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그인하는 천마님-45화 (45/275)

제45화

시후는 오랜만에 아버지의 병원을 찾았다.

물론, 천음절맥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제니를 위해 늦은 밤 아무도 모르게 찾은 일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제니의 심장에 내공으로 막을 씌워 놓고 돌아갔었다.

그것을 빼놓고는 퇴원을 한 이후로 이렇게 병원을 찾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저, 여기는 무슨 일로….”

시후를 따라 병원 입구에 선 진지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천음절맥을 보여준다고 해놓고서는 일반 병원에 자신을 데려오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천음절맥이 여기서 치료를 받고 있거든.”

“네? 여기서요? 아니, 그건 현대 의학이 손을 댈 수 있는 게 아닌데요?”

천음절맥은 음기가 강해 죽어가는 병으로 현대 의학의 영역이 아니었다.

인체 해부도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 현대 의학은 음기와 관련된 천음절맥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현대 의학에서 처방이라고 내려 봐야 결국에는 이식 수술을 권할 뿐일 텐데, 천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천음절맥에 그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절대 이런 곳에 두면 안 됩니다! 만약 돌팔이들이 배라도 가르는 날이면!”

가장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진지춘이었다.

그런 진지춘을 보며 시후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알아. 그리고 여기 내 아버지 병원이다. 소란이라도 피우면 알지?”

“아…. 네….”

진지춘은 한껏 병원 욕을 하려다 시후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중요한 말은 가장 먼저 했어야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그런 진지춘에게 시후는 몇 가지 당부를 더 했다.

아버지를 만나면 이 병원에 침구사(鍼灸司)로 취직하라고 했다.

그래야 천음절맥을 치료할 수 있다고.

진지춘은 느닷없이 침구사로 취직을 해야 한다는 것에 못마땅한 눈치였다.

“싫어?”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요. 제가 중국에서야 의원 면허가 있지 여기 한국에서는 의원 면허가 없습니다.”

침구사를 하려고 해도 면허가 없어서 못 할 거라는 말이었다.

시후 역시 면허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난감했다.

“으흠…. 그걸 어쩐다….”

그런 시후의 반응에 내심 쾌재를 부르던 진지춘의 귀에 쓸데없는 말이 들렸다.

“진지춘 어르신은 저희 세가로 모실 때 이미 국제 면허를 발급받으신 상태이십니다.”

“내가? 언제?!”

국제 면허라는 말에 진지춘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러자 똘망똘망한 눈을 껌뻑이며 제갈조민이 입을 열었다.

“진지춘 어르신께서 그런 거 귀찮아하실 것 같아 저희가 대신해 두었습니다.”

“오호~ 그랬어?”

“굳이…. 그걸…. 왜….”

시후는 문제로 거론되던 면허가 해결되자 기분이 좋았다.

반면 진지춘은 인상을 확 구기고 있었다.

‘쟤는 왜 따라와서 훼방이야!’

진지춘은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대는 제갈조민에게 눈을 부라렸다.

시후는 진지춘이 그러거나 말거나 기특한 일을 한 제갈조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갈조민은 시후가 손을 뻗어오자 움찔할 법도 한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손을 받아들였다.

시후의 손길을 느끼며 제갈조민은 가주의 명을 떠올렸다.

- 앞으로 네가 시후 님을 보필해야 한다.

제갈신길의 그 말에 시후는 어린 여아(女兒)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했었다.

하지만 제갈신길은 제갈조민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명석함으로 이미 세가의 일을 돕고 있기에 꼭 도움이 될 거라고 하여 데리고 온 거였다.

덕분에 난관에 봉착할 뻔한 일을 쉽게 타파하자 시후는 제갈조민의 동행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

그래서 조민의 입지를 다져주기로 했다.

“지금부터 조민은 나를 편하게 대해라.”

“편하게… 말입니까?”

“그래. 그래야 앞으로도 나를 따를 거 아니냐?”

“아!”

역시나 영특한 조민은 시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가주님조차 존대하는 분과 가깝게 지낸다? 세가에서 내 입지는 빠르게 높아질 거야.’

발돋움하기 위해 웅크린 제갈세가에서 어쩌면 훗날 차기 가주 후보가 될 수도 있었다.

빠르게 계산을 끝낸 조민은 눈을 번뜩였다.

“그럼, 시후 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우선 그 호칭부터 바꿔라, 조금 있으면 아버지를 뵐 텐데 ‘시후 님’은 좀 그렇지 않냐?”

“그럼… 어르신?”

“내가 너랑 몇 살 차이 난다고 어르신이냐?!”

“오라버니?”

“지금이 조선 시대냐?”

“그럼, 부득이하게 오빠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래라.”

시후는 결의에 찬 눈빛을 보내는 조민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때 옆에 있던 진지춘이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저는요?”

“너? 너 뭐?”

“저는 뭐라고 부르면 되냐고요.”

“그런 것까지 내가 알려주랴?”

내심 조민과 시후가 가까워진 것을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진지춘이었다.

자신도 시후를 부를 호칭을 정해 달라고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시후의 냉대뿐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삐쭉 내밀며 구시렁거렸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의 등을 툭 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자.”

“네….”

시후의 들어가자는 말에 진지춘은 투덜대면서도 뒤를 따랐다.

그런데 병원에 들어서자 진지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병원이라는 곳은 심신이 아픈 환자들이 찾는 곳이기에 어디를 가나 어두운 분위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병원은 로비에서부터 환자와 간호사들이 서로 정답게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환자들끼리 서로를 도우며 즐거워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도련님, 참으로 밝은 분위기의 병원입니다?”

“그렇지? 아버지의 병원 운영 방침이라고 하시더라고. ‘병원에서는 몸만 아프자’라나? 그보다, 도련님?”

“알아서 부르라면서요?”

마음대로 부르라고 해서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진지춘을 보며 시후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내 삼켰다.

여기서 말이 길어져 봐야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로비를 쩌렁쩌렁하게 올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후 오빠~!!”

고개를 돌리니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오는 제니가 보였다.

시후는 달려오던 제니가 폴짝 뛰어오르자 두 손으로 받아 들며 번쩍 안아 들었다.

천음절맥으로 인해 몸에 기력이 없던 제니가 시후 덕분에 이렇게 뛰어다닐 수 있게 된 거였다.

13살에 어울리는 한껏 귀여운 모습의 제니를 보며 시후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오빠 왔다~! 우리 제니 많이 건강해졌네?”

“그럼~! 오빠랑 같이 놀려면 건강해져야 한다고 해서 제니가 얼마나 노력 중인데?”

제니는 운동을 위해 정원에서 산책하고 병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로비에서 시후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달려온 거였다.

예전에는 조금만 뛰어도 쓰러지기 일쑤였는데 어느 때부턴가 이 정도 뛰는 것은 괜찮아졌다.

시후는 제니의 몸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빠르게 기를 흘려 넣었다.

흘려 넣은 기를 통해 제니의 상태를 점검한 시후는 안심했다.

아직 제니의 심장에 쳐놓은 내공막이 제 역할을 잘해주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진지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구나?”

“어?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진지춘은 이야기의 흐름상 시후가 안고 있는 저 여자아이가 천음절맥일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느낄 수 없지만, 제니에게 시후가 기를 흘려 넣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예상은 확신이 섰고 천음절맥이라는 생각에 시후의 허락도 없이 먼저 다가온 거였다.

그런데 제니가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눈썹이 꿈틀댔다.

“할…아…버…지?”

“응, 할아버지. 흰 머리카락 있으면 할아버지라고 했는데?”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세상 간단한 기준으로 나이를 짐작하도록 교육한 것 같았다.

진지춘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아직 50살밖에 안 되었단다. 그러니 할아버지 말고 다르게 불러주련?”

“어떻게요?”

“의원님?”

제니는 의원이라는 말에 살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제니가 아는 의원은 뾰족한 바늘을 사람 몸에 찌르는 의사였다.

그런 의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자기에게도 바늘을 찌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진지춘을 피하는 거였다.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 이제는 외면까지 당하자 진지춘은 시후를 향해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시후는 그런 진지춘의 눈빛에 피식 웃어가며 알아서 하라는 눈빛을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품속에 파고든 제니를 한쪽 어깨에 앉히며 입을 열었다.

“제니야, 오빠가 잠깐 병원장님 만나고 올 테니까 병실에 가 있을래? 금방 찾아갈게.”

“진짜? 오빠가? 제니 병실에 오는 거야?”

“그래. 금방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알쏘용~!”

제니는 활기차게 대답하고는 폴짝 뛰어내려 후다닥 달려갔다.

제니의 기억으로는 시후가 퇴원 후에 자신의 방을 찾은 일이 없었기에 이리 부산을 떠는 거였다.

한바탕 제니가 시끄럽게 로비를 훑고 떠나자 시후는 진지춘과 제갈조민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버지께 말할 것들은 제갈세가에서 준비해놨지?”

“예, 이미 문서로 만들어 보내 놓은 상태입니다.”

시후의 물음에 조민이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조민이 말하는 문서라는 것은 진지춘에 대한 거였다.

아버지가 시후를 전적으로 믿는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에서만큼은 예외였다.

그런 면에서는 단호한 성격의 아버지인 것을 알기에 다른 방법으로 준비했다.

시후는 둘을 데리고 익숙한 발걸음으로 병원장실을 찾아갔다.

비서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병원장실로 들어가자 아버지가 반겨왔다.

“시후야! 어서 오거라!”

“네, 바쁘신데 방해하는 건 아니죠?”

“하하하, 바빠도 우리 아들 볼 시간은 있단다. 그런데 같이 오신 분들은 누구시니?”

아버지 강인은 시후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한복을 입은 중년인과 교복을 입은 중학생 소녀를 보고는 물었다.

아들과는 무슨 접점이 있었기에 같이 들어온 것인지 궁금한 거였다.

그때 조민이 한 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강인 원장님, 저는 J.K제약회사의 제갈조민입니다. 이번에 저희 쪽에서 초빙한 진지춘 어르신께서 이곳, 강인병원에서 침구사로 견문을 넓히고 싶다 하셔서 모시고 왔습니다.”

“아~! 이분이 진지춘 의원님 되시는군요? 반갑습니다. 강인입니다.”

강인은 진지춘을 향해 선뜻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진지춘도 강인이 시후의 아버지인 것을 알기에 공손하게 악수를 받았다.

그런데.

“응?”

진지춘은 마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기에 시후를 힐끗거렸다.

시후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살짝 감았다.

모른 체하라는 눈짓이었다.

진지춘이 느낀 것은 내공이었다.

그렇다고 강인이 무인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단전이 생겨났고 내공을 얻은 것 같았다.

그것도 상당히 깨끗하고 중후한 내공을 말이다.

누가 만들어 주었는지는 뻔했지만 이런 종류의 내공은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놀란 거였다.

‘아무래도 천음절맥뿐만 아니라 내가 얻을 게 많은 것 같구나.’

진지춘은 강인병원에서 자신이 얻을 것이 천음절맥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인은 이미 제갈세가에서 보낸 진지춘에 대한 이력서를 보았기에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는지 알고 있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중국 약선방 7명의 의선 중 한 분이시라고요.”

“허, 허허, 그저 7번째로 침 좀 놓을 줄 아는 의원일 뿐입니다.”

진지춘은 평소와 다르게 으스대거나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의 진정한 실력을 알아주는 강인의 말에 그만한 대우를 하는 거였다.

그 후 진지춘에 대한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취지가 상당히 좋았기에 사람을 구하는 길을 같이 가는 의사로서 강인은 흔쾌히 계약서를 내밀었다.

“딱히 계약 기간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희로서는 꽤 많은 시간을 함께하셨으면 하지만요, 하, 하하.”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맞장구를 치는 진지춘을 보며 강인은 한 가지 우려되는 말을 꺼내었다.

“그보다 J.K 안가에 계신다 들었습니다만, 거기는 여기와 너무 멀지 않으십니까?”

아마도 출퇴근을 걱정해서 물어가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후가 진지춘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의원님께서 저희 집 근처로 방을 잡으셨다고 하네요.”

“그러시군요?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시후와는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시후가 끼어들자 강인은 시후와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에 진지춘은 미리 만들어 놓은 대답을 늘려놓았다.

“얼마 전에 길에서 갑자기 쓰러진 환자를 발견했는데 시후와 함께 응급 처치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물론, 꾸며낸 이야기였지만 사실이나 다름없도록 제갈세가에서 준비를 해놓았다.

인터넷에 이름 모를 A 씨라며 기사가 올라온 거였다.

그 기사는 이미 강인도 보았기에 시후를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시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병원장 아들인데 그 정도는 해야죠. 그보다 아버지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좀처럼 부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시후였기에 강인은 호기심 인 얼굴을 보이며 어서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방금 로비를 들어오다가 제니를 만났는데 의원님께서 제니를 첫 환자로 지목하고 싶으시대요.”

“으흠…. 글쎄다.”

시후의 말에 강인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진지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니의 경우 특별한 케이스였기에 망설여졌다.

장기이식도 고려하며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별로였다.

그러다 최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력이 좋아졌기에 강인으로서는 정밀검사를 통해 다른 검사를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진지춘은 망설이는 강인을 보며 때는 이때라는 생각에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현대 의학에서는 제니라는 환자가 회복하기 어렵다 보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도 천 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환자이기에 어렵기는 하지만 저희 한의학에서는 치료한 이력이 있으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필요하시다면 약선방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드릴 것입니다.”

진지춘이 약선방까지 들먹이자 강인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치료하시는 것을 저희가 참관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진지춘은 천음절맥을 가진 제니를 맡을 수 있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시후를 바라봤다.

칭찬을 갈구하는 강아지의 눈빛으로 말이다.

그 눈빛에 시후는 ‘옜다’라는 심정으로 슬쩍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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