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시후는 병실 문을 열며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제니를 불렀다.
“제니야, 오빠 왔다.”
“시후 오빠~!”
시후가 병실로 들어오자 제니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허리에 태클을 걸듯 덮쳐오는 제니의 모습에 시후는 내공을 살짝 일으켜 품에 안았다.
혹여 제니가 다칠까 싶어서였다.
이럴 때마다 시후는 천마 시절과는 많이 달라진 자신을 느꼈다.
그때는 가만히 있어도 살기가 일어나서인지 어린아이들은 근처에도 오지 않았었다.
혹여나 근처에 왔다고 하면 대부분 천마의 목숨을 노리는 살수들이었다.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어린아이들의 목숨까지 빼앗아야 했던 그때와는 너무 다른 지금이었다.
지금도 시후는 강인과 진지춘을 대신해 제니를 맡았다.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진지춘이 한의학 치료를 할 수 있기에 제니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거였다.
다행히 제니의 어머니는 강인병원의 의사들을 신뢰했고, 그중에서도 강인을 가장 신뢰했다.
덕분에 강인이 제니에게 앞으로의 치료 계획을 설명할 수 있었다.
제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설명을 듣고는 시후를 바라봤다.
“오빠가 모시고 온 분이니까 오빠가 보증하는 거지?”
“응? 무슨 소리야?”
“아까 로비에서 오빠랑 저 할아버지랑 같이 있었잖아.”
13살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움이었다.
어차피 진지춘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제니의 많은 협조가 필요했기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 제니도 할아버지 말 잘 듣고 치료받아야 한다?”
“알았어! 오빠가 데리고 오신 분이면 믿을 만하겠네!”
당찬 제니의 말에 병실에 있는 사람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제니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진지춘은 시후를 힐끗거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천음절맥의 맥을 직접 짚어 보겠다는 허락을 받으려는 거였다.
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물러서나 진지춘이 제니에게 다가갔다.
“제니라고 했니? 이 할아버지가 진맥 좀 해봐도 될까?”
“오빠를 봐서 특별히 허락하는 거니까, 아시죠?”
“응? 뭐를?”
“제가 아무리 이쁘고 귀여워도 저한테 빠지시면 안 된다는 거요.”
“하, 하하, 알았다, 알았어, 그럼.”
제니의 농담으로 긴장을 푼 진지춘은 제니의 손목을 두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진맥을 하기 시작했다.
손끝을 타고 들어오는 맥의 흐름을 최대한 느끼기 위해 평소답지 않게 집중했다.
‘이게! 천음절맥이구나!’
손끝을 타고 느껴지는 차가운 음기와 함께 불규칙하게 뛰는 특이한 맥이 느껴졌다.
아마도 약선방에서 천음절맥을 느낀 의원은 자신뿐일 거였다.
진지춘은 살짝 들뜬 표정으로 제니의 손을 놓고는 시후를 바라봤다.
‘이제 준비가 끝났군.’
시후는 드디어 제니를 치료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시후 혼자서 제니를 치료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천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반골세수(返骨洗髓)를 해야 했는데.
뼈를 깎는 것이야 시후가 직접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하면 되었다.
하지만 골수를 바꾸기 위해서는 신명단과 같은 영약을 먹인 후 운기를 도와야 했다.
밤에 몰래 찾아와 신명단을 먹인 후 운기를 도울까 생각도 했지만, 생각보다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제니를 납치해서 치료하지 않는 한 남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기에 생각해 낸 것이 진지춘이었다.
앞으로 진지춘이 제니를 침구실(鍼灸室)로 데려오면 시후가 운기를 도울 거였다.
제니에 대한 일은 이제 마무리가 되어가니 오늘의 메인 이벤트를 할 차례였다.
- 대충 안면은 텄으니 조민을 따라 거처를 마련하고 기다려라.
시후의 전음에 진지춘은 흠칫 놀랐다.
대체 내공이 얼마이기에 전음(傳音)까지 사용하는지.
알면 알수록 놀라는 일들만 보여주는 시후에 진지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는 조민에게도 같은 내용으로 전음을 보내고는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아버지,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가려고? 아빠가 태워다 줄까?”
“아니에요, 가다가 잠깐 들를 곳도 있고 해서 혼자 가도 돼요.”
시후의 말에 강인은 엄청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도 느낀 것이었지만 강인은 아들 바보가 확실했다.
시후와 잠시라도 함께하고 싶어 하는 강인의 모습에 시후가 달랬다.
“그럼, 저녁에 봬요. 오늘은 돌아오시면 같이 Safety World에도 접속하고요.”
“그럴까? 간만에 아들이랑 게임 좀 해볼까?”
게임을 하자는 시후의 말에 강인은 아쉬움을 지울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시간 후로는 퇴근할 시간만을 기다릴 거였다.
한편 시후가 Safety World를 거론하자 조민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시후는 조민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하며 제니의 병실을 빠져나왔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어서였다.
시후가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이유는 바로 제갈세가가 닦다 만 똥을 치우기 위해서였다.
병원 앞에 대기 중인 택시를 잡아타고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인천공항이요.”
“요금이 좀 나오는데 괜찮겠어?”
“빨리 가시면 두 배 드리죠.”
택시기사는 시후의 딜에 어깨를 풀더니 액셀을 꾸욱 밟았다.
덕분에 시후는 공항까지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카드로 택시비를 지불한 시후는 공항 안으로 들어와 탑승 현황을 알리는 전광판을 확인했다.
“상하이행이라 했는데…. 저거군.”
조민이 알려준 비행기 시간을 확인하고는 탑승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게이트가 가까워질수록 붐비는 인파에 시후는 기감을 펼쳤다.
인천공항이 넓다고 하지만, 한쪽으로 기감을 펼치자 곧 원하는 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곳은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행 비행기의 탑승객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꽤 많은 사람이 있어 누군가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시후는 달랐다.
이미 읽어둔 기의 주인을 찾아 곧장 걸어갔다.
게이트 앞 한쪽 공간을 차지한 무리 앞에 당도한 시후는 낮은 어조로 물었다.
“너희들이 전부인 거냐?”
“강시후?!”
시후의 목소리에 그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는 제갈재민이었다.
시후가 병원에서의 일을 마치는 대로 공항을 찾은 것은 제갈재민네를 보기 위함이었다.
정확히는 제갈세가를 무너트리려던 원후가와 관련된 이들이었다.
낮게는 주방에서 일하는 주방보조부터 높게는 세가의 주요 인사까지 있었다.
제갈신길은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빠지면 세가를 운영하는 데 있어 힘에 부칠 수 있었지만, 단호하게 원후가와 관련된 모두를 추방했다.
섭혼술에 당해 뜻하지 않게 세가에 막대한 피해를 줄 뻔한 제갈상민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 외에는 예외 없이 제갈상민의 아내와 자식까지 모두 추방했다.
시후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오늘 등교 후에 제갈재민이 전학을 간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이유가 어떻든. 뜻하지 않았든. 자신에게 칼을 겨눈 이들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그들이 일반인이 아닌 무림인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시후를 알아본 제갈재민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침을 꼴깍 삼키며 앞으로 나섰다.
자신을 보호해줄 어른들이 있다는 생각에 만용을 부리는 거였다.
교실에서 똥을 싸지른 이후로 시후네 반 근처에도 오지 않던 제갈재민이 이죽거리며 앞으로 나오자 시후는 눈에 힘을 주며 살기(殺氣)를 뿜어냈다.
“커헉!”
“뭐, 뭔!!”
시후의 살기는 순식간에 제갈재민을 포함해 주변에 있는 무림인들에게 퍼져 나갔다.
제갈재민처럼 내공이 약한 이들은 순식간에 숨이 막혀 정신을 잃었다.
어느 정도 내공이 있는 이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후를 노려봤다.
제갈재민의 엄마, 원후태령처럼 말이다.
시후는 자신과 안면이 있는 태령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시후의 살기는 더욱 진해졌다.
극한까지 내공을 끌어올려 버티던 이들도 슬슬 한계인지 코피를 흘렸다.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이들을 지나 태령 앞에 당도한 시후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죽고 싶나?”
그 말에 태령은 등골이 오싹했다.
평소 자기 아들과 동갑인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치며 따귀를 후려갈겼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생전 느껴보지 못한 살기에 짓눌리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태령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선을 다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젓고 있는 고개가 몸에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럼 그 목 위에 있는 달린 것을 유지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으나 시후는 굳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들으라는 의도였다.
이들 모두가 제갈세가에서 있던 자들이라 똑똑하지 않은 자들이 없었다.
시후는 이런 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태령의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을 뺏어, 자기 번호에 한번 전화하고는 돌려주었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고 싶다면 재깍재깍 받아라. 조만간 찾아갈 테니.”
시후의 말에 모두가 최선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장 이들을 찾아갈 계획은 없었다.
좀 더 내공을 회복한 후에 이들이 필요해질 때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 놓음으로써 이들은 앞으로 두려움에 떨며 시후를 떠올릴 거였다.
천마 시절에도 이런 방법으로 귀찮은 일을 미연에 방지했다.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뇌리 깊은 곳에 심어두는 거였다.
그때 저 멀리서 공항 경찰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몇몇이 기절하고 피를 흘리자 놀란 이들이 신고한 모양이었다.
시후는 검지와 중지를 세워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가 손목을 돌려 태령을 가리켰다.
앞으로 지켜보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뿜어내던 살기를 거두었다.
“커허억, 허억, 허억!”
시후의 살기가 걷히자 여기저기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공항 경찰이 지척까지 가까워져 오자 시후는 태령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태령은 비틀대는 몸으로 품속에서 서류를 꺼내 공항 경찰에게 내밀었다.
그것이 무슨 서류인지는 관심이 없었지만, 서류를 확인한 공항 경찰들은 태령에게 경례를 하고는 돌아갔다.
경찰이 돌아가자 시후는 주위를 한번 스윽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경고는 한 번뿐. 다음은… 알지?”
시후의 뒷말은 듣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들었다.
사색이 된 얼굴들을 보며 시후는 손을 흔들어주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아마도 당분간 원후가 사람들은 한국에 발을 들이지 않을 거였다.
그들도 무림인이니 시후의 무위가 자신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있음을 느꼈으니 말이다.
그렇게 원후가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공항을 빠져나온 시후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크~ 내가 생각해도 많이 유해졌어. 예전 같았으면 단전을 모두 부숴버리고 돌려보냈을 텐데.”
천마 시절과는 다르게 아량을 베푼 자신을 스스로 칭찬했다.
사람으로서 살려준 것뿐만 아니라 무림인으로서도 살려주었으니 말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택시를 찾던 시후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오빠!”
“조민?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돌팔이는 어쩌고?”
제갈조민은 시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분명 조민에게는 진지춘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라 일러놨었다.
그런데 이곳에 나타나자 어찌 된 건가 싶었다.
“집을 구한다는 사정을 들으신 오빠 아버님께서 해결해 주셨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오빠네 집 아파트에 때마침 빈집이 있다고 하시던데요?”
그 말은 시후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지만 모른다고 하기에는 이상하다는 꼬투리를 잡힐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조민은 아무 의심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남는 집이 있다고 하시며 집 하나를 계약해 주셨습니다. 물론, 진지춘 어르신은 못마땅해하셨지만요.”
“크큭, 볼만했겠는데?”
시후는 진지춘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이 됐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진지춘을 활용할 방도가 상당히 많아졌다.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된다면 어느 때고 찾아갈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태산과 인호에 대한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럼, 집으로 돌아가 볼까?”
“네, 오빠!”
시후의 말에 조민은 방긋 웃으며 같이 택시에 올랐다.
그리고 시후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 하나로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에 혼자 들뜨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