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시후와 비천대의 거미 사냥은 미친 듯이 이어졌다.
상당히 일관된 방식으로 케냔 협곡의 거미들을 싹쓸이하며 올랐다.
비천대가 비천화벽진의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서 거미들을 막아내면 시후가 마무리를 하는 방식이었다.
케냔 협곡을 오르면 오를수록 거미의 숫자는 늘어갔고 거미들의 레벨 또한 높아졌다.
정상이 가까워진 지금은 쇳덩어리 색의 ‘철 거미’가 등장했다.
이곳까지 오르면서 올린 비천화벽진의 숙련도는 Lv. 9의 95%.
스킬의 숙련도 Max까지 고작 5%가 남은 상태였다.
숙련도의 레벨이 말해주듯 비천대의 움직임은 상당했다.
철 거미는 입에서 거미줄 대신에 철로 된 화살을 뿜어내는 녀석들이었다.
100마리의 철 거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철 화살은 하늘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당장 꼬치가 될 위기처럼 보였지만, 비천대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흥! 고작 철 화살로 되겠냐? 비천화벽진 일 초식!”
일비의 지시와 함께 일 초식 스킬이 발동됐다.
주위를 둘러싼 적에게 선공을 날리는 일 초식으로 떨어져 내리는 화살비를 피해 철 거미들에게 달려들었다.
비천대는 자신들이 본래 갖고 있던 달리기에 특화된 스킬을 쓰지 않았다.
그 스킬보다 일 초식에 의해 달려 나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일비는 시후에게서 돌려받은 바람의 단도를 역으로 쥔 채 눈앞에 나타난 철 거미의 다리를 공격했다.
철 거미의 외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철로 되어 있었다.
웬만한 유저들이 휘두르는 칼질로는 철로 된 외피에 생채기 하나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비가 사용하는 바람의 단도는 ‘떨림’이라는 특수 스킬이 있었다.
떨리는 속도가 1초에 1만 번에 이르는 초진동이었기에 단도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잘라버릴 수 있었다.
스걱- 스걱-
덕분에 일비는 철 거미의 다리를 두부 썰듯 썰며 나아갔다.
이비와 삼비는 일란성 쌍둥이였다.
그랬기에 취향도 비슷했고 Safety World에서 사용하는 무기도 같았다.
창(槍).
길이 2m에 끝에 뾰족한 촉이 달린 평범한 창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둘이 들고 있는 이 창은 Lv. 60이 될 때 시후가 선물로 준 창이었다.
이비가 가진 창은 화염창(火炎槍).
창끝에 닿는 것은 무조건 화염에 휩싸이게 하는 특수 스킬이 있는 창이었다.
삼비가 가진 창은 냉극창(冷極槍).
창이 지나간 자리에 서리가 일 정도로 급속으로 주위의 온도를 냉각시키는 특수 스킬을 가진 창이었다.
둘은 서로의 창의 특수 스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철 거미를 불태우거나 외피 안쪽부터 얼려버리며 나아갔다.
사비는 시후가 Lv. 50이 되면 준다는 특별한 아이템을 입고 있었다.
고슴도치 로브.
자그마치 희귀 아이템으로 로브를 쓰고 있을 때 공격을 받으면 바늘같이 가느다란 가시들이 돋아나 몸을 보호해주는 아이템이었다.
사비는 로브에서 돋아나는 가시를 이용하여 철 거미에게 달려들었다.
그저 들이박는 게 아니라 철 거미의 외피를 아주 살짝만 뚫는 순간 몸을 비틀어 다음 철 거미를 공격했다.
그렇게 생긴 작은 상처에 사비는 일렉트릭 쇼크 스킬을 퍼부었다.
결과는 외피 안쪽부터 감전된 철 거미들이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내며 쓰러져가는 거였다.
시후는 비천대의 싸우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검기를 대신하는 것은 아이템이나 스킬들로 가능했어.”
비천화벽진을 사용하는 데 피해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검기(劒氣)가 꼭 필요했었다.
내공이 없는 이들에게 아무리 게임상이라지만 검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기에 생각한 것이 아이템과 스킬이었다.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가득 들어 있었으니 적절한 것을 골라 주었다.
스킬은 이미 평소 자기들이 쓰던 스킬이 있어 조금의 조언만으로도 알아서 잘 사용했다.
그 결과 비천대는 이제 시후의 도움이 없어도 Lv. 70짜리 철 거미 100마리를 스스로 사냥하고 있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는 것을 확인한 시후는 마지막 퀘스트인 거미 여왕 타란을 잡기 위해 스테이터스 창을 확인했다.
종족 : 인간
직위 : 없음
직업 : 무림인
파티 : 6명(힘만 센 대머리, 얍삽한 로빈훗, 일비, 이비, 삼비, 사비)
- 힘만 센 대머리와 얍삽한 로빈훗은 거리가 멀어 경험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대상입니다.
<스텟 정보>
힘 : 135
민첩 : 135
체력 : 115 (HP : 11,500)
지능 : 130 (MP : 13,000)
분배 가능한 스텟 : 25
비천대를 레벨업시켜 주면서 시후도 상당히 레벨업을 했다.
스텟을 분배를 망설이던 시후도 블러드 토네이도를 소멸시킬 때 스텟 덕을 톡톡히 보았기에 생각을 바꾸었다.
“아직 호신강기(護身罡氣)도 완전치 않으니 체력을 올려볼까?”
시후는 적의 공격을 튕겨낼 수 있는 호신강기를 떠올렸다.
천마 시절에는 천마분심공을 통해 언제나 호신강기를 두르고 다녔었다.
그렇게 해도 내공은 넘쳐났었고 적을 멸(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암살로 인해 죽을 걱정을 덜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호신강기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이 고작 5분이 전부였다.
거기에 천마분심공을 사용하여 현실 세계와 Safety World를 연결 짓고 있었기에 호신강기를 펼칠 때는 다른 무공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스킬 목록은 또 왜 이래?”
<스킬 목록>
[천마면폭장, 천마멸겁장, 보보섭혼술, 일선지, 묵성오선지.]
지금 당장 펼칠 수 있는 무공이 수백 가지가 넘는데 목록에 들어있는 것은 고작 다섯 가지뿐이었다.
무공을 사용하며 MP가 소모되지 않는 이점이 있었지만 사용하는 무공이 스킬로 등록되는 데에는 어떤 제약이 있는 듯했다.
“이 게임, 생각보다 오묘하군.”
세계 최고의 A.I 시스템을 도입한 Safety World를 이제야 제대로 평가하는 시후였다.
시후는 분배 가능한 스텟 전부를 체력에 넣어주어 HP를 늘렸다.
이제 HP의 양은 14,000. 웬만한 거미의 공격 몇 번에 죽을 걱정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시후가 스텟을 정리하는 사이 비천대는 철 거미 사냥을 마쳤다.
비천대는 시후가 가르쳐준 비천화벽진의 효과를 절실히 느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강해졌다는 희열에 빠져 있는 비천대의 모습을 보며 시후는 피식 웃었다.
“자, 그만 감동에서 빠져나와. 저 모퉁이만 돌면 드디어 우두머리가 있을 테니까.”
방심하지 말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비천대의 표정은 이미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흐르고 있었다.
자신감을 갖는 것은 좋으나 적절한 긴장감과 상대방과의 차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시후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뭐…. 이런 건 직접 경험해 봐야 각인되는 것이지.’
백날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 같다는 생각에 시후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시후가 움직이자 비천대는 대열을 정비하여 빠르게 뒤따랐다.
역시 모퉁이를 돌자 드디어 마지막 보스인 거미 여왕 타란의 모습이 보였다.
케냔 협곡의 정상인 이곳은 제법 넓은 공터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는 뾰족한 바위 두 개가 일정한 거리로 있었는데 그 바위 사이 거미줄을 엮어 놓은 곳에 거미 여왕 타란이 매달려 있었다.
확실히 거미들의 우두머리답게 덩치 또한 다른 거미들의 배는 되어 보였다.
띠링-
[거미 여왕 타란 등장.]
[케냔 협곡의 주인 거미 여왕 타란 대신에 케냔 협곡의 주인이 되어라. 퀘스트 시작.]
시후는 눈앞에 나타나는 퀘스트 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퀘스트 여관 마스터에게 받은 퀘스트들은 빠짐없이 완료한 상태였다.
그 마지막의 종지부가 바로 이 퀘스트였다.
‘협곡의 주인이 되는 거라, 저 녀석을 죽이면 되나?’
마스터에게 받았던 퀘스트들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받게 되면 레벨업이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그렇게 되면 현실 세계에서는 얼마큼의 내공이 회복될지 기대가 되었기에 서둘러 거미 여왕 타란을 해치우고 싶었다.
그런데.
“저희가 먼저 나서 보겠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시후의 앞을 비천대가 막아섰다.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흘러넘치는 얼굴들을 하고서 말이다.
아무래도 피부로 직접 느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의 허락이 떨어지자 비천대는 대열을 정비하고는 타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거미줄에 매달려 등을 돌리고 있던 타란이 몸을 돌렸다.
비천대 네 명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타란을 처음 보는 시후에게는 신선한 모습이었다.
일단은 엄청난 미인이었다.
천마 시절 고금제일이라고 불리던 미인들을 수없이 만나 봤지만 저만한 미모를 가진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거미의 피부인지 껍질인지 모를 것으로 쫙 달라붙은 상의를 입은 모습은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이라면 배꼽 아래로는 8개의 거미 다리를 가진 거미의 몸뚱이라는 거였다.
상체는 매혹적인 미인의 모습에 하체는 괴물 거미의 모습이었다.
거기에 입술을 핥으며 입을 여는 타란의 목소리는 남자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오호호, 오늘도 나의 귀여운 유저들이 왔구나?”
비천대는 입맛을 다시며 거미줄에서 천천히 내려오자 타란의 모습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타란의 첫 번째 공격 신호였다.
유혹해 오는 듯한 목소리로 남녀 상관없이 유저들의 심금을 울리며 거미줄에서 내려와 땅에 닿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며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거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땅에 내려선 타란이 달려들기는커녕 팔짱을 끼고는 무언가를 기다렸다.
“뭐지? 왜 안 달려들어?”
“그러게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타란이 달려들면 비천화벽진의 삼 초식을 이용하여 타란의 공격을 흘리고 일 초식으로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타란이 저런 반응을 보이자 당황스러웠다.
그런 비천대를 보며 타란은 실실 웃었다.
“잘 왔다. 마침 내 수호자라는 녀석이 찾아왔었는데 실력을 테스트해볼 좋은 기회이구나?”
“수호…자?”
타란의 수호자라니, 비천대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때 뒤쪽에서 시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뾰족 바위 위다.”
그 말에 시선을 돌리자 타란의 거미줄이 연결된 오른쪽 뾰족 바위 위에 웅크리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녀석은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준비했다는 듯이 바위에서 뛰어내리고 공중제비를 몇 번 하며 멋지게 착지했다.
그리고 보이는 얼굴에 일비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헐! 냉혈미녀 유라?!”
냉혈미녀 유라. Safety World에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유저였다.
Safety World에서 개인 방송을 하는 유명한 유저로 빼어난 미모와 재치 있는 입담으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유라는 게임 중에는 절대 웃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이한 콘셉트였지만 쌍칼을 들고 무표정으로 적을 난도질하는 미녀의 모습은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비천대는 유라의 얼굴뿐만 아니라 그녀의 실력도 익히 알고 있었다.
“Lv. 130의 유저가 왜 여기에?”
자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레벨의 유라가 타란의 수호자라는 생각에 비천대는 당황했다.
유라는 그런 비천대를 보며 특유의 무표정으로 쌍칼을 빼 들었다.
“당신들에게 악감정은 없어요. 저도 히든 퀘스트 중이라서 하는 것이니 이해해 주세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신이 히든 퀘스트 중이니 죽어도 원망하지 말라는 소리에 비천대는 어이가 없었다.
그때 뒤쪽에 있던 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려, 비천대! 해보지도 않고 기죽지 말란 말이다!”
시후의 말에 비천대 네 명은 눈을 번쩍였다.
“그래! 우리가 배운 게 어떤 건데!”
비천화벽진이 아니었다면 도전도 해보지 못했을 케냔 협곡이었다.
그런 곳을 폭렙을 하며 단시간에 올랐다.
비천대가 알고 있는 선에서는 이만한 성과를 보인 유저는 없었다.
그만큼 비천화벽진은 대단했고 자신들은 강해졌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사냥한 거미들을 떠올리며 비천대는 각자 들고 있는 무기들을 들어 올렸다.
“좋아! 아무리 유라라도 비천화벽진을 상대로…. 헉!”
“미안해요.”
스걱-
일비는 걸어오는 유라에게 악을 쓰듯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천천히 걸어오던 유라가 순간 사라지더니 일비의 뒤에서 나타나 단숨에 목을 잘라버린 거였다.
언제나 비천화벽진의 공격 신호를 내리던 일비가 죽어버리자 나머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주춤하는 사이 유라의 쌍검이 춤을 추며 나머지 비천대의 목을 떨궜다.
시후는 순식간에 비천대 네 명이 당해버리자 한숨을 내쉬었다.
‘쯧, 비천화벽진의 약점을 정확히 찔렀어.’
일단 발동되기만 하면 완벽한 방어를 구축할 수 있었지만, 발동되기 전에는 그저 개개인이 뭉쳐 있을 뿐이었다.
천마 시절 비천대는 적어도 절정의 고수로 이루어져 있어 저런 단점이 없었지만, 사 형제는 달랐다.
그저 Lv. 70 언저리의 유저일 뿐이니 오히려 그 약점을 정확히 찌른 유라를 칭찬할 일이었다.
비천대 넷의 모습이 사라지자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 후 님…. 죄송합니다.
네 명 모두 똑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시후는 간단하게 24시간 후에 보자는 답장을 해주고는 앞을 바라봤다.
유라는 비천대가 서 있던 곳에서 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유의 무표정을 일관하면서 말이다.
잠시의 정적이 흐르자 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그대로 내려가신다면 목숨은 살려 드릴게요. 그러시면 마을로 돌아가셔서 보상은 받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여기서 죽으면 24시간 후에나 보상받게 되니 거미 여왕 타란의 퀘스트를 포기하라는 유라의 권유였다.
그 말에 시후는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려 교차시켰다.
챙-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부딪치자 용호쌍검(龍虎雙劍)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신에 각기 용과 호랑이의 문양에 새겨진 두 검이 번쩍이자 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검을 빼 들었다는 것은 돌아갈 뜻이 없다는 것이기에 유라는 싸울 자세를 잡았다.
“굳이 어려운 길을 가시겠다면…. 꺄악!”
“권주(勸酒)를 사양하는 게 내 특기라서.”
캉-
유라는 한숨을 내쉬며 말하던 도중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시후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등을 돌리지도 않고 들고 있던 쌍검을 교차시켜 뒷목을 방어했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에 앞으로 꼬꾸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땅을 몇 번이나 구르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 유라는 놀란 눈빛으로 시후를 바라봤다.
그런 유라를 보며 시후는 제법이라는 듯이 웃었다.
“오호~, 그걸 막아? 오랜만에 잡아보는 검이라 실력이 녹슬었나 보구나. 어디… 네가 그 녹 좀 풀어 주겠느냐?”
그 말을 끝으로 케냔 협곡의 정상에서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