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태산과 인호는 패브릭 소재로 이루어진 고급지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둘의 앞에는 비취 같은 아름다운 녹색의 향기로운 녹차가 놓여 있었다.
녹차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만도 한데 둘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둘의 앞에는 이 집의 주인인 제갈상민이 자리했다.
제갈상민은 찻잔을 들어 녹차의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머금고는 내려놓았다.
“용정차라는 겁니다. 중국 저장성 항저우에서 최고급으로 공수해 온 것입니다. 드시지요?”
“아…. 네.”
태산과 인호는 아버지뻘인 제갈상민의 존대에 상당히 부담을 느꼈다.
둘이 이렇게까지 제갈상민에게 존대를 받는 이유는 제갈세가의 초인종을 누르고 한 말 때문이었다.
“그래, 두 분께서 저희 집안을 제갈세가라고 부르셨다지요?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던데?”
꿀꺽-
제갈상민의 물음에 태산과 인호는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분명 시후가 시켜서 초인종을 누르고 제갈세가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말한 둘이었다.
제갈세가라는 단어에 대문은 활짝 열렸고 태산과 인호는 이곳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말투는 정중하지만, 압박감이 느껴지는 제갈상민의 기세에 둘은 점점 기가 눌렸다.
태산은 자신보다는 똑똑한 인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어서 무슨 말 좀 해보라며 눈을 부라렸다.
인호는 태산의 성화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크흠, 가… 가주님…. 저희는….”
“저는 가주가 아닙니다. 가주는 저희 아버님이십니다.”
자신이 가주가 아니라고 말하는 제갈상민의 표정은 확 어두워졌다.
그 때문인지 태산은 숨이 턱 막혀와 호흡이 가빠졌다.
인호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 저희가 찾아온 이유는 제갈세가의 기운 가세를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파칭-
인호의 말이 끝나자 제갈상민이 들고 있던 용정차의 찻잔이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졌다.
들고 있던 찻잔이 부서졌지만 제갈상민의 손에는 아무 상처도 없었다.
오히려 손에 흐르는 용정차가 빠르게 증발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존대하던 제갈상민의 낮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는 누군데 세가의 가세를 논하는가?”
“컥!”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있던 둘은 제갈상민이 내뿜는 기세에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인호와 태산의 머릿속에 시후의 말이 떠올랐다.
- 기절할 것 같은 순간, 각자 가르쳐준 심법을 이용해 내공을 확 폭발시켜.
그 말이 떠오르자 둘은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둘의 주위에 공기가 팽창하듯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확-
제갈상민은 범인이라 생각했던 둘의 몸에서 내공이 뿜어져 나오자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초인종을 눌러 ‘제갈세가’를 거론할 때부터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어린아이들이 내공을 뿜어내다니 믿기지 않았다.
거기다 자신의 기세를 밀쳐낼 정도로 상당히 중후한 내공을 보이기에 또 한 번 놀랐다.
그에 반해 태산과 인호는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시후가 이야기한 것은 여기까지인데? 어쩌지?’
시후가 지시한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제갈상민 앞에서 기운을 일으켜라.
그 말에 이렇게 기운을 일으켰더니 제갈상민의 무서운 눈초리만 더해가서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거기에 이제 슬슬 둘의 내공도 바닥을 보였다.
제갈상민 역시 둘의 기운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보고는 눈치를 챈 듯했다.
“어디서 내공을 얻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 출처를 말해야 할 게야.”
태산과 인호가 어린 나이에 저렇게까지 중후한 내공을 얻은 것의 출처를 알고 싶었다.
그것이 세가의 어린 제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드디어 둘의 내공이 다했는지 더는 기운이 풍겨 나오지 않자 제갈상민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앉을 건데 뭐 하러 일어나?”
“헉! 누구냐?”
쉬익-
무인으로서 후미를 잡혔다는 것은 목숨을 맡겨 놓은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제갈상민은 기겁했다.
그리고 무인답게 등을 돌리면서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손을 뻗어갔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가장 간결하게 움직이는 금나수 수법이었다.
시후는 며칠 전에 보았던 금나수 수법을 또다시 보게 되자 반가우면서도 가소로웠다.
그리고 빠르게 목을 잡아 오는 제갈상민의 손을 가볍게 맞잡아갔다.
텁-
“이… 이럴 수가?”
제갈상민은 세가의 독문무공을 금나수에 섞어 뻗었었다.
보통의 금나수와는 달라 잡거나 피하려는 순간 손이 나누어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특별한 묘리가 담긴 무공이었다.
제갈상민의 이 금나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대상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악수하듯 잡히고 후미까지 내준 상태가 되자 등골이 오싹했다.
안색이 창백해진 제살상민과는 다르게 시후는 웃으며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태산과 인호의 옆으로 걸어갔다.
이렇게까지 현실에서 내공이 바닥날 정도로 사용한 적이 없던 둘이었기에 상당히 지쳐 보였다.
시후는 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고생했다. 운기조식을 좀 하도록 해.”
“헉, 헉헉, 알겠어.”
태산과 인호는 턱까지 차오르는 숨에 헐떡이며 겨우 소파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곧장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제갈상민은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의 금나수를 막아내고 저 둘에게 운기조식을 지시하는 시후가 어이없었다.
거기에 마치 제집인 양 운기조식에 들어간 둘을 보며 당장이라도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도 눈앞의 어려 보이는 녀석에게 등 뒤를 잡힌 것에 뒷골이 오싹했다.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한 제갈상민을 대신해 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희 세가가 제법 머리 좀 쓸 줄 아는 것은 알지만 지금은 그러지 마라.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시후의 말에 제갈상민은 뜨끔했다.
자신의 아들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세 명이 무공을 익힌 것도 놀라운데 그중 한 명은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을 정도로 고강했다.
그러자 운기조식을 하는 둘에게로 시선이 갔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기혈이 역류해 죽을 수 있는 운기조식을 버젓이 하고 있으니 저 둘을 이용해 어찌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시후의 한마디에 그 생각이 싹 날아가 버렸다.
만약 자신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분명 시후도 움직일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제갈상민의 눈에서 ‘포기’라는 두 글자를 읽은 시후는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오늘은 대화 좀 하러 왔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용정차 한 모금 마시고 진정부터 해라.”
제갈상민에게 진정하라며 시후는 용정차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태산과 인호가 마시려던 용장차가 저절로 움직였다.
일 갑자의 내공은 있어야 가능한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수법이었다.
제갈상민은 허공섭물을 저리도 쉽게 사용하는 시후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정확히 가슴 앞까지 다가와 둥둥 떠 있는 용정차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아 든 제갈상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귀, 귀하는 누구십니까?”
시후는 자신의 아들뻘인 녀석에게 말을 높이는 제갈상민을 보며 역시나, 라고 생각했다.
천마 시절에도 제갈세가는 무공보다는 이렇게 지략에 더 뛰어난 녀석들이었다.
그때를 떠올려 말 한마디에도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웃고 있던 표정을 지우며 입을 열었다.
“묻자. 너희가 진짜 제갈세가인가?”
“그렇게 생각하시니 찾아오신 거 아니십니까?”
“나는 문언(問言)이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 알겠습니다.”
자신의 질문에 대답이나 제대로 하라는 시후의 말에 제갈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시후의 눈에서 잠깐이나마 살기가 번뜩였기에 고분고분해진 거였다.
시후는 자신의 인내심을 가늠하며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이번도 원하는 답이 돌아오지 않을 시에는 대충 정리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 대충이라는 것은 시후의 기준에서였으니 제갈세가에는 결코 득이 되지 않을 거였다.
“다시 묻자. 현원신공(玄元神功)을 아는가?”
“어, 어떻게? 그건 저희 독문무공입니다. 어찌 아시는 것인지….”
제갈상민은 진심으로 놀랐다.
현원신공은 제갈세가의 맥을 이어 오는 이에게만 전수되는 독문무공이었다.
자신도 얼마 전에 아버지인 제갈신길이 비급을 전해 줬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가 평생 세가의 주인으로 살아온 자신만이 아는 사실을 알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현원진신공(玄元眞神功)은 보지도 못한 것 같구나.”
“그, 그게 무엇입니까?”
“쯧, 모든 것에 통달하여 시초를 알고자 만든 것이 너희 세가의 무공이거늘….”
제갈상민은 이 또한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이쯤 되자 제갈상민은 입을 꾹 다물고 시후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꺼내는 순간 이 기회를 날려버릴 것 같아서였다.
제갈상민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시후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적의가 아닌 호의임을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가의 독문무공을 알고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알려주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시후 역시 이제는 완전히 경청하는 자세로 바뀐 제갈상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들을 자세를 갖춘 듯하구나.”
“말씀하십시오.”
“현원신공은 너희 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배울 수 있게 만든 무공이고, 현원진신공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이룬 이들이 배울 수 있는 독문무공이다.”
시후의 말에 제갈상민은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진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시후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충격에 휩싸였다.
“네 아비가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이 현원진신공을 익히다 주화입마에 빠져서 그런 것이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허나,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우쳐 그것을 무공으로 바꾸려 했던 너희 제갈세가의 뜻을 모르지는 않을 터….”
시후는 말끝을 흐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후의 손 위에서 아주 작은 검은색 구슬이 생겨났다.
검은색 구슬을 스스로 회전을 하는가 싶더니 곧 부풀어 올랐다.
주먹만 한 크기까지 부풀어 오른 검은색 구슬은 점차 회전을 멈췄다.
그러자 검은 구슬의 내면에 수많은 별이 보였다. 마치 우주를 연상케 하는 듯한 구슬이었다.
제갈상민은 저 구슬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제갈세가의 독문무공이라고 생각하던 현원신공을 극성으로 익히면 발현할 수 있는 건곤주(乾坤珠)였다.
우주의 이치를 담고 있는 저 구슬을 격공장으로 사용한다면 능히 집 한 채를 날려버릴 수 있었다.
아직 자신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시후가 보여주자 제갈상민의 머릿속에서 의심이라는 단어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쿵-
“선인의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제갈상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엄청난 무위를 보여 준 시후를 반로환동한 선인으로 생각하는 거였다.
그런 제갈상민을 보며 시후는 턱을 매만졌다.
드디어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아주 바람직한 위치가 되었다는 생각에서였다.
때를 맞추어 운기조식을 마친 태산과 인호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두 눈을 떴다.
그러고는 방 안에 펼쳐진 장면이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비볐다.
태산과 인호는 조용히 시후 옆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시후야? 어떻게 된 거야?”
“왜…. 저분이 네 앞에 저러고 계시는 거야?”
운기조식을 하느라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없던 둘은 시후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러다 턱을 매만지며 미소 짓고 있는 시후의 표정을 보더니 입을 다물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저 미소는 분명!’
Safety World에서 퀘스트 여관 마스터에게 프리패스 선언을 할 때 시후의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현실 세계에서 다시 보게 되자 몸이 먼저 반응해 물러난 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