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시후가 어느새 지풍을 쏘아내 제갈상민의 수혈을 짚어 버린 거였다.
한 손은 여전히 제갈신길의 등에 닿아 있었다.
여전히 기를 불어넣어 주화입마를 치료 중이라는 소리였다.
태산과 인호는 치료 중에 지풍을 날리며 말까지 하는 시후를 보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너, 너! 그래도 되는 거야?”
“어, 나는 돼!”
어쩜 저 말이 저렇게나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태산과 인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입을 다물었다.
매번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는 시후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시후 너니까 뭐…. 근데 이 사람은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태산은 바닥에 쓰러진 제갈상민에게 다가가 손에서 검을 빼냈다.
수혈이 눌려 잠이 들었음에도 검을 쥔 손에서 집념이 느껴졌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아버지를 극진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던 제갈상민이 왜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J.K제약회사 CEO라면 부족한 것이 없을 텐데 왜 아버지를 죽이려는지.
돈이 아니라면 원한 때문인가 싶었지만, 패륜까지 저지를 정도로 원한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무언가 자신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런 고민에 빠진 둘에게 시후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그런 것이야. 게임이랑은 달라. 언젠가는 너희도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칼을 휘두를 때가 올 거야.”
“목…숨?”
“그래, 그게 두렵거나 싫으면 지금 말해. 그래서 너희의 얼굴에 그걸 씌워놓은 거니까.”
태산과 인호는 그제야 시후가 자신들에게 복면을 씌운 진짜 이유를 알게 됐다.
이제는 진짜 애들 논리로 끝날 사안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누군가의 숨통을 끊는 일이 생길 거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무공을 배운다는 것에 들떠 있었지만, 이제부터 시후가 하려는 일은 그저 무공만 배우는 그런 게 아니었다.
시후의 말에서 그것을 깨달은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한차례 눈빛을 주고받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시후를 돌아봤다.
그리고 둘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도 팔자다. 우리도 그 정도는 이미 생각했었거든?”
“맞아, 강시후. 네가 그런 길을 가는데 우리가 너 혼자만 보낼 거라 생각했냐?”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둘의 말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야 내 친우(親友)지.”
둘이 변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확인해야만 했다.
생각만 하는 것과 직접 닥쳐왔을 때 선택은 확연히 달랐다.
이번에 목숨이 날아갈 만한 경험을 했으니 앞으로 둘은 분명 달라질 거였다.
이제 제갈상민의 패륜적인 행동 때문에 착 가라앉은 둘의 기분을 풀어줘도 될 것 같았다.
“제갈상민은 섭혼술(攝魂術)에 당한 거야.”
“섭혼술?”
“그때 프랑시스가 유저들에게 사용했던 그거?”
시계탑에서의 일을 떠올린 인호였다.
시후는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녀석들인지 모르겠지만, 제갈세가도 정말 많이 쇠약해졌어. 다음 가주라고 불리는 녀석이 섭혼술에나 당하고.’
천마 시절의 제갈세가는 다른 이의 침입을 결코 쉽게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다.
특히, 진법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어 천마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들어오며 진법의 ‘진’ 자도 보이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마치 그것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것처럼 보였다.
이 모든 의문을 풀어 주기에는 눈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등의 주인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야. 중요하니 잘 지켜줘.”
““응!””
시후의 말에 태산과 인호는 시후의 곁에 자리하고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시후는 천마분심공을 통해 굳이 둘의 경계가 필요는 없었지만, 덕분에 편안히 집중할 수 있었다.
제갈신길에게 전음을 보냈다.
- 마지막이다, 집중해라. 내가 신호하면 천돌혈에 모인 탁한 기를 한꺼번에 토해내는 거다. 하나, 둘, 지금!
“우웩!”
시후의 신호와 함께 제갈신길은 입에서 피를 왈칵 쏟아냈다.
탁한 기와 함께 토해낸 피는 바닥에 닿자 역한 냄새를 풍기며 증발했다.
그것을 확인한 시후는 제갈신길에게서 손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신길 역시 눈을 뜨며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 갔다.
단전으로 시작해 용추혈과 백회혈까지 기를 운용하는 데 전혀 막힘이 없었다.
“진, 진짜로 나았다?!”
주화입마에 빠졌던 자신이 이렇게 회복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러자 자신을 낫게 해준 귀인이 등 뒤에 있다는 생각에 헐레벌떡 일어났다.
역시나 다시 보아도 손자뻘의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이미 제갈신길에게 외모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이 넘볼 수 없는 경지의 고수가 분명했으니 말이다.
제갈신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이 늙은이가 명을 다하기 전에 이런 천재일우의 기연을 만납니다.”
“알면 되었다.”
시후는 백발의 노인이 머리를 조아리는 일에 상당히 익숙해 보였다.
“아직도 기가 불안정하구나? 이거 하나 더 먹거라.”
시후는 품속에서 옥병 하나를 꺼내어 신명단 한 알을 제갈신길에게 넘겨주었다.
제갈신길 역시 아무 거부 없이 신명단을 받아 들고는 곧장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하며 신명단을 흡수했다.
그 모습에 시후는 제갈신길이 자신을 완전히 믿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정신을 잃고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제갈상민을 깨울 차례였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지풍을 날렸다.
푹푹-
“어으….”
제갈상민은 정신을 차리자 자신이 쓰러져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허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황스러워 소리를 질러 보려 했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그가 아혈을 짚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들어 시후를 노려봤다.
시후는 천천히 제갈상민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손을 슬쩍 들어 허공섭물을 펼쳤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제갈상민을 들어 올렸다.
등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제갈신길은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무게가 있는 사람에게 저리도 가볍게 허공섭물을 펼치다니.
시후의 내공을 짐작할 수 없기에 놀란 거였다.
시후는 등 뒤에서 제갈신길의 탄성이 들리든 말든 제갈상민을 바짝 끌어당겼다.
공포심에 물든 제갈상민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누구냐? 네게 섭혼술을 사용한 자가?”
“으…. 어….”
제갈상민은 아혈을 짚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대신 눈을 부라렸다. 핏발까지 선 것이 대답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다들 그 모습에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오직 시후만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런 녀석들이 있었어?”
“응? 누구?”
제갈상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시후는 무언가 아는 듯한 눈치였다.
시후는 여전히 제갈상민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원후가(元候家).”
“으!! 으!!!”
원후가(元候家)라는 이름이 나오자 제갈상민이 미친 듯이 신음을 내뱉었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듯 몸을 떨며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더 캐물었다가는 섭혼술을 풀어도 자아를 상실할 것 같아 지풍을 날렸다.
또다시 수혈을 눌린 제갈상민이 잠들자 시후는 고개를 돌려 제갈신길을 바라봤다.
“원후가에 대해서 짐작 가는 게 있나?”
“네….”
제갈신길은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원후가는 며느리의 본가입니다.”
제갈신길의 말에 태산과 인호는 깜짝 놀랐다.
저 말은 제갈재민의 외가 또한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제갈상민을 저리 만들었다는 거였다.
제갈신길은 원후가를 생각하며 시후의 눈치를 보았다.
이는 제갈세가의 가주를 죽이려는 음모에 관련된 중요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제갈상민은 말이 없었고 시후가 원후가를 거론한 것만으로 그 배후를 확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시후는 제갈신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입을 열었다.
“흔히들 있지.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 거대한 문파 하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이봐, 그렇게 말하는 너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잖아.”
“…….”
제갈신길은 시후의 말에 뜨끔해, 할 말을 잃었다.
자신 또한 언제부턴가 며느리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며느리가 가져오는 약들은 대부분 간호사를 시켜 버려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심이었지 확신은 아니었다.
본능보다는 이성을 중요시하는 제갈세가다운 모습이었다.
“쯧, 확실한 증거가 그렇게나 필요하단 말이냐?”
제갈신길은 자신의 심중을 들여다보는 듯한 시후의 말에 설마 싶었다.
“혹시….”
“눈 마주치지 마라.”
“헙!”
확실했다.
시후는 생각을 읽고 있는 거였다.
그것이 독심술(讀心術)이든 뭐든 간에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더는 시후의 말을 간과(看過)할 수가 없었다.
제갈신길이 고민에 빠지는 사이 시후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복잡하게도 생각한다. 쯧.’
제갈신길의 생각대로 시후는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이번에 Safety World에서 레벨업과 신명단을 통해 내공을 회복하며 천마 시절 사용하던 독안공(讀眼功)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독안공은 상대방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있는 무공이었다.
천마의 독문 무공이었으며 무수한 싸움에서 독안공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독안공은 천마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싸움에서 독안공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천마분심공을 익힌 천마뿐이었다.
생사(生死)가 오가는 곳에서 독안공을 펼친다면 멍하니 있다가 목이 달아날 거였다.
하지만 천마는 천마분심공을 사용하여 독안공과 천마의 무학을 펼쳤다.
덕분에 상대방의 다음 수를 읽어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천마 신교에서도 천마가 독안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오직 형제의 연을 맺은 몇몇뿐.
빠득-
시후는 형제라는 이름 아래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이들을 떠올리자 절로 이가 갈렸다.
때문에 당황한 것은 제갈신길이었다.
시후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오해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인의 큰 뜻을 모르고 그만….”
“됐고, 이만큼 알려 주었으면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할 수 있겠지?”
“당연합니다.”
제갈신길은 주먹을 움켜쥐며 의지를 다졌다.
썩은 사과는 도려내야만 했다.
“좋아, 그건 너한테 맡기지. 혹시 힘들면 말하고.”
“감사합니다.”
제갈신길은 시후가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는 말에 얼굴이 피었다.
며느리의 안가인 원후가의 정확한 힘을 모르는 상태에서 시후와 같은 고수의 존재는 큰 힘이 되었다.
시후는 백발의 노인이 어린아이처럼 웃는 모습을 보자 도와주는 김에 좀 더 도와주고 싶었다.
품속에서 신명단이 든 옥병을 꺼내며 제갈신길에게 내밀었다.
제갈신길 또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기에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다.
“거기 10알 정도의 신명단이 들어 있으니 그것으로 네 몸 상태부터 호전시켜라.”
“감사합니다, 이렇게 끝없는 은혜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
“뭔, 보답은 뭐…. 아!”
시후는 굳이 지금의 상황에서 제갈신길이 자신에게 해줄 일이 없었기에 보답이라는 것을 받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문득 신명단을 보며 떠오른 것이 있었다.
“하나 있다.”
“말씀만 하십시오.”
“여기 중국에서 넘어온 실력 좋은 의원이 있다며?”
“아! 네, 있습니다. 신의(神醫)라는 의원입니다.”
“신의는 무슨, 그건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할게. 걔 좀 빌리자.”
“네? 빌리신다고요?”
“어, 당분간 나 대신에 상처를 치료해줄 의원이 좀 필요하거든.”
시후는 의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태산과 인호를 봤다.
둘은 갑자기 쏟아지는 시후의 시선에 흠칫했다.
요즘 매일같이 보는 시후의 눈빛이었기에 독심술은 아니었지만, 저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 그 의원은 우리 때문에 필요한 거구나, 아… 지옥이 다가오고 있구나.’
또 한 번의 지옥 훈련을 예견하는 시후의 눈빛에 태산과 인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