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방과 후 태산과 인호는 당가로 향했다.
시후의 말대로 한국대입구역에서 하차하고, 한국대 캠퍼스가 보이자 골목으로 들어갔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 당성치를 만났을 때 썼던 복면을 쓰고는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비천잠행술을 펼치며 빠르게 본관을 찾아간 둘은 총장실에 다다랐다.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둘은 당당하게 총장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보여야 할 당성치는 보이지 않고 웬 여자가 자신들을 맞이해왔다.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
오늘 자신들이 이곳에 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후는 물건을 찾으러 오는 데 기일을 잡아두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 이후로 계속 기다렸다는 거야?’
태산과 인호는 서로를 힐끗거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당연히 당성치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대환단과 만년한철을 받고는 곧장 돌아갈 생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둘이 우물쭈물하자 여자가 입을 열었다.
“후훗, 사내대장부들이 여자 혼자 있는 방에 들어오는 게 겁나시나요?”
“흥!”
비아냥거리는 말에 태산이 먼저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에 인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뒤에 자리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저렇게 소파에 앉는 태산을 보며 자신이라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의도였다.
“뒤의 분은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으시네요?”
“용건만. 받을 게 있어서 왔다.”
태산이 목소리를 갈며 걸걸하게 말했다.
자신들이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한 나름의 대처였다.
평소에도 살짝 굵은 목소리의 태산이 그렇게 말하자 생각보다 무게감이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태산 목소리에 되레 미소를 보였다.
“어머? 목소리가 상남자다우시네요?”
“용건!”
“어머~ 급하시기는. 먼저 제 소개부터 하죠, 당가의 첫째 여식 당나영이라고 해요.”
당나영은 비음까지 넣은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실 당나영이 이들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늘 당성치가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나갈 일이 있으니 대신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이 있었다.
혹여나 누군가가 받을 물건이 있다고 하여 온다면 책상 밑에 있는 여행용 가방을 내어주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절대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도 있었다.
근래 벌어진 일들로 인해 몸을 사리고 있는 당나영은 아버지의 말을 곱씹으며 되새겼다.
하지만 평소 남자를 발톱 밑의 때처럼 생각하는 당나영에게 이들이 이런 혈기 왕성해 보이는 남자들이 찾아왔으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미 아버지의 당부 따위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흥, 무공이 얼마나 고강한지는 모르지만, 나도 이미 반 갑자가 넘는 내공을 갖고 있다고.’
당나영은 당가에서 지원받은 영약을 섭취하여 이미 30년의 내공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한 또래에 자신보다 성취가 높은 것은 남궁세가의 자제뿐이었다.
그런 남궁세가의 자제 또한 자신의 치마폭에 넣고 놀아대고 있으니 콧대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짓을 하기로 했다.
당나영은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나야, 총장실에 귀빈이 오셨어. 차 좀 내와.”
차를 내오라는 당나영의 말에 태산과 인호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태산은 이렇게 상황 파악을 해야 하거나 머리를 써야 할 때면 그저 인호를 바라보았다.
이런 거는 네가 잘하니 알아서 하라는 눈빛이었다.
인호도 그 눈빛에 익숙하게 입을 열었다.
“차는 필요 없으니 물건을 주시죠?”
태산과는 다르게 예의 있는 말투였으나 오히려 더 단호했다.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그런 둘을 잡아두려는 말은 당나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차 한 잔 드실 시간도 없으신가요?”
총장실 문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태산과 인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당나영이 남자의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관능적인 이미지라면 저 여자는 남자의 가슴을 울리는 청순한 이미지였다.
인호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거둘 수가 없었다.
자신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그녀의 미소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다가와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이미 인호는 소파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녀 또한 당나영의 옆에 자리하며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저는 당보영이라고 해요.”
당보영은 조신하게 원피스의 가슴골 부분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저는 차인호라고… 헙.”
“야!!”
인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다가 태산의 호통에 입을 다물었다.
정체를 숨기고자 복면을 쓰고 있는데 이름을 말하다니.
차라리 얼굴을 보여주는 편이 나은 경우였다.
“호호, 두 분은 참으로 재미있으시네요. 차 한 잔 나누고 계시면 물건을 가져다드릴게요.”
당나영은 눈을 흘기며 웃었다.
태산과 인호는 자신들의 잘못에 머쓱해하며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당보영의 모습에 넋을 잃고 정신을 못 차린 자신을 탓해야지.
그렇게 탓하며 망설임 없이 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윽!!”
태산과 인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잽싸게 찻잔을 내려놓았지만 이미 자신들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었고 그것이 앞에 여자들 때문이라는 생각에 둘은 눈을 부라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지만,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가에 오셨으면서 아무거나 그렇게 넙죽 받아 드시다니요? 조심성은 없으시네요?”
인호의 외침에도 나긋나긋하게 대답하는 당나영이 상당히 얄미웠다.
당나영은 책상 밑에 있던 여행용 가방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무엇이길래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내어주라고 했을까요?”
태산과 인호는 몸에 힘이 빠지다 못해 이제는 식은땀까지 흘렸다.
당나영이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저 안에 대환단과 만년한철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둘은 비천잠행술을 펼쳐 캐리어를 챙기고 이곳을 벗어나려고 내공을 일으켜보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단전에서 느껴져야 할 묵직한 힘이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듯 흩어져갔다.
“서, 설마? 산공독?”
“어머? 산공독에 처음 당해 보시나요? 반응이 신선한데요?”
태산과 인호는 그제야 자신들이 내공을 쓰지 못하게 막는 산공독에 중독된 것을 깨달았다.
당나영은 둘의 반응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는 여행용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보이는 대환단과 만년한철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우리 당가의 보물을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주라고 했다고요? 하? 왜죠?”
“…….”
당나영은 자신의 질문에 둘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계시면 억지로 열게 하는 수밖에 없답니다. 소녀가 꼭 모질게 대해야 할까요?”
스윽-
그러면서 당나영은 품속에서 작은 죽통을 꺼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죽통의 뚜껑을 열자 안에서 무언가 기어 나왔다.
“헉!!”
태산과 인호는 죽통에서 기어 나온 거미를 보며 깜짝 놀랐다.
크기는 밤톨만 했는데 거미의 머리가 보통의 것과는 달랐다.
“호호, 놀라시기는요. 이 아이는 인면지주(人面蜘蛛)라는 아이입니다,”
말이 사람의 얼굴을 가진 거미지.
엄니를 오므렸다 폈다 하며 다가오는 것이 괴물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인면지주는 당나영의 신호로 천천히 테이블을 기어 태산과 인호에게로 향했다.
“이 아이에게 물리면 따끔하고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태산과 인호 역시 무협 소설에서 인면지주에 대한 것을 읽은 기억이 있었기에 짐작은 하고 있었다.
‘물리면 몸이 썩어 문드러지겠지?’
끔찍한 고통과 함께 몸이 썩어들어 가게 될 거라는 생각에 둘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인면지주는 테이블 끝에 다다르자 태산을 향해 뛰어오르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픽-
“뭐야?!!”
그런데 인면지주가 뛰어오르려던 그때 무언가 날아와 인면지주를 꿰뚫어 버렸다.
아주 가는 바늘이었다.
자신이 아끼는 인면지주가 죽었다는 것에 놀랄 새도 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도련님께서 나까지 보내신 이유가 있었구나?”
태산과 인호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의선님!!”
얼마 전에 시후에게 소개받은 진지춘이었다.
그때 시후가 진지춘을 돌팔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진지춘이 역정을 냈다.
거기에 태산과 인호가 대뜸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진지춘은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의선’이라고 부르게 했다.
한편, 당나영과 당보영은 기척도 없이 나타난 진지춘을 보며 긴장했다.
둘은 슬금슬금 움직여 품속의 비도를 꺼내려 했다.
“어허! 움직이지 말거라, 당가의 암기가 빠르다 하지만 내 침 또한 그에 뒤지지는 않을 게다.”
둘은 진지춘의 손끝에서 흔들거리는 가는 침을 보며 손을 내렸다.
자신들의 이목을 속이고 들어온 시점에서 자신들은 저자의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에 앞에 둘이 ‘의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의학에도 조예가 있을 거였다.
그렇다는 것은 웬만한 독은 통하지도 않을 거라는 의미였기에 자신들이 상대할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없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둘을 보며 진지춘은 실실 웃었다.
“똑똑하구나? 부디 그 똑똑함을 끝까지 유지하길 바라마.”
태산과 인호에게 다가간 진지춘은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었다.
그러고는 병 속에 들어 있던 작은 환을 몇 알 꺼내어 둘에게 먹였다.
“산공독을 중화시켜 주는 약이다, 바로 내공을 사용하기는 힘들겠지만 잠시 후면 운신할 수는 있을 게다.”
진지춘의 말에 당나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산공독에 중독된 무인을 고작 환약 몇 알 먹였다고 고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환약 몇 알을 먹은 태산과 인호의 낯빛이 확연히 좋아지는 것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 호호, 대단하시네요? 혹여 저분들의 주군이신가요?”
“내가? 크크큭, 너희는 우리 도련님이 오셨으면 아주 큰 봉변을 경험하게 되었을 거야. 오히려 내가 온 것에 감사하며 거기 그대로 있거라.”
약효가 도는 것인지 태산과 인호가 힘겹게나마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지춘이 당 자매에게 경고를 했다.
자신들이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진지춘은 태산과 인호에게 나가자며 눈짓을 하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여행용 가방을 발견했다.
“그건 우리 거 같은데?”
“그럴 리가요? 아직 드리지 않았으니 저희 것이지요?”
여행용 가방은 내어줄 수 없다는 당나영의 말에 진지춘은 뭐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도도한 표정으로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당나영의 모습이 거슬렸다.
태산과 인호가 이곳에 온 목적이 저 여행용 가방 같은데, 저것을 두고 가면 왠지 통쾌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아라.”
진지춘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고는 태산과 인호를 앞장세워 총장실을 빠져나갔다.
셋의 기척이 멀어져 가는 것을 확인한 당나영은 재빨리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었다.
“저예요, 어디쯤 오셨어요? 잘되었네요. 그럼 지금 본관을 빠져나가는 세 명의 무인이 있는데 좀 맡아 주실래요?”
누군가에게 진지춘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한 당나영은 당보영에게 손짓을 하며 총장실을 빠져나갔다.
당보영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여행용 가방을 챙기고는 빠르게 뒤를 따랐다.
총장실이 있던 본관을 빠져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서 있는 진지춘 일행이 보였다.
진지춘의 앞에는 남자 여럿이 막아서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당나영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왔다.
당나영은 빠르게 달려가 그 남자 옆에 서더니 팔짱을 껴갔다.
그러더니 콧소리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오빠가 조금만 늦었어도 저들을 놓칠 뻔했어요~.”
“어쩐지 빨리 오고 싶더라니. 이제 걱정 마. 오빠가 왔잖아?”
한껏 거들먹거리면서 느끼하게 대답하는 남자는 꽤 잘난 미모를 갖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호감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진지춘은 그런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도 평소 주절주절 나불대던 입을 놀리지 못했다.
많아야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녀석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태산과 인호를 총장실에서 데리고 나온 진지춘은 캠퍼스로 나오면 일반인 눈에 띄어 무슨 수가 생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놈의 학교는 왜 학생들이 하나도 없어?”
해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학생들에 화를 내는 진지춘이었다.
“여기 학교는 지금 기말고사 기간이랍니다~!”
“젠장!”
당나영의 말에 진지춘은 혀를 찼다.
한국대생이라면 기말고사 때 캠퍼스에 나돌아다닐 리가 없었다.
아마도 기숙사나 도서관, 자취방에서 열심히 공부 중일 터였다.
“아…. 이러면 나가리인데.”
더는 도망칠 방도가 없는 진지춘이 태산과 인호를 향해 눈짓을 주었다.
혹여 내공이 회복되어 은신술을 펼칠 수 있는지 묻는 거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둘의 썩은 표정뿐이었다.
그때 앞을 막아섰던 남자가 기세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피부가 찌릿찌릿할 정도로 상당한 기세였다.
“나, 남궁세가 삼공자를 앞에 두고 딴청을 부리다니? 간땡이가 탱탱 부은 영감탱이구만?”
“남궁세가? 설마 남궁화성?!”
“이열~. 영감 제법인데?”
자신을 남궁세가라고 소개하는 이 녀석은 남궁화성이었다.
남궁세가 가주의 막내아들로 무공에 탁월한 소질을 보여 나이에 맞지 않은 실력을 갖췄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제갈세가와 더불어 중국 약선방에까지 이름을 떨친 남궁세가였기에 진지춘도 익히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요즘 어디 가문의 여식에게 푹 빠져 있다는 소문이 있더니 그게 당가일 줄이야.”
남궁화성과 당나영의 관계를 눈치챈 진지춘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거 명성이 자자한 남궁화성 공자를 다 만나 뵙는군요. 저는 약선방의 진지춘이라 합니다.”
“약선방?”
남궁화성 또한 약선방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중국 최고의 의원들이 모여 있는 곳.
그곳이 약선방이었다.
“얼마 전 약선방의 의원이 제갈세가에 초청을 받아 들어왔다고 하던데 그게 영감이었어?”
“하, 하하, 그렇습니다.”
자신이 약선방의 의원임을 밝혔음에도 여전히 말이 짧은 남궁화성에게 미소로 대답하는 진지춘이었다.
여기서 발끈했다가는 일이 틀어지기에 참는 거였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 아이들은 제가 아끼는 아이들입니다. 저녁도 늦었고 하니 보내주시면… 큭!”
핑-
진지춘은 말을 하던 도중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진지춘의 목이 있던 자리를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검이 눈에 보였다.
“쓸데없는 말이 많아, 영감?”
어느새 남궁화성이 진지춘의 등 뒤로 이동해 검을 휘두른 거였다.
딱 진지춘이 피할 수 있을 정도로 휘두른 거였겠지만 만약 피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목이 잘렸을 만한 공격이었다.
무공으로도 말로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느낀 진지춘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 진지춘의 앞으로 태산과 인호가 나섰다.
“의선님, 저희가 막아볼 테니 시후에게 연락을 해주세요.”
인호는 자신들을 방패로 하여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여기서 셋이 무슨 수를 써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기에 빠르게 머리를 굴려 내린 답이었다.
진지춘 역시 그 방법뿐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화성은 독 때문에 간신히 거동이나 하는 복면인 둘이 자신을 막아서자 짜증이 솟구쳤다.
저들도 무림인이라면 자신이 뿜어내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텐데 감히 자신을 막아서다니 자존심이 상하는 거였다.
“어디서 굴러먹던 쓰레기들인지 모르지만, 오늘은 상대를 잘못 골랐… 큭!”
“천기보, 풍!”
남궁화성이 말하는 도중 인호가 천기보를 펼쳤다.
이형환위까지는 아니었지만, 한순간 인호를 놓친 남궁화성.
인호가 나타난 곳은 남궁화성의 머리 위였다.
조금이나마 회복한 내공으로 투신검각권의 풍을 펼쳤다.
인호의 발길질에 남궁화성을 중심으로 작은 회오리가 일어났다.
남궁화성은 몸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급히 천근추를 펼쳐 땅에 발을 붙였다.
“감히!!”
“개걸폭렬권, 일 초식!”
퍼펑-
인호의 공격에 발끈한 남궁화성이 검을 치켜들며 인호에게 쏘아져 나가려 했다.
그런데 반 박자 빠르게 태산이 개걸폭렬권을 펼치며 주먹을 내질러왔다.
Safety World에서는 가격당한 부분을 터트리는 위력을 보여준 일 초식이었지만, 지금은 내공이 부족해서인지 풍압을 일으킨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남궁화성이 이성의 끈을 놓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런! 병신 같은 것들이!! 창천뢰검(蒼天雷劍).”
파지지직-
남궁화성의 외침과 함께 휘둘러진 검은 한 줄기의 번개가 되더니 인호의 회오리를 가르며 허공을 갈랐다.
번개만큼 빠른 출수로 아직 땅에 내려서지도 못한 인호의 다리를 허벅지부터 정강이까지 베고는, 몸을 돌려 태산을 향해 뻗어나갔다.
태산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아직 거두어들이지 못한 오른손의 팔꿈치부터 어깨까지 기다란 선혈을 남겼다.
“크악!!”
한 호흡 만에 둘에게 동시에 치명상을 남긴 남궁화성은 어느새 진지춘의 앞에 자리해 있었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당나영 또한 남궁화성의 성격이 지랄맞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기분을 맞추어주며 유혹했었다.
지금처럼 저렇게 미친 듯이 신경질을 낼 때면 당나영 또한 절대로 말을 걸지 않았다.
지금 말을 걸었다가는 들고 있는 검 끝이 자신을 향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였다.
자신이 휘두른 검 한 번에 장내가 조용해지자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짓는 남궁화성이었다.
“그래, 그래. 나를 대할 때는 언제나 이렇게 조용히 대하는 거다. 알겠냐, 영감?”
서서히 검을 들어 올리는 남궁화성에 진지춘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예상외의 사람이 남궁화성을 막아왔다.
“그, 그만하세요.”
지금까지 한쪽에서 조용히 있던 당보영이었다.
당나영은 그런 당보영에게 미쳤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네가 나서냐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당보영은 그런 언니의 눈빛을 무시한 채 훌쩍 날아 진지춘의 옆에 내려섰다.
“이분은 저희 가주님의 손님들이세요. 이 이상 문제가 커지면 뒷수습하기 힘들어져요.”
“손님? 이 영감이?”
여기서 왜 당가 가주가 튀어나오냐며 남궁화성은 고개를 돌려 당나영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을 이곳까지 부를 때에는 그저 손봐줄 놈팡이들이 있다는 소리뿐이었다.
그런데 그 놈팡이들이 가주의 손님이라고 하자 심기가 불편해졌다.
당나영은 해명을 바라는 남궁화성의 눈빛을 받으며 애써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남궁화성은 자신의 처지를 단번에 이해했다.
“이거, 이거. 내가 사냥개가 된 기분인데?”
남궁화성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당보영을 힐끗 바라보았다.
살기를 가득 품은 시선이었기에 당보영은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품속의 비도를 찾았다.
퍽-
하지만 남궁화성의 발이 한 박자 빠르게 당보영의 얼굴을 가격했다.
당보영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자 당나영이 빠르게 날아가 당보영을 잡아챘다.
땅에 떨어져 받을 충격을 없애 주기 위함이었다.
당보영을 받아낸 당나영은 눈을 부릅뜨며 남궁화성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남궁화성의 모습이 확대되어 오는 것을 보았다.
남궁화성은 당나영과 당보영이 겹쳐지는 순간에 검을 내질러 갔다.
한꺼번에 둘을 꼬치로 만들어버릴 심산이었다.
“미친놈이!! 흡!”
쿵-
그런데 태산의 목소리가 들리며 남궁화성의 몸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내지르던 검을 거두어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넌 저 두 년을 꿰뚫어 버리고 난 후다.”
내지르던 검을 거둘 생각이 없는 남궁화성이었다.
그런데 검이 당보영의 등에 닿으려는 그때 무언가 휙 하고 지나갔다.
어느새 인호가 천기보를 펼쳐 당보영을 끌어안고는 몸을 날리는 거였다.
무리해서 천기보를 사용해서인지 허공에 붉은 피가 흩날렸다.
남궁화성은 1차 타겟인 당보영이 사라졌지만, 그 뒤에 있던 당나영은 그대로 있었기에 여전히 검을 내질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른팔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태산이 당나영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아직 움직이는 왼팔을 쉴 틈 없이 내지르기 시작했다.
“개걸폭렬권, 삼 초식!”
파바바밧-
남궁화성은 공기를 터트리는 풍압에 내지르던 검을 회수하며 빠르게 회전시켰다.
허공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여러 번 들리더니 남궁화성이 검을 내렸다.
“이것들이 아주 쌍으로 지랄들이구나?!”
인호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터인데 몸을 날려 당보영을 낚아챘고, 태산은 어깨가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개걸폭렬권을 펼쳐 당나영을 보호했다.
당나영과 당보영을 구한 두 복면인을 번갈아 보던 남궁화성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두 눈에 핏발이 서며 붉어지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그 모습에 당나영은 그동안 남궁화성을 자신의 치마폭에 감싸고 놀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자신의 앞에 버티고 있는 떡 벌어진 어깨가 든든해 보였다.
남궁화성은 그런 당나영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웃어갔다.
“크크큭, 발정 난 암캐처럼 눈 돌리는 거 봐라. 내 네년의 눈부터 파내고 저 녀석들의 팔다리를 하나씩 떼어 당가의 문 앞에 던져주리라.”
장내에 있는 모두가 남궁화성의 섬뜩한 발언에 입을 다물었다.
그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네 팔다리는 어디다 던져줄까?”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모두의 시선이 돌아가자 하늘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이의 모습이 보였다.
“허, 허공답보(虛空踏步)?”
허공답보를 본 남궁화성의 놀라는 목소리 뒤로 진지춘의 외침이 들려왔다.
“도련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