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조민은 자신의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며 영상에 집중했다.
아킬라이와 싸우는 저 오크가 과연 델루와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했다.
아킬라이는 조민의 이런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랜만에 즐거웠다.
“크하하하! 오크 중에 너만 한 녀석이 있다니, 대단한데?”
“크륵, 유저라는 족속인가? 네 녀석도 제법이구나?”
“알아주는 거야? 그럼, 우리 제대로 한판 붙어 볼까?”
아킬라이는 오랜만에 만난 호적수를 상대할 생각에 신이 났다.
헤라 왕궁의 수호기사라는 직책을 맡은 아킬라이였지만 언제나 이런 순간을 좋아했다.
현실에서 피가 튀는 싸움이 벌어지면 꼭 후회되는 일들이 벌어졌었다.
하지만 Safety World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피가 튀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전투를 하면 다른 이들의 찬양을 받았다.
아킬라이가 싸우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희열을 주기 때문이었다.
‘아름답다’라는 수식이 붙은 아킬라이의 검술은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였다.
스르릉-
아킬라이는 자신의 애검(愛劍)인 [헤라의 분노]를 검집에서 뽑아 들었다.
헤라 왕국의 수호기사가 되면서 업적 보상으로 받은, 자그마치 유니크 등급의 검이었다.
[헤라의 분노]
[등급 : 유니크]
[민첩 : +10%]
[회피 : +10%]
[기민 : +10%]
[받은 충격 10% 돌려주기]
기본 패시브 효과가 4가지나 들어 있는 검이었다.
아킬라이가 이름을 날린 시기 또한 헤라의 분노를 사용할 때부터였다.
헤라의 분노를 빼 들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헬멧에 부착된 안면 마스크까지 착용하자 눈에서 투기가 폭발했다.
오크는 아킬라이가 검을 빼 든 후부터 달라진 기운에 다른 오크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크륵, 다른 녀석들은 너희가 맡아라. 방해하지 못하게 해라.”
문신 오크의 지시에 다른 오크들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렇게 아킬라이와 함께 온 은빛 날개 기사단과 오크들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아킬라이 역시 은빛 날개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기사단! 돌격!”
“와아아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기사단이 먼저 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기사단과 오크들이 싸우는 모습을 힐끔거리던 문신 오크는 온몸에 근육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크륵, 저들도 대단하군. 인정한다. 너를 죽여야 우리가 이긴다.”
어눌한 문법이었지만 의미는 확실했다.
그리고 아킬라이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 보이네. 최선을 다하지. 흐럇!”
캉캉캉캉-
선수 필승.
아킬라이가 먼저 뛰쳐나갔다.
헤라의 분노를 두 손으로 꼭 움켜쥔 아킬라이의 검술은 눈부셨다.
검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빛이 은빛 갑옷에 반사되어 자체 발광의 효과가 일어났다.
아킬라이의 검은 물이 흐르듯 끊임없이 움직여 갔다.
수직으로 내리그어 문신 오크가 뒤로 물러나면 그럴 거라 예상이라도 한 듯 이미 몸을 회전시켜 횡으로 그어갔다.
그처럼 공격에 끈을 놓지 않고 몰아붙였다.
하지만 문신 오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킬라이의 쉴 틈 없는 공세를 도끼로 막기는커녕 피하고만 있었다.
2m가 훌쩍 넘는 덩치에는 어울리지 않는 발놀림이었다.
아킬라이는 기본 공격으로는 승기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화이트 카우(White cow).”
[헤라의 분노]에 담긴 스킬이었다.
문신 오크를 향해 일직선으로 찌른 헤라의 분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오크에 버금가는 크기의 황소가 나타났다.
Safety World의 커뮤니티에 소개된 적도 있는 이 스킬은 오러(Aura)가 흰색 황소의 형체를 띄며 상대방을 덮쳤다.
그 설명대로 흰색의 성난 황소가 문신 오크를 덮쳐갔다.
문신 오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드는 흰색 황소를 보며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몸에 새겨진 문신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크륵!!”
문신 오크가 기합 소리와 함께 도끼를 내려찍자 아킬라이의 검에서 나온 것과 같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흰색 황소의 머리를 찍어갔다.
콰광-
성벽 바닥을 쩍 갈라버릴 정도의 충격과 함께 화이트 카우는 양단되어 소멸했다.
아킬라이는 화이트 카우로 큰 효과는 보지 못할 거라 예상은 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지는 몰랐다.
“크크큭. 이거 장난 아닌데?”
아킬라이는 생각보다 문신 오크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예상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민은 실시간 영상을 통해 북쪽 성벽의 상황을 정확히 관찰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신음으로 흘러나왔다.
“젠장!”
디카 또한 신음을 흘렸다.
조민의 반응은 저 문신 오크가 델루와 마찬가지로 오크 부족장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 이제 어쩌나?”
디카의 질문에 조민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지도에 나타나는 전황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유저들이 하나하나 죽어 나가면 결국 24시간 후에나 접속이 가능할 거였고, 지금 상황에서는 24시간을 버틸 수 없었다.
한스텔 마을의 NPC들은 레벨 자체가 높지 않았기에 오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나마 기대를 하고 있던 은빛 날개 기사단이 저렇게 발목이 묶여 버렸으니 전황을 뒤집을 요소가 부족했다.
그렇다고 포기를 할 수는 없었기에 조민은 머릿속에 쑤셔 넣었던 수많은 병법을 되새겨 보았다.
분명 그중에 지금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그런 고민에 빠진 조민을 바라보던 디카의 눈에 이상한 현상이 보였다.
“이보게, 여기 좀 이상하지 않은가?”
디카의 말에 조민은 지도의 남서쪽을 보았다.
확실히 오크들을 나타내고 있는 점의 형상이 다른 곳들과는 달랐다.
성벽을 향해 돌진하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무언가를 쫓듯 우왕좌왕하는 모양이었다.
“영주님, 여기 영상 좀 보여주세요.”
조민의 요구에 디카는 빠르게 지도를 터치했다.
그러자 아킬라이의 영상을 보여주었을 때처럼 실시간으로 남서쪽의 영상이 나타났다.
“헐!!”
영상을 보자마자 두 사람은 동시에 육성으로 놀랐다.
* * *
비천대는 시후의 명령대로 비천화벽진을 펼치며 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진지춘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다가오는 비천대의 모습에 오크들은 콧방귀까지 뀌며 무시했다.
고작 5명이서 자신들에게 덤비다니.
이런 눈빛으로 먼저 다섯 마리의 오크들이 덤벼들었다.
당연하겠지만 오크들은 비천대가 펼치는 비천화벽진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자신들의 공격이 허무하게 튕겨 나오자 당황하던 오크들은 다시 한번 덤벼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보다 못한 동료 오크들이 나서서 덤벼들었지만, 그 역시 비천화벽진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이쯤 되자 주변에 있던 오크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서로 먼저 달려들겠다고 자기들끼리 몸싸움까지 하며 덤벼들고 있는 형세였다.
그 기세로 비천대는 남서쪽으로 이동하며 오크 몰이를 시작했다.
덕분에 남쪽 성벽은 한가해지고 있었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오크들까지 전부 비천대를 공격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크들을 처치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오크들의 공격을 허용하지도 않고 버티는 비천대를 보며 유저들을 혀를 내둘렀다.
때를 맞추어 시후는 태산과 인호를 이끌고 남서쪽으로 향했다.
셋의 배치는 간단했다.
태산과 인호가 앞장서고 시후가 뒤따랐다.
시후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
- 마음껏 날뛰어라. 최대한 소란스럽게.
덕분에 태산과 인호는 자신들이 가진 스킬 모두를 사용할 수 있었다.
개걸폭렬권과 천투검각권에 이어 본인들이 가진 스킬까지 말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시후는 둘에게 아이템까지 줬다.
자그마치 유니크 등급으로 속성이 3개나 있는 아이템이었다.
[미노타우르스의 해머]
[등급 : 유니크]
[힘 스텟 + 5%]
[체력 스텟 +5%]
[물리파괴력 +10%]
[스킬 1 : 질풍의 벽 - 풍차처럼 휘두르면 적의 접근을 막으며 튕겨낸다.]
[스킬 2 : 황소의 돌격 - 해머를 정면에 위치하여 돌격하면 적을 밀쳐내며 돌격한다. 이때 무적 상태가 된다.]
태산은 끝이 뾰족한 해머를 풍차 돌리듯 돌리며 소리 질렀다.
“크하하하! 모두 튕겨 나가라! 질풍의 벽!”
스킬을 사용하자 해머에서 바람이 일어나며 달려드는 오크들을 막아갔다.
그뿐만 아니라, 바람의 벽에 가로막힌 오크들은 마치 트램펄린에 튕겨 나가듯 펑 하며 튕겨 나갔다.
그러자 태산은 해머를 바닥에 꽂고는 한쪽 주먹을 허리춤에 가져다 대더니 개걸폭렬권을 펼쳤다.
상당수의 오크를 그렇게 죽였지만, 워낙 많은 수의 오크들이 모여 있기에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태산은 바닥에 꽂아두었던 해머를 앞으로 쭉 밀듯이 뽑아 올렸다.
땅거죽 파편이 총알처럼 튀어 올라 오크들을 공격했다.
돌멩이에 얻어맞은 오크들이 주춤거리자 인호가 나섰다.
[로빈의 보우건]
[등급 : 유니크]
[민첩 스텟 +5%]
[기민함 +5%]
[관통력 +5%]
[스킬 1 : 꿰뚫는 화살 – 멈춰 있는 적의 특정 부위를 타켓팅하여 맞추면 관통 효과 2배 상승.]
[스킬 2 : 흩어지는 화살 - 대량의 화살을 일제히 날려 일정한 범위의 적을 공격한다. 화살에 맞은 적은 2초간 스턴 상태가 된다.]
“그렇지!! 그렇게 딱 멈춰 있어! 꿰뚫는 화살!”
인호는 헤비 보우건의 방아쇠를 연신 당겼다.
관통 효과로 인해 쏘아져 나가는 화살 하나하나가 위력적이었다.
움직임이 멈춘 오크들은 그저 맞히기 쉬운 과녁에 불과했기에 화살은 정확히 미간을 꿰뚫었다.
그렇게 둘이 합을 맞추어 달려드는 오크들을 저지하자 결국 오크들이 걸음을 멈췄다.
쉽사리 덤벼들지 못하고 일정한 거리를 벌린 채 정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사이 태산과 인호 또한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어 들이켰다.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시후가 다가왔다.
“어때? 쓸 만하냐?”
“쓸 만? 이건 미쳤어!!”
“손맛이 짜릿하다!”
자신이 준 아이템에 대만족하는 둘의 모습에 시후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태산에게 준 것은 [미노타우르스의 해머]로 패시브 효과 3개에 무기 스킬 2개가 장착된 아이템이었다.
인호에게 준 것은 [로빈의 보우건]으로 캐릭터에 딱 맞는 무기였다.
둘이 신나게 날아다니는 동안 시후 역시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둘이 합을 맞추어 한쪽을 상대하면 시후가 다른 방향을 상대했다.
다만, 아주 최소한의 마릿수만 상대했다.
그것도 티 나지 않게 지풍과 돌 파편을 손가락으로 튕겨 날리는 암기술로만 말이다.
문제는.
“킁, 킁킁? 무슨 냄새냐?”
“근처에서 누가 똥이라도 쌌나?”
태산과 인호가 어디서 거름 냄새가 풍기는 것에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으힉! 뭐야? 저 똥 밭은?”
“우웩!! 나 게임에서 토해도 되냐?”
둘은 거적때기 하나 딸랑 걸치고 있는 오크들의 하의에서 연신 쏟아져 나오는 변을 볼 수 있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푸드덕푸드덕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오크들의 표정이 무언가 해탈한 듯한 표정이라는 거였다.
“저런 게 현타지….”
“시후야, 왜 하필 이 방법이냐?”
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이었다.
학교에서 똥싸개 패거리가 보여주었던 참상을 Safety World에서 그대로 재현한 시후였다.
“내가 그랬지? 너희 둘은 이번에 얼굴 좀 팔려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야. 그러니 저쪽도 마무리해라.”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쪽보다 저쪽 애들이 더 겁먹은 것 같은데?”
태산의 말대로 피 튀기게 싸우던 이쪽보다는 푸드득푸드득거리는 저쪽의 오크들이 달려들기를 주저했다.
Safety World를 하면서 오늘 처음으로 몬스터들도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긍심이 높은 오크들은 수치심을 이겨내고 있었다.
어느새 엉덩이를 들썩이는 오크들을 뒤로 물리고 다른 오크들이 걸어 나왔다.
태산과 인호는 되도록 저쪽으로 공격은 하지 말자고 눈빛을 교환했다.
그때 그쪽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시후야! 흙먼지!”
“오호, 드디어 움직였구나?”
남서쪽을 공격하던 셋은 드디어 서쪽 입구 쪽에서 거대한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드디어 서쪽 입구를 공격하던 오크들까지 이쪽으로 몰리는 거였다.
“좋았어! 태산아, 인호야! 가자!!”
“오케이!”
시후의 신호와 함께 셋은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허공을 박차며 경공술을 펼친 셋은 곧장 비천대를 향해 날아갔다.
비천대는 시후가 내린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 중이었다.
어느새 동쪽에 있던 오크들까지 달려들어 이제는 800마리에 가까운 오크들이 모여들었다.
거기에 시후가 끌고 오는 오크들까지 합치면 적어도 1,000마리는 될 거였다.
셋은 순식간에 날아가 비천화벽진 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도련님! 아고~ 죽겠습니다!”
시후가 떨어져 내리자 진지춘이 바로 울상을 지으며 칭얼거렸다.
현실 세계와는 다르게 미남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저렇게 징징대니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지춘을 나무랄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독여야 할 때였다.
“그랬어? 오구오구! 내가 좀 더 빨리 올걸!”
“왜, 왜 그러십니까?”
평소와 다른 시후의 태도에 진지춘은 경계심을 올렸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하지만, 진지춘의 본능보다 시후의 손이 빨랐다.
“간다~ 인간 폭죽이다!!”
“크웨에에에엑!!!”
순식간에 진지춘의 목덜미를 잡은 시후는 그를 하늘 높이 던져버렸다.
진지춘의 절규에 달려들던 오크들도 걸음을 멈추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진지춘을 따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시후의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델루! 복수하러 왔다!!”
진지춘의 목소리로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