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시후는 눈앞에 있는 집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여기가 제갈재민네 집이라고?”
“응, 좀 크지?”
“허…. 아주 ‘나 여기 있소’라고 광고라도 하는 모양새인데?”
시후의 말대로 제갈재민의 집은 딱 제갈가(諸葛家)라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제갈가의 ㈜J.K제약회사는 강남 한가운데 30층짜리 빌딩 전체를 사용했다.
그리고 지금 시후가 찾은 제갈재민네 집은 그 건물 뒤에 자리했다.
그것도 강남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옥집으로 말이다.
담벼락의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 것이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커다란 나무 대문 위에는 대리석을 깎아 만든 커다란 제(諸)자가 걸려 있었다.
그 ‘제(諸)’자를 보니 시후의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제갈세가를 찾아갔을 때 그 자식들도 저런 거를 걸어 놨었지.’
천마 시절 무림 정복을 위해 나섰을 때 제갈세가를 들렀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제갈세가의 가장 높은 전각 위에 걸려있던 저 제(諸)자를 천마멸겁장으로 날려 버렸었다.
지금도 저 제(諸)를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오늘은 은밀한 방문이 목적이었기에 참기로 했다.
“그런데 시후야, 여기 카메라가 엄청 많은데?”
“CCTV?”
태산의 말대로 담벼락 주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24시간 감시를 하는 것 같았다.
“쯧, 고작 저런 기계에 기대다니, 제갈세가도 많이 쇠퇴했네?”
아무리 카메라가 발달했다지만 그림자 속에 숨어 움직이는 무인을 찾을 수는 없는 거였다.
시후는 자신을 바라보며 긴장한 모습을 역력히 보이는 태산과 인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너희에게 가르친 비천잠행술은 결코 저런 기계 따위에 발각될 일은 없으니까.”
“응! 알았어!”
시후의 말에 둘은 주먹을 움켜쥐며 며칠 동안 흘렸던 피와 땀을 되새겼다.
딱히 비천잠행술을 테스트해볼 기회는 없었지만 둘은 시후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시후는 둘의 눈에서 자신감이 엿보이자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그림자가 좀 더 길어지면 움직이자. 그전에 편의점이나 갈까?”
“오! 굿 아이디어!”
편의점을 가자는 시후의 말에 가장 반기는 것은 태산이었다.
사실 오늘 제갈재민네 집에 몰래 들어간다는 말에 둘은 위를 비워 놓은 상태였다.
혹여나 자신들이 먹은 음식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것은 아닐까 해서였다.
그 때문에 어찌나 오래 공복 상태를 유지했는지 아까부터 배 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시후도 그 소리를 들었기에 둘에게 편의점을 가자고 제안한 거였다.
그렇게 셋이 라면과 냉동식품으로 허기를 달래는 사이 제갈재민네 집 앞에 검은색 세단이 정차하는 게 보였다.
뒷좌석 문이 열리며 내리는 남성을 보고 태산이 손가락질했다.
“어? 재민이네 아버지다!”
“오호~ 저 사람이?”
시후의 눈이 번쩍였다.
눈에 띌 정도로 볼록한 백회혈이 보였다.
강시후로 살면서 처음으로 내공을 가진 이를 본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저기는 나 혼자 들어갔다가 와야겠다.”
“푸룹! 왜?!”
태산은 깜짝 놀라 먹던 라면을 뿜었다.
갑자기 시후가 단독 행동을 하겠다고 하니 놀란 거였다.
“저 아비라는 사람, 무공을 익혔다, 그것도 제법 수준 높은 내공을 가질 정도로.”
“뭐? 진짜?”
그 말에 둘은 집으로 들어서는 제갈재민네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무공이라고는 시후를 통해 처음으로 보았던 것인데 그것을 익힌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시후 역시 당장 저 대문을 부수고 들어가 녀석의 머리채를 잡아 궁금한 것들을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 시대에 무공의 맥이 이어지고 있는지.
제갈세가의 맥은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인호가 제갈재민네 집에 관해 설명해줄 때 정치 쪽에 큰 힘이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일전에도 정치적인 압박으로 아버지 병원에 폐를 끼칠까 시후가 물러났다는 일화도 있었으니 그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천마 시절 경험으로 정치판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천마신교 내에서도 무수한 정치판이 존재했었으니 말이다.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쥐꼬리만 한 권력을 어떻게 해서든지 키워보려는 무수한 권모술수가 난무했었다.
천마 때 그 정치판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무시할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적인 힘을 무시할 힘이 없음이 안타까웠다.
본래 Safety world에서 내공을 회복할 수 있음을 알았을 때만 해도 미친 듯이 게임만 하고 싶었다.
허나,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과 무한한 믿음을 주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생각을 바꿨다.
천마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과 행복이었기에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두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어리숙하면서도 약하디약한 녀석들에게서 시후에 대한 깊은 우정을 느꼈다.
그랬기에 두 녀석을 좀 더 강하게 키우고 앞으로 자신이 걸어갈 길을 같이 걸어가고 싶었다.
독단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천마만의 우정을 다지는 방법이었다.
지금도 두 녀석은 제갈재민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무공을 익혔다고 하니 걱정을 한 바가지나 하고 있었다.
이미 시후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보았음에도 말이다.
“그렇다고 너희보고 놀고 있으라는 게 아니야. 너희가 해줘야 할 게 있다.”
“진짜?! 뭔데? 말만 해!”
둘은 시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의욕을 불살랐다.
그리고 잠시 후 태산과 인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제갈재민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 * *
제갈재민의 아버지인 제갈상민은 급히 집으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알아주는 제약회사의 우두머리가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제갈상민이 집으로 돌아온 이유가 중하다는 거였다.
제갈상민은 빠르게 안가의 복도를 지나치며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제갈세가의 가주(家主)만이 기거할 수 있는 방이었다.
제갈상민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들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문지기들이 안쪽으로 향해 말했다.
“가주님, 첫째 아드님께서 드셨습니다.”
잠시 후 문이 저절로 열렸다.
제갈상민은 문지기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대학병원의 VVIP 병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방 안 한가운데는 커다란 병상이 놓여 있었고, 그 옆을 둘러싼 여러 명의 의료진과 여러 가지 의료기구들이 즐비했다.
그 침대에는 백발의 노인이 누워 있었는데 바로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신길이었다.
제갈신길은 병상에 누워 호흡기까지 끼고 있었지만, 아들이 들어왔다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서 오너라.”
“아버님, 괜찮으신 겁니까?”
“허, 허허, 괜찮다. 잠시 발작이 있었는데 다들 호들갑이구나.”
“아버님….”
제갈상민은 회사에서 중요한 미팅 중에 아버님의 병세에 대한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거였다.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신길은 자식에게 모든 사업을 물려준 후에 무공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고를 정리하던 중 제갈세가의 독문무공에 대한 비급을 발견했다.
자신의 대에서 그 비급을 발견하다니. 독문무공을 잇게 하는 것이 가주로서 마지막 임무라 생각했다.
밤낮을 잊고 식(食)을 잊고 무공에만 매진하던 어느 날 갑자기 기혈이 역류하더니 결국 주화입마에 빠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대 의학과 J.K제약회사의 신약이 있어 주화입마에 빠진 제갈신길을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거였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제갈신길은 이미 황천길을 건넜을 거였다.
제갈신길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느꼈는지 손을 들어 올렸다.
제갈상민은 재빠르게 다가가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내가 세가에 큰 업을 이루고자 너무 서둘렀나 보구나. 결국 이렇게 너희들을 힘들게 하다니.”
“아닙니다. 그 누가 아버지를 뭐라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서 일어나셔야지요.”
“허, 허허, 그러고 싶지만 그러지를 못하는구나. 마지막 구결만 완성했더라면 제갈세가의 위상을 다시 드높일 수 있었을 텐데….”
병상에 누워서도 세가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제갈상민은 안타까웠다.
아들이 왔다는 소식에 힘을 내던 제갈신길은 힘에 부치는지 결국 아들의 손을 놓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제갈상민은 아버지의 손을 이불 속으로 조심스럽게 넣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쪽에 늘어서 있는 의료진을 바라보여 작게 속삭였다.
“아버님의 병세는 어떻습니까?”
“주화입마에 빠지신 후 여러 가지 약제를 써보았으나….”
“그만.”
뒷말은 듣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제갈상민은 손을 들어 의사의 말을 끊었다.
소리 없이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의사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렇게 방 안에는 잠든 제갈신길과 간호사 한 명만이 남게 되었다.
간호사는 교대로 제갈신길의 옆에 있어야 했기에 한쪽에 놓여 있는 의자로 향했다.
그리고 피로가 쌓였는지 익숙한 행동으로 기지개를 켰다.
“으~,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교대인데…. 헉! 으음….”
기지개를 켜던 간호사는 침대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을 보고는 기겁했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던 찰나 갑자기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듯 자리에 쓰러졌다.
침대 그림자가 길어져 나타난 것은 훤칠한 키에 곱상하게 생긴 외모의 시후였다.
시후는 극에 달한 비천잠행술을 통해 침대 그림자에 녹아 있었다.
제갈상민이 이 방에 들어올 때 같이 들어온 거였다.
그래서 제갈신길과 제갈상민의 대화를 통해 전반적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시후는 소리 없이 침대로 걸어가 잠들어 있는 제갈신길의 이마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를 슬쩍 흘려 넣어 몸 상태를 확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바퀴 돌고 돌아온 기는 다시 시후에게 회수되었고 제갈신길의 몸 상태에 대한 정보를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전형적인 주화입마의 상태로군. 내공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공을 한 결과인 것 같은데, 어떤 무공을 운공하다가 그런 거지?’
단번에 제갈신길의 상태와 왜 주화입마에 빠진 것인지 알게 된 시후는 어떤 무공을 사용하다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제갈신길은 삼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갖고 있었다.
천마 시절 제갈세가 가주가 사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갖고 있었으니 그리 뒤지는 내공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제갈세가 가주 녀석의 무공을 파훼하면서 느낀 것은 그리 큰 내공 운용이 없어도 제갈가의 무공을 펼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분명 세가의 독문 무공을 연마하다 이리되었다고 했는데 그 연유가 궁금했다.
아니면 시후가 알고 있는 제갈세가와 이곳의 제갈세가와는 다른 것인가 싶었다.
‘뭐, 그건 잠시 후면 알게 되겠지. 그러고 보니 태산과 인호가 신호를 보낼 때가 됐는데?’
태산과 인호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졌다.
무언가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