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시후는 루프를 눈앞에 두고도 한쪽 구석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당장 케냔 협곡으로 갈 방법이 눈앞에 있는데 동행이 없다는 이유로 갈 수 없다니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혼자 들어가도 괜찮다며 막무가내로 들어가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루프 앞을 막아서는 NPC들을 지나쳐 루프로 뛰어들어 보았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일순간 루프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시후는 자신을 가로막는 NPC들과 괜히 드잡이질하기 싫어 모여든 유저들에게 같이 가자며 권유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냉대뿐.
차고 있는 장비들로 보아 낮은 레벨 유저는 아니었지만, 루프를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다들 꺼린 거였다.
괜히 같이 갔다가는 뒤치다꺼리만 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한쪽 구석으로 쫓겨난 시후는 팔짱을 낀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하아…. 태산과 인호라도 불러야 하나?”
어쩔 수 없이 퀘스트 여관에 두고 온 시후와 인호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으로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두 녀석이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다.
- 시후야, 프랑시스 괜찮은 거냐? 장난 아니야, 막 질러! 골드를 물 쓰듯이 쓰고 있어!!
- 우리 너무 힘들다. NPC도 여자는 여자인가 보다. 쇼핑하는 게 여우 잡는 것보다 더 힘들다!!
이 외에도 여러 메시지가 있었지만 대충 정리하자면 프랑시스를 돕는 게 힘들다는 거였다.
시계탑을 환락탑으로 만들기 위해 프랑시스가 벌써 움직이는 것 같았다.
혼자서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에 태산과 인호를 짐꾼으로 쓰는 것 같았다.
“쯧, 저러면 내가 부를 수가 없잖아.”
저렇게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혼자서 퀘스트를 하겠다며 손까지 흔들어준 자신이 저들을 부를 면목이 없었다.
그렇다고 경공술을 펼쳐 내달리기에는 거리가 멀었고 어찌해야 할까 하는 고민하는 중에 알림이 울렸다.
띠링-
[친구 4명이 접속했습니다.]
“친구?”
뜬금없는 접속 알림에 친구 목록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드디어 루프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떠올랐다.
“짜식들! 때마침 왔구나?”
시후는 재빠르게 친구 목록에 있는 4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비천대, 집합! 한스텔 마을 북쪽 루프 앞으로! 당장!
접속한 친구 4명은 토끼를 잡을 때 수하로 두게 된 사 형제였다.
드디어 루프를 사용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답장을 기다렸다.
그런데 돌아온 답장은 시후가 원하던 내용이 아니었다.
- 와씨! 깜짝이야! 이 시간에도 Safety World를 하고 있어요?
- 하루 종일 게임만 합니까?
- 저, 저희는 저희끼리 게임하면 안 될까요?
- 카오님, 한 번만 봐주세요, 네?
사 형제에게 따로따로 온 메시지들은 호출에 불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친구 목록을 자세히 누르면 이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기에 당장 찾아가 정신교육을 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지금은 이런 실랑이를 벌일 시간도 아까운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미운 놈들 떡 하나 더 주기’였다.
- 지금 당장 오면 아이템 돌려준다. 거기에 막내는 광렙시켜 주마.
일전에 받았던 바람의 단도, 늑대의 외투, 가죽 부츠, 가죽 장갑을 미끼로 던졌다.
어차피 이제는 다른 아이템들을 착용한 상태였기에 이것들은 필요가 없었다.
인벤토리에 자리나 차지하게 넣어두느니 돌려주고 저들을 데리고 다니는 게 더 이득이었다.
역시나 사 형제에게는 그때 바쳤던 아이템들이 제법 중요했는지 바로 입질이 왔다.
- 진, 진짜 돌려주시는 거죠?
- 우리 거기 가면 막 죽이고 그러는 거 아니죠?
- 저 진짜 광렙시켜 주시는 거죠?
사 형제의 답장에 시후는 어이가 없었다.
‘이 자식들은 속고만 살았나.’
의심 많은 사 형제의 반응에 속이 타들어 갔지만 그래도 오겠다는 의지를 보이니 결정타를 날렸다.
- 5분 안에 도착하면 막내 광렙시킨 후에 아이템까지 준다.
막내를 끔찍이도 생각했던 형제들이라면 이 메시지를 무시할 수는 없을 거였다.
그리고 정확히 5분이 되던 때에 저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사 형제가 보였다.
사 형제는 루프까지 오르는 계단을 단숨에 휙휙 오르더니 시후의 앞에 자리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숨을 헐떡이는 것이 최선을 다해 달려온 것 같았다.
시후는 어미 새에게 먹이를 갈구하는 새끼 새들의 눈빛을 보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휙휙-
대충 던져 주는 바람의 단도, 늑대의 외투, 가죽 부츠, 가죽 장갑을 녀석들은 보물이라도 받는 것처럼 받아갔다.
그러고는 혹여나 시후의 마음이 변해 다시 뺏길까 봐 인벤토리에 즉각 넣었다.
이제 줄 것도 주었으니 녀석들에게 본론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너희들 케냔 협곡 가봤냐?”
시후의 질문에 큰형과 둘째가 손을 들었다.
가본 녀석이 둘이나 있으니 길을 잃거나 헤맬 걱정은 줄어들었다.
시후는 빠르게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퀘스트 목록을 공유했다.
사 형제는 눈앞에 펼쳐지는 퀘스트 창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냐? 파티 맺어라. 이거 같이 할 거니까.”
“네? 저, 저희가요?”
“당연하지. 그러려고 부른 거지. 설마 너희들 얼굴 보자고 불렀겠냐?”
사 형제는 느닷없는 상황에 우물쭈물했다.
시후는 망설이는 사 형제의 표정을 보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막내에게로 향했다.
막내는 시후가 다가오자 움찔거렸다.
하지만 다가오는 시후를 거부할 만한 배포는 없었는지 가만히 있었다.
시후는 그런 막내에게 어깨동무하고는 작게 속삭였다.
“케냔 협곡에 가면 내가 너 책임지고 Lv. 50까지 올려준다. 그리고 달성 기념으로 아이템까지 챙겨줄게. 어때?”
“지, 진짜요?!”
막내는 시후의 말에 큰형을 바라봤다.
사 형제 중에 큰형의 레벨이 딱 Lv. 50이었던 거였다.
이번 한 번만 따라가면 큰형과 같은 레벨이 될 수 있을뿐더러 거기에 맞는 아이템까지 준다는 말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막내는 두 눈을 번뜩이며 주먹을 움켜쥐고 형제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사 형제는 막내라면 꽤 껌뻑 죽는 것 같았다.
우물쭈물하던 형들도 어느덧 막내의 의견에 따라 퀘스트를 공유하며 시후와 파티를 수락했다.
파티가 되자 서로의 레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좋았어, 너희들 레벨이 50, 40, 30…. 막내는 역시 Lv. 5네?”
“네, 카오님, 아니…. 후 님은 레벨이…. 엥? Lv. 70?”
지금까지 시후를 고레벨 유저인 카오캐라고 생각했던 사 형제는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런 사 형제의 표정을 보자 시후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또 저런 표정이네.’
퀘스트 여관 마스터와 같은 표정을 지은 사 형제를 보며 시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천마 시절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은 언제나 두 가지뿐이었다.
천마를 따르던 이들의 경외심에 물든 표정.
천마를 적으로 생각하던 이들의 공포심에 물든 표정.
그런데 이곳에 온 후로부터는 저런 표정들만 보고 있으니 짜증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레벨업을 빠르게 할 필요가 있겠어.’
시후는 벙쪄 있는 사 형제의 등을 밀어 루프로 향했다.
어서 루프를 타고 케냔 협곡으로 가 거미들을 싹 다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루프를 지키는 NPC들의 수색이 끝나자 다섯은 루프로 들어갔다.
번쩍이는 빛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눈부심이 잦아들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케냔 협곡의 엄청난 위용이 눈에 들어왔다.
“히이야, 어마어마한데?”
좀처럼 놀라지 않는 시후의 말대로 케냔 협곡은 어마어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협곡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산세가 험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케냔 협곡은 그 이상이었다.
산 전체가 뾰족뾰족한 검은색 돌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고개를 높이 치켜들어 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산세가 험해 아무 생각 없이 오르다가는 발이라도 헛디뎌 저 뾰족한 바위들에 꿰뚫려 죽을 것 같았다.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케냔 협곡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시후에게 루프를 지키는 NPC들이 다가왔다.
한스텔 마을에서 봐왔던 것이 있었기에 시후는 이곳에 거미를 잡으러 왔다고 말해주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케냔 협곡의 입구에 다다르자 상당히 친절한 말투가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서부터 케냔 협곡! 발밑 조심!>
무슨 동네 개 조심도 아니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경각심을 자극하는 문구였다.
시후는 입구 앞에서 사냥 계획을 말해주기 위해 사 형제를 돌아봤다.
다들 시후의 레벨을 알고부터는 뚱한 표정들이었다.
대놓고 이번 퀘스트가 실패할 거라는 생각들을 표정에 드러냈다.
이런 녀석들에게는 말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럼, 비천대에 이름에 맞게 애들 좀 굴려 볼까?’
천마 시절 비천대를 천마신교 최고의 부대로 만들기 위해 손수 훈련시켰던 것을 되새겨 보았다.
매일매일 곡소리가 울려 퍼졌었지만, 어느덧 천마의 등 뒤를 맡길 만한 녀석들로 키워냈었다.
사 형제를 그렇게 키울 생각을 하며 먼저 이름부터 지적해갔다.
“너희들 내가 이름 바꾸라고 했는데 아직이네?”
“그게… 이름을 바꾸려면 골드가 좀 들어서요. 그리고 시간도 없었고요.”
둘째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후와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오늘이 처음 접속하는 거였다.
새벽이면 없겠거니 하고 들어왔는데 웬걸.
시후가 떡하니 말을 걸어와 지금의 상황에 놓였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끌려 다녀야 하나 싶을 때 레벨이 고작 Lv. 70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잡생각이 많아졌다.
일대일로 싸워 봐야 옷깃도 스치지 못하겠지만 다 같이 덤비면 그럭저럭 해볼 만해 보였다.
아이템까지 돌려받은 마당에 어떻게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그때 시후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몇 골드인데?”
“네? 뭐가…요?”
“이름 바꾸는 데 드는 비용 말이야. 얼마면 되냐고.”
“500골드인데…. 그건 왜… 헉!”
큰형은 시후의 말에 대답해 주다가 자신의 스테이터스 창으로 들어오는 골드를 보고 깜짝 놀랐다.
[See 후 님께서 5,000골드를 선물하셨습니다.]
“헐!!”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사 형제의 놀라는 반응에 맞추어 시후가 입을 열었다.
“내 밑에서 일하는 애들이 어디 가서 궁상맞게 다니면 안 되지, 그걸로 이름부터 바꾸고. 나머지는?”
꿀꺽-
시후가 뜸을 들이자 사 형제는 뒷말을 기다리며 침을 꼴깍 삼켜갔다.
“나머지는…요?”
“나머지는 너희 활동비라고 하자.”
“화, 활동비…. 가, 감사합니다! 후 님!”
나머지는 모두 가지라는 말에 막내는 ‘님’ 자까지 붙여 환호했다.
막내를 시작으로 나머지 형제들도 같은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이름을 변경하는 데 드는 5백 골드만 해도 이들에게는 부담이었다.
그런데 5천 골드를 던져 주고는 시원하게 활동비로 쓰라니, 시후의 배포에 감격까지 했다.
그 마음을 담아 빠르게 이름을 변경했다.
큰형부터 一飛(일비), 二飛(이비), 三飛(삼비), 四飛(사비).
그나마 좀 있어 보이라고 한자로 했다.
그런 형제들을 보며 시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너희에게 준 골드는 너희 물약값으로 나갈 테니까!’
시후의 속내를 모르는 형제들은 그저 돈벼락을 맞았다는 생각에 신나 할 뿐이었다.
앞으로 시후는 사 형제들을 앞세워 여왕 거미 타란까지 직진할 생각이었다.
가는 길에 퀘스트 여관 마스터에게 받아온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하면서 말이다.
지형을 모르는 시후에게는 앞에서 살짝 몹 몰이를 해줄 녀석들이 필요했으니 비천대야말로 딱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의 레벨을 좀 올려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케냔 협곡에 있는 거미들의 레벨은 평균 Lv. 60대.
딱 보니 큰형을 제외하고는 거미한테 한, 두 대만 맞아도 죽을 것처럼 보였다.
“좋아, 일단 너희들 레벨 좀 올리자. 따라와.”
““네~!””
이제는 시후의 말에 토 따위는 달지 않는 형제들. 아니, 비천대(飛天隊)였다.
시후를 선두로 하여 케냔 협곡에 들어서자 입구 앞에서부터 거미가 나타났다.
다행히 토끼나 여우 때와는 다르게 근육남에 귀만 씌워 놓은 모양은 아니었다.
‘인제야 제대로 된 녀석들이 나타나는군.’
성인 남성 크기만 한 거미는 8개의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걸어왔다.
거무튀튀한 케냔 협곡의 색과 어울리는 진한 회색의 거미였다.
아래턱에 있는 날카로운 집게에서는 진한 진액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저기에 물리면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았다.
갑자기 큰돈이 생겨 즐거워하기만 하던 비천대는 진한 회색 거미를 보는 순간 현실을 깨달았다.
“우, 우리 괜찮을까?”
일비의 걱정스러운 말에 다른 형제들도 몸을 움츠렸다.
반면 시후는 거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읽으며 가볍게 막내에게 손짓했다.
“막내야, 여기는 네가 먼저다.”
“네?”
피슝-
시후는 막내의 대답과 동시에 쏘아져 나갔다.
한 발 앞에 있던 시후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쏘아져 나가자 넷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달려 나가는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못했는데 어느새 진한 회색 거미 머리 위에 나타났다.
그리고 아주 살짝. 손등으로 거미의 머리를 툭 쳤다.
하지만 결과는 엄청났다.
콰앙-
시후에게 얻어맞은 거미는 머리가 푹 꺼지며 땅에 처박혔다.
얼마나 새게 처박혔는지 떨어져 있는 비천대가 있는 곳까지 먼지가 휘날렸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뜬 비천대는 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시후가 토끼 떼를 잡는 것을 보았지만 지금 보여준 모습은 Safety World를 하면서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엄청난 광경이었다.
피어올랐던 먼지가 가라앉을 때쯤 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내야! 막타 날려라!”
그리고 이날 비천대는 광렙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