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냉혈미녀 유라는 세상 당황스러웠다.
현재 자신의 레벨은 Lv. 133.
한스텔 마을을 벗어나 헤라 왕국에 도착했을 때 우연찮게 히든 퀘스트를 받았다.
거리에서 포교 활동 중이던 헤라교의 교인이 다른 유저에게 핍박을 받는 것을 도와주었더니 퀘스트를 청해왔었다.
Lv. 100이 되기 전에 사냥했던 거미 여왕 타란을 수호하라는 히든 퀘스트였다.
48시간이라는 타임 카운트 퀘스트였기에 유라는 주말을 이용하여 클리어할 생각이었다.
기간 퀘스트는 보기 드문 퀘스트였고 Safety World에서 기간 퀘스트는 큰 보상이 따랐다.
히든 퀘스트에 기간 퀘스트라면 엄청난 보상이 약속되어 있었기에 개인 방송 콘텐츠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Lv. 100이 되지 못한 유저들이 오는 케냔 협곡에서 타란을 지키면 되기에 유라는 쉽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몇 유저들이 왔지만 역시나 쉽게 해결했었다.
그런데 방금 비천대가 어쩌고저쩌고하던 이들을 처리한 후 마지막 남은 유저를 처리하려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다.
“미친!!”
유라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이 가진 방어 스킬 모두를 사용했다.
쌍검을 교차시켜 빛을 폭사하여 상대방의 시력을 멀게 하는 ‘발광검’.
죽음에 이르는 치명타를 맞았을 때 그것을 1회 무효화시켜 주는 수호의 귀걸이의 특수 스킬 ‘죽음에서 살아 돌아오는 강한 의지’.
망토의 끝을 잡고 몸에 두르면 근처에 있는 그림자로 스며들어 갈 수 있는 망자의 망토의 특수 스킬 ‘검은 그림자’.
이 세 가지 스킬들로 지금까지 수많은 위험에서 벗어났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러지를 못했다.
발광검을 펼쳐 빛을 폭사시켰지만, 저 녀석이 휘두르는 검은 어김없이 도망치는 길목을 막아 왔다.
그 막아오는 검을 밀쳐내고 다리를 잘라갔지만, 녀석은 폴짝 뛰어오르는 가벼운 동작으로 피해버리고는 등을 베어버렸다.
그걸로 귀걸이의 특수 스킬이 사라졌다.
등을 베인 충격으로 땅을 데구루루 굴러서 근처 바위까지 도망쳤다.
그러고는 망토 끝을 잡고 검은 그림자 스킬을 사용하여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역시나 갑자기 자신이 사라지자 녀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찾았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녀석이 몸을 돌리는 순간 바위들의 그림자를 타고 녀석의 등을 찔러갔다.
쌍칼이 녀석의 등에 닿으려는 순간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녀석의 입과 그림자가 된 자신을 정확히 힐끗거리는 눈을 발견했다.
챙-
결국, 그렇게 또 공격이 막히자 유라는 토끼 눈을 뜬 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은신술은 천마동에서 익힌 것 중 가장 허접한 거였다.”
시후는 토끼 눈을 뜬 채 놀라는 유라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섬광탄이라도 쓴 건지 시야를 멀게 한 것은 제법이었지만 시력으로만 사물을 찾은 지는 이미 옛날이었기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감으로 쉽게 유라를 찾아 등을 베었지만 즉사하지 않는 모습에 무슨 스킬을 쓴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은신술을 쓰자 천마동에서 익힌 은신술 몇 개가 떠올랐다.
과거를 떠올리게 해준 유라에게 줄 선물은 더는 괴롭히지 않고 죽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끝내볼까?”
“자, 잠깐만!”
챙- 챙-
끝을 알리는 시후의 말에 유라는 당황하며 시간을 벌어보려 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최선을 다해 막는 것뿐이었다.
시후가 휘두르는 검에는 별다른 기술도 없었다.
그저 베고 찌르는 것뿐.
그런데 어째서인지 가장 막기 힘든 곳만 골라서 공격해왔다.
유라는 자신이 상대할 만한 이가 아니라는 판단에 죽어서 로그아웃하느니 히든 퀘스트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동안 감추어놨던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미러링(Mirroring)!”
스팟-
유라가 미러링이라 외치자 모습이 일렁였다.
그와 동시에 시후가 고개를 홱 꺾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기운을 놓친 것은 아니었기에 정상 입구에서 나타나는 유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잔상을 남기는 이형환위를 게임에서 보다니 놀라웠다.
정상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라는 질렸다는 표정을 보였다.
“당신 누구죠?”
“갑자기 통성명이라도 하자는 건가?”
유라는 히든 퀘스트까지 포기한 마당에 정체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물어봤다.
하지만 저 유저는 이름을 알려주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더 캐물어 봐야 소용이 없었기에 유라는 포기했다.
유라는 고개를 돌려 타란을 바라보았다.
“아깝지만…. 퀘스트 포기.”
유라가 타란을 보며 퀘스트 포기라 외치자 타란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흥! 그럼 그렇지, 너희 유저라는 족속들은 언제나 그렇지. 꺼져라!”
타란의 축객령으로 퀘스트 실패 알림이 뜨자 유라는 냉혈미녀답지 않게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이 사태를 만든 시후를 노려봤다.
“어디서나 등 뒤를 조심하시길 바라요.”
유라는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키자는 생각에 복수를 다짐하는 듯한 말을 남기고 떠나려 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시후의 모습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느껴지는 목 언저리의 서늘함과 함께 유라는 Safety World에서 로그아웃되었다.
시후는 자신이 당한 것 그대로 이형환위를 펼쳐 순간적으로 유라의 등 뒤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단숨에 유라의 목을 쳤다.
어찌나 빠르고 간결한 동작이었는지 유라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로그아웃이 되었다.
시후는 즐거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등 뒤는 언제나 조심하고 있단다, 아가야.”
이렇게 또 한 사람에게 참된 교육을 해 주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이제 이곳에 온 마지막 용건을 끝마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시후의 시선이 타란에게로 향하자 타란은 움찔했다.
유라가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 타란은 알 수 있었다.
유라에게 자신은 아주 손쉬운 사냥감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유라가 자신의 수호자라는 역할을 자처하자 사실 좀 기뻤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유저들에게 죽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만 해도 몇 명의 유저들이 유라에게 죽어 나갔는지 샐 수도 없었다.
그런 유라를 너무나도 손쉽게 죽여 버린 시후의 눈빛을 받자 순간 오금이 저렸다.
꿀꺽-
긴장한 타란의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멀리 떨어진 시후에게까지 들려왔다.
“녀석, 긴장하기는. 시간이 없으니 그 목, 길게 빼내거라.”
소용없는 반항 따위는 하지 말라는 시후의 말에 타란은 사고가 정지했다.
쌍검을 길게 늘어트려 천천히 걸어오는 시후의 모습에 숨이 막혔다.
‘지금까지 나를 사냥하려고 나타났던 유저들과는 달라.’
사실 타란은 다른 NPC와는 달랐다.
NPC들은 죽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아났다.
다만 살아난 NPC는 기존의 기억은 모두 잊은 채 본인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하지만 타란은 케냔 협곡의 주인이라는 자리에서 언제부터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 죽기 직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걸어오는 유저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그런데 문제는 시후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고 얼굴에 피가 쏠리는 것이 죽기 직전에 느끼던 것과는 달랐다.
마치 태초에 갖고 있던 본능이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남자를 갖고 싶어. 그의 곁에 있고 싶어. 함께하고 싶어.’
지금까지 만나본 유저 중에서 가장 큰 공포를 느끼게 해주는 시후에게서 타란은 다른 감정을 느꼈다.
극강의 공포가 생존 본능을 넘어 종족 번식의 본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였다.
시후는 자신이 다가갈수록 시시각각 변하는 타란의 표정을 읽으며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러다 순간 걸음을 멈췄다.
“아… 기억났다, 저 눈빛, 저 반응…. 설마….”
천마 시절 사대 호법 중 하나였던 요화선녀 옆에 찰싹 붙어 있던 녀석이 떠올랐다.
요화의 오른팔 역할을 자처하던 녀석은 틈만 나면 천마에게 달려들었다.
요화가 아끼던 녀석이기도 했고 제법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 그저 어리광 수준으로 여겨 돌려보냈었다.
나중에야 녀석의 성향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근처에 오는 것을 금했었다.
그때 녀석이 천마를 바라보는 눈빛이 딱 타란의 눈빛과 같았다.
녀석의 이름은 화식녀(花食女).
언뜻 들으면 꽃을 먹는 녀석 같지만, 사실은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이용하여 남자를 잡아먹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화식녀가 눈빛을 빛낼 때는 언제나 상기된 얼굴로 같은 말을 내뱉었다.
“탐나…. 갖고 싶어….”
“그래, 저 말이었어. 젠장!”
화식녀와 똑같은 말을 타란이 내뱉자 소름이 쫙 돋았다.
슬쩍 팔을 내려다보니 닭살이 쫙 돋아나고 털이 곤두서 있었다.
공포와는 다른 생리적인 거부감에서였다.
그래서인지 더는 타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타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8개의 다리가 케냔 협곡의 단단한 돌바닥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걸어오는 타란의 모습에 시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게 둘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벌이는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타란은 아무리 속도를 내어도 시후와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초조해졌다.
이렇게 해서는 시후가 도망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잠깐! 할 말이 있다!”
“말해.”
“일단 대화를 위해 잠깐 멈추는 게 어떤가?”
“네가 멈추면 나도 멈추지.”
시후의 말에 타란은 바로 걸음을 멈췄다.
그에 시후도 걸음을 멈추자 타란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싶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라.”
“네 목숨.”
“불가(不可). 그것 말고 다른 것을 말하라.”
목숨을 달라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것을 요구하라는 타란의 모습에 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죽일까?’
지금 느껴지는 것으로는 천마멸겁장 한 방이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러지 않는 것은 알 수 없는 찝찝함 때문이었다.
여기서 타란을 죽이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시후는 그게 무얼까 고민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스테이터스 창을 열었다.
그리고 퀘스트 항목에 완료되지 않은 케냔 협곡의 주인이 되어라 라는 것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어쭈? 이것 봐라?”
시후는 퀘스트 내용을 읽으면서 교묘한 설명을 발견했다.
타란을 물리치고 케냔 협곡의 주인이 되라는 말은 쓰여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타란을 죽이라는 말은 쓰여 있지 않은 거였다.
‘그렇지, 저 녀석을 죽인다고 해서 케냔 협곡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시후는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타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케냔 협곡을 넘겨.”
“내 조건만 들어준다면 그렇게 하겠다.”
“조건?”
“너를 따라다니게 해다오!”
“아…. 역시나.”
타란의 요구에 화식녀가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런 녀석을 데리고 다녀봐야 어디에 쓸모가 있겠느냐마는 문제는 이 찝찝함이었다.
천마 시절에도 이 찝찝한 기분을 애써 무시했다가 크게 낭패를 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후는 하는 수 없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쯧, 좋아, 대신 나도 조건이 있다.”
“뭐, 뭐든!”
시후가 자신의 요구에 응할 반응을 보이자 타란은 들뜨기 시작했다.
“먼저, 존대하기. 이제부터 내가 네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나를 모셔라.”
타란은 ‘모셔라’라는 말에 지금까지 중에 가장 크게 눈을 부릅떴다.
“알았다…. 아, 아니, 알겠어요!”
“그래, 그럼 지금부터 내가 네 주인이고 이 케냔 협곡의 주인이다?”
“네! 주인님!”
띠링-
타란이 시후를 주인으로 인식하자 알림음이 들려왔다.
아마도 퀘스트를 성공했다는 알림일 거였다.
시후는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타란을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팟-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인 시후는 타란의 앞에 훅 하고 나타났다.
타란은 갑자기 눈앞에 시후가 나타나자 한순간 숨이 막혀왔다.
그런 타란에게 시후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운명 공동체가 된 기념으로 악수나 할까?”
“운…명?!”
타란은 ‘운명’이라는 단어가 큐피드의 화살이 되어 심장에 꽂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시후가 내민 손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맞잡았다.
그 순간.
‘오공단금술(五孔斷禁術).’
시후는 맞잡은 타란의 손을 향해 기운을 흘려 넣었다.
일전에 퀘스트 여관 마스터에게 가한 금제를 타란에게도 가하는 거였다.
그때는 아직 내공이 부족하여 직접 손을 썼지만, 이제는 기를 흘려 넣는 것으로도 가능했다.
시후에게 반(叛)하는 행동을 하는 순간 피를 토하며 죽게 되는 운명인 줄도 모르고 타란은 그저 시후의 손을 잡은 것이 벅찰 뿐이었다.
‘이, 이제, 이것을 시작으로…. 시작으로!!’
타란의 눈이 부푼 꿈만큼 커진 것을 본 시후는 슬쩍 손을 뺐다.
손을 더 잡고 있다가는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였다.
시후의 단호한 행동에 타란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직 온기가 남은 손을 꼬옥 안았다.
그런 타란의 행동을 애써 못 본 척한 시후는 잠시 미뤄뒀던 알림창을 확인했다.
금제도 가했으니 앞으로 자신이 격을 고난에 대한 보상을 확인할 심산이었다.
그리고 보이는 메시지에 그 어느 때보다 물욕에 가득 찬 눈빛으로 감탄했다.
“그렇지! 이 정도는 줘야 내가 납득이 가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