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보보섭혼술(步步攝魂術).
천마신교 사대 호법 중 하나였던 요화선녀가 천마를 위해 만든 무공이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천마를 한번 꼬드겨 보겠다고 만든 무공이었다.
기루에 있을 때 천마가 거두어 줘 천마신교에 들어온 후에 수발을 드는 시녀가 되었지만 어째서인지 천마는 요화를 찾지 않았다.
천마의 곁에서 웃음을 흘리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요화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천마를 휘어잡아 다른 년들은 쳐다도 보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천마는 요화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요화가 기연을 얻어 세상의 모든 남자를 자신의 치마폭에서 휘두를 요공(妖功)을 얻었다.
그 후 사대 호법의 자리를 꿰찼고 어느 날 천마에게 새로 창안한 무공이라며 보보섭혼술(步步攝魂術)을 펼쳐보았다.
그때 천마는 자신의 심기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손뼉까지 쳐주었다.
‘그게 끝이었지? 그때 뽀뽀라도 해줄 걸 그랬나?’
요화를 한 번도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여자로 대해 주지 않았었던 시후였다.
하지만, 보보섭혼술을 극찬하며 박수를 보낼 때 보이던 요화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이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때를 회상하던 시후는 시계탑 던전에서 한창 춤을 추는 여자들을 상대로 보보섭혼술을 펼쳤다.
보보섭혼술은 걸음걸이가 시작이자 끝이었다.
걸어오며 시전자가 보이는 모든 행동이 매혹의 묘리였다.
지금도 시후가 한 발 내디디며 한쪽 입꼬리만 올렸을 뿐인데 여자들은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훗.”
그 모습에 가볍게 웃으며 한 발을 더 내딛자 여자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갔다.
다시 한 발을 내딛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몸을 배배 꼬는 이들이 늘어갔다.
앞쪽에 있던 여자들이 주저앉아 뒤에 숨어 있던 프랑시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프랑시스? 그렇게 멀리 있으니 얼굴을 자세히 보기 힘들구나, 금방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저벅-
또 한 발을 내딛자 프랑시스 외에는 전부 주저앉아 쓰러져갔다.
그중 몇몇은 눈을 뒤집어 까며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프랑시스 또한 멀쩡하진 않았다.
유저들이 자신의 던전에 들어오면 언제나 반갑게 반겨주었다.
그들의 생생한 피를 빨아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웃음과 교태만으로도 멍청하게 스스로 목을 내밀던 녀석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눈앞의 저 유저는 달랐다.
저자의 미소 한 번에 동공이 흔들렸고, 한걸음에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으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이미 자신의 주위에 서 있는 동료는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한 프랑시스는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 그만!”
“왜 그러느냐, 프랑시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프랑시스의 손짓에도 시후는 한 발 더 내디뎠다.
그러자 여자들 중 몇몇이 비틀거리며 사라져 갔다.
프랑시스는 뒷걸음질까지 치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라!”
그런 프랑시스에게 시후가 다시 한번 한 걸음을 내딛자 그나마 버티던 여자들도 사라져갔다.
이제는 프랑시스만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프랑시스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를 질렀다.
“오지 말란 말이다!!”
마지막 발악이었는지 프랑시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쓰러져갔다.
텁-
그런데 쓰러져가던 프랑시스의 몸을 누군가가 잡아갔다.
자신을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준 게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힘겹게 눈을 뜬 프랑시스의 눈에 시후의 얼굴이 들어왔다.
“내가 싫으냐?”
“아….”
싫으냐며 그윽하게 바라보는 시후의 눈빛에 프랑시스는 무너져갔다.
유저들은 그저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이라 생각했던 프랑시스는 탄탄한 가슴을 가진 시후의 품에 무너지듯 기대었다.
그리고 깊은 탄성을 흘리며 시후의 옷자락을 꼬옥 쥐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후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너는 죽이지 않으마. 아무래도 쓸데가 많을 것 같구나.’
퀘스트 여관 마스터를 길들이고 나서 시후가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유저들보다 이곳에 있는 NPC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
태산과 인호가 알고 있는 것은 게임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정보였기에 시후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바로 Safety World에 있는 NPC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는 거였다.
‘이게 바로 인재 채용이지.’
천마 시절부터 유능하다 싶으면 바로 자신의 밑에 두어 써먹었었다.
물론, 그만한 대우를 해주었기에 불평을 가진 이들은 없었다.
천마에게 배신의 칼을 꽂은 형제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때를 생각하니 기분이 착 가라앉아 갔다.
그때 품속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비벼오는 프랑시스가 보였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체온이 진짜 사람처럼 느껴졌다.
프랑시스는 무언가 갈구하는 눈빛으로 시후를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에 시후는 결정했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네….”
시후는 자신의 말에 반쯤 풀린 눈으로 대답하는 프랑시스를 살짝 끌어당기며 숙여갔다.
그러고는 프랑시스의 작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 시후가 하는 것은 보보섭혼술의 마지막 단계였다.
상대방을 영원한 자신의 종으로 삼기 위한 절차.
보보섭혼술의 완벽한 피날레를 위하여 구결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내공을 돌렸다.
때문에 시후는 아무 감정도 없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반면 프랑시스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입맞춤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구름 위를 걷는다는 것이 마치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이 보보섭혼술의 묘리임을 알 리 없는 프랑시스였다.
시후는 마지막까지 집중하여 보보섭혼술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눈앞에 스테이터스 창이 나타나 있었다.
- 시후야? 눈 떠도 돼?
- 이제 괜찮은 거야? 눈 뜬다? 어? 어?
자신을 애타게 찾는 태산과 인호의 메시지들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태산과 인호는 언제 눈을 떴는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그 어느 때보다 경악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시후는 아직도 품속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프랑시스를 슬쩍 옆으로 밀어내며 둘을 불러들였다.
“다 정리되었다, 이리 와.”
정리되었다는 시후의 말에 태산과 인호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없었다.
둘은 잠시 주춤하더니 빠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뭐, 뭐냐?”
“뭐가? 왜들 그리 호들갑이야?”
“왜, 왜 걔랑 키…. 크흠, 그걸 하는 건데?”
“키? 그거?”
“너! 뭐! 막! 형이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아무리 여기가 Safety World 안이라지만 그러면 안 돼!”
횡설수설하는 둘의 말에 시후는 어렵게 눈치챘다.
“아~ 너희 지금 내가 입맞춤을 해서 그런 거냐?”
“와~ 저 말하는 거 보소? 누가 보면 선수인 줄 알것소~?”
저런 말투는 어디서 배웠는지 태산의 비꼬는 말투에 시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뭐, 너희는 나중에 가르쳐 주마, 그보다 인사해라, 앞으로 우리를 도와줄 프랑시스다.”
“엥?”
자신들을 빼놓고 어른의 길을 가는 시후의 모습에 둘은 당황스러웠었다.
그렇다고 그 모습을 탓할 수도 없고 그저 비꼬는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던전의 몬스터를 자신들을 도와줄 거라고 말하는 시후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둘의 표정을 보며 시후는 말을 이어갔다.
“아, 프랑시스가 시계탑 던전의 주인이라고 하더라?”
“뭐? 주인?”
한껏 상기된 얼굴로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시후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저 여자가 이곳 시계탑 던전의 주인이라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의심의 눈초리가 프랑시스에게로 향하자 프랑시스가 입을 열었다.
“저들에게는 아직 제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서 모를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프랑시스의 말에 시후는 던전의 주인이 피를 원한다고 나타났던 스테이터스 창을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은 비밀이라니?
이해할 수 있게 더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제가 다른 애들보다 좀…. 그래서 정체를 숨겼어요.”
“아…. 어려 보이는 게 싫어서?”
“네.”
다른 애들이라 말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여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 자격지심이 있었나?’
여자의 진정한 매력은 그런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건만 게임이 설정해 놓은 NPC의 성향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둘까도 싶었지만, 이제는 시후에게 필요한 인재가 되어야 하니 바로잡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시스, 여자의 진정한 매력은 그런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니란다.”
“네?”
“세상의 모든 남자를 품으려던 여자를 아는데, 그 녀석이 말해 주더구나.”
“그 여자가 뭐라고 했는데요?”
시후는 귀를 기울이는 프랑시스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손가락의 끝은 프랑시스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프랑시스는 급히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시후가 엉큼하다고 생각했다.
눈을 흘기는 프랑시스의 귀에 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 상대의 마음을 읽고 느끼고 알아주고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면 제 것이 된다고 하더구나.”
“마음…!”
가슴이 아닌 마음이라는 시후의 말에 프랑시스의 두 눈은 점점 커졌다.
지금까지 프랑시스가 알던 남자라는 존재와는 너무나도 다른 시후의 말과 행동에 프랑시스는 포로가 되고 있었다.
여자와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미모 속에 흘러넘치는 남성미를 느꼈다.
둘의 대화에 낄 수 없던 태산과 인호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시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알림 소리와 함께 눈앞에 나타나는 스테이터스 창을 보았다.
“진짜 프랑시스가 이곳 주인인가 보다?”
“응?”
무슨 소리냐며 묻는 시후에 태산은 자신의 스테이터스 창을 공유하여 주었다.
[시계탑 던전의 주인 프랑시스가 유저를 동료라 인식합니다.]
[시계탑 던전의 히든 퀘스트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시후도 스테이터스 창을 열었다.
역시나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시계탑 던전의 히든 퀘스트라…. 너희들 알고 있었냐?”
“아니, 전혀, 대부분 시계탑 던전의 클리어 조건만 달성하면 되었기에 이런 거는 몰랐는데?”
시계탑 던전의 클리어 조건은 간단했다.
던전에 들어가 여성형 몬스터 1마리만 처치하고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매혹되어 죽으면 끝이었지만 1마리만 잡고 나와도 짭짤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다들 그렇게 했다.
스테이터스 창에 히든 퀘스트라는 말을 유심히 보던 시후는 고개를 돌려 프랑시스를 바라봤다.
“프랑시스, 히든 퀘스트에 대해서 아는 거 있니?”
“네, 당연하죠.”
“알려 줄래?”
“네, 어차피 애들이 돌아오려면 한참 거릴 테니 제가 안내할게요.”
프랑시스는 길 안내를 하겠다며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셋도 뒤따라갔다.
안쪽은 던전 입구와는 달리 상당히 깨끗했다.
그리고 삼매진화를 통해 어둠을 밝히던 입구와는 다르게 프랑시스가 걸어가니 벽에 걸려 있는 횃불에 자동으로 들어왔다.
불이 밝혀 주위가 보이자 누군가가 자주 다닌 흔적도 곳곳에 보였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아무 말 없이 걸어가기만 하는 프랑시스에 셋은 조용히 뒤따랐다.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자 프랑시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앞에는 화려한 장식으로 수가 놓인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프랑시스는 그 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히든 퀘스트 장소예요.”
“안에 뭐가 있는데?”
“그건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요, 대신 꼭 후 님께서 성공하시길 빌어요.”
무언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는 프랑시스의 모습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문 앞으로 다가가 손에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끼이익-
문은 한동안 열지 않았는지 쇠가 갈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자동으로 벽에 걸려 있는 횃불에 불이 들어오는데 방금 걸어온 곳과는 다르게 엄청 넓은 공간이었다.
마치 거대한 운동장을 연상시키는 넓이의 방을 보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을 보고는 그리로 걸어갔다.
또 한참을 걸어가니 붉은 카펫의 끝에 단상이 나타나며 단상 위에는 황금색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저 녀석을 잡아야 하나?”
태산은 히든 퀘스트라는 것을 듣는 순간 보스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보이는 녀석이 보스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던전을 처음 들어와서는 여자들의 모습을 한 몬스터들에 힘 한번 못 써봤지만, 저 녀석은 남자의 모습이었기에 태산은 슬슬 몸을 풀었다.
그런 태산을 보며 시후가 입을 열었다.
“오~ 의지가 대단한데? 여기 네가 한번 해볼래?”
“그럴 생각이었다.”
시후가 피식 웃자 태산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보스몹이냐!!??”
주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태산의 목소리에 단상 위에 앉아 있는 녀석이 입을 열어왔다.
“불나방 같은 녀석이로구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