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ANOTHER DAY
“혀엉, 하민이는 생선.”
“……어머.”
뒤편에서 가사 도우미의 나직한 탄성이 들려왔다. 하민의 맞은편에 앉아 젓가락질하던 해준이 한쪽 눈을 작게 찡긋거렸다.
“하민아, 형 아니고 아빠.”
“그래, 하민아. 아빠라고 해야지. 형은 남자가 남자인 형제한테 부르는 말이야.”
해준의 말을 뒷받침하듯 가사 도우미가 푸근한 어조로 읊조렸다.
그러나 하민의 시선은 멈추어 버린 젓가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숟가락에 고슬고슬한 밥을 풀 때마다 다정히 반찬을 올려 주던 젓가락이었다.
고등어가 먹고 싶다며 직접 짚어 주기까지 했는데 더는 움직이지 않자 불만이 생긴 모양이다. 하민의 아랫입술이 툭 불거져 나왔다.
“그치마안… 한음 아빠랑 주혁이 삼촌도 형이라고 부르자나.”
한음을 쏙 빼닮은 눈매가 아래로 축 처졌다. 속상한 제 마음을 알아차리고 원대로 하게 해 달라는 듯한 눈치였다.
“아빠랑 삼촌이 그렇게 불러도 하민이는 형이라고 부르면 안 돼.”
“왜애……?”
“나는 네 형이 아니라 아빠니까.”
틀렸음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거리던 하민의 눈에 스리슬쩍 힘이 들어갔다.
“하민이도 형이라고 할래.”
“안 돼.”
“왜!”
“설명해 줬잖아.”
“싫다고 했짜나! 시러!”
“이하민.”
해준의 일갈에 하민이 움찔 떨었다. 꾹 다물린 하민의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커다란 눈에 울먹울먹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해준은 봐주지 않겠다는 듯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런 해준을 보며 하민이 입꼬리를 아래로 씰룩였다. 곧이어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안 먹어.”
“먹기 싫으면 억지로 먹지 마.”
“안 먹는다니까! 안 먹어!!”
억누른다고 노력하는 듯 보이나 목소리에는 울음이 어렴풋이 서려 있었다. 하아, 이를 응시하던 해준의 입에서 천근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빠 미워!”
울음과 함께 하민의 날숨이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후두둑, 굵직한 눈물이 연달아 떨어졌다.
“아유, 하민아, 왜 울고 그래. 뚝 하자, 뚝. 아줌마가 고등어 발라 줄까?”
“그냥 두세요.”
조리대에서 얼어붙은 채로 서 있던 가사 도우미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왔으나 해준이 이를 막았다.
눈물만 뚝뚝 흘리던 하민이 기어코 울음소리를 냈다. 그게 어찌나 서러워 보이던지, 가사 도우미인 정난은 안타까운 낯빛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민아.”
그때 멀찍이서 하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한음이 달려왔다. 하민의 쌍둥이 동생인 하준의 고사리 같은 손을 꼭 붙든 채.
놀란 눈으로 한달음에 다가와 해준과 정난을 바라보았다. 정난은 난처한 얼굴로 서 있었고, 해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나 우러?”
막 세수를 마치고 돌아온 하준이 하민의 얼굴을 살폈다.
“하민아, 왜 울어, 응? 해준 아빠랑 무슨 일 있었어?”
“아빠아…….”
한음이 하민의 옆에 움츠리고 앉아 다정히 물었다. 그러자 하민의 울음이 본격적으로 물꼬를 텄다.
이를 지켜본 해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하민, 밥 안 먹을 거야?”
“형.”
그 무뚝뚝한 목소리는 한음이 듣기에도 무정해 보였다. 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해준을 회유하듯 말꼬리를 늘였다. 자리에 서서 한숨을 거듭하여 내쉰 해준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준이 밥 먹이고 있어.”
그러더니 울고 있는 하민이를 안아 들었다. 한음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제 남편의 뒷모습과 제 아이의 우그러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민이랑 형 무슨 일 있었어요?”
한음이 뒤늦게 정난을 향해 물었다. 하준이를 자리에 앉히고, 아이가 먹기에 알맞게 식은 밥을 한술 떠 손에 쥐여 주었다.
“글쎄 하민이가 해준 선생님보고 형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네?”
하준이 열 번씩 두 번 씹어 먹어야지, 옆에 앉아 하준이의 행동거지를 주시하던 한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32개월이 될 동안 단 한 번도 아빠를 형이라 부른 적이 없던 아이인데.
“선생님이 그러면 안 된다고 못 박아 말했는데도 하민이가 고집을 부려서요.”
“……갑자기 왜 형이라고…….”
“글쎄요……. 한음 선생님이 형이라고 불렀던 걸 기억하고 따라 부른 것 같아요.”
“…….”
“아빠, 하준이 저거 먹고 시퍼요.”
한음은 얼이 빠져 큰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하준이 멀리 떨어진 반찬 그릇을 가리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하준이 계란말이 먹고 싶었어요?”
자상하게 웃으며 아이의 앞으로 그릇을 가져다 놓았다. 하준이가 계란말이를 포크로 쿡 집어 야무지게 베어 먹었다.
한음의 말대로 열 번이 넘는 횟수를 저작한 뒤 꿀떡 삼켰다. 잘 먹네. 한음이 그런 하준을 칭찬하듯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웃고 있는 얼굴과는 반대로 마음은 심란했다. 해프닝으로도 넘겨도 될 일인지, 초장에 바로잡아야 할지 가늠이 안 섰다.
이번 일은 무뚝뚝한 해준에게 귀염받기 위해 하민이 제 나름대로 부린 애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럽게 우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려 댄 모습을 떠올리자니 끝없는 걱정이 뒤따랐다.
상처받았을 텐데. 잘 달래 주고 있겠지? 그는 해준과 하민이 사라진 자리만 몇 번씩이나 돌아보았다.
발코니로 나온 해준은 하민이를 라탄으로 된 등나무 의자에 앉혔다. 자리에 앉았으면 손을 놓을 법도 한데 하민이는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말없이 그의 등을 쓸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눈물 콧물 다 빼 가며 울던 하민이 서서히 울음을 그쳐 갈 적이었다.
“하민아.”
중저음의 목소리가 하민의 귓가를 부드럽게 감았다. 하민은 대답하기보다 해준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현재 해준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어르고 달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이 통하는 나이라면 몰라도 제 고집 때문에 먹던 밥도 안 먹겠다고 떼를 쓰니, 머리가 아팠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확실히 못 박아야 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심히 걱정도 되었다.
“손에 힘 풀고 아빠 봐야지.”
단호하지만 어느 정도 누그러진 음색이었다. 그게 더 서러웠던지라 하민은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눈물이 뺨을 거치지도 않고 떨어졌다.
해준은 이를 재촉하기보다 시간을 두고 기다려 주었다. 이내 그의 목에 둘린 팔 힘이 약해졌다. 하민이 코를 홀짝이며 얼굴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어깨까지 늘어진 얇은 모발이 뺨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그의 서러움을 곧이곧대로 대변했다.
해준이 하민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뺨에 얼룩진 눈물 자국을 손수 닦아 주고,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흥.”
“흥!”
앞서 해야 할 일을 짚어 주자 아이가 이를 따라 했다. 하민이 조금 더 진정한 뒤에야 해준은 입을 열었다.
“아빠가 왜 여기 데리고 왔는지 알아?”
“…….”
고사리 같은 손을 아이의 무릎 위에 두고, 그 위를 감싸 쥐었다. 하민의 촉촉이 젖은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몰라?”
해준이 재차 묻자 하민의 입술이 느지막이 달싹였다.
“……하민이가 아빠를 형이라고 불러서?”
“그래. 그럼 하민이 혼내려고 여기 데리고 왔을까?”
“…….”
무슨 말을 꺼내기가 무서운 눈치였다. 하민의 입꼬리가 꼭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아래로 늘어지고 돌아오길 반복했다.
하민은 눈꺼풀을 꼭 감았다 뜨며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눈물이 한 방울 더 흘러내렸다. 해준이 손등으로 아이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하민은 코를 훌쩍였다. 하민이 느끼기에 해준 아빠는 한음 아빠보다 더 무서웠다. 울어도 통하지 않고, 졸라도 통하지 않았다. 그런 아빠가 제 앞에 다정하게 앉아 눈물을 훔쳐 줄 때면 그간의 서러움이 밀려오는 듯했다.
“혼내면 말 잘 들을 거야?”
훌쩍이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물론 해준이 하민에게 화를 낸 적은 없었다. 가뜩이나 무서운 아빠인데 화를 내면 얼마나 더 무서울까. 눈물이 비집고 새어 나왔다.
“……아니. 하민이 혼내지 마.”
하민은 한쪽 손을 들어 제 눈을 벅벅 비볐다.
“아빠가 혼내면 슬퍼?”
“……슬퍼.”
“그럼 혼내지 말고 어떻게 할까.”
“몰라…….”
“하민아. 화난다고 밥 안 먹겠다고 고집부리면 돼, 안 돼.”
잔잔한 구슬림에 하민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밥 몇 숟가락 안 먹었잖아. 배고프지?”
해준은 장난치듯 하민의 아랫입술을 검지로 슥 훑어 내렸다. 그러자 하민이가 배시시 수줍은 웃음을 내보였다.
“아빠가 말 안 들어준다고 울고 떼쓰면 돼, 안 돼.”
“안 돼요.”
“하민이도 잘 아네.”
“그치만 하민이는 아빠가 하민이 더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서…….”
연이어 설득하려던 입술이 순식간에 다물어졌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왜 아빠를 형이라고 부르려 하였는지.
함께 아이를 보고, 훈육하곤 있으나 32개월이 지난 오늘도 해준에게 아이는 버거웠다.
아이들과 해준 사이에는 얄팍한 벽이 세워져 있었다. 아이가 생기면 부성애가 생긴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이 무작정 편안한 건 아니었다.
보일 듯 말 듯 선을 그은 것과 은연중에 한음을 우선으로 생각하던 버릇이 아이 눈에도 보인 모양이다. 해준은 덜컥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막았다.
“하민이가 한음 아빠 따라서 형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시간을 매기기가 모호할 만큼의 침묵이 흘렀다. 해준은 제 손안에서 깔짝이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빠는 하민이 사랑해.”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어색했다. 아이를 향해 사랑한다는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작은 손을 힘 실어 쥐었다.
“……정말?”
하민은 말간 음성으로 되물었다. 입꼬리를 자상하게 끌어 올린 해준이 그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주억였다.
“그러니까 가서 밥 먹자.”
“응!”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해준을 따라 하민이 밝은 얼굴로 일어섰다. 해준의 손을 꼭 부여잡고 앞서 그를 이끌기까지 했다.
해준은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눌러 삼켰다. 표정 변화에 민감한 아이가 언제 또 그 마음을 알아차릴지 모를 일이었다.
하민이와 하준이의 식사가 끝이 날 즈음에는 초인종이 울렸다. 밥을 먹던 한음이 반색하며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둥이들아! 삼촌 왔다!”
신발장까지 들어선 주혁이 상기된 목소리로 한껏 외쳤다. 반가움을 채 주체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쌍둥이가 화색을 띠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 냈다.
“삼초온!”
“삼촌!!”
한걸음에 달려가 무릎을 굽히고 앉은 주혁에게 폭삭 안겼다. 쌍둥이를 양팔에 안은 주혁이 각 뺨에 입술을 한 번씩 비볐다.
“삼촌이 뭐 사 왔게?”
“뭐 사 와써?”
“과자? 장난감?”
주혁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등 뒤로 팔을 뻗었다. “두구두구두구.” 혼자서 긴장감을 조성하더니 쇼핑백 안에서 선물을 꺼냈다.
“짠! 동화책!”
주혁을 따라 발을 구르며 신나 하던 쌍둥이가 몸을 굳혔다.
어느새 해준이 거실로 나왔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이쪽을 주시하는 게 보였다.
하준은 동화책 하나를 받아 들고 멀뚱히 보고만 서 있었고, 하민은 해준의 눈치를 보더니 주혁이 든 동화책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삼촌.”
표정이 시큰둥했다. 선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한음이 그런 쌍둥이를 보며 자그마하게 웃었다.
“……이 끝이 아니고!”
그 시들한 반응을 눈치챈 주혁이 뒤늦게 운을 뗐다. 상당히 멋쩍어 보이는 얼굴에 긴장감이 묻어났다.
하민은 뚱한 얼굴로 주혁을 응시했다.
“우리 민둥, 준둥이가 좋아하는 자동차랑 레고 사 왔지!”
“와!”
하민이 나지막한 탄성을 냈다. 탁! 하준은 손에 든 책을 떨어트렸다. 입술을 가느다랗게 벌리고 주혁이 높이 든 장난감 상자를 빤히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쌍둥이의 반응에 선물 타임이 성공적이었음을 직감한 주혁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선물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떠케 하면 되는데?”
“……그거 하준이 주세요. 하준이 그거 갖고 시퍼.”
“오늘 하루 삼촌 말 잘 들으면 줄 거야.”
“뭐어? 그런 게 어디 이써!”
그게 기가 막혔는지 하민이 소리를 빽 질렀다. 어허, 주혁이 할아버지 흉내를 내며 엄한 소리를 내도 하민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 탓에 흥분한 하민이와 기가 죽은 하준이의 옷을 갈아입히는 게 더 고된 일이 됐다는 건 그가 두고두고 미안해야 할 일이었다.
오래간만에 부부 내외가 오프를 맞춘 날이었다. 같은 신경외과의 교수였으나 둘이 나란히 오프를 맞출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일을 상기할 때마다 해준이 미간을 좁히고야 마는 이유와 밀접했다.
부부 내외가 일하는 근무지가 서로 달랐던 것.
해준은 그 사실을 곱씹을 때마다 심기가 불편했다. 한 병원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다는 건 대부분의 외과의가 갈망하는 문제였다.
거두절미하고 한음은 그들에게 인정받았다. 임신한 몸과 출산, 갖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노력을 불사하고 환자에게마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인턴일 적부터 몸담고 있던 병원에서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더는 한성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내가 이 병원에 남게 되면 계속 형이랑 경쟁해야 하잖아. 나는 그게 싫어.’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머리가 지끈 울렸다.
경쟁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정적인 기능이 아니었다. 인간 사회에서 경쟁 구도는 필요에 의한 요소였고, 작용이었다.
한음은 그게 싫다 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해준과 앞다퉈야 한다는 게.
해준의 생각은 달랐다. 설령 그와 경쟁하게 될지언정 한 근무지에 묶여 있는 것이 서로에게도 나은 일이라 판단했다.
행여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였다. 표는 내지 않았어도 해준에게 한음은 물가에 내놓은 애와 다름없었다.
설득을 그만두게 된 건 그의 확고한 결단을 끝내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음이 제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갈 때까지도 그를 어린아이로만 보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고, 위태롭지 않았다. 한음이 그 스스로 고심하고 결정을 내렸다는 건 그만큼 그가 성장했다는 방증이었고, 단단해졌다는 증표였다.
한음은 근무지를 옮기고 나서도 소신 있게 일했다. 제 아비인 이도진은 한음의 이직을 누구보다 아쉬워했다. 물론 도진보다 아쉬웠던 건 해준 본인이었지만.
오랜만에 맞춘 오프인 만큼 오늘은 그들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육아와 훈육에 치여 미루고 미루던 데이트. 그리고 내일은 결혼 6주년.
쌍둥이를 주혁에게 맡긴 뒤, 해준과 한음은 집을 나섰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는 당연하다는 듯 부드러운 분위기가 함께했다.
해준이 정방을 주시하며 핸들을 돌릴 때, 한음은 옆자리에 앉아 그의 오른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손끝이 팔뚝 안쪽을 부드러이 쓸어 만졌다.
“하민이랑 이야기 잘 해 봤어?”
“대충.”
“잘 풀렸나 보네.”
성의 없는 대답일 뿐이었는데 예상외의 반응이 돌아오자 해준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내내 그를 응시하고 있던 한음과 시선이 맞았다.
“표정 보니까 알겠던데. 아까 하민이가 방글방글 웃으면서 돌아오기도 했고.”
“알면서 왜 물었어.”
“형도 괜찮은가 싶어서?”
어깨 위로 한음의 머리가 내려앉았다. 이전이었더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입 꾹 다물고 눈치만 살피는 게 아니라, 제 기분을 가늠하고 이를 재차 확인하는 것은.
이런 변화는 늘 남모르게 찾아왔지만 겪을 때마다 기꺼웠다. 해준이 은연중에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앞창을 응시했다.
“안 괜찮았으면 어쩌려고 했는데.”
“사탕 흔들어 줄까?”
애를 다루는 듯한 소리에 해준이 비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든가.”
무심한 어조가 귓전을 내리쳤다. 아무래도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모양이다. 해준은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한음이 권할 때마다 됐다며 고개를 젓곤 했었으니 말이다.
“정말?”
한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그가 고개를 주억였다.
“대신 닳지 않는 사탕으로.”
“……그런 사탕이 있어?”
“있지.”
쌍꺼풀이 지지 않은 큰 눈이 멀뚱멀뚱 눈을 끔벅였다. ……그런 사탕이 있었다고? 난생처음 듣는 소리에 맹한 반응이 쉬이 끊이질 않았다.
“……언제 나왔는데?”
“입 벌려 봐.”
“입?”
해준은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오른손을 뻗었다. 그의 검지가 한음의 혓바닥 위를 지그시 눌렀다.
영문을 몰라 쉼 없이 깜박이던 눈이 단숨에 가늘어졌다. 해준의 손가락이 물러가고 나서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건 사탕이 아니잖아.”
“사탕은 양보할 테니까 네가 먹고, 나는 네 혓바닥이나 물려 줘.”
“…….”
“종일 빨아도 안 닳잖아, 빨수록 도톰해지긴 해도.”
낯 뜨거웠다. 한음이 대꾸 없이 손으로 제 귓바퀴를 구겼다. 해준에게서 퍼진 은은한 페로몬이 차내 곳곳을 메웠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오션 뷰로 입소문이 자자한 호텔이었다. 해준이 발레파킹을 맡기는 동안, 한음은 호텔 정문에 서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뒤늦게 제게 다가온 해준의 팔을 붙들고 회전문을 통과할 적이었다.
탁.
“아…….”
호텔에서 나오는 남자와 그만 어깨가 부딪치고 말았다. 나지막이 신음을 터트린 한음이 뒤를 돌았다.
“죄송합니다.”
그가 남자를 향해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남자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휘청휘청 발걸음만 내디딜 뿐이었다.
“괜찮아?”
“어? 응…….”
한음은 제 어깨를 감싸 쥐고 묻는 해준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왜 저러지……. 그 찰나의 의구심이 뇌리를 훑었으나 시답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
쿵! 아마 바로 뒤편에서 들린 묵직한 굉음만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벌써 체크인을 하고 있었으리라.
반사적으로 등을 돌린 한음이 입술을 가느다랗게 벌렸다. 자신과 어깨가 부딪친 남자였다. 휘청휘청, 아주 위태롭게 걷고 있던.
한음이 서둘러 한 걸음을 내뻗었다. 그를 먼저 지나쳐 간 건 해준이었다.
해준은 앞으로 고꾸라진 남자를 똑바로 눕혔다. 사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한 행인들이 하나둘 “어떡해.” 탄성을 뱉으며 주위로 몰려들었다. 겉옷을 벗어서 갠 해준이 남자의 머리 뒤로 옷을 끼워 넣었다.
“이봐요. 제 말 들립니까?”
그가 환자의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남자가 쓰러진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하니 만에 하나를 위해 몸을 흔들지 않았다.
“……우욱.”
해준의 목소리에는 반응이 없던 남자가 별안간 구토를 했다. 해준은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남자의 고개를 옆으로 틀어 기도를 확보했다.
해준이 남자의 칼라 단추를 끄르는 사이에 한음은 핸드폰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주위를 둘러 보호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았다.
하나같이 생면부지인 환자를 우려하는 사람들이었다. 한음은 하는 수 없이 호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해준은 급한 대로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남자의 동공 반응이 없었다. 미약했으나 자발적 호흡이 가능했고, 맥박은 일반적인 박동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곧 구급차가 올 거예요. 혹시 제 목소리가 들린다면 손가락을 움직이시면 됩니다. 양쪽 다 시도해 보세요.”
환자의 청각이 제 기능을 상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 재차 말을 건넸다. 애석하게도 환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해준은 환자의 의식을 계속 확인하며 제 핸드폰을 조작했다. 멀리서 한음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뒤에는 호텔리어가 함께 뛰어오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근처 큰 병원 교수에게 전화를 건 해준이 속사포 같은 보고를 이었다.
“한성대학병원 이해준입니다. 당장 응급실에 자리 하나만 비워 주세요. 20분 뒤에 50대로 추정되는 남환 이송될 겁니다. 현재 Coma 상태고, CVA(CerebroVascular Accident, 뇌혈관질환, 뇌졸중) Aura(조짐)가 보여요. 확실한 건 찍어 봐야 알겠지만 Tachycardia(빈맥)가 보이는 거로 봐선 Cerebral infarction(뇌경색)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됩니다. Emesis(구토) 한 번 있었고, Syncope(의식상실) 한 지…….”
그의 시선이 왼쪽 손목에 채운 시계로 향했다.
“이제 4분쯤 됐을 겁니다. 골든타임 안에 처치할 수 있도록 준비 부탁드립니다.”
해준은 지체할 새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남자의 상태를 귀담아듣던 한음이 남자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보호자는?”
“혼자 왔대.”
남자의 바지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찾은 한음이 그의 질문에 대꾸했다.
“저 혹시… 두 분 다 의사십니까? 제가 뭘 도와 드리면 될지…….”
입 안이 마르는지 혀로 입술을 축인 호텔리어가 두 사람을 훑었다. 한음은 남자의 핸드폰을 호텔리어에게 건넸다.
“의사 맞고요. 번호 찾아서 보호자한테 연락 좀 해 주세요. 급합니다.”
“아……. 아, 네.”
그가 부랴부랴 핸드폰을 열어 보호자의 연락처를 찾는 사이, 응급차가 도착했다. 응급대원이 들것으로 환자를 옮겼고, 해준은 상황 설명을 하며 어느 병원으로 가 줄 것을 요구했다.
한음이 응급차에 탑승하려는 해준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해준이 그의 어깨를 쥐었다.
“어제도 늦게까지 병원에 있었잖아.”
“……그래도.”
“들어가서 쉬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제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는 해준을 보며 한음은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환자를 실은 응급차가 조급히 호텔을 떠났다.
한음은 상황이 일단락된 뒤에야 호텔 룸으로 들어왔다. 스위트룸이었다. 룸은 지나치게 넓었고, 발코니를 열고 나가면 개별 수영장이 있을 정도로 호화스러웠다. 물살을 가르고 끝으로 나아가면 오션 뷰의 전경이 한눈에 보일 것 같았다.
이 넓은 방에 혼자 남아 있는 게 어색했다. 해준이 언제쯤 돌아올까 싶어 핸드폰만 들었다가 놨다.
흘러가는 시간이 무료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침대에 누워 실없이 눈만 깜박인 게 몇 분째인지, 한음은 핸드폰 화면만 연신 들여다보며 이를 확인했다.
침대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들고 화면을 켰다. 해준에게서 온 연락은 따로 없었다. 한음은 이를 기다리는 대신 주혁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형, 잘 도착했어?
─누구야? 한음 아빠야?
─어허, 민둥! 아빠 보고 싶다고 삼촌 밟으면 어떻게 해!
─삼초온, 얼른 핸드폰 줘! 하준이도 아빠 보고 싶대잖아!
─알았어, 알았어. 어우, 쪼그만 게 성질머리는 도대체 누굴 닮은 거야?
하하,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초반 주혁의 얼굴만 비추었던 앵글이 천장을 담았다가 이내 아이들의 얼굴을 포괄적으로 싸안았다,
─아빠아!
화면의 6할을 차지하는 건 하민이였다. 귀퉁이에 하준이가 바닥에 앉아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게 보였다.
하준이가 고개를 돌려 한음을 찾았다. 곧이어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무구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하준이가 헤에, 천진하게 웃었다.
“응. 삼촌 말 잘 듣고 있었어?”
─말도 마. 몇 시간 있었다고 벌써 진 다 빠졌어. 민둥, 삼촌 쓰러진다.
─쓰러지면 안 돼! 얼른 일어나! 하민이랑 레고 쌓기로 했자나!
─으윽.
“많이 힘들어? 올라가면 고기 사 줄게.”
─고기로 퉁 칠 생각 마라. 으윽.
뒤로 쓰러지는 모션을 취했다가 상체를 일으킨 주혁이 도로 쓰러졌다. 그게 재미있었는지 하민이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쓰러졌다.
─삼촌, 삼촌, 괜찮아?
─으윽. 우리 하준이 안고 기절해야겠다.
─숨 막혀…….
─하민이도! 하민이도!
주혁은 뒤늦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준을 끌어안고 누웠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하민이 방방 뛰면서 달려가자 영상이 한층 더 산만해졌다.
영상이 송출되는 내내 한음은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비록 육아를 하며 피곤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으나 끝내는 그들을 통해 피로를 해소했다.
─그런데 준이 형은? 옆에 없어?
─주니 형은?
─하민, 삼촌 따라 하지 마세요.
─삼촌 따라 하지 마세요.
주혁은 자신의 말을 따라 하는 하민의 이마를 향해 꿀밤 놓는 시늉을 했다.
“잠깐 일이 생겨서 나갔어. 곧 들어올 거야.”
─일? 무슨 일?
“호텔 앞에서 환자 만났거든. 보호자가 없어서 형이 대신…….”
침대에 누운 채 심각한 얼굴로 제 이야기를 경청하는 주혁에게 말을 잇던 순간이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말을 가로챘다. 한음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왔나 보다.”
서둘러 현관까지 달려간 한음이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열자마자 스멀스멀 퍼지는 페로몬이 기분을 개운하게 만들었다.
한음은 해준을 등진 채로 핸드폰을 위로 들어 올렸다.
“하민아, 하준아, 해준 아빠는 안 보고 싶었어?”
─아빠아!
─아빠!
비로소 주혁만 가득 찼던 화면 안에 하민이와 하준이가 들어찼다. 문을 닫고 들어온 해준이 한음의 등 뒤로 붙었다. 허리를 두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게 간지러워 신음을 터트릴 뻔했다. 어금니를 꾹 참고 삼킨 한음이 제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등을 약하게 꼬집었다.
“아파.”
턱을 살짝 내린 해준이 한음에게 속삭였다. 음파가 수화기를 통과하다 말고 공기 중으로 분산될 만큼 작은 소리였다.
아플 리가 없음에도 괜한 엄살을 피우는 것이다. 해준은 그리 속살거리는 와중에도 손가락을 깔짝거리기 바빴으니.
“그럼 삼촌이랑 재미있게 놀고 내일 봐, 애들아. 아빠가 사랑해.”
한음은 저도 사랑한다는 소리를 쉼 없이 나열하는 아이들을 보며 마주 웃었다. 해준의 손길을 꿋꿋이 모르는 체하다가 서둘러 영상 통화를 종료했다.
“애들 다 보는데. 환자는 어떻게 됐어? 괜찮은 거야?”
“사랑해?”
“어?”
아이들과의 통화를 방해한 해준을 꾸짖으며 질문을 늘어놓던 입술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사랑한다는 소리에 놀란 건 아니었다. 말끝이 사선으로 치솟아 있다는 게 문제였다.
몸의 방향을 뒤편으로 틀었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온 해준이 시야 가득 피어났다.
그와 함께한 세월은 망망대해처럼 범위를 넓혀 가는데, 심장은 면역이라곤 일절 모르는 기관처럼 급박한 펌프질을 해 댔다.
각인이라는 게 그랬다. 그 사람의 페로몬에만 반응하고, 그 사람의 호흡에만 안정감을 되찾는다.
물론 각인하지 않았어도 해준을 향한 마음이 변함없으리란 건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저 되뇌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은 익숙함이 싫었을 뿐이다.
“사랑하냐고.”
반문에 되짚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복부를 기어 다녔던 손가락이 이제는 한음의 허리께에 머물렀다.
무슨 의도로 하는 소리인지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한음은 그의 목으로 얄팍한 팔을 둘렀다. 배실배실 웃음이 산뜻하게 퍼졌다.
“사랑해.”
박동의 울림이 샅샅이 밴 고백이었다. 다리 사이로 해준의 한쪽 다리가 끼어들었다. 곧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고백이 제법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한음은 입술을 가볍게 빨고 멀어지는 입술이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호텔 내부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은 뒤에는 곧바로 룸으로 올라왔다. 가운으로 갈아입고 나와 수영장에 발을 담갔다. 발장구를 치자 작게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밥을 먹으며 와인을 한 잔 기울였더니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랐다. 뒤쪽으로 손을 뻗고 고개를 삐뚜름하게 젖혔다.
서울에서는 별을 보기가 아주 힘들었는데, 이곳 하늘에서는 별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하민이랑 하준이 데리고 오면 좋아하겠다.”
이제는 입만 열면 아이들의 이름이 나왔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먹으면 당연하다는 듯 뒤따라 오는 게 신기했다.
순간 미약했던 해준의 페로몬이 더 짙어졌음을 느꼈다.
“편히 쉬라고 데리고 나왔더니 와서도 애들 생각이네.”
씻고 나와 발코니로 나온 해준이 한음의 뒤로 걸어왔다. 고개를 한껏 젖히고 있었던 탓에 예쁘장한 얼굴과 시선이 맞았다.
“그러게.”
한음은 등을 바닥까지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데크 위로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머리카락 끝이 해준의 발치에 닿았다.
그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맞닿은 시선의 보폭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해준이 손을 뻗어 한음의 뺨을 문질렀다.
“잠깐 떨어져 있었다고 벌써 보고 싶고 그러네.”
부드러운 손길 덕에 한결 더 나른해졌다. 한음이 눈을 감았다. 해준은 코끝에 흐드러지는 페로몬을 맡으며 손끝을 부드러이 놀렸다.
한음의 페로몬에서는 은은한 제비꽃의 향기가 났다.
목덜미며, 사타구니며 코를 박고 흠뻑 들이켜도 독하다 느끼긴커녕 심신이 차분해지는 향이었다.
지금까지도 한음은 해준에게 그의 페로몬이 늘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했다. 그때야 말없이 한음의 머리꼭지에 입술을 붙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지만, 그건 해준도 마찬가지였다.
맡고 있다 보면 그 페로몬이 피로를 다독여 주는 기분이다. 이는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꼈다.
개인마다 상성이 잘 맞는 페로몬이 존재한다는 건 이론으로만 깨우쳐 봤다. 이제껏 공감하지 못한 경험을 해득했을 때의 나이가 한음을 처음 만났던 스물셋이었다.
문득 코끝에 진동하는 페로몬을 따라 기울어진 고개는 쓰러질 듯 위태로운 형질자를 담았다. 그가 쓰러진다는 자각을 하기도 전에 손이 제멋대로 뻗어져 나갔다.
그때는 그저 우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도하지 않았던 인연의 시작 그즈음에도 해준은 쉬이 인정할 수 없었다.
하나 그에게 베풀지 않아도 되었을 호의를 베풀고,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 적부터 고요히 가라앉는 마음을 거듭하여 겪게 되자 어느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시절 한음에게 해준은 번듯한 어른이자 보호자였다. 그가 한음에게 결점 없는 보호자의 면모를 보일 수 있었던 건 한음이 어렸고, 위태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안온한 페로몬을 흩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페로몬은 늘 불안정했지만 제 앞에서는 점차 안정을 찾아 나갔다.
그에게는 자신이 필요했고, 자신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해준은 한음의 동그란 코끝을 검지로 가볍게 눌렀다. 한음이 편안히 내리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코는 왜 눌러.”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한음의 얼굴 위로 해준이 손을 펼쳤다. 코끝을 누른 뒤에 잠시 빠진 틈을 타 무언가를 손안에 감추었다 했더니, 검지에 걸린 채 달랑거리는 건 차 키였다.
“뭐야?”
한음은 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차 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난데없이 차 키를 자랑할 리는 없고 저를 위한 선물인가 싶어 상체를 일으켰다.
“필요하잖아. 한성에서 일했을 때야 같이 출근해서 상관없었는데 이제는 아니니까.”
한음은 가늘게 벌어졌던 입술을 길게 늘였다. 외제 브랜드 로고가 떡하니 박힌 스마트 키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운전면허야 시간이 날 때 따 놓긴 했어도 운전대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출퇴근은 늘 해준과 함께했고, 오프 때 역시도 해준은 데려다주는 번거로움을 번번이 감수했다.
근무지가 바뀐 뒤에는 형의 차를 사용하긴 했다만,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만 족히 일곱 대였다.
제 차를 새로 장만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한음이 떨떠름한 얼굴로 스마트 키를 받아 들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세 대 뽑았는데.”
“뭐?”
“매일 같은 차 몰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순간 얼이 빠졌다. 한 대 값만 해도 억대가 들었을 게 뻔한데, 이걸 세 대나 뽑았다고?
“미쳤어, 정말…….”
머리가 아찔했다. 그게 다 얼마일지 가늠도 가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데크 위로 움츠리고 앉은 해준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너무…….”
“하민이랑 하준이도 골라 주고 싶다길래.”
“…….”
“의견 조율이 어려워서 세 대 다 뽑은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과했어. 돈이 남아돌아? 한 푼이라도 모아서 나중에 애들 결혼할 때 보탤 생각을 해야지.”
“애들 이제 네 살이야.”
“네 살이건, 서른이건!”
한음이 언성을 높이건, 말건 해준은 태연자약하게 받아쳤다. 그게 어찌나 약이 오르던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환불해!”
“못 해.”
“왜!”
“못 하니까.”
“그게 무슨 억지……! 어어, 형! 떨어져! 차 키 떨어져!”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소리를 빽 지른 순간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해준이 한음을 어깨에 짊어지듯 들어 올렸다.
발을 버둥거리던 한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깜짝 놀라 떨어트릴 뻔한 차 키를 온 힘을 다해 붙잡았다.
해준은 놀라서 소리치는 한음을 이고 걸음을 망설임 없이 내디뎠다. 환불하라며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차 키를 소중하게 품는 모양새가 사랑스러웠다.
발코니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해준이 한음을 침대 위로 냅다 내던졌다.
“형!”
“우리 앞으로 네 시간 뒤면 결혼 6주년이야.”
“…….”
한음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그 6주년을 맞이하여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기분이 붕 떠올랐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갈 듯 말 듯 씰룩였다.
“내 선물은…….”
“잘 받을게.”
조심스레 내뻗은 목소리가 한순간에 가로채였다. 해준이 무심하게 말하며 군더더기 없는 동선으로 그의 위로 올라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그가 여민 가운의 리본을 풀었다.
“……아직 안 줬는데.”
“주고 있잖아.”
한음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해준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통에 오므려지다가 말았지만.
손을 반대로 뒤집은 해준이 그의 몸을 은근하게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워낙에 간지러웠던지라 발끝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하아…….”
한음은 그 별것 아닌 행위에도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해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이 너무 묵직했다. 묵직하게 저를 짓누르고, 활짝 벌어진 앞섶으로 밀고 들어와 살갗을 지분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려의 페로몬이 워낙에 농후했던지라 히트 사이클이 터졌을 때처럼 몸이 달았다.
“한음아.”
한음의 턱선 위로 입술을 붙인 해준이 작게 속삭였다. 음심이 깊게 밴 숨결이 피부에 들러붙어 좀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타고 도로 올라왔다. 바람을 쐰 통에 차가워진 피부가 뜨거운 체온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으응, 형…….”
한음은 가늘게 뜬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턱을 한껏 치켜든 채 제 몸을 훑는 손길을 느꼈다.
갈빗대까지 올라온 손길이 더 위, 한음의 가슴팍까지 번졌다. 엄지가 아직은 말랑한 젖꼭지를 바깥쪽으로 밀어내듯 꾹꾹 매만졌다.
촉, 촉. 말캉한 입술이 목을 지나 쇄골까지 떠밀려 내려갔다.
“달아.”
“으흣…….”
해준이 짤막한 말을 터트릴 때마다 뜨거운 숨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죽을 맛이었다. 밭은 호흡에 따라 가슴팍이 쉴 새 없이 들썩였다.
한음은 해준의 뒷덜미를 감싸 쥐었다. 해준의 입술이 자극으로 빳빳해진 유두를 한입에 물었다.
“아……!”
외마디 탄성이 터졌다. 해준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다리가 무릎을 세웠다. 해준이 혓바닥 끝으로 유륜을 한 바퀴 쓸었다.
한음이 허벅지 안쪽 살을 잘게 떠는 게 느껴졌다. 그의 허벅지를 한 손에 쥐고 안쪽 살을 짓눌렀다. 손바닥에 밀린 허벅지가 무릎을 굽힌 채로 옆으로 넘어갔다.
꼭 젖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해준이 힘껏 그의 젖꼭지를 빨았다. 목 뒤에서 움찔거리던 손가락이 뒷머리까지 쓸고 올라왔다.
한음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이을 때마다 페로몬이 짙어졌다. 이를 목전에서 들이켠 해준이 숨을 거칠게 토했다.
“아무것도 안 나와.”
“으흑, 흣…….”
해준은 한음의 젖 한쪽을 씹어 문 채로 목소리를 짓이겼다. 골반을 싸맨 한음의 다리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러트 사이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랬다간 한 번 시도한 전적이 있었던 노팅까지 이어질 게 분명했다.
안에 깊게 처박고 귀두를 부풀리는 것은 그저 사정액을 분출할 때보다 더한 쾌감을 안겨 주었으니, 그 감각을 잊지 못한 몸이 또 한 번 이를 시도하려 들 터였다.
해준이 입을 크게 벌려 가슴을 더 포괄적으로 물었다. 그의 손이 더듬더듬 한음의 속옷 위를 침범했다.
바짝 발기했을 성기를 속옷 위로 짓눌러 만졌다.
“아흐, 그냥… 그냥 박아 주면, 흣… 안 돼?”
“안 돼.”
한음은 하반신을 쉴 새 없이 비틀었다. 해준이 속옷을 벗기지도 않고 보드라운 면 위에서 손을 놀리는 통에 아래가 양껏 젖어 들어갔다.
출산한 지 32개월이나 지난 지금, 젖이 나올 리도 없는데 해준은 막 태어난 갓난애처럼 젖 한쪽에 매달려 뺨이 움푹 팰 정도로 강하게 흡입해 댔다.
“벗겨 주기라도, 읏, 해…….”
“싫어.”
그가 느닷없는 고집을 부리며 성기를 짓눌렀다. 흥분은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만져 주었으면 했다.
한음은 해준의 어깨를 짚고 신음을 꿀떡꿀떡 삼켰다. 손을 바짝 밀착한 몸 사이로 비집고 넣으려는데, 시도해 보기도 전에 해준에게 붙잡혔다.
“……아, 나 진짜… 으응, 못 참겠, 어.”
“참아.”
머지않아 속옷마저 축축하게 젖어 들 게 뻔했다. 애써 참아 보려 했는데, 눈물이 퐁퐁 솟아올랐다.
가쁜 숨이 불규칙하게 터져 나왔다. 이대로 잠자코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급한 대로 허리를 움직였다. 손아귀에 짓눌리는 힘과 함께 강한 마찰이 이니 아래가 한결 더 급박한 빠르기로 빠끔거렸다.
“흐으…….”
한음이 숨을 짤막하게 내쉴 때였다. 한쪽 무릎을 세운 해준이 제 버클을 스스로 풀었다. 바지 앞섶이 벌어졌고, 언더웨어 안에서 큼지막하게 부푼 성기를 꺼냈다.
숨통을 가득 메울 것처럼 퍼진 페로몬이 갈수록 빼곡해졌다. 러트 사이클의 조짐이 보였다.
해준은 한음의 허벅다리를 쥐어 제 장골을 감싸게끔 둘렀다. 그가 여전히 젖을 문 채로 허리 짓을 했다. 한음은 어금니를 세게 깨물 수밖에 없었다.
“으흣!”
아래가 쉼 없이 벌렁거렸다. 그게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야, 해준이 한음의 가슴팍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대관절 얼마나 빨아 댄 건지 한쪽 젖꼭지가 퉁퉁 부었다. 타액으로 얼룩진 유두가 공기 중에 노출되는 것조차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시렸다. 홧홧했고, 쓰라렸다. 이런 한음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해준은 혓바닥을 넓게 펴고 그 위를 핥아 댔다.
“……아흣, 아파…….”
그는 꼭 한음이 통증에 시달려 상체를 비틀어 대는 걸 즐기는 눈치였다.
혓바닥이 쉴 틈 없이 젖꼭지를 위로 떠밀듯 핥았다. 한음이 가늘게 뜬 눈으로 해준을 내려다보았다.
하나의 행위에 몰두한 눈동자가 매서웠다.
“이해, 준…….”
가까스로 그의 이름을 읊조리자 혓바닥의 힘이 더 강해졌다. 해준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다리가 한쪽으로 내몰렸다.
가냘픈 양쪽 발목을 한 손에 쥔 해준이 그의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끼워 넣었다.
“왜…….”
왜 제 아래에 삽입하지 않느냐고 물으려 했다. 그가 타액에 전 듯한 젖꼭지를 다시 입에 물지만 않았어도 한음은 말끝을 전부 이을 수 있었으리라.
해준은 한음의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끼운 채 허리 짓을 하며 젖을 빨아 댔다.
“아흐……!”
꼭 젖몸살이 왔을 때처럼 통증이 지끈지끈 울렸다. 허벅지 사이를 관통하는 성기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핏대를 얼마나 세웠는지, 성기가 치고 빠질 때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하반신을 휘감았다.
해준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허벅지를 손으로 힘껏 내리눌렀다. 한참이나 개처럼 허리 짓에만 몰두하던 그가 숨을 크게 터트렸다.
해준의 머리칼을 움켜쥔 한음은 머리통이 점차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그대로 상체를 세운 해준이 한음의 발목을 높이 들었다.
“후으…….”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를 가르고 들어오는 성기가 또렷하게 보였다. 붉게 오른 귀두가 빠른 속도로 모습을 내보였다가 감추었다.
한음을 손등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허벅지 사이에서 돋아났다 꺼지는 선단이 지나치게 외설적이었다.
그게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 선단과 이어진 길쭉한 좆 기둥이 드러날 때마다 제 아래가 쑤셔지는 것처럼 속이 뻐근해졌다. 지난 몇 년간 제 안을 어떻게 쑤셔 댔는지 분명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당장 이가 갈린다 할지라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침이 무겁게 넘어갔다. 입으로 터져 나오지 못한 숨이 코로 빠져나갔다.
“흣…….”
그걸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사정할 것처럼 성기가 당겼다. 속옷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축축해졌다.
한음이 눈동자를 느릿느릿 위로 들어 올릴 적이었다.
“후읏…….”
숨을 거칠게 몰아쉰 해준이 사정했다. 허벅지에 뿌리째 쑤셔 박고 사정했는데, 기둥이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사정액을 뿜은 선단이 점차 굵어졌다. 한음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마치 갈고리처럼 부푼 귀두가 더 짙은 점성액을 울컥 쏟아내기 시작했다.
“…….”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해준이 제 허벅지에 대고 노팅을 했다는 걸.
분명 성기를 육안으로 담아내고 있음에도, 한음은 그게 제 아래에 깊게 박힌 것처럼 숨을 참았다.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한음이 시선으로 더듬더듬 해준의 얼굴을 살폈다.
한껏 상기된 얼굴이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색정적이게 물든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혼탁했던 눈동자에 조금씩 혈기가 돌아왔다.
높이 들어 올렸던 발목을 놓은 해준이 상체를 낮췄다. 그가 느긋이 한음의 입술을 핥았다.
“……박아 달라고 했었지.”
목소리가 음습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침이 꼴딱 넘어갔다. 엉덩이 안쪽으로 손을 비집고 넣은 해준이 한음의 속옷을 단숨에 끌어 내렸다.
그의 손이 한음의 다리 사이를 훑었다. 이윽고 아래를 한번 훔친 손이 얼굴까지 올라왔다. 손가락에는 밑구멍에서 질질 새어 나왔을 액이 묻어 있었다.
해준은 혀를 내어 제 손에 묻어난 액을 핥았다. 가뜩이나 옅은 쌍꺼풀이 풀려 있었던 터라, 그 모습이 음심을 자극했다.
한음은 이를 가만히 지켜보기보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입술을 부딪고 손을 아래로 내려 단단하게 심지가 선 성기를 아래에 맞추었다.
“으응…….”
축축하게 젖은 입구에 선단이 닿자 허리께에서 전율이 올라왔다. 한음이 신음을 흘려 대기 무섭게.
“흣!”
해준이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퍽, 퍽. 그가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몸이 반동으로 떠밀리고 제자리로 떠내려오길 반복했다.
“혀, 형! 으응, 읏!”
한음의 머리꼭지를 감싸 쥔 해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얼결에 해준의 등을 감싸 안았던 한음이 팔의 위치를 조금 더 위로 옮겼다.
해준의 어깨를 붙잡고 제멋대로 터져 나오는 교성을 내질렀다. 노팅이 끝난 터라 귀두가 부드러워졌을 법도 한데, 조금 전에 보았던 갈고리 같은 형체가 내벽을 헤집어 대는 기분이었다.
“흐윽! 으응, 아……!”
한음은 해준의 어깨에 이마를 박은 채 상반신을 옹송그렸다. 마디를 구부린 손끝이 그의 생살에 파고드는 것도 몰랐다.
어찌나 흥분에 겨웠던지, 한음은 제가 사정을 한 줄도 모르고 해준을 세게 끌어안았다.
“아아, 흐읏, 읏!”
쑤셔지고 있는 와중에도 아랫구멍은 쉼 없이 애액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아래를 바짝바짝 조일 때마다 그의 허리 짓이 거세졌다.
우는 소리와 더불어 아래가 마찰할 때마다 찔꺽이는 소리가 허공 속 페로몬 사이를 두둥실 파고들었다.
제 몸을 한껏 끌어안은 채 발정하는 그가 좋았다. 품 안에 폭삭 안겨 있는 게 좋았고,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것도 좋았다.
젖꼭지가 그의 가운에 쓸려 따가웠지만, 그렇다 한들 바짝 밀착한 몸을 조금도 떼어 내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편안함이 가슴께에 넘실거렸다.
* * *
이른 아침이었다. 해가 뜨기에 모호한 시각이긴 했으나 날씨가 유난히 우중충했다. 오늘 결혼기념일인데……. 선 베드 위에 가부좌를 트고 앉은 한음이 속상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캔들 피웠어?”
해준이 발코니 문을 열고 나왔다. 한음은 뒤를 돌아 해준을 바라보았다.
“응, 그거 내 선물이야.”
“선물?”
“내 페로몬 추출하고 첨가해서 만들었어. 요새는 그런 거 주고받는 게 유행이라더라. 나 없어서 적적하면 형 연구실에 피우라고.”
시간이 날 때 캔들 공방까지 찾아가 손수 만든 향초였다. 향수를 만들어 줄까 했는데, 향수는 워낙에 취향을 타는 선물이라 향초로 선택했다.
한음은 제게 다가오는 해준을 향해 다시 입술을 벌렸다.
“그거 말고 선물 또 있는데.”
“이거?”
별안간 입꼬리를 짓궂게 끌어 올린 해준이 등 뒤에 숨긴 편지지를 꺼냈다. 편지지를 든 손에는 한음이 선물한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결혼 6주년을 축하해. 이 한 문장을 적는 순간조차…….”
“형!”
화들짝 놀란 한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해준에게 달려들어 그가 쥔 편지지를 빼앗으려 했다.
손을 길게 뻗었으나 해준이 편지지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이런 건 혼자 읽어!”
“지금이 공상은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게 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소리 내어 편지를 읽길래 온몸으로 막으려 들었더니, 그만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당신의 남편으로 산 나의 6년은…….”
“하지 말… 어어, 어!”
한음이 반사적으로 해준의 옷깃을 쥐었다. 풍덩. 생존 본능에 떠밀려 해준과 함께 수영장 안으로 빠졌다.
수영장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한음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한음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를 물 위까지 건져 낸 해준이 뒤늦게 편지를 살폈다.
“……씨발.”
평소에는 욕도 잘 하지 않는 해준이 욕지거리를 낮게 짓이겼다. 얼굴에 묻어난 물기를 닦으며, 한음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해준은 흠뻑 젖은 편지지를 든 채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읽으랬지?”
“다시 적어 줘.”
“내용 하나도 기억 안 나.”
“내가 기억해.”
“…….”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던 한음이 잠시간 침묵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편지지의 내용을 외울 만큼 몇 번이고 읽었으면서……!
저를 놀리기 위해 발코니까지 나와 내용을 줄줄이 읊는 해준이 얄미웠다. 한음이 수면을 옆으로 내리쳐 그에게 물을 뿌렸으나 해준은 다시 적어 달라며 같은 말만 연달아 반복했다.
대꾸도 않고 수영장을 빠져나온 한음이 서둘러 룸 안으로 도망쳤다. 너무 민망하고 창피해서 귀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장장 세 시간을 고민하고 또 고심하면서 쓴 편지인데. 물기가 뚝뚝 떨어진 채로 침대 옆에 주저앉아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린 한음은, 훗날 잉크가 번진 편지지가 액자에 걸린 채로 안방에서 발견되었을 때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조금 전의 부끄러움은 잊고 맛있는 밥으로 배를 채운 한음이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Rrrrr…
창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이 순간 우렁차게 울려 대는 핸드폰으로 떨어졌다.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누구지.”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더니 주혁이었다. 주혁과는 이미 호텔에서 출발하기 전에 연락했었다. 곧 출발하니 조금만 더 고생해 달라고.
그가 잠결에 얼른 와 달라며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대뜸 걸려온 전화가 이상했다.
행여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을까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응, 주혁아.”
─나 자발적으로 쫓겨났어.
“쫓겨났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꼭두새벽부터 준이 형네 아빠 왔어.
한음이 입술을 달싹이며 눈을 깜박였다. 운전 중인 해준을 흘깃 쳐다보다가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아버님이? 왜?”
그제야 해준의 시선이 한음에게 향했다.
─몰라. 손주들 보겠다고 아침부터 와서 잔소리해 대는 통에 잠깐 나왔어. 형은 언제 와?
한음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일전에 이날 주혁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호텔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게 걱정되었던 모양이었다.
“40분 정도 남았어. 내가 아버님한테 한번 전화 해 볼게.”
─응.
달칵. 전화가 짧게 끊어졌다. 옆얼굴로 해준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응, 애들 보고 싶어서 오셨나 봐.”
고개를 정방으로 돌린 해준이 이맛살을 구겼다. 해준은 곧바로 블루투스가 연결된 내비게이션의 화면을 전환했다. 그가 도진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를 연결했다.
짧은 연결음 후에는 기다렸다는 듯 스피커를 통해 도진의 불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이 자식아!
먼저 도진을 향해 살갑게 인사하려 했던 한음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입술을 소리 없이 방긋거렸다.
─너 어제 하민이 울렸다며?
다짜고짜 성을 낸 이유가 그의 손주인 하민과 관련되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한음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서둘러 입을 가리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음도 해준과 결혼하고 애를 낳기 전까지는 도진의 성정이 이럴 줄은 몰랐다. 워낙에 대쪽 같은 성격이라 상대가 누구든 간에 무작정 무뚝뚝할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는 한음이 해준과 결혼을 약속한 시점부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음이 임신을 한 시점부터 ‘아가.’라는 낯부끄러운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아이를 배 속에 품었을 적에는 매번 좋은 음식과 몸에 좋은 영양제를 손수 가져다주었다. 배가 불러 오면 살이 많이 틀 거라며 크림을 챙겨 주기도 했고, 태교에 좋은 음악도 선물해 주었다.
집에 방문할 때마다 아기 용품을 사 오는 건 예삿일이었다.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한음을 위해 누룽지며, 모과차며, 생강 캔디며, 효과가 있는 음식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챙겨 줬다.
해준은 무뚝뚝해 잘 챙겨 주지도 않을 것이라며 지극 정성으로 한음을 보살폈다. 그 모습을 보니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를 깨달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무뚝뚝하다가 필요할 때는 필요 이상으로 제 사람을 챙긴다.
해준의 평소 행실이 무뚝뚝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시아버지의 챙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무심하진 않았다.
입덧이 심해 밥을 먹지도 못하고 누워 있으면 죽이라도 끓여 왔고, 산부인과 교수에게 연락을 취해 필요한 용품을 하나하나 메모해 두었던 게 해준이었다.
매일 임신 일기를 작성해 몸 상태를 기록하고, 잠결에 무언가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 날이 밝자마자 나가서 사 오기도 했다.
도진이 한음을 위해 가지고 오는 건 이미 해준이 한 박스씩 사 둔 것들이었다. 그는 행여 악영향을 끼칠까 달고 살던 담배까지 끊었다.
매일 밤 마사지를 받으며 잠이 들었으니, 그만하면 좋은 남편을 넘어 훌륭한 남편이었다.
애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얼마나 극진히 육아에 손을 보탰는지, 일일이 나열하자면 하룻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했으리라.
해준을 못마땅해하는 도진에게 그의 이야기를 해 주면, 도진은 쓸데없이 감싸 주지 말라며 혀를 찼다.
난생처음 가져 보는 가정과 가족이 이토록 달가울 줄 몰랐다.
따뜻했다. 무한정으로 베풀어 주는 다정을 몸소 받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잃고 싶지 않은 행복감에 겨웠다.
─애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고 형이라 부를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애를 쥐 잡듯 잡으면 돼?
─할아버지! 그거 아니라니까! 아니이, 아빠, 나느은……. 정말 형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그랬어요, 우리 하민이. 괜찮아. 형이라고 부르는 게 뭐 어때서? 응? 하민이가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부르는 거지.
제 아들에게도 퉁명스러운 사람이 손주에게는 지극했다. 이런 모습은 봐도 봐도 익숙하지 않다 여겼는데, 곧이어 한음이 누누이 들어 오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거 봐라. 애가 기죽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거. 아비가 됐으면 잘 타이를 줄도 알아야지. 다짜고짜 혼내기만 하면…….
“됐고, 하민이 바꿔 주세요.”
한음은 끊이질 않고 쏟아지는 언성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해준은 타격 하나 입지 않은 얼굴로 받아쳤으나 그의 기분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하여간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자식. 오면 하민이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한번 안아 줘! 알았어?
─아빠아…….
하민이 조심스레 해준을 부르자 그 벼락같은 호통이 물러갔다. 습관처럼 사이드미러를 확인한 해준이 차선을 이동했다.
“하민아, 아빠 없는 동안 밥 잘 먹고, 잠도 잘 잤어?”
─……응.
“할아버지가 귀찮게 안 하고?”
─이 자식이!
─응……. 할아버지가 맛있는 거 많이 사 와써.
“하준이는. 지금 뭐 해.”
─하준이 지금 내 앞에 있어…….
─……아빠, 언제 와…….
─하준이가 아빠 언제 오냬.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할아버지가 못살게 굴면 전화하고.”
─넌 천륜도 없냐? 애들이 보고 잘도…….
“아버님, 저 한음이에요.”
부모, 자식 간의 대화를 엿듣던 도진이 또 한 번 발끈하자 이번에는 한음이 입을 열었다.
조심스레 운을 떼자 수화기 너머가 불시에 잠잠해졌다. 큼, 도진이 목을 가다듬는 듯 잔기침 소리가 들렸고, 목소리를 알아들은 아이들이 ‘아빠다.’ 하며 반색하는 소리도 들렸다.
해준이 한음을 흘깃거리는 듯한 시선 역시 느껴졌다.
─어, 그래……. 아가냐?
한결 부드럽게 풀어낸 도진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네. 힘들게 왜 집까지 오셨어요, 말씀하셨으면 저희가 그쪽으로 갔을 텐데요.”
─됐다, 바쁠 텐데 오라 가라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보니까 지난번에 챙겨 준 홍삼도 다 못 먹었던데, 요즘도 많이 바쁘냐?
“네, 열심히 먹는다고 먹었는데 제가 많이 빼먹었었나 봐요.”
─한 박스 더 사다 놨으니까, 천천히 먹어라, 아가.
“매번 감사해요.”
─감사는, 건강하면 된 거지. 알았다, 조심히 들어와라. 해준이 지금 운전 중이냐?
“네.”
─크흠……. 운전 조심히 해서 와라. 기다리마.
뚝. 이런저런 안부가 오가고, 마치 폭풍과도 같았던 전화가 끊어졌다. 한숨을 길게 내쉰 한음이 머리를 뒤로 기댔다.
“하민이가 어지간히 속상했나 봐.”
“애니까.”
“형은 안 속상해?”
정방을 주시하고 있던 해준이 한음을 훑어보았다. 입가에 짤막한 웃음이 피어났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반박할 땐 하더라도 도중에 말을 끊는 법이 없었던 게 제 남편이었다. 계속되는 쓴소리에 목소리를 냈던 게 다 저를 보호하고자 이행한 행동이었다는 걸 때늦게 알아차렸다.
해준은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시선을 보며 그 기분이 썩 싫지 않음을 느꼈다.
“늙어 노망나면 잔소리가 더 많아지게 돼 있어.”
“…….”
“원래 그러셨던 분이기도 하고.”
“그래도 나라면 서운할 것 같은데.”
“어렸을 땐 그랬지.”
“지금은?”
해준은 지난 일을 곱씹듯 잠시간을 침묵했다.
“별생각 없어.”
그러고 나선 하는 말이 별생각 없다는 말이었다. 해준은 실제로도 그런 도진의 태도에서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했다.
애정이 필요했던 어릴 때야 충분히 서운해할 만한 일이었지만, 애초에 독립성이 강한 터라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턴 주체적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눈썹을 팔자로 늘인 채 저를 쳐다보는 한음을 보고 있자면 서운한 시늉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좀 서운한가.”
“거봐. 서운하다니까.”
입꼬리만 조금 올리고 말았던 웃음이 더 짙게 피어났다. 이런 걱정도 나쁘지 않다는 걸, 해준은 한음을 만나며 알게 되었다.
쉼 없이 굴러가던 차가 그제야 RPM을 멈추었다. 급히 차를 주차하고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선물 받은 차를 구경할 새도 없었다.
한음은 엘리베이터가 올라갈 때마다 하나둘 늘어나는 숫자를 초조하게 응시했다. 쫓겨났다던 주혁이 걱정되었다. 도착하고 나서 전화해 본 결과 집에서 도진과 함께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도진과 주혁의 성격이 서로 맞지 않다는 건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일이었다.
어른들에게는 늘 살가웠던 주혁이지만 하나둘 마찰이 일어나고 나선 애써 짓던 웃음도 금세 거두곤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한음이 해준의 팔을 급히 잡아끌었다. 서둘러 도어락을 해제하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아버님. 하민아, 하준아.”
그가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에 진입했을 즈음이었다.
팡! 팡, 팡! 별안간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폭죽에서 터져 나온 꽃가루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발걸음이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거실을 한가득 채운 풍선들이며, ‘CONGRATULATION’이라고 적힌 글자 풍선이며. 막상 눈에 들어오는 건 많은데 이게 무슨 일인가 깨닫는 데 꽤 오래 걸렸다.
단단히 굳어 버린 머리로 상황을 분간하기도 전에 뿌우! 하준이 코끼리 나팔을 불며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하준아, 이게 다 뭐야?”
한음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품에 하준을 안았다. 뿌우! 한 품에 폭삭 안긴 하준이 한 번 더 코끼리 나팔을 불었다.
한음이 고개를 틀어 해준을 돌아보았다. 해준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갯짓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시선이 도로 앞쪽으로 가 꽂혔다.
케이크를 든 하민이 안방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음 아빠, 해준 아빠! 겨론기념일 추카드려요!”
“이게 뭐야…….”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이벤트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양쪽 벽에 붙어 폭죽을 터트린 도진과 주혁이 그런 한음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거 다 준이 형이랑 내가 생각한 거야. 할아버지 꼬셔서 풍선 부느라 죽는 줄 알았다니까?”
“결혼기념일이 뭐 별거라고 이런 거추장스러운 짓까지 해? 그리고 말이야, 자식아. 이런 건 업체 부르면 금세 해결돼. 뭐 하러 하나하나 풍선을 불어?”
“이런 건 다 정성으로 하는 거거든요?”
주혁과 도진이 한마디씩 보탰으나 그 말은 고막을 스치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한음은 제 앞에 선 쌍둥이를 사이좋게 안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촛불 불어야지.”
등 뒤에서 해준이 한음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과분한 행복이었다. 아니, 정말 과분한 게 맞나. 한음은 늘 제게 주어진 행복을 남에게 뺏어 얻은 것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자신에겐 너무 과분한 것 같다고. 넘쳐흐르는 행복이 도리어 불안하다고.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런 마음가짐이 오늘은 그를 휩쓸어 버리지 못했다.
누려도 괜찮을 행복감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와 그의 남편인 해준의 노력으로 결실을 본 행복이었으니.
한음은 눈물을 채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초를 불었다.
결혼 6주년을 축하해.
이 한 문장을 적는 순간조차 지금이 공상은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게 돼.
당신의 남편으로 산 나의 6년은 늘 말도 안 되는 일의 연속이라 아직도 많이 얼떨떨한가 봐.
매 순간 그늘이란 걸 모르고 자란 사람처럼 행복하게 웃고 있으면서, 가끔은 남의 행복을 가로챈 사람처럼 불안할 때도 있어. 그런 나를 매번 붙잡아 준 건 당신이고.
그런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 낯부끄러워도 오늘만큼은 꼭 전하고 싶어.
지난 세월에 파묻혀 웅크리고 살았던 내게 손을 뻗어 줘서 고마워.
볕이 얼마나 따사로운가를 깨닫게 해 줘서 고마워.
당신과 함께하는 미래에 욕심을 품게 해 줘서 고마워.
내게 이런 안락한 가정을 선물해 줘서 고마워.
지나온 나날보다 더한 행복감을 맞이하게 해 줘서 고마워.
우리의 아침이 찰나의 순간에 머물지 않길 기도하며.
오늘도 사랑해.
─당신의 오메가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