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시후는 거대한 시계가 걸려 있는 탑 앞에 서 있었다.
퀘스트 여관 마스터가 준 ‘던전’ 퀘스트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탑을 바라보며 살짝 들뜬 표정을 짓고 있는 시후와는 반대로 태산과 인호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 시후야, 여기 꼭 들어가야 하냐?”
“우리 그냥 마을 밖에서 여우나 늑대 잡으면 안 되냐??”
상당히 이 ‘던전’이라는 곳을 들어가기 싫어하는 둘의 모습에 시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희가 단시간에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은 여기뿐이야.”
“하아….”
태산과 인호는 시후가 왜 저렇게까지 빠르게 자신들을 레벨업시키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나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지 어떠한 핑계를 대어도 통하지 않았다.
사실, 태산과 인호는 이 던전을 잘 알고 있었다.
중세시대 에피소드를 시작하는 초보 유저들은 한스텔 마을에부터 출발이었다.
마을 입구 밖에 있는 여러 가지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어느 정도 레벨이 되면 이곳 ‘한스텔 마을 악몽의 시계탑 던전’에 와야 했다.
강제 퀘스트는 아니었지만, 이 던전을 클리어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우선 경험치.
시후의 말대로 단시간에 폭렙을 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이 최고였다.
이곳에 나타나는 몬스터 한 마리 한 마리가 붉은 갈퀴 여우보다 많은 경험치를 줬다.
둘째로는 아이템.
어디나 똑같겠지만 ‘던전’이라는 곳에는 희귀 이상 아이템의 드롭 확률이 높았다.
그것도 그냥 높은 것뿐만 아니라 10%나 높았다.
그게 무슨 아이템이 되었든 10마리를 잡으면 하나의 아이템은 드롭된다는 사실이었다.
둘은 맞는 말만 골라 하는 시후에게 더는 들어가기 싫다는 핑계를 대지 못했다.
“후…. 시후야, 네가 이 던전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뭔데?”
상당히 진지한 모습으로 말하는 인호의 모습에 시후는 집중했다.
이곳에 대한 고급 정보를 말해 주려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인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시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곳은 우리 같은 모쏠들에게는 최악의 던전이야.”
“모? 쏠?”
“모태 쏠로! 여자랑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우리 같은 남자들 말이야.”
무언가 자책하는 듯한 인호의 말에 시후는 어리둥절했다.
그런 시후에게 인호는 바짝 다가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경험치랑 아이템을 잘 주는 곳이기는 해. 하지만! 봐봐! 그런 곳에 왜 사람들이 없을까?”
“음…. 글쎄?”
인호의 말을 들으니 이만한 곳에 다른 이들이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자 이젠 태산까지 바짝 다가왔다.
“여기 던전 이름이 괜히 악몽의 시계탑이겠어? 페이즈가 일어날 때 잘못하면 말 그대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단 말이야!”
“악몽 같은 시간? 무슨 소리야?”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라는 시후의 말에 인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악몽의 시계탑 던전은 경험치와 아이템을 많이 준다는 유혹으로 유저들을 꾀어 악몽을 겪게 한다는 거였다.
게임이란 자고로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스트레스를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경험치와 아이템 드롭 확률이 높은 이곳에 인적이 드문 거였다.
시후는 인호의 설명을 들으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거랑 너희가 모쏠인 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 그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둘이었다.
모쏠이 뭔지는 인호의 설명에 충분히 이해했다.
‘즉, 여자를 모르는 남자라는 소리잖아?’
여자와 어떤 만남을 가져본 적 없는 모쏠이라는 말에 시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둘은 모르겠지만 천마 시절 수도 없이 많은 여자에게 구애받던 천마였다.
‘천마’여서가 아니라 웬만한 여자들은 천마의 품에 한 번 안기는 것을 소원으로 삼을 정도로 천마는 인기남이었다.
남자다운 매력이 철철 넘쳐 흘렀달까?
천마라는 사실을 감추고 저잣거리에라도 나가는 날에는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저 둘은 사춘기를 넘어서부터는 여자의 손도 잡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충 이곳의 몬스터가 어떤 녀석들일지 상상이 가는 시후는 둘의 어깨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 형, 못 믿냐?”
시후는 둘에게 어른의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미소를 본 태산과 인호는 어째서인지 시후가 진짜 어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 뭐, 뭐냐?”
“뭐가?”
“뭔데, 우리 집 대학생 큰형이 여자친구 만나고 들어오면 보이는 미소를 보이냐?”
태산의 발끈하는 말에 시후는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가자, 이 형아가 어른의 싸움을 보여줄 테니까!”
당당하게 앞장서 걸어가는 시후의 모습에 태산과 인호는 무언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시계탑 안으로 들어서자 시후의 눈앞에 스테이터스 창이 나타났다.
[한스텔 마을 악몽의 시계탑 던전을 찾으셨습니다.]
[현재 유지중인 파티원으로 입장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요]
던전을 입장하겠냐고 묻는 간단한 질문에 시후는 ‘예’를 눌렀다.
그러자 스테이터스 창이 사라지며 구석 바닥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셋은 그곳이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생각하며 걸어갔다.
바닥을 들어 올리자 계단이 나타났고 셋은 시후를 선두로 하여 내려갔다.
계단을 모두 내려오자 안은 빛이 하나도 없어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시후야 내공을 일으켜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태산과 인호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시후는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며 작은 삼매진화(三昧瞋火)를 일으켰다.
시후의 손에서 일어난 작은 불꽃으로 태산과 인호도 탑 지하실의 내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지하실은 최근에 이곳을 드나든 사람이 없었는지 여기저기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했다.
태산은 시후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부러운 시선을 보내 갔다.
“와…. 멋지다. 나도 할 수 있으려나?”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해 보았지만, 삼매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거다. 현실에서야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라면 조만간 할 수 있을 거야.”
“진짜?!”
시후의 말에 상당히 기뻐하는 모습의 태산이었다.
“그래, 그러니 그만 방정 떨고 집중해라. 나타난 것 같으니까.”
“어? 그러네?”
집중하라는 시후의 말에 태산과 인호는 자세를 바로 하며 앞을 바라봤다.
전방에 어둠을 뚫고 나타난 것은 중세시대 에피소드에 어울리는 복장의 여자들이었다.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치맛단과는 대조적으로 잘록한 허리선을 보이기 위해 꽉 조여 맨 허리 부분 하며, 여성의 매력을 한층 관능적으로 보이기 위한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시계탑 지하에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한 이곳과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뭘 그렇게 꽃단장까지 하고 기다리고 있으셨나들?”
촤악-
시후의 말에 여자들은 대답 대신에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활짝 펴며 입과 코를 가려갔다.
마치 시후가 말하는 바람에 고약한 냄새가 퍼져 코를 막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저것들이?!”
명백히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여자들의 행동에 시후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여자들이 양쪽으로 갈라서며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호, 호호, 반가워요, 여러분?”
“넌 누구냐?”
“호, 호호, 제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요? 여러분께서 저희에게 오셨다는 게 중요하죠~”
말할 때마다 눈웃음을 쳐오는 여자는 아직 어린아이 티를 채 다 벗어 던지지 못한 모습이었다.
다른 여자들보다 좀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붉은색 머리카락을 돌돌 만 헤어스타일은 귀여움을 더했다.
그런데 듣고 있는 이의 심장을 쿵쿵거리게 만드는 묘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시후는 속이 살짝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단하군. 요화(妖花)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저 어린 나이에 이런 공격을 한다니.’
천마 시절 천마신교의 사대 호법 중 하나였던 요화선녀(妖花仙女)가 떠올랐다.
기루를 떠돌다가 뛰어난 외모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요화를 발견하고는 천마가 천마신교로 데리고 왔었다.
그 후 자신의 수발을 드는 시녀로 두었었는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무공을 사용하더니 요화(妖花)라고 불렸다.
천마에게는 딱히 방해도 되지 않았고 알아서 강해진 아이였기에 방치했었다.
그러더니 남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던 사대호법의 한자리를 떡하니 꿰차더니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해 귀찮았던 녀석이었다.
“그때 그 녀석도 웃음소리 하나로 사람을 홀려 치마폭에서 가지고 놀다 죽였었지, 아마?”
덥석-
시후는 자신을 지나쳐 무언가에 홀린 듯 앞으로 나서는 태산과 인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흘깃 보니 눈동자가 반쯤 풀려 있어 저 녀석에게 홀린 듯했다.
“쯧, 정신 차려. 이 녀석들아!”
“크아악!!”
시후는 잡고 있던 손을 통해 둘의 몸에 내공을 흘려 넣었다.
캡슐로 들어오기 전에 둘의 몸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흘려 넣은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기 위해 흘려 넣은 거였다.
아마도 둘은 수십 개의 바늘이 혈관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을 거였다.
한순간에 고통으로 정신을 번쩍 차린 태산과 인호는 고통에 물든 얼굴로 시후를 바라봤다.
“너희 그러다가 쟤가 손이라도 잡아주는 날에는 뼈만 남겠다?”
“그, 그래서 우리가 여기 힘들다고 했잖아!”
여자에 대한 내성이 전무한 둘에게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큰 곤욕이었다.
둘의 그런 모습에 시후는 혀를 차며 둘의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가 대었다.
“잠시 귀 좀 막자, 대화는 스테이터스 창을 통해서 하고.”
시후의 끝말과 함께 둘은 주위에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둘의 스테이터스 창에 시후가 보낸 메시지가 나타났다.
- 소리를 들을 수 없게 혈을 눌렀다, 대화는 이것으로 하고 너희는 잠시 뒤로 물러나 있어.
메시지를 확인한 둘은 시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앞에 나타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셨습니다? 아니면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시다든지?”
자신의 웃음소리에 시후가 홀리지 않자 살짝 비꼬듯 말하는 거였다.
여전히 부채로 입을 막고 있는 주위 여자들과는 달리 녀석은 교태를 부리며 눈웃음을 쳤다.
그 모습에 시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꼬마야? 어디 가서 엄마 젖이나 좀 더 먹고 오지 그러니? 이 오라버니 말이다? 어린아이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뭐야?!”
녀석은 시후의 말에 발끈해왔다.
그러면서도 주위에 있는 여자들을 힐긋거리는 것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모습이었다.
“너도 자각은 하고 있었구나?”
“아니거든??!!”
반복해 지적하는 시후의 말에 발끈하는 녀석이었다.
이렇게 보니 저리 발끈하는 모습이 사뭇 귀여워 보였다.
그런데 발끈하던 녀석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알림음이 들리며 스테이터스 창이 나타났다.
띠링-
[시계탑 던전의 주인을 발견하였습니다.]
[던전 주인인 프랑시스가 유저를 눈여겨봅니다.]
[프랑시스가 유저의 피를 원합니다. 주의하십시오.]
나타나는 메시지들은 모두 위험을 알리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시후가 느끼기에는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으흠…. 내가 피부로 느끼는 것과 여기 시스템이 알려준 것과는 괴리감이 좀 있군?’
어디까지나 Safety World를 무공을 되찾는 수단으로 여기는 시후에게 이런 메시지는 신뢰할 수 없었다.
자신의 피부와 본능으로 느끼는 위험만이 진정한 위험이었다.
시후가 스테이터스 창을 확인하는 것을 보던 프랑시스는 소리를 질러왔다.
“흥!! 유저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하지만, 오늘은 어림도 없을 거다!”
프랑시스의 말이 끝나자 주위에 있던 여자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곳이 던전이고 붉은 갈퀴 여우보다 강한 몬스터를 찾아왔기에 저들이 여우 녀석보다 강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충 가늠해봐도 이곳을 정리하는 데 그리 큰 힘과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솔직히 이곳에 들어오기까지는 태산과 인호에게 좀 더 경험을 쌓게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좀 전 프랑시스의 웃음소리에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도 몸을 흔들며 걸어오는 여자들의 모습에 태산과 인호는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 쯧, 너희 눈도 감아라.
“어? 어, 어!”
분명 시후가 귀가 들리지 않도록 점혈을 해놓았는데 시후의 말이 똑똑히 들렸다.
그것도 고막을 통해서가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들리는 목소리였다.
태산과 인호도 무협지를 많이 보았었기에 지금 이것이 전음(傳音)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전음까지 사용하는 시후의 모습에 둘은 다시 한번 놀라며 두 눈을 꼬옥 감았다.
둘이 눈을 감은 것까지 확인한 시후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여자들의 수는 대충 세어 보아도 30명 정도.
저들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따라라- 따- 따라라- 따-
음악에 귀를 기울이자 여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클래식한 음악 소리에 맞추어 사뿐사뿐 움직이는 저 모습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아! 미뉴에트.’
시후는 며칠 전에 들었던 학교 수업이 떠올랐다.
중세시대 귀족들이 무도회에서 추었던 춤이라며 영상 자료를 본 것이 기억났다.
3/4 박자의 리듬에 맞추어 추는 사교춤이었다.
“오호~ 미뉴에트라, 꽤 봐줄 만은 하구나?”
“호, 호호, 이 춤을 아시다니, 제법 안목이 있으십니다? 그럼 그렇게 즐겁게 구경하시면서 생을 마감하시면 됩니다!”
여자들에게 가려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프랑시스의 목소리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시후는 이미 내공을 일으켜 심상이 흔들리는 것을 막고 있었지만 다른 유저들은 저 춤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었다.
이곳 악몽의 시계탑 던전의 첫 번째 페이즈는 여자들의 웃음에 정신이 흔들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페이즈에서 저 춤을 보게 되는 순간 스르륵 잠들게 되는 거였다.
그 후 정신을 잃고 악몽을 꾸는 사이 프랑시스에게 피를 빨리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내공을 일으켜 두 페이즈를 모두 극복한 시후는 드디어 이 녀석들을 상대할 방법을 결정했다.
“너희들에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마! 보보섭혼술(步步攝魂術).”
보보섭혼술을 펼치며 한 발 내딛자 다가오던 여자들은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시후의 미소를 보자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