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당성치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없는 동안 벌어진 일을 듣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킨 일이나 할 것이지! 뭐?! 뭘 먹여?! 누구를 불러?!”
그는 태산과 인호가 산공독을 먹고 남궁화성과 칼부림까지 벌여 결국, 시후가 나타난 것을 들었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이 남궁화성의 몸에 시후가 검으로 글을 썼다는 소리를 듣자 기절할 뻔했다.
이 모든 것을 보고한 당나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그래서!!?? 그게 끝이냐?”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고 그 후에 시후가 어떻게 했는지 묻는 거였다.
당나영은 고개를 슬쩍 들어 당소영을 바라보았다.
네가 대신 말하라는 눈빛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당소영이 입을 열었다.
“가주님….”
“아버지라 불러라.”
“아… 네.”
언제나 이런 보고를 올릴 때면 꼬박꼬박 가주라고 부르라고 했던 당성치가 왜 아버지라고 부르라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따랐다.
“아버지, 그분은 일단 돌아가셨어요.”
“일단?”
“네, 대신 이걸 전해주라고….”
당소영이 내민 것은 작은 서찰이었다.
흰색 봉투를 받아 든 당성치는 눈을 껌뻑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것을 주는 것이 이상했지만 우선은 내용 확인이 먼저였다.
빠르게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니 글이 적혀 있는 화선지가 나왔다.
搜, 梅花劍, 匠人
추, 매화검, 장인
당성치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당나영은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아! 그… 남궁화성의 몸에 글을 새길 때 사용한 검이 매화검이었습니다. 좋은 검이라며 관심을 두던데….”
당성치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말을 흐리는 당나영이었다.
당성치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눈에 선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직 남궁세가에서 연락이 없다는 거였다.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연락을 해와 따지고 들거나 찾아와 난장판을 부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었다.
‘혹, 그자가 우리의 뒷배라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당소영에게로 향했다.
“그래, 그와의 이야기는 잘 마쳤느냐?”
“중간까지는요.”
“중간?”
“네. 이야기 도중에 연락을 받고 제 앞에서 사라졌거든요.”
“쯧!!”
그 연락이 무슨 연락인지 뻔했기에 당성치는 혀를 찼다.
성질 같아서는 당나영과 당보영에게 죄를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후를 따르는 두 명의 복면인이 당나영과 당보영에게 관심을 보인 듯싶어서였다.
앞으로 당가를 보호해줄 큰 방패가 시후라면 작은 방패는 두 복면인이라 생각했다.
“그래, 혹 그분의 전화번호가 있느냐?”
“여기….”
당소영은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시후의 번호를 입력해 당성치에게 넘겨주었다.
통화 버튼을 누른 당성치는 목까지 가다듬으며 시후가 전화를 받기만을 기다렸다.
- 왜?
시후의 목소리가 들리자 당성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아이고, 편안히 귀가하셨습니까?”
- 뭐야? 당 영감이야?
자신을 ‘당 영감’이라 부르는 시후의 목소리에도 당성치는 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까지 굽신거리며 통화를 이어갔다.
“하, 하하, 네, 저입니다. 오늘 오셨다는….”
- 찾았어?
대뜸 말을 끊으며 찾았냐고 물어오는 시후의 말에 당성치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하, 하하, 그것은 곧 찾도록….”
- 찾으면 연락해, 쓸데없이 연락하지 말고.
띠릭-
통화 종료음이 길게 들리며 시후와의 통화가 종료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제는 시후가 이러는 게 되레 마음이 편하게 느껴졌다.
당성치는 스마트폰을 당소영에게 돌려주며 어깨를 두드렸다.
“부디, 꼭! 그 이야기를 마쳐야 한다!”
“네….”
당소영은 잔뜩 기대에 부푼 당성치의 눈빛에 부담감을 느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성치는 당소영의 대답에 흐뭇하게 웃어주고는 고개를 돌려 당나영과 당보영을 보았다.
“너희는 매화검을 만든 대장장이를 찾아보아라. 당가의 제자들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최우선으로 찾아 보고하거라.”
“네!”
그렇게 당가에서 시후의 입지를 다지는 동안 시후는 초조한 마음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한국대를 빠져나온 이후 태산과 인호를 제갈세가로 데리고 왔다.
집으로 데리고 올까도 싶었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은 집에서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이곳으로 왔다.
제갈세가에서는 시후가 방문하자 제갈신길이 한걸음에 달려 나와 맞이했다.
대뜸 연공실을 빌리자는 시후의 말에 제갈신길은 단번에 자신이 폐관 수련을 하던 곳을 안내해 주었다.
태산과 인호는 이미 시후가 오늘 해야 할 일을 귀띔해 두었기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지춘 역시 혹여나 둘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나서야 했기에 일전에 있던 곳에서 필요한 약제들을 챙겨 연공실을 찾아왔다.
그렇게 준비가 되자 시후는 대환단을 꺼내어 반으로 나눈 후 태산과 인호에게 건네었다.
“죽기 직전의 사람도 살린다는 대환단이야. 먹으면 바로 효과가 나타날 거야. 그러니 바로 가부좌 틀고 내가 말해주는 대로 운기해.”
태산과 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후의 말을 따라 가부좌를 틀고 대환단을 먹었다.
대환단은 입 속으로 들어가자 즉각 용해되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으!!! 써!!”
대환단을 먹으면서 맛이 쓰다며 인상을 쓰는 둘을 보며 시후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전설의 명약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것을 먹으면서 맛을 탓하다니.
어찌 보면 그런 둘이 대단해 보였다.
“초코 시럽이라도 발라주랴?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이제부터 집중해.”
“응!”
둘은 시후의 말에 눈빛을 빛내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대환단의 기운이 퍼지는 게 느껴지기 시작할 거야. 처음에는 너희가 각자 배운 대로 개걸심법과 천투심법을 운용해.”
둘은 정신을 집중하며 개걸심법과 천투심법의 구결을 외워갔다.
각자의 심법에 맞게 내공을 움직이자 둘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시후는 그런 둘의 뒤로 다가가더니 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부터 중요하다. 절대, 절대로! 입 벌리지 마라.”
둘은 시후의 말에 그동안 읽었던 무협 소설 속의 내용을 떠올렸다.
운기조식 중에 기연을 만날 때마다 주인공들은 신음 하나 흘리지 말아야 했다.
잘못했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는 내용이 기억났다.
둘은 자신들이 지금 딱 그 상황이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준비된 둘의 모습에 시후는 천마분심공을 이용하여 내공을 일으켰다.
일으킨 내공은 자연스럽게 태산과 인호의 백회혈로 흘러 들어갔다.
각자 운용하는 심법이 다르기에 그것에 맞게 도와주려는 거였다.
‘대환단의 기운이 요동치고 있군.’
둘의 몸속에서 요동치는 대환단의 기운을 잡아갔다.
천천히 대환단의 기운을 안정시킨 시후는 빠르게 온몸 구석구석 훑기 시작했다.
태산과 인호는 몸속 주요 혈들을 지나가는 거대한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기운이 거대한 벽에 맞닿은 것을 느꼈다.
그게 시작이었다.
“……!!!”
17년 인생에 둘도 없을 정도로 가장 강력한 고통이 밀려왔다.
둘은 모르겠지만 시후는 대환단의 기운에 자신의 내공까지 얹어 둘의 임독양맥(任督兩脈)을 뚫는 중이었다.
사실, 이 방법은 임독양맥을 타동하는 정도(正道)는 아니었다.
100여 가지의 약재를 달인 약물에 몸을 담가 피부를 바꾸고 골수까지 약재를 스며들게 하여 천천히 타동시키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안전한 대신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을 가장 아쉬워하는 시후였기에, 극심한 고통이 따르겠지만 이 방법을 택했다.
물론 둘의 의지가 굳건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지만 이번에 남궁화성에게 칼밥을 먹었을 때를 보니 그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뚜둑-뚝-
무언가 끊어지고 뜯겨 나가는 소리가 연공실을 가득 메우자 태산과 인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이제부터 진짜다, 버텨!
시후는 둘에게 전음으로 의지를 다질 것을 경고한 후 운공법을 달리했다.
개걸심법과 천투심법의 후속편과도 같은 거였다.
물론, 태산과 인호의 몸에 맞게 시후가 새로이 만든 거였다.
둘의 머릿속에 직접 운공법을 주입하자 태산과 인호는 곧장 일러준 운공법으로 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둘이 자신이 일러준 대로 운공을 하는 것을 확인한 시후는 둘의 머리에서 손을 뗀 후 지켜보기 시작했다.
혹여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재빠르게 손을 쓰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시후가 손을 쓰게 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태산과 인호의 머리 위에서 은은한 금광이 뿌려지더니 곧 둘의 미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둘은 깊게 심호흡을 하더니 그 자리에서 천천히 쓰러졌다.
“돌팔이.”
시후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진지춘을 불렀다.
진지춘은 빠르게 달려가 둘의 상태를 확인했다.
둘의 소매를 걷고 진맥을 하던 진지춘의 눈은 점차 켜졌다.
무언가 뚫리는 소리가 들릴 때 설마 했는데 진맥을 하니 확실해졌다.
둘은 임독양맥이 타동되어 있었다.
환골탈태까지는 아니었지만, 임독양맥이 타동된다는 것은 무인으로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큰 행운이었다.
기연이 닿아야 가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그 기연을 사람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진지춘은 경외의 눈빛으로 시후를 바라보았다.
시후는 진지춘의 세상 부담스러운 시선에 둘의 상태가 괜찮다는 것을 눈치챘다.
“조금만 안정을 취하면 일어날 테니 담요나 좀 덮어주고 너는 둘이 깨어날 때까지 잘 지키고 있어라.”
“도련님~~.”
둘을 지키라는 지시를 들은 진지춘이 갑자기 콧소리까지 넣어 자신을 부르자 시후는 눈썹을 꿈틀대었다.
집 지키던 개가 평소 먹어보지 못한 고기를 보았을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잘 지키기나 해.”
“에이~~ 도련님! 저는요? 네? 저는요?”
“너 뭐?”
“저도 이 두 녀석처럼 임독양맥 시원하게 한번 안 뚫어 주시나요?”
무슨 임독양맥이 막힌 변기도 아니고 저리 쉽게 말하는 진지춘이 어이가 없었다.
“넌 이미 많은 영약을 먹어서 내공이 충분하잖아.”
“에이~ 다다익선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요?”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다.”
“에이~~ 도련님~ 네?”
좀 있으면 환갑을 바라보는 진지춘이 앙탈을 부리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어났다.
그래도 비상사태를 대비해 이것저것 챙겨온 모습이 기특해 화는 내지 않기로 했다.
“조만간 너도 좋은 거 던져 줄 테니 쟤들 잘 챙겨라.”
“넵!!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주먹까지 움켜쥐며 좋아하는 진지춘이었다.
진지춘은 시후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시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조건 이루어진다는 거였다.
말에 무게가 있다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기대감을 가득 품은 진지춘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태산과 인호를 돌보기 시작했다.
둘은 이번 일로 적어도 일 갑자의 내공은 갖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임독양맥이 타동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내공이 움직일 것이고 무엇을 배우든 막힘없이 습득하게 될 터였다.
시후는 앞으로 태산과 인호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하는 즐거운 생각을 했다.
“이제 근골을 만들어야 하니 한 손으로 절벽을 오르는 거를 시킬까? 아니면, 손가락 하나로 물구나무를 선 다음 탄지공을 이용한 콩콩이를 시킬까?”
둘을 단련시키기 위한 수많은 방안들을 계획하는 시후였다.
문제는 그 모든 게 천마 시절 천마동에서 겪었던 일들을 토대로 만든다는 거였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시키는 방법들이었다.
부르르-부르르르-
“어? 왜들 이래?”
진지춘은 갑자기 태산과 인호가 몸을 부르르 떨자 깜짝 놀라며 시침을 했다.
갑자기 둘이 왜 이런 증상을 보인 것은 모르겠지만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
시후는 그런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연공실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제갈신길과 제갈조민이 시후를 맞이해왔다.
마치 시후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무슨 일이냐?”
“이번에 당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근데?”
“당가를 거두실 생각이십니까?”
제갈신길은 당성치와의 만남으로 시후가 당가를 찾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제갈세가는 시후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했다.
원후가가 제갈세가를 집어삼키려고 했던 일을 시후 덕분에 피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내쫓고 나니 제갈세가의 힘이 반감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시후가 제갈세가의 절학인 현원진신공을 알려 준 덕분에 부족한 힘을 메꿀 수 있었다.
이대로 제갈세가의 뛰어난 제자 몇 명에게 현원진신공을 집중적으로 가르쳐 몇 년 만 지나면 지금의 두 배, 아니, 세 배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제갈세가와 사이가 좋지 못한 당가와 시후가 접점이 생겼다니 제갈신길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갈신길의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시후는 단번에 그의 불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당가가 뭐가 되었든 너희 제갈세가가 내 바로 뒤에서 걸어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시후의 말에 제갈신길은 표정을 활짝 피며 허리 숙였다.
조민 역시 같은 모습으로 인사를 했다.
시후는 그런 조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턱을 까딱거렸다.
그 모습에 조민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머리는 똑똑한데 눈치가 없구나? Safety World 어떻게 마무리 잘 되었냐고 묻는 거였다.”
“아! 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로그인하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만한 일이 있을 거예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비밀로 하며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조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 시절에 이런 식으로 보고를 올리는 녀석이 있었으면 주둥아리를 찢어버렸을 텐데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저런 조민이 귀여워 보여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에 시후는 제갈신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혹시 남궁세가는 어디 있는지 아느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