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당성치의 지시로 당가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참석자 중 상당수가 한국대 교수들이었다.
그만큼 당가가 한국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교수실에서 업무 중이었기에 빠르게 모였다.
되려 당성치가 직접 부른 첫째 여식 당나영이 제일 늦게 회의실로 들어왔다.
주요 인사들이 이미 자리해 있자 당나영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늦어 죄송합니다.”
“내 빨리 오라 하지 않았느냐?”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지만 차가 막혀서….”
“닥쳐라! 캠퍼스에 들어올 때 남궁세가 자제와 들어온 것을 보았거늘!”
당나영은 당성치의 말에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한창 남궁화성과 학관에 들어가려던 그때 아버지 전화를 받았기에 기분이 상해 있었다.
평소라면 투정을 부리거나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겠지만, 며칠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덕분에 남궁화성에게는 미안하다며 캠퍼스에서 찐한 키스로 이별을 했는데 그것을 당성치가 보았을 줄이야.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기에 당나영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언뜻 보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것이 그저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금 당나영의 머릿속에는 빨리 회의를 마치고 다시 남궁화성과 놀러 갈 생각뿐이었다.
다들 당나영의 평소 행실 때문인지 그 모습에 오히려 혀를 찼다.
이쯤 되자 당성치도 자신의 여식이 그만 욕을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 화제를 돌렸다.
“오늘 여러분을 급히 모이게 한 이유는 저희 당가에 큰 은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은인이요?”
“저희가 누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있었나요?”
당성치의 말에 원로들이 수군거렸다.
다들 이만하면 살 만하지 않냐는 말들을 돌려 말했다.
당성치는 그동안 보아왔던 현재에 안주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도대체 언제까지 지금에 만족만 할 것입니까? 현재가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들 있습니까?”
“가주, 말이 심하십니다?”
“심한 건! 바로 당신들입니다!”
결국, 참지 못한 당성치의 고함이 회의장을 가득 메워나갔다.
고함에 내공이 담겨 있었는지 회의장에 있는 모두가 찌릿찌릿했다.
자신의 고함에 다들 입을 다물자 당성치는 말을 이어갔다.
“제갈세가는 이번에 외가를 배척했다 합니다.”
“네? 제갈 녀석들이요?”
다들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당성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눈과 귀가 닫혀들 계셔서야….”
“아니, 가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득이 아닙니까? 제갈세가의 외가는 상당한 뒷배가 있지 않았소? 그것이 없어졌다면….”
“외가를 배척하는 데는 그동안 실전되었던 제갈세가의 독문 무공이 나타났기 때문이랍니다.”
“설마…?”
“맞습니다, 현원신공의 위 단계에 있는 무공을 찾았다 합니다.”
“이럴 수가!”
제갈세가의 현재 상황을 상세히 전해 듣자 다들 표정이 굳어졌다.
그만큼 제갈세가가 현원신공의 뒤편을 얻었다는 것은 큰 의미였다.
처음과는 다르게 다들 앞날에 대한 걱정스러운 대화로 수군거렸다.
당성치는 자기 생각대로라는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다행히, 저희에게도 며칠 전에 은인 한 분이 찾아오셨었습니다.”
“가주, 속 시원히 이야기 좀 해보시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이가 생긴 것답게 재촉을 해왔다.
그 말에 당성치는 기다렸다는 듯이 구석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자 구속에 조용히 서 있던 덕칠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덕칠이 앞으로 나오자 당나영이 인상을 구기며 눈을 부라렸다.
며칠 전에 자신이 시킨 일을 제대로 처리 못했기에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였다.
평소라면 저런 당나영의 눈빛에 허리를 한껏 구부리고는 굽신굽신했을 덕칠이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니, 앞으로 자신은 달라질 것이라며 굳게 다짐했다.
미리 당성치와 덕칠은 이러한 상황에 대비한 이야기가 오갔는지 덕칠은 회의실 중앙에 서서는 자세를 잡았다.
팔을 휘저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덕칠의 모습에 다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가의 춤 아니오? 그걸 왜…?”
“그러게 말이요. 당가의 춤과 지금의 사태가 무슨…. 어?”
“이럴 수가?!”
몸을 움직이는 덕칠에게 한마디씩 내뱉던 이들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당가의 춤을 춘다고 생각하며 바라보다가 덕칠의 발치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족적이 눈에 들어온 거였다.
그리고 어느새 꺼내어 들었는지 호접 하나가 덕칠의 손을 떠났다.
퍽-
호접이 벽에 박히는 아주 짧은 소리와 함께 모두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호접무라니?! 덕칠이 녀석이 어찌 호접무를?!!”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가 호접무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덕칠의 움직임에 놀라며 당성치를 바라봤다.
해명을 바라는 눈빛에 당성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호접무. 덕칠은 며칠 전에 어떤 은인을 만나 호접무를 배웠다 합니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당가의 절세무학을 외부인이 알려 주다니요?”
“저도 믿기지 않지만…. 보셨잖습니까?”
다들 침음성을 흘리며 덕칠을 바라봤다.
방금 덕칠이 보여준 암기술로만 따진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가진 내공이 부족할 뿐이지만 덕칠은 젊었다.
앞으로 꾸준히 연마하고 내공을 증진한다면 당가를 이끌 인재로 탈바꿈이 될 수도 있다는 견해였다.
문제는 얼마 전까지 덕칠은 당나영의 잔심부름이나 하던 그저 그런 인물이었다는 거였다.
그런 덕칠을 잠깐의 조언으로 저만한 실력을 갖추게 했다는 그는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가주의 말씀은 그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그를 찾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서 시작하시지요?”
“좋습니다. 그럼, 당가의 모든 식솔에게 연락을 취하십시오.”
당성치의 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시후 본래 모습은 덕칠이를 통해 몽타주로 작성해 놓았다.
아마 잠시 후면 그 몽타주가 당가의 모든 인원에게로 전달될 거였다.
그렇게 당가의 주요 인원들이 회의장을 빠져나가자 안에는 당성치와 당나영만이 남게 되었다.
당성치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당나영을 불렀다.
“그래. 남궁세가의 일은 어찌 되어 가느냐?”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당나영에게는 충분히 들렸다.
“치마폭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남궁화성 그자는 이미 제 치마폭에 푹 빠졌어요.”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게야. 은인을 찾는 일이 잘되든 잘못되든 남궁세가의 안주인 자리는 꼭 차지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원후가 머저리들같이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당나영은 당성치와 알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섰다.
홀로 남은 당성치 또한 당나영이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부우- 부우-
품속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스마트폰을 꺼내자 화면에 셋째 여식의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른 당성치는 낮은 한숨으로 말을 시작했다.
“소영아, 너는 왜 전화를 꺼 놓는 것이냐?”
필요할 때 바로 연락이 닿지 않은 것을 나무라는 당성치의 말에 당소영은 의외의 답을 해왔다.
- 아빠, 찾았어요.
“찾다니? 뭐를 말이냐?”
- 그 사람이요, 당가의 은인.
“뭐야?!”
- 사진 보내 드릴게요. 확인해 보세요.
당소영의 말에 깜짝 놀라 서둘러 스마트폰 화면을 봤다.
당소영이 톡을 통해 보낸 사진은 자신의 셋째 딸과 나란히 웃으면서 찍은 남자들 몇 명의 사진이었다.
그중 한쪽 구석에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대한 당성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어디냐? 이분은 어디 있느냐?”
- 지금 가고 있으니 좀 이따가 봬요.
이리로 오고 있다는 말에 당성치는 전화를 종료하고 회의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를 맞이할 확실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 빠르게 움직이는 거였다.
* * *
시후는 세상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철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눈앞에는 태산과 인호가 앉아 있었는데 둘은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리고 있었다.
둘 사이에 앉아 있는 당소영을 향해서 말이다.
“샘~ 정말 집이 한국대 근처세요?”
“응~, 한국대 다닐 때 얻어 놓았던 자취방인데 아직 빼지를 못해서 당분간 거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
“와~ 그럼 샘 한국대생이신 거예요?”
“한국대생이라니 좀 달라 보이니?”
셋의 대화는 대부분이 당소영에 대한 거였다.
출신, 나이, 취미, 연애사까지.
대부분 관심이 없던 시후도 연애사 이야기가 나올 때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
“공부만 하느라 남자 만날 시간이 없어서 아직 모솔이야.”
“에이~ 거짓말, 샘 미모에 남자들이 가만히 두었다고요?”
아주 진부한 핑계였지만 어째서인지 남자가 없다는 말에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시후였다.
그런 시후를 보며 당소영이 물었다.
“시후는 선생님한테 궁금한 게 없나 봐?”
“…….”
방긋 웃으며 물어오는 당소영의 말에 시후는 오히려 입을 꾹 닫았다.
저 웃는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평소답지 않게 뭉클한 느낌까지 들었다.
애써 그 감정을 감추기 위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후가 아무 말이 없자 태산과 인호가 대신 변명을 했다.
“에이~ 시후가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큰 관심이 없어요.”
“맞아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저것도 변명이라고 하다니.
한 소리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이번 역은 한국대 입구, 한국대입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한국대입구역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시후는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커다란 물건을 잡아갔다.
“미안해, 시후야. 선생님이 그만 손을 다치는 바람에….”
당소영은 첼로 케이스를 잡아 내리는 시후를 보며 한껏 미안하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시후는 그 말에 물끄러미 붕대가 감겨 있는 당소영의 손을 바라봤다.
흰색 붕대에는 살짝 핏기가 내비치는 것이 상처가 벌어진 것 같았다.
“됐어요. 어차피 가는 길이었으니까요.”
“그래도…. 대신 선생님이 저녁은 맛있는 거 사줄게!”
심드렁한 시후의 대답에도 활기차게 대답하는 당소영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시후네가 당소영을 도와줄 생각은 아니었다.
시후가 하굣길에 홀로 어디를 좀 간다고 하자 태산과 인호가 같이 가자며 따라붙었다.
당가의 독이 걱정되었지만 둘이 비천잠행술로 은신해 버리면 아무리 당가의 고수들이라 해도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허락했다.
그렇게 셋이 학교를 나와 왕십리에 갔을 때였다.
역을 내려가는데 자신의 키만큼 커다란 첼로 케이스를 들고 낑낑거리는 당소영을 발견한 거였다.
그 모습에 태산과 인호가 먼저 다가갔다.
한걸음에 달려가 말을 걸었다가 붕대가 감겨 있는 당소영의 양손을 보고는 전후 사정을 듣게 되었다.
내일 수업에 쓰려고 첼로를 얻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만 다쳤다는 거였다.
간단하게 치료만 하고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전철을 탔는데 첼로가 무거워 이렇게 낑낑거리고 있었다는 거였다.
시후는 그런 당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태산과 인호가 도착지가 어디인지 물었고, 한국대 입구라는 말에 이렇게 동행하게 되었다.
어차피 목적지도 같으니 시후도 손을 내밀어 직접 첼로 케이스를 옮겨주고 있었다.
태산과 인호는 그런 수고를 하는 시후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음~음~ 봄바람 불어오면~ 흩날리는~ 꽃잎들이~!”
때아닌 노래를 흥얼거리는 태산을 보며 시후는 인상을 구겼다.
저 노래가 그냥 흥얼거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좀 닥치라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후를 보며 인호 또한, 합창하기 시작했다.
둘은 시후가 화를 낼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후다닥 앞서 달려갔다.
덕분에 시후와 당소영만이 나란히 걷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계단을 오르며 당소영은 시후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 미안함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런 당소영을 시후는 애써 외면하듯이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당소영이었다.
“시후는 오늘 여기에 약속이 있어서 온 거야?”
“뭐, 그렇죠.”
“여자 친구라도 만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여자는 만나게 되겠네요.”
“어머? 부럽다! 우리 시후 같은 멋진 남자를 만나는 여자는 누구일까?”
“글쎄요. 그게 부러워할 일이 될지는 가봐야 알겠죠.”
당소영의 물음에 시후는 애매모호한 대답만 했다.
그런 의미 없는 대화를 하며 계단 끝에 다다르자 당소영이 손가락을 들어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가 내가 사는 오피스텔이야, 이제부터는 내가 들고 갈게. 너희는 볼일 보고 이따가 저녁 시간에 다시 만날까?”
“네~”
태산과 인호는 당소영의 말에 한껏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면 시후는 앞으로 나서며 둘을 바라봤다.
“너희는 여기 있어. 이거만 입구까지 날라주고 올게.”
시후는 들고 있던 첼로를 들어 올리며 태산과 인호를 역 앞에 남게 했다.
그렇게 시후와 당소영이 오피스텔 입구에 다다르자 당소영이 첼로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이따가 오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뭐, 그러시든지요.”
“그래, 그럼 이따가 보자, 어멋?”
당소영은 시후에게 손 인사를 하기 위해 한쪽으로 첼로를 둘러업다가 무게를 못 이겨 비틀댔다.
그러자 시후가 한쪽 손을 뻗어 당소영을 부축했다.
순간 당소영은 시후의 품에 안기게 되자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입을 열었다.
“미, 미안…!”
그런데 순간 시후의 사늘한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목에 칼이라도 들어오는 것 같은 서늘한 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가의 산공독은 언제 맡아도 신선하구나?”
“……!”
당소영의 두 눈이 부릅떠지자 시후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다려라. 당가에 다녀올 테니.”
“뭐?”
“네가 약속대로 이곳에서 저녁을 사게끔 기다리란 말이다.”
시후는 너무 놀란 표정의 당소영을 품에서 놓아주며 피식 웃었다.
푹-
그러고는 지풍을 날려 오피스텔의 문을 열어주었다.
마치 너의 산공독은 내게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대신 말해주듯 무공을 사용한 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