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시후는 일요일을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인호의 말마따나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읽어서였다.
특별하게 무엇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인근 공원을 산책하거나 아버지가 해주시는 요리로 식사를 하거나 할 뿐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행복했다.
그사이 태산과 인호는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시후네 가족이 화목한 모습을 보고는 자기들도 엄마가 보고 싶다며 집으로 간 거였다.
아직은 17살의 나이인 둘의 심리상태를 고려하여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어 배웅해 주었다.
그렇게 일상적인 하루를 마감하던 저녁 시간 때에 시후의 집에 초청하지 않은 둘이 찾아왔다.
“아이고~! 이거 병원장님께서 초대를 다 해주시니 그냥 올 수 없어 작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초인종이 울려 아버지가 나가니 진지춘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저녁 식사에 진지춘을 초대한 것 같았다.
“아이고, 뭘 이런 거를 다 가져오십니까?”
“하, 하하, 이게 중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술입니다? 들어는 보셨을 겁니다, 양하주(洋河酒)라고.”
“이게 그 귀한 양하주라는 말씀입니까?!”
시후는 들어본 적도 없는 술이었지만 아버지의 반응으로 보아 상당히 유명한 술인 것 같았다.
“맞습니다, 하, 하하, 어느 시인이 ‘나는 새, 술 향기를 맡아 봉황으로 변하고, 물에 놀던 물고기, 술맛을 보니 용이 되어 승천하도다’라는 시를 남겼다는 그 명주입니다.”
시후는 진지춘의 말에 눈을 번쩍였다.
진지춘 또한 시후를 슬쩍 보고 있었는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윙크를 해왔다.
- 도련님 것은 제 집에 잘 모셔 놓았습니다.
진지춘의 전음에 시후는 씨익 웃었다.
최근 들어 가장 기특했다.
그래서 직접 거실로 안내까지 했다.
“이리 앉으세요, 진 의원님.”
“하, 하하, 감사합니다.”
꼭 명주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시후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진지춘이 들고 온 양하주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뒤따라 들어온 다른 한 명을 이제야 발견했다.
“제갈조민?”
“오빠, 안녕하세요.”
제갈조민은 자신을 이제야 발견한 시후 때문인지 한껏 뾰로통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 제갈조민의 손에도 무언가 들려 있었는데, 바로 냄비였다.
작은 두 손으로 들고 있기에는 좀 커 보이는 냄비였지만 무공을 익히고 있는 조민이었기에 전혀 무거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자세는 딱 ‘이게 너무 무거워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살짝 앞으로 구부정한 자세였다.
그 모습에 왜 저러나 싶을 때 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후야, 뭐 해? 연약한 소녀가 그리 무거운 거 들고 있으면 좀 들어줘야지?”
“네? 아…. 네.”
그제야 제갈조민이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눈치챘다.
16세 가녀린 소녀를 흉내 내고 있는 거였다.
시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냄비를 받아 들고는 물었다.
“이건 뭐야?”
“초대받은 집에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 해서 만들어 봤습니다.”
“만들어? 네가?”
조민의 대답에 시후는 슬쩍 냄비 뚜껑을 열어봤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갈비찜이 들어 있었다.
둘이 현관 앞에서 그러고 있자 어머니가 다가왔다.
“어머~ 이걸 직접 만들었어?”
“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조민의 모습에 시후는 또 한 번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면 꼬박꼬박 대꾸하던 조민의 이런 낯선 모습이라니.
그리고 어째서인지 조민과 어머니는 안면이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제갈조민을 초대한 것은 어머니 같았다.
그 후 식사 자리에서 알게 된 것은 아버지의 강인 병원과 제갈세가의 JK 제약회사가 협약하기로 했다는 거였다.
그 시발점은 제갈재민의 어머니로 인해 마냥 좋지는 않았지만, 제갈상민과 아버지는 그 일로 거래를 트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JK 제약회사에서 가끔 법률상담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법률사무소를 찾는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던 내내 시후는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지 않았냐는 눈빛으로 조민을 쳐다봤다.
조민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입술만 달싹이며 대답을 했다.
- 묻지 않으셨잖아요.
저 영악한 것.
16세 소녀의 모습에 시후조차 잠시 잊고 있었다.
제갈조민이 제갈세가에서 가장 추앙받는 차기 가주 후보라는 것을.
어느새 아버지와 진지춘은 거실로 나와 양하주를 따라서는 한잔 걸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후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가 침 흘리겠어요, 오빠.”
“쓰읍.”
조민의 말에 시후는 혹시나 해 입가를 훔치고는 눈을 흘겼다.
저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에게 이제는 들어야 할 것을 듣고는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당가에 대한 건?”
조민은 시후가 당가를 거론하자 의도를 파악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른 셋은 이미 거실에서 시끌벅적한 분위기였기에 주방에 있는 둘의 이야기가 들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에 조민이 세가에서 가지고 온 정보를 읊기 시작했다.
“먼저, 저희 세가와 당가는 선대 가주님때부터 알고 지내셨다고 하십니다.”
조민의 말대로 제갈세가와 당가는 선대 가주 때부터 연이 이어져 왔다.
중국을 떠나 한국에 자리를 잡는데 두 분이 힘을 합쳤었다고 했다.
제갈세가는 언제나 영특한 두뇌를 가지고 빠르게 한국의 정서를 파악했고, 당가는 본래 가지고 있던 약에 대한 지식을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개조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도와 터를 잡아가던 때에 뭣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사이가 틀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부터 이상하게 제갈세가는 제약회사를 바탕으로 사업을 진행했고, 당가는 교육 쪽에 힘을 실어 사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JK 제약회사와 한국대학교였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시후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JK 제약회사야 기업이야 그렇다 치지만 한국대학교는 국립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당가의 손에 들어간 거지?”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손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럼?”
“그저 주요 요직이 당가의 사람으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낮게는 청소부부터, 높게는 교수와 총장까지 당가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는 거였다.
결국 나랏돈을 이용하여 대학을 운영하는 것과 마찬가지처럼 들렸다.
그 후로 시후는 당가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조민에게서 들었다.
주요 요직에 있는 이들 중에 알아야 할 이들과 당가 가주에 대한 정보.
그리고 요즘의 정세에 대한 것들을 들었다.
“결국, 거기도 집안싸움 중이라는 거네?”
“아…. 네.”
집안싸움이라는 말에 조민은 제갈세가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당가는 차기 가주로 세 여식을 거론하고 있었다.
그 여식들이 권력 싸움에 권모술수까지 부리고 있는데, 당가는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 모든 게 가주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이라 생각하나 봅니다.”
“쯧, 그때나 이때나 녀석들은 똑같구나.”
시후는 천마 시절 당가를 떠올렸다.
그때도 당가 가주 늙은이와 친분을 맺은 것도 당가의 세력 싸움 때문이었다.
저잣거리에 놀러 나가 여인들과 즐겁게 지내던 때에 당가의 여식이 찝쩍거렸던 일이 있었다.
콧대 높은 줄 모르고 오만방자하던 녀석의 엉덩이를 후려쳐준 사건 때문에 당가를 한바탕 헤집어 놓았었다.
덕분에 분열되어 있던 당가는 하나로 합쳐졌고 결국 천마에게 엉덩이를 맞았던 여식이 차세대 가주로 추앙받았다.
당가는 특이하게 데릴사위를 맞이하여 가주의 자리에 앉혔었기에 결국 그 여식의 남편이 다음 가주가 되었을 거였다.
소림에서 무림 정복의 걸음을 멈춘 천마였기에 그 뒷이야기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여식의 당찬 모습은 천마도 혀를 내둘렀던 터라 당가를 크게 키웠을 터였다.
그렇게 당가에 대한 생각을 하던 때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후야, 아버지 좀 침실로 모셔다드리겠니?”
“네?”
어머니의 부름에 거실로 나가 보니 아버지 강인이 거나하게 취해 헤헤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미 진지춘이 가지고 온 양하주는 텅텅 빈 상태였다.
술자리를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술을 다 마신 것 같았다.
“무슨 술을 이리 급하게 드셨대요?”
“양하주가 워낙 달콤하고 부드럽고 연하면서도 맑고 산뜻하여 그만 멈추지를 못했습니다. 헤헤.”
걱정이 담긴 시후의 말에 진지춘이 제 발이 저린 것인지 바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강인의 건강을 우려하는 시후의 말에 괜히 불똥이 튈까 미리 말로 방어를 하는 거였다.
하지만 시후의 귀에는 그저 그런 양하주가 자신의 집에 있으니 이번에는 나무라지 말아 달라는 말로 들렸다.
- 양하주에 그런 다섯 가지 특색이 없다면 네 몸에서 다섯 가지 특별함을 찾을 것이야.
시후는 전음으로 두고 보자는 말을 남겼다.
진지춘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한번 양하주의 여운을 느껴봤다.
진짜 달콤하고 부드럽고 연하고 맑으며 산뜻한지 확인하는 거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시후는 눈치를 슬슬 보는 진지춘에게 눈을 흘긴 후 아버지 강인을 침실로 옮겼다.
어머니 윤여정은 익숙한 손길로 강인의 옷을 벗기고는 잠옷으로 갈아 입혔다.
“시후야, 아버지는 엄마가 챙길 테니 손님들 좀 대접하겠니?”
“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어도 녀석들에게 손님 대접은 제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시후가 홀로 거실로 돌아오자 진지춘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됐다, 편히 쉬어라.”
“헤헤, 감사합니다.”
시후의 쉬라는 말에 진지춘은 그제야 허리에 힘을 뺐다.
그런 진지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후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너도 Safety World 하냐?”
“그 가상현실 게임이요? 당연하죠, 제가 또 거기서 한 레벨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 레벨이 얼마인데?”
“크~! 이거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제가 자그마치 Lv. 298입니다.”
“……!”
생각보다 높은 레벨에 살짝 놀랐다.
진지춘은 시후가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들뜨며 입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높지요? 제가 현실에서야 흰머리 희끗희끗한 할아버지지만 그곳에서는 아닙니다, 제법 현질 좀 했습죠.”
현질까지 했다는 말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해 주었다.
그러자 더욱 신이 나서 말하는 진지춘이었다.
“언제 한번 제가 버스 태워 드릴 갑쇼? 말씀만 하시면 제가…….”
신나게 떠들어대던 진지춘은 조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말끝을 흐렸다.
어째서인지 조민이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그 순간, 진지춘은 자신이 너무 들떠 범의 아가리 안에서 재주를 피운 꼴을 자각했다.
시후의 앞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그의 표정을 관찰했어야 했다.
고개를 슬쩍 돌려 시후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명단 하나를 던져 주고는 소명단을 만들라는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했을 때의 표정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진지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잘됐네. 너 잠깐 나랑 Safety World에 좀 들어가자.”
“네? 네?!!”
진지춘은 알 수 없는 기에 눌려 일어나려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지춘에게 기운을 흘린 거였다.
천마 시절 2할의 내공을 회복하자, 별다른 행동 없이도 기를 다스릴 수가 있게 되었다.
그 모습에 조민은 눈을 번뜩였다.
어제만 해도 의념기(疑念氣)를 사용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저렇게 자연스럽게 의념기를 펼치다니.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격하게 들었다.
“저도! 저도 같이 들어가요.”
“그럴래? 그럼 우리 집에서 접속하자. 따라와.”
그렇게 시후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시무룩한 모습의 진지춘을 끌고 조민과 함께 캡슐 방으로 향했다.
시후는 아직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캡슐을 둘에게 넘겨주고는 본인의 캡슐로 Safety World에 접속했다.
셋이 만나기로 한 장소는 한스텔 마을 퀘스트 여관 앞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