석들은 묻는 족족 술술 대답했고 거기서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혈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가주인 남궁정도와 세 명의 아들. 그렇게 네 명뿐이었죠?”
“이제는 세 명이지.”
남궁화성이 죽었으니 남궁세가에서 혈교와의 관계를 아는 것은 세 명뿐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당소영은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당소영은 사람을 죽인 것이 처음인 것 같았다.
시후는 저도 모르게 당소영의 어깨를 다독였다.
“처음이 어려운 거지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그,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무림인으로 살아가면서 살인 한 번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닐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할 줄은 몰랐다고요.”
“네가 아니었으면 그놈은 또 혈영수를 만들었을 거야.”
내내 찝찝함을 느끼던 당소영은 혈영수라는 말에 인상을 구겼다.
어린아이 100명의 생명으로 만든 혈영수.
그것을 생각하자 찝찝함이 좀 덜어졌다.
“고마워요.”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준 시후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당소영이었다.
시후는 그런 당소영을 힐끗 보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써 멀리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러지 못했다.
당소영이 웃으면 마음이 가벼웠고 당소영의 표정이 굳으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서인지 지금 시후의 기분은 착 가라앉다 못해 짜증이 올라오는 상태였다.
당장 이 찝찝한 기분을 풀지 않으면 잠자리에 쉽게 들지 못할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그 화풀이 상대가 건너편 건물에 떡하니 보이니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었다.
“넌 여기서 기다려라.”
“정말 혼자 가시려고요? 그래도 남궁세가의 가주인데요?”
“혈교에 꼬리나 치는 개 주제에 가주는 개뿔.”
“그래도 안에 남궁세가 고수들이 많아요.”
“걱정하지 마라. 웬만해서는 살생을 자제할… 오호~ 네가 걱정하는 게 저놈들이 아니구나?”
자신을 막아서는 것이 살생을 좋아하지 않아서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되레 적진에 혼자 쳐들어가는 자신을 걱정하는 거였다.
어이가 없었다.
고양이 앞에 쥐. 아니, 호랑이 앞에 생쥐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거였다.
아무래도 당소영에게는 오늘 제대로 보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큰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거라.”
쾅-
시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미 건너편 건물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 * *
남궁정도는 사무실에서 첫째와 둘째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곧 그분들이 들어올 거다. 준비는 차질 없이 하고 있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저희 둘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남궁정도는 두 아들의 말에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만 우리의 뒷배가 되어준다면 이 나라는 우리 남궁세가가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야.”
“그럼요. 그렇게만 된다면 막내 녀석도 굳이 당가에 가서 웃음을 팔지 않아도 되고요.”
남궁화성을 거론하는 셋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당가에서 남궁화성에게 접근한 것을 알게 되면서 계획을 세웠다.
남궁화성을 치마폭에 넣어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뻔히 보였기에 일단은 따라주기로 했다.
혼인만 하게 되면 그 뒤로 야금야금 당가를 침식해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혈교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난 자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짙은 혈향에 거부감이 들었으나 그들이 내세운 조건에 군침이 돌았다.
한국에 혈교가 포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자신들의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무위는 놀라웠다.
한평생 검의 길을 갔노라고 생각했던 남궁정도의 경지를 이제 갓 청년의 티를 벗은 녀석들이 보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숨만 붙어 있다면 모든 상처를 치료해주는 혈영수를 만드는 방법까지 선물로 받았으니 그들의 조건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혈영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어린아이들이야 밤거리에 수두룩했으니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보육원 하나를 통째로 먹기도 했다.
혈영수를 생각하니 혈영수의 관리를 맡겼던 셋째 남궁화성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녀석,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길래 전화도 없는 게야?”
남궁정도는 투덜대며 스마트폰을 들어 남궁화성의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그 순간 남궁정도의 기감을 곤두세우는 무언가가 창가 쪽에서 느껴졌다.
쾅-
창가에 큰 폭발과 함께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남궁정도는 벽에 걸려 있던 자신의 애병기인 춘몽검(春夢劍)을 반사적으로 뽑아 들었다.
“웬 놈이냐?!”
검을 빼 든 남궁정도는 긴장했다.
건물의 창문과 벽이 깨지며 일어난 먼지 사이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자신을 향해 쏘아져 왔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거대한 살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오금이 저린다는 게 무슨 말인지 비로소 알게 된 남궁정도는 차분하게 대화부터 해보려던 순간 믿기지 않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건? 매화검?”
어째서 막내아들의 애병기가 갑자기 들이닥친 저자의 손에 들려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궁정도가 매화검을 알아보자 시후는 감탄을 보내며 한 걸음 다가갔다.
“오~ 바로 알아보네?”
“귀하는 누구인데 그 검을 가지고 있는 거요?”
건물로 뛰어들 때 천투변용술을 사용해 중년인의 모습으로 역용하였기에 남궁정도가 하대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찌 말하든 상관은 없었지만, 굳이 ‘강시후’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기에 변용한 거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검뿐이겠어?”
시후는 매화검을 들고 있는 반대쪽 손에 든 것을 흔들어 보였다.
그 손에는 착신음이 울리는 스마트폰이 있었다.
남궁정도는 순간 싸한 느낌에 내공을 끌어올려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스마트폰에 나타나 있는 글자가 보였다.
“아.버.지?? 네 이놈!!”
챙-
남궁정도는 더는 전후 사정을 들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검을 휘두르며 날아갔다.
남궁세가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제왕무적검(帝王無敵劍) 제 일 초식 섬전(閃電).
섬전이 펼쳐지는 순간 눈앞이 번쩍이고 상대의 목에는 작은 구멍이 뚫린다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빠른 찌르기 공격이었다.
남궁정도는 상대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느꼈기에 이번 수식으로 우위를 점하려 했다.
하지만 남궁정도는 섬전으로 날아가는 속도보다 빠르게 뒤로 튕겨 나갔다.
쾅-
“커헉!”
방 안에 있던 남궁태성과 남궁진성은 눈앞이 번쩍이는 순간 아버지가 벽에 꽂히는 것을 보았다.
입 안에서 피를 한 움큼 토하는 것이 죽지는 않았지만 크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
무림 고수라 생각했던 아버지가 단 한 초식 만에 저리되었다는 것에 둘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후는 입맛을 다셨다.
“이거 실력을 보여주기도 뭣한 놈들이었네.”
당소영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려 했건만, 고작 이화접목(移化接木)의 수법으로 전투 불능이 된 놈이나.
제 아비가 저리되었는데도 전의가 꺾인 놈들이나.
한심한 놈들뿐이었다.
“내 들어야 할 말이 있어서 참는다. 너!”
“네?!”
“혈교에 대해서 아는 거 다 말해라.”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는 혈교가 무엇인지… 커헉!”
툭-
시후는 남궁태성을 지목하여 물었었다.
그리고 동시에 독안공을 펼쳤다.
예상은 했지만 남궁태성이 혈교에 대해 모른다며 거짓말을 하자 참지 못하고 매화검을 휘둘렀다.
남궁진성은 옆에 있던 형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져 굴러다니자 사색이 되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창문을 부수고 들어온 저자는 혈교와 남궁세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입을 막아야 했지만, 자신들이 어찌해볼 수 없는 무위를 지녔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남궁진성은 시후의 시선에 입을 열었다.
“서, 석 달 전 중국에서 혈교라는 무리가 저희에게 접선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포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저희 세가가 강해질 방법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주일 후에 그들과의 2차 접선이 잡혀 있습니다.”
독안공을 통해 남궁진성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간파한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을 싹 다 죽이고 자신이 역용술을 펼쳐 대신 혈교 녀석들을 만나도 되었지만 그러기에는 귀찮았다.
아직 천마 시절 무공의 3할 정도만 회복한 상태에서 절대로 만족할 수 없기에 지금도 당장 Safety World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차선책을 생각했다.
“너, 앞으로 네가 가주다.”
“네?”
쉐엑- 푹-
시후는 매화검을 던져 벽에 붙어 웅크리고 있던 남궁정도의 심장에 박아버렸다.
그렇게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정도와 차기 가주를 논하던 남궁태성이 죽어버렸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자신의 아버지와 큰형이 죽었음에도 남궁진성의 반응은 오묘했다.
살짝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것이 아비와 형제의 죽음에 분노해야 하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역시, 살모사 같은 녀석이었어.’
시후는 남궁진성에게 독안공을 사용했을 때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남궁세가의 가주인 아버지의 기대는 언제나 첫째인 남궁태성의 몫.
세가의 중요한 결정은 모두 그와 상의해서 결정되었고 자신은 언제나 거드는 역할뿐이었다.
그렇다고 귀여움을 받는 역할도 아니었다.
언제나 개망나니 같은 짓을 하고 다녀도 용서가 되고 아버지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던 것은 셋째인 남궁화성의 몫이었다.
둘째의 서러움이랄까.
남궁진성은 언제나 외로웠고 아버지의 정을 그리워했다.
그 그리움은 결국 질투와 시기로 변질하였고, 첫째인 남궁태성의 목이 바닥에 구를 때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다.
거기에 가주인 아버지만 없다면 자신이 가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독안공을 통해 여기까지 읽은 시후는 남궁진성을 이용하기로 했다.
녀석의 소원대로 남궁정도까지 죽였다.
제 부모의 배를 뚫고 나오는 살모사 새끼처럼 남궁진성은 자기가 살기 위해 부모를 밑거름으로 생각했다.
털썩-
“앞으로 충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시후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남궁진성이었다.
“그래라, 혹여나 삐딱선 탔다가는 알지?”
남궁진성은 시후의 말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대답할 뿐.
“네!!”
“좋아, 그럼 네 폰 내놔.”
자신의 폰을 내놓으라는 말에 남궁진성은 주머니에서 폴더 폰을 꺼내어 주었다.
시후는 폴더 폰을 받아 만지작거리며 남궁진성을 다시 보았다.
“생긴 거답지 않게 현대식 문물을 사용할 줄 모르는 녀석이구나?”
“제가 굳이 스마트폰을 다룰 필요가 없어서…. 곧 새로운 폰을 장만해서 대령하겠습니다.”
“됐고, 연락은 여기로 해라. 무슨 연락인지 알지?”
시후가 말하는 연락은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이곳의 정리부터 혈교에 대한 것들까지.
다행히 눈치가 빠른 남궁진성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라.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당부라면 당부고 경고라면 경고였다.
하지만 저런 녀석들은 분명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쓸데없는 짓을 할 게 뻔했다.
시후는 마지막 말에 길게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남궁진성은 아수라장이 된 방을 둘러보며 심호흡을 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만큼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시후가 저질러 놓은 일을 뒷수습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