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시후는 바위에 걸터앉아 비천대가 공유해준 상태창을 확인했다.
회색 거미를 잡을 때 보여주었던 무위 때문인지 비천대는 시후의 말을 잘 따랐다.
덕분에 막내가 Lv. 50까지 찍는 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이후 다른 비천대들도 같은 방법으로 광렙시켜 주었다.
시후가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쥐어박아 놓은 후 비천대가 돌아가면서 막타를 날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자 어느덧 레벨이 시후와 비슷해졌다.
“일비가 Lv. 68, 이비가 Lv. 67, 삼비가 Lv. 65, 막내가 Lv. 51. 이 정도면 한두 대 맞는다고 죽지는 않겠고.”
거미 여왕 타란에게 가는 길에 어이없이 죽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는 거미 여왕 타란에게 한 대 맞았다고 죽어버리는 일이 없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전투 방법을 달리하기로 했다.
때마침 굴곡진 길의 모퉁이를 돌자 붉은 거미 10마리가 갑자기 포위했다.
밑에서부터 시끌벅적하게 올라온 탓인지 미리 함정을 판 것 같았다.
시후는 기회다 싶어 비천대 넷에게 지시했다.
“너희끼리 일단 버텨봐라.”
그러고는 전면에 보이는 붉은 거미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전면에 붉은 거미는 5마리.
확실히 케냔 협곡을 오르면 오를수록 나타나는 거미들의 레벨도 올랐다.
맨 밑에서 만났던 진한 회색 거미와는 다르게 이 붉은 거미들은 지능이 높아 보였다.
시후가 움직이는 순간 한 녀석이 달려들어 움직임을 막아섰다.
그사이 다른 녀석은 거미줄을 발사하고 또 다른 녀석은 기다란 다리로 찔러왔다.
나머지 녀석들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뒤에서 대기했다.
‘이것 봐라?’
훈련이라도 받은 듯한 모습에 호기심까지 일었다.
바로 죽이려던 생각을 살짝 접어두고 천마보(天魔步)를 펼쳤다.
뒷짐을 진 채로 산책이라도 하는 듯이 붉은 거미들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했다.
천마동의 마지막 관문에서 습득한 천마보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걸음을 옮길 수 있는 보법이었다.
오감에 육감까지 터득해야 하는 전제 조건이 있었지만, 환골탈태하며 그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이처럼 난잡한 공격에는 천마보가 제격이지.’
동시에 다가오는 거미줄, 거미 다리, 진액 어느 것 하나 시후의 몸을 스치지 못했다.
다섯 마리의 합격기를 적당히 구경한 시후는 빠르게 붉은 거미들을 지나쳐 갔다.
붉은 거미들은 시후를 따라 몸을 돌리는 순간 한쪽 손을 번쩍 치켜든 시후를 봤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손이 내리쳐지는 순간 자신들은 양단이 될 거라는 것을 말이다.
역시나 시후가 손을 수직으로 내리긋는 순간 어느새 일직선으로 나열된 거미들은 머리부터 배까지 한순간에 양단되었다.
“거미들이 제법이군, 어디 비천대 녀석들은… 오호~ 녀석들도 제법인데?”
나머지 거미들에게 죽지는 않았겠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비천대는 의외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일비는 ‘어그로’ 스킬을 펼쳐 거미들 다섯을 유인했다.
거미들은 다른 비천대를 쳐다보다가도 일비가 소리치면 고개를 돌려왔다.
저 기술은 상당히 쓸모가 있어 보였다.
그 순간 거미들의 시야 밖에서 이비와 삼비가 창을 빠르게 찔러 갔다.
레벨업 좀 했다고 찔러가는 창끝이 일렁거렸다.
거기에 본인들의 스킬인지 무어라 소리를 지르자 한 호흡에 삼 연격이 이루어졌다.
그것으로 거미들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밀쳐낼 수는 있었다.
그리고 막내 녀석이 생각보다 발군이었다.
형제들 사이에 숨어 있던 막내는 들고 있던 창을 등에 둘러메고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손에서 빛이 일렁이자 거미들을 향해 내지르며 소리를 질렀다.
“파이어 월(Fire Wall)!”
그러자 붉은 거미들 발밑이 들썩이더니 펑 하고 터지며 불길이 솟아올랐다.
말 그대로 불로 만든 벽이 거미들을 덮쳤다.
그것으로도 붉은 거미들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거미들은 뒤로 물러나 덤벼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잘 싸우는 비천대의 모습에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방금 파이어 월을 사용한 막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이 저 스킬 한번으로 MP가 고갈된 것 같았다.
“잘했다.”
피슝-
시후는 담담한 목소리로 비천대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던지며 붉은 거미들에게 쏘아져 갔다.
그 모습에 비천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스킬을 연달아 사용하느라 MP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제는 HP가 깎이면서 버텨야 하나 생각하던 때에 시후가 나선 거였다.
그리고 시작된 시후의 전투 장면에 비천대는 혀를 내둘렀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엄청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네요.”
“그치? 몇 번 봤으면 질려야 하는데 어째 볼 때마다 입이 떡 벌어지냐?”
일비와 이비의 말처럼 시후가 거미들을 때려잡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사람만 한 크기의 거미들이 날카로운 다리를 어지럽게 얽히고설키며 찔러가도 시후는 유유히 빠져나갔다.
뒷짐을 진 채로 펼치는 천마보의 움직임에 여유가 넘쳐 보였다.
지속되는 시후의 회피로 거미들이 일제히 달려들자 시후는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거미들이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시후의 손이 번쩍였다.
“묵성오선지(墨星五線指).”
다섯 손가락에서 빛이 번쩍이는 순간 검은 빛줄기가 거미들의 머리를 관통했다.
한순간에 죽어버린 거미들의 모습에 비천대가 넋을 잃은 사이 시후는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비천대의 앞에 내려섰다.
“너희들 제법이더라?”
붉은 거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한 비천대는 시후의 칭찬에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부족한 실력을 비꼰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형제들이라서 그런가? 연계가 아주 좋아. 그래서 말인데, 내가 뭐 하나 가르쳐줄 테니 배워라!”
‘배울까’도 아니었다.
‘배워라’였다.
강압적인 듯한 말투였지만 비천대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침울해졌던 표정들이 살짝 밝아지기까지 했다.
자신들의 오해를 깨달은 거였다.
거기에 시후가 무언가를 가르쳐 준다고 하니 기대감까지 피어올랐다.
시후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비천대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너희들에게 가르쳐줄 것은 일종의 검진(劍鎭)이다.”
“검…진…이요?”
비천대가 검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너희들에게 맞게 변형했으니 ‘합격진(合擊陣)’이 더 적절하겠구나. 어쨌든 잘 배우길 바란다.”
말을 끝낸 시후는 부산물로 얻은 붉은 거미의 다리 하나를 꺼내어 막대기 대신에 사용했다.
바닥에 그림을 그리듯 네 명이 자리할 배치와 동선을 그려갔다.
무공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이들이었기에 그림을 이용하여 설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이들에게 가르치려는 검진이 복잡한 움직임을 요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였다.
‘그저 네 명이 뭉쳤다가 퍼졌다가를 반복하면 되는 거니까. 녀석들에게는 딱이야.’
검기(劍氣)를 사용할 수 있다면 넷이서 일천 명은 상대할 수 있는 검진이었지만 이들에게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기에 다른 요구를 했다.
“너희들이 할 일은 거미들에게 죽지 않는 것이다.”
“죽지 않는 거요? 그럼, 버티기만 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렇지.”
“네? 그럼 이걸 왜 배워요?”
막내의 질문에 시후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가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가르치는 거야. 제대로만 하면 일천 명이 덤벼도 막아낼 수 있는 검진이다.”
“일천 명!!??”
생각지도 못한 숫자에 넷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네 명이서 일천 명을 막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거였다.
그런데 문제는 시후가 진지하게 이야기하니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였다.
케냔 협곡을 오르면서 보여준 시후의 모습은 절로 믿음이 가게 했다.
“자, 시간 없으니까 움직여봐. 내가 봐줄 테니까.”
“네!!”
비천대는 시후가 바닥에 그린 그림을 보고는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서로 양팔을 벌려 닿을락 말락 한 거리를 유지한 비천대는 시후를 바라봤다.
준비되었으니 어서 지시를 내려달라는 눈빛들이었다.
진지하게 임할 준비가 된 비천대를 보며 시후는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본래 이름은 따로 있었으나 너희에게 맞게 변형했으니 이름도 바꿔야겠다. 비천화벽진(飛天火壁鎭). 너희를 위한 합격진이다.”
“비천화벽진… 멋지다!”
막내는 시후의 말을 곱씹으며 이보다 멋진 이름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막내는 시후를 볼 때마다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 삶에서 목표로 할 수 있는 큰 사람을 만났을 때 보이는 그런 눈빛이었다.
시후는 손에 들고 있는 거미 다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비천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적이 어디서 등장하거나 어떻게 공격해 오는지 말해주며 비천대가 움직이는 타이밍을 알려주었다.
마치 가상의 적이 있는 듯 비천대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움직여 갔다.
비천화벽진은 총 네 가지의 변형을 이루고 있었다.
먼저, 적에게 둘러싸였을 때 순간적으로 선공을 날리는 일 초식.
옆 사람에게 찔러 오는 공격을 막으며 자리를 이동하는 이 초식.
수많은 적이 동시에 공격을 해와 피할 자리가 없을 때 날아드는 무기를 쳐내는 삼 초식.
특히, 삼 초식은 적의 무기가 몸에 닿을락 말락 한 순간에 몸을 빠르게 회전하여 무기를 쳐내는 초식이었다.
마지막으로 사 초식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는 최후의 초식으로 막내의 파이어 월이 필요했다.
적들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막내를 가운데로 이동시킨 뒤, 나머지 삼 형제가 바닥에 무기를 찔러 넣어 벽을 만들고 그 벽 뒤로 막내의 파이어 월을 일으키는 초식이었다.
원래는 검기를 날리고 검벽을 일으키고 이화접목의 묘리를 터득해야 하는 초식들이었지만 시후가 이렇게 변형한 거였다.
그 후 반복적으로 비천화벽진을 쉴 새 없이 연습하는 비천대였다.
“그만.”
시후는 2시간은 예상했으나 30분이나 단축된 시점에서 비천대를 불러 세웠다.
생각보다 비천대가 열정을 갖고 임했기에 빠르게 몸에 습득된 것 같았다.
그리고 시후가 그만을 외치는 것과 동시에 비천대 네 명에게 스테이터스 알림이 울렸다.
“어? 대박! 비천화벽진이 스킬로 등록되었어요!”
일비의 외침에 나머지 형제들도 빠르게 스테이터스 창을 확인했다.
[비천화벽진 : 소수가 다수를 상대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태세.]
[이화접목과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이용한 무림인이 창시한 스킬.]
[사용 조건 : 비천화벽진을 스킬로 등록한 4인 이상이 모여야 스킬이 발동됨.]
[숙련도가 오를수록 막아내는 인원수가 늘어남.]
비천화벽진 스킬의 설명을 읽은 네 명은 시후를 바라봤다.
Safety World에서 유저에게 스킬을 배우다니.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에 감동해 우러러보는 시선이었다.
시후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세상 초롱초롱한 눈빛에 만족감을 느끼는 찰나.
시후의 스테이터스 창에도 알림이 울려왔다.
띠링-
[스킬을 창안한 업적 달성.]
[모든 스텟이 +5 상향됩니다.]
“오호~ 이것 봐라?”
태산과 인호에게 무공을 가르쳐줄 때는 나타나지 않던 스킬 창안 업적 달성이 나타난 거였다.
스테이터스 창을 보며 왜 이제야 이런 게 나타났는지 이유를 생각했다.
“설마? 걔네 거는 현실 세계에서 가르쳤던 거라서?”
태산과 인호에게 가르친 개걸심법과 천투심법은 현실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업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라 추측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기예를 비천대에게 가르친다면?’
도대체 얼마큼의 업적을 받으며 스텟이 오를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로써 비천대가 강해져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긴 셈이 되었다.
“좋았어, 가자, 너희가 한시라도 빨리 레벨업을 해야 할 이유가 또 생겼다!”
시후의 말이 떨어지자 비천대는 시후의 뒤를 빠르게 따랐다.
뾰족한 케냔 협곡의 바위를 몇 개 지나자 한쪽에 몰려 있는 거미들이 보였다.
거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이름은 진주 거미.
거미라는 녀석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예쁘장한 색을 몸에 두르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시후는 먼저 비천대에게 가르쳐준 비천화벽진의 숙련도를 올릴 생각이었다.
“비천대 앞으로. 비천화벽진을 펼쳐라!”
““네!””
비천대는 시후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뛰어나갔다.
시후는 한쪽 손을 들어 검지로 진주 거미 한 마리를 겨냥했다.
진주 거미들이 동시에 비천대에게 덤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려는 거였다.
“일선지(一線指).”
투쾅-
검지에서 뻗어져 나간 빛줄기는 정확하게 진주 거미의 이마에 꽂혔다.
이번에는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켜야겠기에 좀 더 내공을 실어 날렸다.
덕분에 진주 거미의 머리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지듯 터졌다.
당연하게 다른 진주 거미들이 반응해왔고 이미 거미들을 향해 달리고 있는 비천대를 발견하는 건 즉시였다.
끼에에엑-
거미들은 괴성을 지르며 비천대를 덮쳐갔다.
달려오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그 거대한 몸집을 점프하여 공중에서부터 덮쳐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꽤 많은 숫자의 거미들이었기에 순간 비천대의 앞에 거대한 진주색 벽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비천대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훈련한 대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자리했다.
그리고 일비의 외침을 시작으로 비천화벽진이 발동되었다.
“비천화벽진 제3초식.”
콰드드득-
몸을 회전시키며 적의 무기를 쳐내는 삼 초식이 스킬로 발동되었다.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자세를 취하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진주 거미들은 기다란 다리를 찔러나가던 중 비천화벽진 삼 초식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어림잡아도 50마리가 넘는 진주 거미들이 발라당 뒤집히며 바닥에 널브러지고 있었다.
“대박!!”
믿기지 않는 결과에 막내는 환호성까지 질렀다.
그리고 비천대는 스테이터스 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만한 스킬을 사용했음에도 MP 소모량이 고작 10 정도였다.
이 정도의 MP 소모량이라면 몇 시간이고 거미들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비천대 네 명이 수십 마리의 거미를 막아내는 믿기지 않는 장면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시후는 실수 없이 비천화벽진을 운영하는 비천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좋아! 이 기세로 단번에 거미 여왕에게까지 간다! 묵성오선지!!”
촤라라락-
시후의 열 손가락에서 무시무시한 빛줄기들이 뿜어져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