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중국 약선방에서 제갈세가로 파견된 의원 진지춘은 잔뜩 기죽은 모습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처음 제갈세가로 파견된다고 했을 때 동료 의원들의 부러움을 한눈에 받았다.
약선방의 정보력으로 이미 제갈세가 가주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곳에 파견을 나가게 된다면 상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 뻔했기에 부러워들 한 거였다.
역시나 제갈세가에 도착하자 주화입마에 빠진 가주를 구해달라는 어이없는 요구를 들었다.
‘주화입마가 무슨 고뿔인 줄 아나.’
그에 진지춘은 고치는 척만 했다.
여러 가지 약재를 이용해 단약을 만들거나 탕약을 만들어 복용시켰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몸을 보훈해주는 약재들이었기에 그저 기력이 떨어지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세가에 있는 동안 황제가 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돈이면 돈, 술이면 술, 약재면 약재.
제갈세가는 진지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런데 며칠 전 제갈상민이 들고 온 신명단을 본 이후로 상황이 급변했다.
‘약선방에서도 방주만이 제조법을 알고 있는 그것을 어찌.’
재료도 구하기 힘들어 약선방에도 몇 알 없었다.
진지춘도 딱 한 번 향을 맡고 구경해본 것이 다였다.
그런 귀하디귀한 신명단을 이곳에서 보았으니 보는 순간 욕심이 일었다.
그런데 그 희귀한 것을 주화입마에 빠져 다 죽어가는 노인네에게 먹이니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이미 먹어 없어진 것.
진지춘이 할 수 있는 것은 신명단의 출처를 캐묻는 것뿐이었다.
끈질기게 제갈상민을 쫓아다니며 신명단의 출처를 물어갔다.
그러길 3일째.
느닷없이 주화입마에 빠져 있던 노인네가 자신을 불러온 거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가주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믿기지 않는 장면에 오금이 저렸다.
‘저, 저 자식은 왜 나자빠져 있어?!’
자신을 고용해온 제갈상민은 게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반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제갈신길은 버젓이 일어나 있었는데 몸 상태가 상당히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 복면인 2인과 곱상하게 생긴 녀석 하나가 있었는데 방 안에 있는 모두가 그 녀석을 가장 어려워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녀석의 눈빛을 받는 순간 오줌을 찔끔 지렸다.
‘무, 무슨 눈빛이….’
진지춘은 속을 꿰뚫려 보이는 듯한 시후의 눈을 피해 제갈신길에게 물었다.
“무, 무슨 일로 나를 불렀소?”
“그대가 그동안 나를 위해 애써준 것에 감사도 표할 겸….”
“그리고요?”
“이분의 청을 들어주었으면 해서 불렀네.”
“이분? 누구? 이 어린놈…. 아니, 어린 분?”
제갈신길이 정중하게 두 손으로 시후를 가리키자 진지춘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을 위아래로 훑었다.
‘어쭈? 이놈 봐라?’
의원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몸에서 풍겨오는 기운이 상당했다.
내공만으로 따지면 제갈상민에 버금가는 내공을 가진 듯했다.
하지만 검을 들어본 적이 없는지, 아니면 싸움을 해본 일이 없는지 손이 상당히 고왔다.
딱, 침을 잘 다루는 의원의 손이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진지춘의 실력을 알아볼 차례였다.
시후는 슬쩍 손바닥을 뒤집으며 검지를 튕겼다.
푹-
“어? 어?!!”
시후가 날린 지풍은 진지춘의 혈 중 하나를 정확히 가격했다.
그 혈은 왼쪽 전신을 마비시키는 혈로, 진지춘은 순간 왼쪽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시후는 진지춘이 들어오기 전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모두에게 일러뒀다.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나서지 말라고 말이다.
그 때문에 비틀거리며 당황하는 진지춘을 아무도 돕지 않았다.
결국, 힘이 빠져 왼쪽으로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은 진지춘은 놀란 눈으로 시후를 올려다봤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에게 조용히 말했다.
“풀어봐라.”
그제야 진지춘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 시후의 짓인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대들 마음이 전혀 일지 않았다.
그저 시후의 말에 따라 품속에서 대나무 침통을 꺼내 들더니 자신의 주요 혈들을 찔러갔다.
왼쪽에 온 마비를 풀기 위해 침을 찌르면서도 자신이 왜 시후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각의 시간이 지나자 진지춘은 마비를 풀 수 있었다.
시후는 그 모습에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흥미를 보였다.
“제법이구나? 이각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당신은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됐고, 이것도 풀어보아라.”
푹-
진지춘의 말을 끊고 또다시 지풍을 날렸다.
이번에는 오른쪽이었다.
진지춘은 방향만 바뀌었지 똑같이 마비되는 오른쪽에 화들짝 놀랐다.
이번에는 혹시나 싶어 대비도 했었다.
고수까지는 아니지만, 자신도 어느 정도의 무공은 익히고 있었기에 웬만한 기습에는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버젓이 신호까지 하며 날린 지풍을 피할 수 없었다.
진지춘은 하는 수 없이 왼손으로 침을 꺼내어 혈을 찔러갔다.
이번에는 방향만 바뀌었지 왼쪽과 똑같은 경우였기에 일각이 채 되기도 전에 마비를 풀었다.
진지춘은 마비가 풀리는 순간 내공을 일으키며 창가로 내달렸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본능적으로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였다.
하지만 진지춘이 창문에 다가서기도 전에 시후의 말이 들려왔다.
“쯧, 포기가 더디구나? 굳이 접골 능력까지 보게 하다니.”
시후는 도망치려는 진지춘을 향해 손을 슬쩍 휘저었다.
뿌득-
“크아아악!!”
아주 깔끔하게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진지춘이 비명을 질렀다.
진지춘은 골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바닥을 굴렀다.
이번에도 역시 방 안에 있는 이들은 진지춘을 도와주지 않았고 진지춘은 이각이 지나서야 틀어진 골반을 맞췄다.
이쯤 되자 진지춘도 알 수 있었다.
시후의 허락 없이는 이 방을 나갈 수 없으며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의술 실력을 자신의 몸을 통해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진지춘은 시후를 향해 눈물까지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요.”
“잘못? 평소에 죄를 많이 지었더냐?”
“네? 아, 아닙니다! 저는 태어나서 죄 같은 거는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죄 한번 지어본 적 없다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진지춘이었지만 시후는 상관없었다.
진지춘에게서 원하는 것은 의술 실력이지 진실함이 아니니 말이다.
“네 의술 실력이 제법이라지?”
“네?! 누가 그럽니까? 저는 그저 귀동냥으로…. 헙!”
진지춘은 의술 실력을 묻는 시후의 말에 거짓을 말하려 했다.
평소라면 대라신선이 와도 자신의 실력에는 못 미친다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발뺌하려 했다.
그런데 말을 끝마치기 전에 시후가 품속에서 옥병을 꺼내어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며칠 전에 맡았던 청량한 내음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그, 그건! 신명단?!”
“잘 아는구나? 자, 받아라.”
시후는 냄새만으로 신명단을 알아맞히는 진지춘에게 한 알을 넘겨주었다.
진지춘은 왜 이런 귀한 단약을 자신에게 주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그리고 손에 들려 있는 단약을 자세히 보자 확실히 신명단이 맞았다.
예전에 방주가 한번 보여주었던 그 모양, 크기, 향까지 똑같았다.
드디어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보물과도 같은 신명단이 자기 손에 들어왔지만, 갑자기 ‘왜?’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이것을 왜 제게….”
“네 실력 좀 보자.”
“네?”
“기한은 일주일. 그 안에 신명단을 만들면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대한 효능이 비슷한 것을 만들어라.”
“네에?!!”
제조법을 알지도 못하는 신명단을 만들라는 시후의 말에 진지춘은 어이가 없었다.
거기에 시후는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였다.
가격이었다.
저렴한 재료로 최대한 비슷한 효능을 낼 수 있는 단약을 만들라는 거였다.
가격과 효능 사이에서 저울질하여 판가름을 내주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진지춘은 왜 자신이 그런 수고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왜 그걸?”
“왜에?”
탁-
이유를 묻는 진지춘 손에 들려 있는 신명단을 잽싸게 가로챘다.
그러자 진지춘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시후의 손에 고정됐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을 보며 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다시 왼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진지춘의 시선 또한 그에 따라 움직였다.
그만큼 신명단에 큰 관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제조법.”
“무슨…? 설마?!”
“그래, 네가 내 테스트를 통과하면 신명단 제조법을 알려주마.”
“정말입니까?!”
진지춘은 아직 골반에 남아 있는 통증도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시후를 향해 내밀었다.
시후는 그 손에 빼앗았던 신명단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일주일이다. 만약, 결과가 좋으면 신명단 말고도 다른 선물도 주마.”
“다른 선물이요?”
선물이라는 말에 진지춘은 기대감에 부푼 눈을 보였다.
하지만 시후는 그 눈빛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제갈상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몸을 살짝 일으켜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제갈신길에게 말했다.
“이 녀석의 섭혼술은 풀어주지. 대신 뒤처리는 확실히 해라.”
“알겠습니다.”
제갈신길은 시후가 말하는 뒤처리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시후는 제갈신길의 대답을 듣고는 머리를 움켜쥔 손을 통해 기를 불어넣었다.
시후에게 섭혼술을 깨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천마 시절 요화선녀의 섭혼술도 시후를 어쩌지 못했던 것은 시후의 기가 섭혼술과 극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시후는 웬만한 섭혼술쯤은 이미 터득한 지 오래였기에 제갈상민이 걸린 섭혼술을 파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백회혈을 통해 기를 흘려 넣자 어떤 종류의 섭혼술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주 낮은 수준의 가장 저질스러운 섭혼술이었다.
‘육체적인 관계가 성립해야만 가능한 섭혼술이라…. 저급하긴.’
부부였기에 가능한 섭혼술이었다.
시후는 흘려 넣었던 기로 제갈상민의 단전을 한번 훑고는 뇌로 이동시켰다.
뇌로 이동시킨 기를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달걀을 만지듯 살살 구슬리고는 다시 백회혈로 뽑아냈다.
그게 끝이었다.
차 한 모금 마실 정도의 시간만으로 가볍게 섭혼술을 풀어버렸다.
제갈상민을 놓아주고 일어서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다가왔는지 진지춘이 헤헤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까 말한 선물에 대한 귀띔이라도 듣기 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후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진지춘이 원하는 말이 아니었다.
“일주일이다. 만약, 실패하거나 도주한다면?”
“하…면요?”
“다시는 여자를 안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주마.”
“히익!”
스륵-
그 말을 끝으로 시후는 제갈신길과 진지춘의 앞에서 훅 하고 사라졌다.
마치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복면 2인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제갈신길과 진지춘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면서 서로가 시후에게 약조한 것을 되새겼다.
“크흠, 그럼 신의께서는 약방(藥房)으로 가십니까?”
제갈신길이 말하는 약방은 제갈세가 별채 중 가장 끝에 위치했다.
진지춘이 여러 가지 약재를 가져다가 놓고 세가의 시비들을 꼬드기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쓰임으로 사용할 때였다.
아니, 이제야 본래의 이름값을 할 때였다.
“크흠, 그럼 가주께서는 뒤처리에 고생하시구려.”
“신의께서도 부디 좋은 선물을 받도록 고생하시길 바라오.”
둘은 서로를 독려하는 듯 아닌 듯 미묘한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진지춘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서자 제갈신길은 아직 정신을 잃은 채인 제갈상민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에 기를 훅 하고 불어 넣자 제갈상민이 서서히 깨어났다.
“으…. 여긴…. 어? 아버지?!”
제갈상민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제갈신길을 보자 벌떡 일어났다.
침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아버지가 언제 아팠냐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으니 놀란 거였다.
그런 제갈상민을 향해 제갈신길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며느리는 어디 있느냐?”
병상에서 방금 일어난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싹한 음성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