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시후가 오늘 세가를 찾은 이유는 진지춘과 약속한 1주일이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오늘 등교 후 벌어진 일로 미루어 제갈신길이 일을 제대로 처리한 것 같아 세가를 찾은 거였다.
시후는 저번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제갈세가의 대문을 두들겼다.
쿵- 쿵-
손에 내공을 싣자, 나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세가를 울렸다.
잠시 후 안쪽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려왔다.
“누, 누구십니까?”
문을 빼꼼 열고 고개를 내민 것은 시후의 예상과는 다르게 어린 여자아이였다.
“의외인데?”
“네? 뭐가요?”
떡대 좀 있는 장정들이나 세가의 일을 봐주는 일꾼 중에서 한 명이 자신을 마중 나올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똘망똘망한 눈을 껌뻑이며 잔뜩 겁먹은 모습의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나오자 의외라 생각한 거였다.
시후는 여자아이의 질문에 대답 대신에 발걸음을 옮겼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오는 시후의 모습이 어찌나 당당했는지 여자아이는 머뭇거리다가 어느새 뒤를 졸졸 쫓는 모양새가 되었다.
“저, 저기 누구신데 저희 집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십니까?”
“오호~ 여기가 네 집이야? 그럼, 네 성도 제갈이더냐?”
“네, 소녀 이름은 제갈조민입니다만. 아니, 그보다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제갈신길은 가주의 방에 있더냐?”
“아니요, 지금은 약방에 계십니다만. 어? 뭐지?”
시후는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오는 제갈조민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기네 집에 왜 함부로 들어왔냐며 따지는 것인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인지.
둘 중 하나만 할 것이지 둘 다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시후는 걸어가면서 기감을 넓게 펼쳐 세가 전체를 덮었다.
시간을 들이면 어디에 몇몇 사람이 있는지를 알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제갈신길과 진지춘만 찾으면 되었기에 아주 잠깐만 펼쳤다가 거두었다.
그런데 졸졸 쫓아오던 제갈조민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뭐지?”
제갈조민은 시후를 쫓아가다 전신을 휘감으며 빠르게 지나가는 무언가를 느꼈다.
오싹하면서도 뭉클한 느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원인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주위에는 평소 보던 세가의 모습뿐이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느꼈나 하는 생각에 어리둥절했다.
오히려 시후가 그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내가 펼친 기감을 느꼈어? 어린 나이에 제법인데?’
자신이 펼친 기감을 느끼려면 적어도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 가능했다.
아마도 제갈신길을 포함한 몇몇은 느꼈을 거였다.
다들 나이에 맞게 그동안 쌓아 온 내공도 있으니 별로 신경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여아 티도 벗지 못한 제갈조민이 그것을 느꼈다는 것에 흥미가 일었다.
“약방으로 갈 거야. 안내 좀 해줄래?”
“네? 아, 네.”
제갈조민은 부드러워진 시후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며 약방으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처음 보는 남자를 안내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16살 인생 중에 가장 희한한 경험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시후는 제갈조민의 안내를 받아 약방에 도착했다.
약방으로 들어서는 문 앞에는 예상대로 제갈신길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제갈신길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고개를 숙였다.
“구명지은(救命之恩)을 뵙습니다.”
시후를 구명지은이라 칭하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주화입마에 빠져 죽을 날만 기다리던 자신을 치료해준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좀먹어가던 세가를 회생시킬 수 있게 도와준 것에 대한 것까지 포함이 된 거였다.
시후 또한 제갈신길의 말에 의미를 알았기에 슬쩍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그래. 일 처리는 잘한 것 같더구나?”
“네. 덕분에 아픈 살을 도려낼 수 있었습니다.”
“썩어 문드러져 죽는 것보다는 지금의 아픔이 나을 거야.”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둘의 대화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어디를 보아도 한참 어려 보이는 시후에게 백발의 노인인 제갈신길이 굽실굽실하는 모습은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제갈조민은 그런 이질적인 장면을 보면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오늘 아침 큰아버지인 제갈상민의 아내와 자식들 모두가 제갈세가를 떠났다.
차기 가주로 지목되고 있던 제갈상민은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세가를 지탱한다 생각했던 이들의 추방.
두 걸음을 나가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며 주위상계(主爲上計)를 논하는 가주.
지난 1주일간 세가에서 일어난 일들은 총명한 제갈조민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보자 그 모든 것들이 이해가 갔다.
제갈조민은 조용히 시후의 옆을 지나쳐 제갈신길 한 발 뒤에 자리했다.
조금 전까지 허둥지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의연한 모습이었다.
‘역시 제갈세가의 자제야.’
시후는 드디어 제갈세가의 진정한 인재를 보았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저런 아이가 있다면 앞으로 자신이 하기로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제갈조민에게 몇 수 가르쳐주며 큰 깨달음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다른 우선순위가 있었다.
“돌팔이는 어디 있나?”
“돌팔…. 아! 진지춘 의원님 말씀이시군요? 안에 계십니다.”
제갈신길은 시후가 진지춘을 돌팔이로 칭하자 금방 알아채고는 안내했다.
안내를 받아 약방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가지 약재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약방 제일 안쪽에는 작은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진지춘이 보였다.
진지춘은 시후가 약방으로 들어서자 얼굴에 화색을 띠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뭔가 있기는 한가 보구나?”
“그럼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어서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하는 진지춘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에 시후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대신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진지춘의 앞에 놓여 있던 책상이 슬쩍 들리며 시후에게로 날아왔다.
일전에도 보았지만 너무나도 가볍게 허공섭물을 펼치는 시후였다.
눈앞에까지 책상을 끌고 온 시후는 책상 위에 놓인 단약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들이 네가 만든 것이냐?”
“하, 하하,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진지춘이 어깨를 으쓱이는 게 ‘내가 이 정도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후는 진지춘이 그런 모습에도 단약에 시선을 두고 자세히 관찰했다.
‘제법인데? 뭉친 강도와 크기, 향에서 느껴지는 것이 신명단과 아주 흡사해.’
보급형 신명단을 만들라는 말을 그대로 따른 모양이었다.
신명단 한 알만을 던져 주었을 뿐인데 이런 결과를 만들다니 실력은 인정했다.
하지만.
“실력은 제법인데 눈치가 별로구나?”
“눈…치…요?”
진지춘은 단약을 한참 쳐다보던 시후가 뜬금없이 눈치 타령을 하자 의아했다.
그러다 시후의 눈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지금까지 앉아서 시후를 맞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당탕탕-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느라 주변에 있던 약재들을 한바탕 쏟으며 요란하게 일어나는 진지춘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지춘은 후다닥 달려갔다.
좁은 방이었기에 달린다고 하여도 몇 걸음 떼지를 않았지만, 최대한 달리는 것처럼 동작을 취했다.
자신이 이렇게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진지춘은 허리를 살짝 숙여 굽실거리며 시후의 눈치를 살폈다.
“헤헤, 제가 잠시 정신 줄을 놨나 봅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비비기까지 하는 진지춘의 모습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그래, 오늘은 결과가 좋으니 한번 봐주마. 다음에도 그러면 두 다리는 필요 없다는 것으로 알고 네 몸에서 떼어내 주마.”
“커헙!”
웃으면서 세상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시후에 진지춘은 숨이 턱 막혔다.
사실 시후가 자신을 테스트한다며 내린 문제를 진지춘은 어제저녁에 완성했었다.
1주일 기한을 줬음에도 미리 끝낸 자신이 대견했기에 시후를 보며 살짝 거들먹거려 본 거였다.
그런데 그만 비빌 곳을 잘못 알고 비빈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만만한 놈이 아니다, 젠장!’
겉모습만 어려 보이지 하는 짓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같았다.
시후는 자신을 바라보며 진땀을 빼는 진지춘의 어깨를 살짝 토닥이고는 책상에 놓여 있는 단약 하나를 집었다.
그러자 진지춘은 빠르게 입을 놀렸다.
“그 단얀은 신명단과 비슷한 효과를 내지만 가장 저렴한 약재들을 사용했습니다. 천년산삼 대신에 홍삼이라는 녀석을 사용했고요. 백골초와 같은 음기가 강한 것을 대신하기 위해서 느릅나무를 사용했습니다.”
단약에 대한 설명을 들은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보기만 해서는 정확한 효과를 알 수 없었기에 먹어 보기로 한 거였다.
그 모습에 제갈신길과 진지춘은 내심 놀랐다.
저 단약이 저렴한 약재로 만들기는 했지만, 신명단의 1/10의 효능은 갖고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단약을 먹는 순간 운기조식을 들어가야 단약이 몸을 망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영양제 삼키듯 단약을 날름 삼키고는 운기조식은커녕 고개를 갸우뚱거리고만 있으니 놀라는 거였다.
반면 시후는 단약을 먹는 순간 천마분심공을 이용해 운기조식을 했다.
기를 운용하여 단약을 녹이고는 안에 담긴 영양분을 몸속 구석구석 보내고는 단전으로 흡수했다.
“으흠, 신명단의 십분지 일에 달하는 효능이 있구나?”
“어? 어떻게 아십니까? 운기조식도 하지 않으시고?”
진지춘은 어느새 존대까지 했다.
시후는 대답 대신에 제갈신길을 바라봤다.
“네 주화입마도 회복되었으니 이 녀석은 내가 데리고 가도 되겠지?”
“네?”
“예에?!”
제갈신길과 진지춘은 동시에 놀랐다.
중국 약선방에서 제갈세가로 초청을 받아 온 진지춘을 데려간다는 말에 놀라는 거였다.
그 말에 당황한 진지춘은 제갈신길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눈짓을 주었다.
제갈신길 역시 세가에서 초빙한 의원을 다른 곳으로 보낸다면 문제가 야기될 거라는 생각에 시후를 말렸다.
“그게, 저희 세가의 이름으로 모신 분이라 다른 곳에서 지내시는 것은 좀….”
“크크큭.”
제갈신길은 자신이 말하는 도중에 시후가 웃어오자 말끝을 흐리며 말을 멈추었다.
“너희가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더냐?”
“……!”
시후의 날카로운 지적에 제갈신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자신은 세가에 벌어진 일들을 처리하여야 하는데 시후가 찾아왔기에 여기에 이렇게 있는 거였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지만 시후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무슨 일을 겪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고민하던 제갈신길은 문득 시후의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시후와 눈이 마주치자 시후가 입을 열어왔다.
“거기 녀석들이 너희 세가를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네가 강해지면 될 거 아니냐?”
“그걸 제가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명석한 두뇌로 이름난 제갈세가답지 않구나?”
무언가 말해줄 듯하면서 말해주지 않는 시후의 반응에 제갈신길은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현원진신공(玄元眞神功), 우주(宇宙)를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하는 무공이더냐?”
“그게 무슨?”
“요즘같이 눈에 보이는 우주를 이해하려 드니 현원진신공을 득할 수 없는 것이다.”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보거라.”
제갈신길은 시후가 자신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직이 자신을 주화입마에 빠트린 현원진신공.
제갈세가의 비전 무공에 대한 실마리를 시후가 풀어주려는 것이었다.
어느새 시후의 손에서 나타난 검은 구슬.
우웅- 우웅-
그것은 현원신공이 극에 달하면 나타나는 건곤주(乾坤珠)였다.
현원진신공은 현원신공이 극에 따른 후에 진입할 수 있는 거였다.
어렴풋이 그것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몰랐던 제갈신길이었다.
시후는 지금 그 길을 보여주려 했다.
“누가 우주가 지구 밖에 있는 것이라 하더냐? 우주란 만물을 포용하는 공간일 뿐 그것의 형체는 알 수가 없으니….”
시후는 말끝을 흐리며 건곤주를 더욱 부풀렸다.
점점 부풀어 오르며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치던 건곤주가 순간 번쩍였다.
진지춘과 제갈조민은 순간적인 눈부심에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현원신공의 극에 이른 제갈신길은 건곤주의 눈부심이 단순한 빛의 발현이 아님을 알기에 오히려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번쩍이는 빛 속에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검은 구슬을 보았다.
약방 전체를 감싸던 빛은 곧 검은 구슬로 폭풍같이 빨려 들어갔다.
팡-
풍선이 터지는 듯한 아주 단출한 소리와 함께 검은 구슬이 터지자 빨려 들어갔던 빛은 아주 작은 별들이 되어 약방을 수놓았다.
그 순간 제갈신길은 깨달았다.
현원진신공의 끝은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약방을 감싸던 별들이 사라지자 진지춘과 제갈조민은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둘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깜짝 놀랐다.
제갈신길이 시후에게 부복(俯伏)을 한 거였다.
눈을 감았던 그 잠깐의 순간 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진지춘만이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 어디로 굴러갈지 알 수 있었다.
“좋아, 그럼, 돌팔이는 내가 데려가는 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들었지, 돌팔이? 가자.”
이제는 자신이 시후를 따라가는 것을 막을 사람이 없다는 것에 진지춘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미운 놈 떡 하나 던져 줘야겠는데?’
진지춘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끌고 갈 수는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앞으로의 일에 큰 효과를 볼 수 없었기에 구슬리기로 했다.
“천음절맥(天陰絶脈).”
우뚝-
그 한마디에 진지춘은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멈췄다.
그리고 부복해 있는 제갈신길을 봤을 때보다 더욱 부릅뜬 눈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한껏 놀라는 진지춘을 보며 시후는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입을 열었다.
“보여 줄까? 천음절맥?”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