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시후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진지춘의 집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집이 보였다.
안쪽이 상당히 소란스러운 것이 무엇을 들여놓는 것 같았다.
“마침 비어 있던 집이라 저희 세가에서 물건들을 빨리 옮겼습니다.”
“옮겨? 새로 산 게 아니고?”
“네, 진지춘 어르신께서 평소 쓰시던 것들을 쓰고 싶다고 하셔서….”
“쯧, 별것도 아닌 놈이 여럿 귀찮게 하는구나.”
진지춘 보고 별것 아닌 놈이라 칭하자 조민은 대꾸할 수 없었다.
시후가 생각하는 진지춘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갈세가에게 진지춘은 상당한 손님이었다.
주화입마에 빠진 제갈신길을 치료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진지춘이 놀고먹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세가 식솔들이 연공 중에 다치게 되면 상처도 돌봐주었고, 약선방의 지식을 공유해 주었다.
그동안 약초만 쌓아 두고 있던 약방에서 진지춘이 만든 약이 한둘이 아녔다.
제갈세가는 그것을 J.K제약회사로 가져가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쳐 임상시험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시판으로 여러 가지 약품들을 판매할 것이고, J.K제약회사는 또다시 성장할 거였다.
거기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제갈세가 또한 넉넉한 재정 상태를 확보하며 이번에 생긴 상처를 치료할 것이다.
굳이 그것까지는 시후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조민은 입을 다문 거였다.
그사이 진지춘의 집으로 들어간 시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배치까지 약방과 비슷하게 꾸몄구나?”
“어? 도련님, 오셨습니까?”
일꾼들에게 물건 배치를 지시하던 진지춘은 시후를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왔다.
시후는 자신을 반기는 진지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련님이라는 말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이미 그렇게 부르기를 허락했으니 무를 수는 없었다.
다만 저 먹이를 갈구하는 새끼 새의 표정은 재수가 없어 지적해야 했다.
“너, 표정 바꿔라!”
“네? 아! 하, 하하! 도련님께서 주실 것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그만…! 하, 하하!!”
겉으로는 너스레를 떠는 듯했지만 속내는 어서 가르쳐 줄 것들을 가르쳐 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시후는 품속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저게 신명단 제조법!?!’
진지춘은 그 봉투가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꼬리라도 있었으면 격렬하게 흔들었을 것 같은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시후는 진지춘의 손에 봉투를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신명단 제조법이다. 이것만 있다면 네가 만든 그것을 더욱 보완하여 더 만들 수 있겠지?”
“아유~ 이를 말씀입니까? 이것만 있다면 제가 만든…. 네?”
진지춘은 봉투를 열다가 시후가 한 말을 되새기고는 멈췄다.
어째 이번에 만든 단약을 보완하여 대량 생산하라는 말처럼 들린 거였다.
탁-
“왜? 싫으냐?”
진지춘이 망설이는 순간, 시후가 봉투를 낚아챘다.
진지춘은 그토록 원하던 신명단 제조법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순간 멍해졌다.
자신이 어찌 반응해 볼 수 있는 손놀림이 아니었다.
‘쳇, 저 고등학생같이 어린 외모 때문에 매번 깜빡한단 말이야.’
곱상한 시후의 외모 때문에 간간이 절대 고수라는 사실을 깜빡하는 자신을 질책했다.
시후의 말대로 이번에 만든 단약을 대량 생산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작업.
한마디로 귀.찮.은.일.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듭니다. 이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팔, 다리 안 쑤시는 곳이 없어 환을 빚는 것도 힘이 듭니다. 제가, 이 신명단의 재료를 구해서…. 도련님?”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던 진지춘은 심드렁한 시후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시후는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진지춘을 오뉴월에 개 패듯 패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기서 다그쳤다가는 단약을 만드는 시간만 잡아먹을 것 같아 진지춘이 말한 고충을 없애 주기로 했다.
물론, 그것들을 자신이 직접 할 필요는 없었기에 고개를 돌려 조민을 바라봤다.
조민은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 해결 방안을 모색해 놓은 상태였다.
“저희 세가에서 진지춘 어르신을 보필할 이들을 보내겠습니다.”
“그게 좋겠구나. 돌팔아? 그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너는 따로 준비 좀 해라.”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신명단 제조법을 넘겨주었다.
진지춘은 또다시 빼앗길세라 잽싸게 봉투를 품속에 넣었다.
“준비라니요?”
“네 침술이 제법이더구나?”
“아~참! 우리 도련님, 그걸 또 기억하셨구나? 제가 그때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 본래 실력은 더 훌륭합니다.”
침술에 대해서 칭찬을 하자 진지춘은 바로 어깨를 으쓱이며 득의양양했다.
일전에 시후가 테스트랍시고 몸에 마비를 걸었던 일을 되새겼다.
시후 또한 생각보다 마비를 푸는 시간이 짧았기에 실력 하나는 인정했다.
이제 그 실력을 쓸 생각에 말을 꺼낸 거였다.
앞으로 태산과 인호가 종종 다치는 일이 생길 테니 말이다.
“아, 그전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네? 무슨 문제요? 설마, 제 실력에요?”
“음…. 어찌 보면 네 실력이지? 네 내공이 고작 이 갑자뿐이니 말이다?”
“헙!”
진지춘은 자신이 품은 내공의 크기를 정확히 말하자 깜짝 놀랐다.
진지춘에게 내공이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일 갑자에 달하는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진지춘은 하다못해 약선방에까지 자신의 내공을 거짓으로 알렸다.
정말 필요시에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지키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맥을 짚어도 알 수 없는 그 정도를 시후가 간파하자 놀란 거였다.
그렇게 놀라는 진지춘을 보며 시후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네가 치료할 이들은 내공이 중후한 아이들이다. 그런데 네 내공이 부족하여 시침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지 않겠냐?”
“그 정도라는 말입니까?”
진지춘이 가진 이 갑자에 내공으로도 시침하지 못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뜻했다.
시침자의 내공에 상응하는 내공을 가졌거나, 질적으로 다른 내공을 가졌거나.
부상을 치료 중에 저도 모르게 반탄력이 발하여 침을 밀어내는 상황을 우려하는 시후의 말에 진지춘은 호기심이 일었다.
제갈신길의 경우만 해도 내공이 삼 갑자에 달했다.
그 정도의 환자도 자신의 시침을 밀어내지 못했는데 시후가 말하는 것으로 보면 그보다 더하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뭐, 아직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거라는 거지.”
“그게 뭡니까?”
아직은 아니라는 시후의 말에 진지춘은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앞으로 3년 안에 태산과 인호를 현재 자신의 경지까지는 이루게 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그때 가서 치료할 수 있느니 없느니 떠들어 봐야 늦기에 지금부터 진지춘의 내공을 증진시킬 생각을 하는 거였다.
“여하튼, 너도 앞으로 내공을 증진해야 하니 그리 알고 그… 단약.”
“소명단(小命丹)입니다.”
“그래, 소명단을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해라.”
진지춘은 시후의 말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민에게 이것저것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약재들이며 의원들의 적절한 실력을 포함한 인원까지 전달해 주었다.
조민은 진지춘의 말이 끝나자 스마트폰을 들어 세가로 연락했다.
아마 몇 시간 후면 진지춘이 원하는 인력과 자재와 약재들이 올 거였다.
이 모든 것이 시후와 진지춘을 가까이하기 위한 제갈세가의 투자임을 알기에 시후는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되는대로 제갈신길을 찾아가 공부를 도와주는 것으로 퉁칠 생각이었다.
대충 이곳의 일이 마무리되는 것을 확인한 시후는 진지춘의 집을 나섰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Safety World에 접속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진지춘의 집을 나서는데 여전히 조민이 뒤따랐다.
“넌 왜 나오냐?”
“저도 집에 가려고 그럽니다.”
자신을 따라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순간 멋쩍어 등을 홱 돌리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서둘러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최상층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그런데 뒤따라 탄 조민이 로비인 지하층 버튼이 아닌 최상층 버튼 바로 아래 버튼을 누르는 거였다.
“너 집에 간다며?”
“네, 집에 가는 겁니다. 저도 오늘부터 여기에 입주했습니다.”
“뭔 소리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당연하게 내리는 조민을 보며 시후도 뒤따라 내렸다.
그러자 방금 진지춘의 집에서와 같이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집이 보였다.
똑같이 어수선한 소리에 조민과 함께 걸어가 보니 창문을 통해 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진지춘과 동시에 진행했는지 이미 짐은 거의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허…. 진지춘은 그렇다 치지만 네가 왜?”
이제 겨우 16살인 여자아이가 혼자서 이런 집에 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시후의 질문에 조민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세가에서 시후 오빠의 일은 엄청 중요한 사안이기에 제가 직접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관리?”
누가 누구를 관리한단 말인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길게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속이야 어떻지만 시후 본인은 고등학생 1학년이었다.
학교에 있는 동안은 어쩌려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따지듯이 묻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기 싫어졌다.
더 물어봐야 괜히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날 것 같아서였다.
“됐다, 네 마음대로 해라. 단! 방해하면 알지?”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빠에게 방해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됐어. 어? 저거 캡슐이냐?”
손사래를 치며 집을 나서려는데 사다리차에 실려 들어오는 캡슐을 발견했다.
한눈에 Safety World에 접속하는 캡슐을 알아본 것은 시후네 집 캡슐 방에 있는 것과 같은 기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시후가 캡슐을 알아보자 조민은 방긋 웃었다.
“저도 Safety World 합니다.”
“그래? 몇 렙이냐?”
중학생 주제에 레벨을 올려봐야 얼마나 올렸겠느냐마는 일단 물어는 봤다.
혹시나 게임하는 도중에 마주치게 된다면 인사라도 해줘야지, 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내뱉는 말은 그런 마음을 싹 잊게 해주었다.
“Lv. 210입니다.”
“……! 몇?!”
무슨 중학생이 게임을 얼마나 했길래 Lv. 210이라는 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시후가 열심히 레벨업을 하여 이제 겨우 Lv. 170인데 말이다.
혹여나 학업은 뒤로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며 올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했길래 그렇게 올린 거야?”
“시작한 지는 두 달? 폭렙한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겨우 Lv. 130이었습니다.”
“…너 아이디가 뭐냐?”
시후에게 Safety World의 레벨업은 현실에서의 내공 증진과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단시간에 그만한 레벨업을 한 것인지 궁금했다.
조금 똘똘한 중학생이라 생각했던 조민의 가치가 커지는 순간이었다.
시후는 어서 아이디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 친구 추가를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벌어질 한스텔 마을과 오크와의 전쟁에 조민도 참전시킬 생각을 했다.
시후가 살짝 들뜬 모습을 보이자 조민도 덩달아 들뜨며 입을 열었다.
“냉혈 미녀 유라입니다.”
“누구?”
조민의 입에서 ‘냉혈미녀 유라’라는 아이디가 나오자 시후는 바로 케냔 협곡을 떠올렸다.
타란을 만나러 갔을 때 수호자 어쩌고저쩌고하며 타란을 지키고 있던 유저의 이름이 분명 유라였다.
그리고 로그아웃하려는 유라를 이형환위를 펼쳐 등 뒤로 이동하고는 단칼에 목을 날려버린 게 떠올랐다.
시후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조민의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분명 Lv. 100대 초반이었는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Lv. 210라니, 확실히 조민에게 폭렙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게임상이라지만 자기 목을 날려 버린 녀석에게 그런 정보를 알려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이야기 꺼냈다가 매몰차게 거절을 당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조민이 입을 열었다.
“무슨 걱정 하시는지 알겠지만, 저도 오크 부족장 퀘스트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너 내가 누군지 아는 거냐?”
지금 현실이 아닌 게임상에서 자신을 아느냐고 묻는 시후에 조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라고 묻는 시후의 표정에 조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빠를 몰랐으면 모를까, Safety World 아이디가 ‘See 후’면 간단하게 알아봅니다.”
사실 케냔 협곡에서 시후에게 목이 잘려 죽어 로그아웃되었을 때만 해도 분을 삭이지 못했었다.
그래서 복수를 다짐하며 레벨 업에 박차를 가했었다.
그런데 세가를 찾아온 시후의 이름을 제갈상민에게 듣고는 의혹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그 의혹이 확신이 되는 순간 복수 따위는 잊어버렸다.
‘괜히 Safety World에서 복수다 뭐다 해서 오빠 심기라도 건드렸다가는 세가에 무슨 화가 닥칠지 모르니까.’
자신의 실수로 세가에 폐를 끼칠지 모른다는 걱정에 Safety World에서도 시후를 전폭 지원할 계획이었다.
조민의 말에 시후는 목을 긁적거리며 멋쩍어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잘되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똑똑한 제갈조민이 Safety World에서 조력자가 된다면 레벨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거였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제갈세가를 도와주면 될 일이었으니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좋아, 그럼 접속해서 친추 보내마.”
“네, 저도 로그인하는 대로 메시지 보내겠습니다.”
“그래.”
시후는 Safety World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조민의 집을 나서려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조민에게 물어갔다.
“그런데 게임상에서의 너는 좀 더 뭔가 성숙해 보였는데…. 과금한 거냐?”
“오빠!!”
“짜식. 발끈하기는. 간다.”
그 말에 지금까지 침착한 모습을 보이던 조민이 얼굴을 붉히며 발끈했다.
시후는 그제야 조민이 제 나이로 보이는 것 같아 피식 웃고는 집으로 향했다.
그런 시후의 뒷모습을 조민은 날카롭게 쏘아봤다.
시후가 사라지자 자기 몸 이곳저곳을 만지며 투덜거렸다.
“흥, 두고 봐요. 3년 후면 오빠도 깜짝 놀랄 테니까.”
무언가 미래 지향적인 악담을 하는 조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