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희노애락환진(喜怒哀樂幻陳).
사람의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을 이용한 환영진으로 진법에 갇힌 자는 네 가지의 감정을 바탕으로 비현실적인 경험을 한다.
그것을 살짝 변형해 돈벌이의 수단으로 환락탑에 설치했다.
환락탑을 이용한 유저들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만족감을 얻었다.
그런 유희(遊戲)를 위한 것을 이렇게 성벽 밖에 펼쳐 놓으니 저만한 수의 오크들을 잡아두는 절진이 되었다.
천마 시절에도 정파 무림 녀석들에게 사용했을 때 어찌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언제나 점잔만 빼던 녀석들이 울고불고 제 옷고름을 풀어 헤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꼴들은 특히 볼만했지.’
그렇게 꼴사나운 모습들만 보이며 발을 묶어두기 위한 환진이었기에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위력은 없었다.
그래서 오크들에게 이 진을 사용한 거였다.
살려둬야 쓸모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 후회되네.”
성벽 아래 저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후회가 들었다.
오크들은 옷을 풀어 헤치거나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하지 않았다.
녀석들의 외모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건 정말 아니었다.
입 밖으로 삐쭉 삐져나온 송곳니와 더불어 초록빛 피부를 자랑하듯 뽐내는 저 자태들이라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군.’
한쪽에서는 몇 가닥 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치장을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초록빛 피부에 흙을 바르며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얼마 전 TV에서 보았던 미스&미스터코리아 선발 대회를 연상케 했다.
거기다가 서로 자신이 잘났다며 으르렁대더니 곧 싸울 기세였다.
저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오크 부족 간에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 시후가 나섰다.
- 조민아, 진 해제해라.
조민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자 오크들을 뒤덮었던 진이 빛을 잃으며 해제되었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오크 녀석들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바보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던 시후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
시후의 시선 끝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을 휘날리며 그에 뒤지지 않는 뽀얀 피부를 자랑하듯 상체를 벗어던진 진지춘이 있었다.
그의 앞에는 조금전 시후와 목숨을 걸고 싸우던 델루가 서 있었다.
델루 역시 온몸에 흙을 처바른 것이 다른 오크들처럼 근육을 뽐냈던 거 같았다.
“근데 왜 쟤네는 계속 다투는 거야?”
어찌 된 것인지 진이 해제되었건만 둘은 아직도 실랑이 중이었다.
“크륵, 인간! 자고로 남자의 매력은 이 우아하면서도 탄탄한 초록빛 근육에서 나오는 거다!”
“헹! 근육만 있으면 다냐? 얼굴을 보라고 얼굴을. 그 얼굴 마주 보고 밥이나 먹겠냐?!”
희노애락환진에 빠졌던 둘은 남자의 매력에 관한 토론을 진이 해제되었음에도 계속하는 거였다.
그런데 진지춘이 얼굴에 대해 지적을 하자 델루가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주먹을 휘둘렀다.
시후는 오늘 진지춘이 한 공로를 생각해 허무하게 로그아웃시킬 순 없기에 나서려 했다.
그런데 좀 전까지만 해도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도망치던 진지춘이 되레 델루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 죽여라!! 죽여!!”
“크륵! 죽인다!”
퍽퍽-퍽퍽-
그 모습에 시후는 걸음을 멈췄다.
어째서인지 델루의 상태가 자신과 싸울 때와 너무 달랐다.
흉포하게 몰아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보통의 오크들보다 약해 보였다.
덕분인지 진지춘과는 주먹질로만 투덕거렸다.
진지춘도 한방에 로그아웃될 줄 알았는데 버틸 만하자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이 모든 게 광폭화의 리바운딩 결과였다.
원래대로라면 델루는 이미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진지춘이 얼굴을 지적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저렇게나마 움직이는 거였다.
그래도 저렇게 못생긴 녀석과 밉상인 녀석 둘이 웃통을 벗고 투덕거리고 있으니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푹-푹-
시후는 지풍을 날려 둘의 수혈을 짚었다.
델루가 추한 꼴까지 보이며 쓰러지자 오크들은 패닉에 빠졌다.
“그럼, 마무리해 볼까?”
시후는 내공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 모두 엎드려.
눈앞에 보이는 오크들 모두에게 천리전음(天里傳音)을 사용했다.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시후의 목소리에 오크들은 세상 당황했다.
처음 겪는 일인지 두려움이 차오르는 눈빛으로 시후를 찾았다.
그렇게 시선이 집중되자 시후는 오크들에게 살기를 뿜어냈다.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흉흉한 살기였다.
시선에 닿는 것만으로도 칼날에 베이는 듯한 착각이 오크들을 휩쓸었다.
스윽-
시후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오크들을 향해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시후의 손바닥이 자신들을 향하자 오크들은 기겁하며 무릎을 꿇었다.
델루를 공격했던 천마멸겁장을 떠올린 거였다.
수백의 오크가 무릎을 꿇는 장면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초록의 물결이 파도치듯 넘실거리며 모두의 머리가 조아려졌다.
천마 시절에는 언제나 보았던 광경이었지만 강시후로 살면서는 정말 오랜만에 이런 장면을 보았다.
‘느낌이 색다르군.’
무언가 내면에 비어 있던 것이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띠링-
[오크 무리의 머리를 조아리게 했습니다.]
[명성치가 + 1,000 상승합니다.]
“오호~, 명성치가 이런 거였어?”
시후는 자신의 감정을 고양되는 것이 [명성치]와 관련이 있다는 것에 흥미를 보였다.
등한시하던 명성치에 대한 생각을 고치며 입을 열었다.
- 남쪽 성문 앞에 10열 종대로 헤쳐 모이는 데 1분.
또다시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오크들은 괴로워했다.
그리고는 앞다투어 남쪽 성문으로 내달렸다.
오와 열을 맞추어 정렬하는 오크들을 보던 시후는 수혈을 집혀 자빠져 자는 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둘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시후는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앞으로 귀찮은 건 지괴(智怪)가.”
시후는 허공섭물을 펼쳐 둘을 띄우고는 델루를 먼저 한스텔 마을로 던졌다.
뒤이어 진지춘도 똑같은 궤도로 던졌다.
저대로 날아간다면 둘이 순차적으로 착지할 수 있을 거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진지춘은 자신에게 고마워할 거라 생각하며 조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냈다. 마무리 짓고 나와라.”
귀찮은 일은 지괴를 삼기로 한 조민에게 모두 떠넘기는 시후였다.
조민에게 답신을 간략하게 받은 시후는 퀘스트 창을 열었다.
[오크 부족장 히든 퀘스트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일반 퀘스트와는 달리 히든 퀘스트는 이렇게 수락을 해야만 보상이 취득할 수가 있었다.
망설임 없이 ‘네’를 클릭하자 눈앞에 메시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크 부족장 히든 퀘스트 보상으로 경험치 +2,300,000을 받으셨습니다.]
[오크 부족장 히든 퀘스트 보상으로 버프 문신을 획득했습니다.]
[오크 부족장 히든 퀘스트 보상으로 오크 영지권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레벨이…….]
경험치 2백3십만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레벨업 메시지가 끊임없이 나타났다.
드디어 계속 떠오르던 메시지가 사라지자 시후는 스테이터스 창을 열었다.
종족 : 인간
직위 : 없음
직업 : 무림인
파티 : 8명(힘만 센 대머리, 얍삽한 로빈훗, 일비, 이비, 삼비, 사비, 유라, 다주힐)
<스텟 정보>
힘 : 145
민첩 : 145
체력 : 150 (HP : 15,000)
지능 : 140 (MP : 14,000)
분배 가능한 스텟 : 119
분배 가능한 스텟을 확인한 시후는 고민도 없이 힘과 민첩에 전부 투자했다.
그리고 달라진 몸 상태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과연 천마분심공을 통해 현실에서는 얼마큼의 내공이 증진됐을지 기대가 컸다.
“태산아, 인호야, 나가자.”
메시지를 보낸 시후는 먼저 로그아웃을 했다.
빛이 번쩍이며 고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자각한 시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흐흐흐.”
참을 수 없이 방정맞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캡슐의 뚜껑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시후는 천마분심공을 통해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운기조식을 하면서도 일상생활이 가능했기에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걸어 나갔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밤이었기에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천천히 들이켰다.
“꿀꺽, 꿀꺽, 흐흐흐, 흐흐흐흐.”
물을 마시면서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생수병을 들고 거실 창가로 다가가 서울의 야경을 보았다.
강시후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날의 야경을 보았지만, 오늘만큼 아름답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나 싶었다.
천마분심공을 통해 운기조식이 끝나가자 백회혈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주위를 가득 메울 정도로 피어오르던 수증기는 점차 빛을 발하며 시후를 감싸 안았다.
번쩍-
마치 번개라도 치는 것처럼 번쩍이던 수증기는 순식간에 백회혈로 빨려 들어갔다.
시후는 수증기가 빨려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거센 힘을 느꼈다.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쿵쾅거리며 단전에 내공이 가득 차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순간.
뚝-
끊임없이 차오르던 단전의 틀이 깨져갔다.
시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주 미세한 숨도 내뱉을 수 없는 중요한 순간이었기에 집중하는 거였다.
단전 안에 가득 채워져 있던 내공이 몸속의 모든 혈맥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손끝과 발끝까지 내공의 흐름이 느껴질 때쯤 시후가 입을 열었다.
“흐흐흐, 됐다. 드디어 천마지체가 되었다.”
천마지체(天魔之體).
천마가 모든 무(武)에 통달할 수 있게 만들어준 근본이었다.
보통의 무학은 단전에 모은 내공을 혈로 보내 사용한다.
그 틀을 깨는 것이 정파에서는 자연경(自然境), 사파에서는 탈마경(脫魔境) 이르는 것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천마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들에 이르기까지는 득도를 이루어야 했기에 포기했다.
‘신선 따위가 될까 보냐.’
그래서 찾은 것이 천마지체였다.
배꼽 밑에 축적하던 내공을 끌어 쓰려면 어쩔 수 없이 지체되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단전의 용량은 시간의 공을 들여야만 키울 수 있었다.
그 단점을 보완하고자 천마 시절 그 틀을 깨고 모든 혈도를 단전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천마는 누구보다 단단하고 방대한 내공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의 경지가 그와 같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마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드디어 그 끝을 향해 뛸 수 있다는 거였다.
“이제 삼 할 오 푼의 경지를 회복했구나. 크하하하!”
시후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든 채 거실 창을 통해 야경을 바라보며 마음껏 기뻐했다.
그 때문인지 평소라면 자연스럽게 느꼈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시, 시후야?”
“야, 너 괜찮은 거냐?”
흠칫-
시후는 뒤쪽에서 들리는 태산과 인호의 목소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창밖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미친 듯이 웃고 있던 자세 그대로 말이다.
‘아…. 젠장.’
내공을 회복했다는 기쁨보다는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수치심이 더욱 컸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니 거실 끝에서 태산과 인호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기억을 지워버릴까?’
지금이라면 아주 간단하게 두 사람의 뇌를 조작할 수 있었다.
백회혈을 통해 내공을 슬쩍 흘려 넣어 뇌에 자극만 준다면 짧게는 일각, 길게는 하루 정도의 기억을 지울 수 있을 거였다.
하지만 태산과 인호 역시 그동안 시후를 허투루 봐온 게 아니었다.
“워! 워워!! 스탑!! 강시후!”
“하지 마라?!”
둘은 시후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말려왔다.
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의 경험과 본능으로 알았다.
지금 시후의 가늘게 뜬 눈은 자신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 생각에 가득 찬 표정이라는 것을.
“쳇!”
둘이 빠른 눈치에 기억을 지우겠다는 생각은 접어야 했다.
저들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니 본인들이 자각하는 안에서는 고통을 주기 싫었다.
둘은 시후가 생각을 접었다는 것을 느꼈는지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그런데 무슨 좋은 일이 있길래 그렇게까지 웃고 있던 거야?”
“있어.”
“아~ 뭔데?”
“내가 하고 싶은 일에 한 걸음 다가갔기에 좋아한 거야.”
진지한 시후의 말에 태산과 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잘됐다. 그게 어떤 곳이든 우리도 같이 갈 거니까, 무르기 없기다?”
“맞아. 오늘만 해도 Safety World가 이렇게 재미있던 적이 있나 싶었다. 시후 너랑 있으면 언제나 두근두근해서 너무 좋아.”
낯 뜨거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둘을 보며 시후는 얼굴을 붉혔다.
어두운 거실 조명 덕분에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는 않았다.
시후는 둘이 눈치채기 전에 냅다 달려들었다.
“으악!! 무슨 짓이야!!”
시후가 목에 팔을 두르며 조여오자 둘은 비명을 질렀다.
“크큭, 앞으로는 더 재미있어질 테니 기대해라.”
“그래, 기대하마!”
시후의 기대하라는 말에 태산과 인호는 배시시 웃었다.
“아! 맞다, 조민이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는데.”
“뭐?”
“오크들 정리가 끝났대. 다음에 접속하면 영주성으로 바로 오래.”
조민이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자신이 시킨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는 뜻일 거였다.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괴로 임명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태산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손뼉을 쳤다.
짝-
“아! 맞다!”
“왜? 뭘 또 전해달래?”
“아니… 배고파…. 라면 먹을래?”
“…….”
한창 누아르 감성이 물씬 풍기는 분위기를 망치는 태산이었다.
인호는 그런 태산을 보며 분위기 좀 타라며 멱살을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투덕투덕하는 통에 거실이 시끄러워졌다.
시후는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좋았다.
이 시끄러운 소음 또한 지금은 아름다운 곡조로 들렸다.
“크! 소악사(小樂士) 녀석이 있었다면 딱 좋을 날이다.”
천마 시절 기분이 울적할 때나 지금처럼 즐거운 일이 있을 때나 어디선가 나타나 음률을 흘리던 녀석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무림 정복을 위해 소림사를 칠 때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뭐, 잘 지내겠지…. 야! 파는 나중에 넣어야지!”
태산이 냄비에 면과 함께 파를 털어 넣는 것을 본 시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 *
당성치와 당소영은 서로를 마주하며 용정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렇게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용정차를 다 마실 때쯤 당성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분이 정녕, 네 학교 학생이란 말이더냐?”
“네.”
“허….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당성치는 시후를 반로환동한 은둔 고수쯤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허공섭물로 사람을 옮기거나 자신의 기감을 피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문제는 자신이 그런 고수와 척질만한 일을 저질렀다는 거였다.
당가 보물창고에 있는 대환단과 만년한철로 완전히 척지는 것은 모면했지만 지금 상태는 썩은 동아줄을 잡은 거나 진배없었다.
그리고 그 썩은 동아줄이 바로 당소영이었다.
물욕이 없다, 명성욕이 없다, 야망이 없다 하여 당가 가주 서열 쟁탈전에서 배제한 막내딸이었다.
그런 막내딸에게 시후가 관심을 두고 있으니 생각을 달리해야만 했다.
“소영아.”
“싫어요.”
아직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싫다고 답하는 당소영의 말에 당성치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잘 구슬려야 했기에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뭐가 싫다는 것이냐?”
“뻔하죠. 저보고 그를 꾀라고 말씀을 하실 거잖아요.”
당성치는 자신이 말할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는 당소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가주 쟁탈전에서 배제가 되기는 했지만 어려서부터 눈치 하나만큼은 남달랐던 아이였다.
그리고 두 언니보다는 확실히 정이 많은 아이이기도 했다.
“윽!”
당성치는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는 고통스러워했다.
“왜 그러세요?”
당소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성치를 부축해갔다.
‘옳거니.’
당소영이 다가오자 제 생각대로라는 생각을 하며 열연을 펼치기 시작했다.
“크윽! 그분에게 당했던 곳에 통증이 아직 남았나 보다.”
“의원님을 부를까요?”
잔뜩 걱정한 표정의 당소영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당성치는 슬쩍 손을 들어 당소영의 손을 잡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다. 당가 내에 누가 나보다 내 몸을 잘 볼 거라 하더냐. 내 몸은 내가 잘 추스를 터이지만…. 태산 같은 걱정에 심마(心魔)에 빠질까 걱정이구나.”
한껏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시후 때문에 당가에 해를 끼치게 된 자신이 어찌해야만 할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 모습에 당소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알겠어요. 그와 이야기해 볼게요.”
“그래 주겠니?!”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 그래.”
자신들이 경험한 시후는 전형적인 강자의 성격이었다.
그것도 한참 높은 곳에 있는 강자.
일찍부터 남을 내려다보았고 남에 대한 배려보다는 관망이 우선이었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힘을 사용함에 주저함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런 자를 대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뿐인 목숨이 댕강하고 날아가 버리니 말이다.
그래도 당소영이 접점을 만들어본다고 했으니 무슨 수가 생겨날 거였다.
이제 당성치가 할 일은 대환단과 만년한철을 가지러 올 그들을 성대하게 반기는 일뿐이었다.
당성치는 밤도 늦었으니 어서 들어가라며 당소영을 마중해 주었다.
그렇게 당소영이 서울대 캠퍼스에서 빠져나가자 홀로 남은 당성치 뒤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