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시후는 제갈세가를 빠져나온 후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태산과 인호도 함께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다 태산과 인호가 눈에 들어왔다.
둘은 거실 소파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냐?”
시후가 둘에게 생수 하나씩을 건네주며 물었다.
그에 둘은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인호가 입을 열었다.
“너 때문에.”
“나? 왜?”
시후는 왜 뜬금없이 자신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잡느냐는 눈빛이었다.
“좀 전에 그곳에서 너 왜 그런 식으로 말했어?”
“뭐가?”
“그랬냐? 그러더냐? 하거라? 겁나 노인 같은 말투였어.”
인호의 말에 제갈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인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무공을 제법 익힌 녀석들을 대하다 보니 천마 시절의 버릇이 나온 것 같았다.
천마로 불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위에는 천마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이들만 있었다.
그렇다고 천마는 그들에게 존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대해야만 했다.
그게 천마신교의 율법이었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이에 상관없이 하대했던 말투가 이번에 나온 거였다.
그렇다고 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없으니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어려 보인다고 얕보이면 안 되니까 그런 거야.”
시후의 대답에 둘은 그럴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은 어두웠다.
대충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여전히 어두운 둘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그런데 너희 표정을 보니 그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응, 그 때문이라면 우리도 큰 걱정이니까.”
“너희가 왜?”
“우리도 어려 보이잖아? 그럼 우리도 그런 할아버지들에게 반말해야 한다는 거잖아?”
“뭐? 풉!”
태산의 대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후가 배까지 부여잡고 웃기 시작하자 둘은 인상을 구겼다.
“뭐가 웃기냐?”
“으하하, 그럼 안 웃기냐? 별거 아닌 거로 그런 표정 짓고 있으니 웃지 않고 배기냐?”
“아이씨! 우린 진짜 진지하다고. 우리 지금까지 어른한테 반말해본 적 없단 말이야!”
“뭐?! 푸하, 하하!!”
그 말에 시후는 더욱 크게 웃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좀 많다고 반말도 못 하는 두 녀석의 모습이 너무 우스웠다.
천마 시절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거리낌을 느낀 적이 없었다.
힘이 있으니 썼고, 써야만 했다.
그렇게 피와 살이 튀는 곳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천마의 친구들이 이런 녀석들이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산과 인호는 계속해서 웃는 시후의 모습에 이제는 볼까지 부풀리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시후도 이제는 그만 웃어야겠다는 생각에 심호흡했다.
“크큭, 후우웁! 알았어, 알았어, 삐지기는~ 너희는 그냥 너희 식대로 해도 돼.”
“우리 식대로?”
“그래. 다른 이에게 위압감을 보인다는 것은 그저 말투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니까.”
태산과 인호는 시후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17살짜리 남자애들이 위압감이라는 것을 이해할 리 만무했다.
솔직히 제갈신길 또한 시후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주눅 든 모습을 보일 리 없었다.
시후가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다지만 제갈세가 가주의 자존심은 절대 낮지 않았다.
그런 제갈신길의 존대는 시후라는 탈 안의 천마를 본능으로 느껴서였다.
시후는 태산과 인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희는 나처럼 안 해도 돼.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가지만 너희의 색을 버리진 말라는 소리야.”
““알았어.””
시후가 좀 더 쉽게 풀이해 주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하기로 했으니 시후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시후는 훨씬 밝아진 둘의 표정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마음 좀 추슬렀으면 가자.”
“가? 어딜?”
“어디긴 어디겠냐? Safety World지.”
“그래! 가자! 아까 몸을 못 풀었더니 무언가 쌓인 것 같아. Safety World에 가서 몸 좀 풀어보자!”
그렇게 셋은 가벼운 마음으로 Safety World에 접속했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과는 달리 로그인을 하자마자 셋에게는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S.W SOFT 운영기획실장 김철수는 직접 Safety World에 접속했다.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큰 버그가 발생해서였다.
A.I 시스템으로 모든 에피소드를 생성하고 유지하는 Safety World가 느닷없이 기존에 있던 퀘스트를 없애버린 일이 생긴 거였다.
한스텔 마을 악몽의 시계탑 던전.
초보 유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르는 곳이었다.
유저의 악몽을 재현해 내는 것에 문제가 있었지만, 얻게 되는 경험치와 아이템이 상당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비밀 퀘스트였던 뱀파이어 백작의 블러드 토네이도 때문에 시계탑이 부서져 버린 이후, 이곳이 이상해졌다.
이곳의 주인 행세를 했던 프랑시스가 시계탑을 완전 개조한 거였다.
어디서 배웠는지 시계탑에 ‘환락탑’이라는 거대한 간판까지 내걸었다.
그것도 새로 리스폰된 자신의 수하들을 데리고 말이다.
Safety World가 15세 이상 사용가라고 했지만, 환락(歡樂)이라는 단어가 쓰일 만큼 성적인 게임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A.I 시스템은 그 환락탑을 인정했고, 많은 유저들은 그곳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한번 들어갔다가 나온 유저들은 하나같이 칭찬 일색이었다.
오죽하면 S.W SOFT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이 언제나 욕이었던 것이 시계탑에 관해서는 ‘좋아요’가 난무했다.
김철수는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커뮤니티를 열람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저기가 그저 그런 곳이 아니라는 말이야?”
시계탑에 관한 글들을 하나하나 읽었다.
- 시계탑이 환락탑으로 이름 바꿨음, 그런데 그 환락이 그냥 환락이 아님!!!
- 들어가 본 유저만이 그 가치를 암. 일단 한번 들어가 보시라니까요?
- 윗분 언제 적 시대 유저이십니까? 대단하십니다.
- 환락탑!! 오늘도 환락탑!! 1일 1환락탑!!
- 그곳에 들어가 보지 않은 자, 환락을 논하지 말라! 커밍순!!
- S.W SOFT 오랜만에 열일한 듯. 이런 컨텐츠도 내놓고, 앞으로 이렇게만 하자!!
- 나도 윗분 말에 동감!!
- 나는 곶감!! 데헷! 데헷!
- 너는 나가 죽어!
첫 번째 페이지만 읽는데도 모두가 환락탑에 대한 글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곳에 대한 자세한 정보나 영상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 고생을 하며 찾아가는 거지. 젠장!”
팀장이 이렇게 직접 발로 뛰어야 하냐며 투덜대는 사이 어느덧 환락탑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장 환락탑으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김철수는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무슨 줄이 저리 길어? 그리고 대기 번호표? 그런 거는 또 어디서 난 거야?”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곳에 대기 번호표가 있다는 것에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줄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환락탑’이라는 간판만 빼면 겉모습은 시계탑과 똑같았다.
그런데 입구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타나는 메시지가 전혀 달랐다.
띠링-
[환락탑 입장을 환영합니다.]
[환락탑에서는 동영상 촬영,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촬영 모드가 off됩니다.]
[환락탑의 사용 제한 시간은 1시간이며 재입장까지는 24시간의 대기 시간이 발생합니다.]
[환락탑은 희(喜)층, 로(怒)층, 애(哀)층, 락(樂)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하시는 층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문을 열고 입장하는 순간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며 김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아무 정보가 없었구나? 쯧, 층이 4개나 된단 말이지? 그럼…. 순서대로.”
김철수는 4개의 층을 전부 조사할 생각으로 ‘희’ 층을 선택했다.
[희(喜)층을 선택하셨습니다. 사용 금액은 20골드입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20골드?!”
입장 금액이 20골드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소리가 커졌다.
퀘스트 여관을 사용하는 금액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조차 2골드였다.
그런데 이곳은 그곳에 10배에 달하는 골드를 받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20골드나 주고 여기를 그렇게들 들락거린다고?”
도대체 이곳이 어떤 곳이기에 20골드나 받아먹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시작부터 게임 밸런스 붕괴가 아니냐는 의혹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골드가 어디로 가는지도 의문이었다.
일단은 환락탑을 경험해봐야 했기에 20골드를 지급했다.
[환락탑 희(喜)층으로 입장했습니다.]
[사용자가 원하는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언가 상술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메시지와 함께 눈앞의 풍경이 변했다.
김철수는 Safety World 안에서 여러 가지 장비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엄청 비싼 것들은 아니었다.
자신이 S.W SOFT 직원이라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디자인에 무난한 갑옷 세트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희층에 입장하는 순간 몸에 느껴지는 것은 딱딱하고 답답한 갑옷이 아닌 실크의 촉감이었다.
희한하다는 생각에 몸을 내려다보는 순간 육성으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이 셔츠는?”
김철수는 흰색 셔츠와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거기에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그것도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돌체인가롱의 메이커였다.
그뿐만 아니라 온몸에 착용한 것 모두가 고급 명품들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하는 생각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완전히 변한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철수는 지금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 명패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장 김철수]
“내가 사장?”
그러고 보니 이곳은 낯이 익었다.
얼마 전 방문했던 박철 사장의 사장실이었다.
그곳과 똑같은 곳이었는데 박철 사장의 명패 대신에 김철수의 명패가 있었다.
그제야 이곳의 테마를 알 수 있었다.
“이래서 희(喜)라고 했구나?”
희층은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김철수의 경우 언제나 목표가 사장이었고, 많은 직원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1시간 동안 김철수는 사장실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임원들의 서류를 결재해주며 회의를 했다.
누가 보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김철수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자 김철수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환락탑은 즐거우셨습니까?]
[사용 시간 1시간이 지나 외부로 전송됩니다.]
[24시간 후에 다시 방문해주십시오.]
[재방문 시에는 10% 할인된 금액으로 사용 가능합니다.]
메시지를 모두 읽는 순간 김철수는 시계탑 밖으로 이송되었다.
여전히 시계탑에 들어가기 위해서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보며 김철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 이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미친 듯이 찾는구나?”
환락탑이 그저 19금을 연상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왜 A.I 시스템이 이곳을 인정했는지 이해했다.
김철수는 다른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4일에 걸쳐 희로애락(喜怒哀樂), 4개 층을 모두 경험하고 나서야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그 보고를 토대로 S.W SOFT는 환락탑에 대한 광고와 함께 이벤트를 진행했다.
덕분에 환락탑의 대기 인원은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