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Endless
옅게 자란 머리카락, 동그란 눈매, 자그마한 코, 침에 전 듯 반들반들한 작은 입술. 내 손으로 가려지고도 남는 작은 머리통.
“애기가 엄마를 닮았네요.”
“골고루 닮았죠.”
신기했다. 부모가 없어서 나는 누굴 닮았는지도 모르는데, 이 아기는 유 간호사를 쏙 빼닮았다. 어디를 보는 줄도 못 알아볼 만큼 흐리멍덩한 초점이지만 눈동자가 너무나도 맑았다.
나를 보고 있는 건가. 순간적인 호기심에 손을 들어 아기의 눈앞에 대고 살살 흔들었다. 그러자 내 손의 움직임을 따라 동공이 유연하게 굴러간다.
“이 선생님은요?”
“저요?”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아기에게 향했던 눈길을 들어 올렸다. 손을 움직여 아기의 시선을 붙잡았던 행위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유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이해준 선생님이랑 결혼하신 지 꽤 됐는데 아직 소식이 없길래요.”
형과 나 사이의 아기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여태까진 시기가 부적절했다. 지금이야 어엿한 전임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의국에서 뛰어다니기 바빴으니. 얼추 자리는 잡았어도 아이를 갖기엔 여러 제약이 많았다.
전문의 자격증도 못 땄던 상황인 데다가 애 때문에 덜컥 일을 쉴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그런데 이게 변명거리가 되려나.
한성은 직원들을 위한 복지가 좋았다. 하나의 팀 안에서 우르르 빠져나가는 것만 아니면 육아 휴직도 자유롭게 쓸 수가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임신했다고 하면 병원장이 나서서 내 빈자리를 채웠으리라.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우리는 암묵적으로 노팅을 미뤘다.
“아, 저희는 아직.”
“왜요? 이 선생님도 아기 되게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귀엽지 않아요?”
글쎄, 내가 그 정도로 아기를 좋아했었나. 옅게 웃은 내가 다시 고개를 숙여 아기를 바라보았다. 검지만 펴고 아기의 주위를 맴도니 작은 손이 불쑥 뻗어져 나와 내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귀엽긴 하네요.”
검지를 움켜쥔 손을 보며 손가락을 살살 까딱거렸다. 분명 손가락을 쥔 손에는 그렇다 할 힘이 실려 있지 않았는데, 이 자그마한 손은 내 움직임을 부담 없이 따라온다.
예뻤다. 낼 줄 아는 거라곤 이해할 수 없는 소리뿐이었지만 확실히 예뻤다. 예전과는 다르게 모든 부담감을 내려놓은 채 마주한 아기는 마냥 예쁘기만 했다.
형을 닮은 아이. 전에 우연히 형의 어렸을 적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셨는지 인상을 찡그린 채 찍은 사진이 얼마나 귀여웠던가.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귀엽다는 생각이 다였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유 간호사와 나눴던 이야기를 곱씹으면 형을 닮은 아이,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간 상상을 하게 된다.
형과 나를 골고루 닮은 아이. 나는 그게 궁금했다.
눈은 형을 닮았으면 좋겠는데.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닌데 덜컥 그 생각부터 드는 걸 보면 이미 유 간호사의 말에 혹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걸 보면.
그러면 형에겐 어떤 식으로 운을 떼야 할까. 단 한 번도 형과 나눠 본 적이 없는 주제라 덜컥 겁이 났다. 형은 좋아할까, 싫어할까. 좋아한다면 더 묻고 따질 것도 없는데, 내 의견에 싫다고 피력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형이 아기를 좋아했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기억을 되뇌면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젓게 된다.
형은 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싫어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더 들어맞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떨쳐 낼 수 없는 이유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유 간호사의 아이를 본 지도 꼬박 닷새가 지났는데, 배 속에 애가 들기라도 한 것처럼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쓸어 만지는 행동이 그 짧은 시간 안에도 수십 번씩 벌어졌다.
예전에는 확실치 않은 미래를 그릴 때마다 부정적인 생각에 잠겼다면, 이번에는 좀 달랐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를 그리면 나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형과 나를 오목조목 닮은 아이. 셋이서 보낼 휴일. 셋이서 찍을 가족사진. 셋이서 틔워 나갈 행복.
물론 그 과정이 마냥 행복하진 않을 테지만 셋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형과 나라면 그런 고난쯤은 금방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부부가 남들보다 두드러지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뒤처진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분명 서로를 아끼고 있고, 위해 주고 있다. 그러면 그 마음이 자연스레 아이한테도 향하지 않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보단 확신에 가까워지는 상상을 꽤 여러 번 했다.
자신이 있었다. 일에 치였다고 아이를 외롭게 두진 않을 거라는 자신. 내가 받았던 사랑을 오롯이 아이에게 베풀 수 있었고, 형도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의 사랑을 풍족하게 받고 예쁘게 커 갈 아이라니. 그게 퍽 낭만적이기까지 해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임신을 하고, 처음 육아를 시작할 때면 행복감보다는 버거울 일이 더 많겠지만 이겨 내고 싶었다.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고민은 한시도 빼놓지 않고 길게 이어졌지만 결심이 확실히 들어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가에 웃음이 연신 맴돌았다. 레지던트 하나가 무슨 좋은 일이 있냐며 물어보기까지 했으니 그 정도면 말 다했다. 확실히 나는 미래의 그 일을 설레하고, 달가워하고 있었다.
금일 마지막 수술이 끝난 뒤엔 곧바로 형의 연구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연구 자료를 검토 중이던 형이 내 기척에 잠깐 고개를 들었다.
“이번 주 세미나 자료 확인해?”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도로 끌어 내리는 걸 보면 꽤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자료였던 모양이다. 문틈에 서 있던 내가 다가가 널브러져 있는 자료를 하나 집어 들었다.
“두개저 내시경? 아, 이거 미세침습 기법으로 수술하는 거?”
“알아?”
내 말에 형이 작은 반응을 보였다. 대강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한 적은 없지만, 몇 년에 걸친 심포지엄으로 이 수술은 임상 수술을 넘어서 실제로 시술되기까지 했었으니까.
두개저는 두개골 바닥뼈 부분을 의학적으로 정의한 말이었다. 두개저에서 발생하는 질환의 대부분은 뇌 바닥에서 생긴 종양이거나 코에서 생긴 종양이 머리로 올라간 경우였다.
바닥뼈다 보니 두개술로 진행했을 땐 시간도 너무 잡아먹고 까다롭다. 게다가 종양이 뇌 기저부나 중심부에 발생한 경우에는 개두술로 절제하기가 어려웠다. 이유는 뇌 조직으로 인해 수술 시야가 너무나도 비좁아서.
선뜻 건드리기가 어려운 부분이라 종양의 위치를 파악해도 치료할 수 없는 경우가 파다했다. 그런 수술을 조금 더 쉽게 접근하고, 간편하게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 두개저 내시경 수술이었다.
수많은 의사의 골머리를 앓게 만든 두개저 종양은 관점을 다르게 접근해 본다면 의외로 간단한 문제였다. 두개골을 연 상태로 치료하기가 어려우니 콧속으로 내시경과 미세수술 기구를 넣어 종양을 제거하는 것.
물론 과학 기술이 뒷받침해 줘야 하는 문제였지만, 이미 내시경 수술은 꽤 많이 사용하는 수술이었다. 환자 입장에서도 머리카락을 밀지 않아도 되고, 머리뼈를 열어 수술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줄어드니 내시경 수술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물론 내시경 수술의 리스크도 적지는 않으나 혈관 손상만 주의하면 개두술을 받았을 때보단 예후도 좋았다.
“알지. 그런데 이 상태로만 진행하면 시야 확보 힘들어서 정밀한 수술은 못 해.”
분명 두개저 내시경 수술이 개두술보다 편리한 건 맞다. 그러나 콧속으로 내시경을 집어넣는다고 해도 한계는 존재했다. 두개 내로 들어가는 입구가 협소해서 조작이 힘들었던 탓이다.
“그러면?”
“그때도 한창 연구 중인 부분이긴 했는데, 드릴로 양쪽 후상돌기를 절제하는 거였어. 그러면 두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넓어지니까 그냥 했을 때보단 종양 절제율이 높아. 합병증 발생도 낮아지고.”
“또.”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게 다야. 그 뒤에 과거로 넘어왔으니까.”
아마 그 당시 기면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임상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걸 볼 수 있었으리라. 이제 와 아쉬울 건 없었지만, 형이 물으니 왠지 그 뒤 내용을 더 상세히 알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자료를 내려놓은 뒤 연구실 모퉁이에 따로 마련된 사이드 테이블에 다가갔다. 급하게 잡힌 수술 건으로 늦춰진 퇴근이었지만, 연구 자료에 집중하고 있는 형을 보니 퇴근이 예상보다 더 미뤄질 것 같아 커피를 내렸다.
“이번 주 금요일 오전에 스케줄 비워.”
“왜?”
“참여해 보라고. 어떤 합병증이 일어나고 수술 후 치료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얼추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머신 내부를 돌고 돌아 느릿하게 추출되는 커피를 보던 내가 뒤늦게 고개를 틀었다. 형은 날 쳐다보고 있지 않았지만 괜스레 낯부끄러워져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형, 나 며칠 전에 유재희 간호사 애기 봤다?”
커피를 들고 소파에 앉은 내가 부러 무신경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형의 반응이 궁금해 뱉은 소리임에도 나는 앞으로 형이 지을 행동을 단번에 예측했다. 무시하거나 그랬냐는 둥 별 의미 없는 대꾸를 하겠지.
내 말에 자료를 확인하던 형이 고개를 들었다. 한 3초가량 눈이 마주쳤을까. 형은 곧 심드렁하게 내 시선을 피했다.
“그랬어?”
뒤늦은 대답이었다. 불 보듯 뻔한 반응에 갈증도 일고, 심장 역시 벌렁거렸다. 내가 형에게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하나였으니.
“응, 되게 귀엽더라. 손도 엄청 작고 유 간호사 판박이던데.”
“아기니까.”
코를 한 번 훌쩍인 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주제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 형은 시답잖은 소리를 하냐는 듯 무감각하게 말했다. 내가 정작 전하고 싶었던 말은 귀엽고, 손이 작다는 게 아니라 아기가 유 간호사 판박이라는 거였는데.
그게 섭섭하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했다. 형이 타인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꺼낸 주제였다. 얼핏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쩐지 고백을 해 보지도 못하고 차인 기분이었다.
“이해준.”
“왜.”
말을 건네는 족족 지체 없이 대꾸하는 것 보면 공연히 더 서운했다.
“우리도 애 가질까?”
그래서 나는 스트레이트로 공을 집어 던졌다. 형은 내 공을 받을까.
이름 석 자를 떡하니 부를 때도 자료에 처박혀 있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문득 목이 타는 것 같아 침을 의식적으로 삼켰다.
“병원장님도 내심 바라시는 것 같고, 히트 사이클 주기가 곧 다가오기도 하니까…….”
사실 내심이란 단어는 그 사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내게 대놓고 강요하진 않았지만 병원장은 분명 형과 나 사이의 자식을 원했다. 이전까지는 입지가 단단하지 못해 결정을 미뤘더라면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를 테니까. 나는 형이 내 의견에 동조해 주길 바랐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퇴근 준비나 해. 곧 나갈 거야.”
그러나 희끄무레 피어났던 기대감이 사그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대강 짐작했던 반응이긴 했어도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부분은 평범하게 싫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게 왜 쓸데없는 소리야?”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쓸데없다. 내가 어렵사리 꺼낸 말이 왜 형에겐 쓸모없는 이야기가 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는데, 왜 그걸 보잘것없는 일로 치부를 하는 것인지. 이해해 보려 머리를 굴려 봐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도 우리 닮은 애 낳고 싶어.”
“이한음.”
“우리 결혼했잖아. 나도 이제 약 안 먹어도 될 정도로 건강 되찾았고, 전처럼 일 때문에 몇 날 며칠씩 밤새울 필요도 없는데 왜 고민해 보지도 않아?”
말씨에 보다 노골적인 서운함이 깃들었다. 형은 단 한 번도 나와의 아이를 꿈꿔 본 적이 없을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형은 알파였고, 노팅은 알파의 본능이었다.
내게 히트 사이클이 올 때마다 형 역시 러트 사이클로 고생을 했다. 노팅을 하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우리 사이에 생기는 아이가 싫어서일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형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어도, 우리의 애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리라 생각했는데. 꼭 나만 우리 사이의 아이가 보고 싶은 것 같았다. 아이를 키우기에 여유가 없는 상황이 아닌데도 단칼에 자르는 게 섭섭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는데도 막상 듣고 나니 그 감정을 삭일 수가 없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운함을 토로하는 나를 보며 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고민했어. 해 봐도 싫다는 게 내 대답이야.”
“그러니까 왜?”
“싫은데 이유가 필요해?”
“적어도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는 대야지.”
나와의 대화에 머리가 아픈지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형이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임신하고 나면 일은 어떻게 할 건데.”
“무슨 질문이 그래. 일은 계속할 거야.”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정말 이상한 질문이었다. 꼭 아이를 가지려면 일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 같아서. 그건 너무 극단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임신한 몸으로도 충분히 일했다. 다만 제 몸속에 생명이 있다는 걸 자각하고 평소보다 몸을 아꼈을 뿐이다. 나도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구태여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일 이야기를 짚고 넘어간단 말인가.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사건 사고 터지는 곳이 병원이야. 홑몸도 아니면서 계속 일을 하겠다고?”
“병원은 환자를 치료해 주는 곳이야. 내가 다치는 곳이 아니라.”
“너 며칠 전에 응급실 당직 서다가 무슨 꼴 당할 뻔했는지 잊었어?”
“…….”
그러나 합죽이가 된 듯 일순 다물린 입술은 그 어떤 말도 토하지 못했다.
“칼부림 날 뻔했어. 그러면 저번 달에는? 정신 나간 환자가 밀쳐서 침대 선반에 머리 박고 기절까지 했지.”
내가 형의 말에 대꾸를 할 수 없는 이유는 명백했다. 형이 우려하고 있는 상황은 운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게 대형 병원 소속 의사의 숙명이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환자들과 부딪혀 가며 그들의 병세를 치료해 주어야 하는 것.
한성이 연동보다는 체계가 잘 잡힌 곳이라 교수의 당직을 전임의가 대신 서게 되는 일은 없었어도 당직을 서는 횟수가 전공의 4년 차 때와 엇비슷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수도 없을뿐더러 아이 역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가 조심하면 되는 일이야.”
“네 배에 애가 있건 없건 조심했어야 하는 일이야. 그런데 못 했잖아.”
“그때는 몸을 사릴 수 없는 상황이었어. 내가 책임져야 할 생명이 있었다면 그렇게 무턱대고 달려들지 않았을 거라고.”
“내 생각은 안 해? 네 안중에 있는 건 아직 들어서지도 않은 애 하나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러면 뭔데!”
눈앞이 아득했다. 실언을 했다. 그저 타도당하는 주장을 방어하기 위해 꺼낸 말이 본의 아니게 형의 심기를 건드렸다.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인지했을 때는 이미 서로의 언성이 높아진 뒤였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아찔했다.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쥔 사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던 형이 거친 숨을 골랐다.
“형,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애 갖는 건 쉬워. 그래, 백번 양보해서 네가 임신했다고 쳐 보자고. 그러면 그 이후에는. 그저 남의 애가 예뻐서, 다른 사람이 원해서, 순간 등 떠밀리듯 애 갖고 나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할 건데?”
“…….”
“너도 나도 바빠. 애 볼 시간은 있겠어? 낳고 나면 그만이야? 임신해서 일 쉬는 사이에 손이라도 굳으면 그건 또 어떻게 할 건데.”
“…….”
“너 외과의야. 병원이야 몇 달 쉬고 돌아온 의사한테 자리 하나 내줄 수는 있어도 나는 그 꼴 못 봐. 손 굳은 의사한테 환자 안 맡긴다고.”
모르지 않는다. 그렇게 어린애 가르치듯 하나하나 일러 주지 않아도 전부 뼛속까지 새겨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형의 생각처럼 무턱대고 결심한 일이 아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 이유 하나로 애 갖기를 주저했다. 안 가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애가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불거진 건 분명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는지 그게 의문이었다.
나도 며칠을 내리 고민했단 말이야. 그러니 형 역시 나처럼 깊이 있는 고민을 해 주길 바랐다. 적어도 그때가 되어 우리에게 아이가 있어선 안 될 까닭을 조목조목 설명했더라면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을 테니까.
지금 이 심정을 대변해 줄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한 걸까, 속상한 걸까. 의도치 않게 어긋난 대화 속에서 비집고 올라오는 감정이 자꾸 목울대를 건드린다.
눈을 감고 끓어오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차근히 숨을 들이쉬고 내뱉음과 동시에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형이 안중에도 없는 게 아니야. 처음부터 위협받았던 상황도 아니었을뿐더러 조금 다치는 걸 불사하더라도 환자부터 돌봐야겠다고 생각했었어.”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사고였다고. 목숨 담보 잡고 불구덩이로 뛰어 들어간 게 아니라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났던 사고.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으면 아무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순간인 거 인정해. 내 불찰이야.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왜 그런 의미가 돼. 형을 내 인생에서 배제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
“형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겠어. 나도 줄곧 걱정했던 일이야. 그래서 다 이해하는데. 그런데 형, 나는 내가 왜 꼭 일과 애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지 이해가 안 가.”
왜 나는 둘 다 선택할 수 있는 기로가 없는 것인지, 그게 너무 속상했다.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형마저 딱 잘라 말해 버리니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한음아.”
“오늘은 먼저 퇴근해. 난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게.”
“이한음, 거기 서.”
날 불러 세우는 형의 목소리에도 등을 보였다.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한껏 우그러진 얼굴로 연구실을 벗어나려던 몸이 불시에 돌려세워졌다.
“하던 얘기는 끝내고 가.”
그런 내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린 형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두 번은 형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아래로 떨궜던 내가 숨을 고르며 내 팔을 붙잡은 손을 떨어트렸다.
“당장 끝낼 수 있는 얘기가 아니잖아. 나도, 더 생각해 볼 테니까 형도 고민해 봐.”
그대로 형의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나를, 형은 더 붙잡지 않았다. 속상해. 그 마음이 좀처럼 사그라들 줄 몰랐다. 늘 내 곁을 맴도는 형의 페로몬조차 날 달랠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느릿하게 끔벅였다. 취한다. 고개를 모로 기울일수록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 머리가 제멋대로 치우쳐졌다. 그에 혀를 찬 무영이 내 머리에 손을 받쳐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비슷하지.”
가라앉은 목소리에 무영이 내 눈치를 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래로 내리깔린 시야는 빈 잔을 담았고, 비어 있는 술잔과 기 싸움이라도 하는 듯 노려보던 눈에 불쑥 힘이 풀렸다.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야, 야, 음아, 그건 왜.”
“따라서 마실 거야.”
그런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무영이 날 저지하려 손을 뻗었다. 어쩐지 어디서 본 그림인 것 같아 실소를 터트리며 잔을 채우자 무영은 멋쩍은 듯 손을 뒤로 물렸다.
“너 벌써 취했는데. 이 선생님 부를까?”
“부르지 마. 혼자 들어갈 수 있어.”
“그러면 그만 마시든가.”
“남았잖아. 아까워.”
오늘따라 목으로 넘어가는 술이 특히나 더 썼다. 자연히 인상을 찡그리면 무영은 턱을 괴고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잖아. 틀린 말도 아니고. 초기에 안 좋은 일 휘말렸다가 유산이라도 하면 네가 제일 상심이 클 테니까. 다 너 걱정해서 말리는 거잖아.”
“……알아.”
“무작정 안심할 수 없는 직업이기도 하고… 그런데 사실 그런 직업이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닌데, 그치? 오히려 병원이 직장이니까 더 안심할 수 있지 않나.”
도대체 누구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호했다. 어이가 없어 작게 터져 나간 웃음에 무영은 안심을 하는 듯 따라 웃었지만 내 웃음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테이블 위로 팔을 올린 채 엎드려 무거운 머리를 기댔다. 테이블을 일정한 간격으로 툭툭, 두드려 대던 손가락이 차츰 느려지기 시작했다.
“뭐, 형질이 강할수록 유산할 위험이 줄어든다곤 해도, 그게 또 절대적인 건 아니니까. 아, 난감한 문제다.”
비어 버린 술잔의 립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내가 손에 힘을 실은 순간, 잔이 한쪽으로 기울더니 테이블 위를 굴렀다.
“설득 못 하면 어떻게 할 거야? 포기?”
반 바퀴도 채 구르지 못한 잔을 멍하니 보던 내가 눈동자를 굴려 무영은 올려다보았다. 포기. 그건 생각 안 해 봤다. 어떻게 해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고민은 했지만 내 의견을 고집스럽게 내칠 형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형은 늘 내 의견을 존중해 줬는데. 그러면 이번에는 내가 한발 물러나야 하는 게 맞나. 그 생각이 들다가도 나는 고개를 젓는다. 반대 주장을 내세웠던 형은 그에 부합한 이유에 형을 덧대지 않았다.
“무영아.”
“응.”
“내가 오메가인 의사라고 해서 꼭 의사 인생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왜 자꾸 내 사정을 고려해서 반영해. 정작 나는 형의 아이를 갖고 싶어서 안달인데.
“자꾸, 얼굴도 모르는 애가 생각이 나, 무영아.”
“…….”
“그 애가 너무 애틋하고 소중해. 지금 내가 너무 행복해서 실없는 생각을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라기보다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애가 달진 않았다. 그런데 유 간호사와 그의 아이를 보고 나니 나는 계속해서 우리의 미래를 떠올린다.
형과 내가 전부가 아니라, 그 사이에 끼어 있을 우리의 아이까지. 그러니까, 계속 그 생각 때문에 애가 갖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너 GS에 윤우연 선생님 알지?”
“윤우연 선생님?”
“응, 우리보다 한 기수 높은 선배.”
흐려졌던 시야가 느닷없는 인물에 조금은 선명해졌다. 한 기수 높으면 김현재와 동기겠네. 그게 누구더라. 나는 5년 전 GS 인턴을 돌았던 때를 떠올렸다.
윤우연, 윤우연. 분명 머릿속 어딘가에는 남아 있는 이름인데. 눈동자를 굴리며 가만히 윤우연을 기억하던 내가 문득 생각나는 얼굴에 고개를 들었다.
“그 오메가 선생님?”
“그래, 그 윤 선생님. 그 선생님도 작년에 애 낳아서 작년부터 육아 휴직 중이거든. 윤 선생님 알파가 상의도 없이 노팅해서 4년 차 때 임신한 채로 이 악물고 일 다녔어. 아무래도 홑몸이 아니다 보니까 당직도 몇 번 빠지고 그랬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애도 건강하게 태어났고.”
“……형은 내가 일을 쉬는 게 싫대.”
“일 잠깐 쉬는 게 뭐 어때서. 의사로서의 삶만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잘 의논해 보고 결정할 일이지.”
“…….”
“마음 확고하잖아. 그러면 그냥 죽자고 덤벼들어서 설득해. 어쩔 수 없지, 뭐.”
그런 말을 내게 남긴 무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밑잔이 깔린 잔을 들었다. 무색을 띤 술이 무영의 입 안으로 넘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숙인 나는 깊은 고뇌에 잠겼다.
온 세상의 소리를 씹어 삼킨 듯했던 적막 속에서 유일한 소리가 피어났다. 도어 록이 해제되었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공기마저 무거운 공간을 가르고 들려왔을 때, 나는 내게 불어닥치는 페로몬을 느꼈다.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은 형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TV도 틀어져 있지 않고, 불도 켜지 않아 캄캄한데 그 속에 홀로 앉아 있는 형의 실루엣을 보니 불쑥 서러움이 비집고 올라왔다.
앉아서 자고 있을 리는 없고, 누가 봐도 새벽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다. 허공을 고요히 떠돌고 있는 페로몬은 심기가 불편한 듯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신발장에 가만히 서 형의 페로몬을 느끼던 내가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형에게 다가가는 걸음이 술에 절어 있음을 곧이곧대로 뽐내며 휘청였다.
내가 형의 앞으로 다가가 서도 형은 망부석처럼 앉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서운하다. 서운하고, 서운하고, 서운하고, 또 서운하다. 고집을 꺾어 볼까 하다가도 형과 나, 그리고 우리의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가 계속 눈에 밟힌다.
형과 나 사이에 감도는 묘한 기류가 갑작스럽게 터진 형의 한숨으로 인해 깨졌다.
“들어가서 자. 내일 얘기해.”
짜증이 미묘하게 서린 목소리가 당장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을 뒤로 미뤘다. 내가 만취 상태임을 알아차린 형은 꾸역꾸역 차오르는 화를 강제로 억눌렀다. 그러나 뇌를 잠식한 술기운은 간혹 겁대가리를 상실하게 만든다.
한 발자국을 떼 형과의 간격을 좁혔다. 한쪽 무릎을 소파에 올려 둔 채로 몸을 바짝 세우며 다른 한쪽도 소파 위에 마저 올렸다. 형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꿇린 무릎이 술기운에 위태롭게 흔들릴까 싶어 손으로 형의 어깨를 짚었다.
형의 위로 올라타겠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내보이자 꼬여 있던 다리가 풀렸다. 몸에 힘을 빼고 형의 허벅지 위로 자리 잡고 앉았다.
“야.”
정신이 아롱아롱 흩어질 정도로 취했겠다, 시큰둥하게 터진 목소리에도 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야, 이해준.”
“왜.”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다시금 형을 부르자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내 귓가를 덮었다. 심통이 나도 단단히 난 목소리였다. 손의 위치를 형의 뺨으로 옮겨 고개를 고정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조금씩 형의 윤곽을 선명하게 담았다.
“서운해.”
“…….”
“나 서운하다고.”
“그래 보여.”
어리광을 부려도 풀어 줄 기미가 없어 보이는 목소리에 입술이 비틀렸다. 비죽 튀어나온 입술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꿋꿋하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너는 화나 보여.”
“제대로 봤네.”
이쯤 되면 내가 괜한 걸 고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는 형과 함께 키우는 건데, 형이 싫다고 하면 나는 포기를 하는 게 당연한 건데. 코로 깊게 들이켠 숨이 폐부를 한 차례 헤집고 흘러나왔다.
“내가 애 갖고 싶다고 한 게 그렇게 싫었어?”
“싫어.”
만개하듯 꽃잎을 활짝 펼쳤던 아집이 조금씩 꺾여 나가고 있었다. 꼭 설득시키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던 결심은 꽃봉오리도 피워 보지 못하고 시들었다.
이리도 단언하는데 무슨 수로 설득해. 술잔을 넘기며 전의를 불태웠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준비했던 멘트도 채 나열해 보지 못하고 풀이 죽었다.
“……일 때문에?”
일이라면 정말 괜찮은데. 내 몸 아껴 가며 잘해 낼 자신 있었는데. 차마 입 밖으로 터져 나가지 못한 미련이 쌓이면 쌓일수록 아쉬움을 집어삼킨다.
“네가 포기할 게 많아져서.”
“…….”
형은 우리의 다툼이 시작된 지 한나절 만에 진짜 속내를 내비쳤다. 임신하면 내가 포기하게 될 것들. 일과 내 시간. 그 정도는 나도 다 염두에 두고 꺼낸 말이었다.
“난 아무것도 포기 안 할 거야.”
어느 정도 물러서긴 할지언정 형의 생각대로 전부 포기해 버리진 않으려 했다. 아예 손에서 놓아 버리기엔 나는 이 일을 사랑하니까.
“하게 될 거야. 배가 불러 오면 불러 올수록 일에 제약이 생길 거고, 체력적으로 한계도 많이 느낄 거야. 운이 나쁘면 감정적으로도 크게 휘둘릴 거고, 그때가 되면 임신한 걸 후회할 수도 있어.”
“…….”
“나는 그게 싫어. 갖지 않아도 상관없었을 그깟 애 하나 때문에 네가 고생할 게 눈에 훤해서. 배 속에 다른 생명을 품게 된다는 건 그런 거야. 그때가 되면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어, 한음아.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
그러나 형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나는 임신을 함으로 절망 속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형의 그 마음이 너무 부드럽게 와닿았다. 얼굴을 감싼 손이 형의 뺨을 조심스럽게 간지럽혔다.
형은 지금 내가 어떤 눈으로 형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거울을 통해 보진 못했어도 느낄 수는 있었다. 형은 내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어여뻤다.
기억을 되뇌어 지금까지 내 임신을 반대했던 형의 말을 곱씹으면, 형의 입장을 대변한 말이 단 하나도 없다. 다 나였다.
애를 품은 채로 다칠 수도 있을 나를 걱정하고, 좋아하는 일을 포기할지도 모를 상황에 처할 나를 우려하고, 끝끝내 스스로의 판단을 후회하게 될 나를 두려워하고. 그런데 있잖아, 형.
“후회 안 해.”
나는 그때가 되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형이 생각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만은 면할 자신이 있었다.
“고집 그만 부려.”
“우리 아이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이랑 나를 빼닮은 우리 아이.”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벅찼다. 평생 임신이라곤 생각도 해 본 적 없던 내가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숨 가쁜 감격이 내게서 우러나온다.
“나도 의사야. 임신하고 나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도 잘 알고, 그것 때문에 힘들리란 것도 다 알아. 그런데 힘들면 좀 어때. 나 혼자 버티는 거 아니고 형이 내 옆에 있어 줄 텐데.”
“…….”
“등쌀에 밀려서 어영부영 가지려는 게 아니라 내 의지로 결정한 거야. 걱정할 일 없게 몸 잘 챙길게. GS에 윤우연 선생님도 임신한 상태로 일 잘했대. 형질이 강할수록 유산, 사산할 위험도 낮고, 일터가 병원이니까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겨도 바로바로 진료 볼 수 있잖아. 전공의 때는 하루에도 몇 십 개씩 날계란 까서 손 안 굳게 노력했어. 이번에도 잘할 자신 있어, 나. 애 낳고 나서 낮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 손에 맡겨도 퇴근하고 나면 누구보다 애 잘 볼 거야. 형은 우리 애 나 몰라라 할 거야?”
“한음아.”
“나 아무것도 포기 안 해. 물론 형이 나를 지탱해 주긴 했지만 5년 전에도 포기하는 거 없이 일, 사랑 다 잡았어. 나는 그때보다 더 단단해졌어, 형. 형 눈에는 안 그래?”
형에게 떨어져 내리는 시선이 확신을 뒤집어썼다. 주저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고,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고. 쉬이 물러서는 일 없이 누릴 수 있는 것 전부 누리며 살 수 있다고.
“형도 사랑해 줄 거잖아. 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우리 애 나보다도 더 사랑해 줄 거잖아.”
“그래도 조금만 더 고민해 보자.”
형은 하나부터 열까지 신중하지 못한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믿음직스러웠다. 형의 판단은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눈높이를 낮추고 형의 목을 끌어안았다.
“행복해. 일을 할 수 있고, 형을 사랑할 수 있고, 형이 나를 사랑하는 지금이 나는 너무 행복해. 그 분에 넘치는 행복감을 우리 애한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었어.”
“…….”
“좋은 부모 아래에서, 풍족한 사랑을 받고, 모난 곳 하나 없이 자랄 아이. 그게 보고 싶었어. 다른 사람 통해서 말고 우리를 통해서.”
“이 상황에 그 이야기 꺼내는 건 불공평한데.”
“그러니까. 절대 거절할 수 없을 상황까지 만들었는데 우리 형은 싫다네.”
입가에 어렴풋한 웃음이 감돌았다. 내가 졌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본인보다 나를 더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이길 자신이 없어졌다.
얼굴을 형에게 기댄 채 형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만지니 목석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형이 내 허리로 팔을 두른다. 코끝에 흐드러지는 체취, 페로몬, 그리고 살결에 닿는 체온.
취기가 이제야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지만 눈을 감았다. 내가 기대고 있는 형의 품이 너무 안락했다.
“애랑 너 중에 고르라고 하면 나는 너야. 그건 변함없어.”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이 슬며시 뜨였다. 뺨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 기척에 고개를 떼고 형을 바라보니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깊은 눈이 내 눈높이를 따라 이동한다.
“나는 고생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라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이건 누가 봐도 지는 싸움이야. 애를 낳고 나면 기쁜 일만큼 속상할 일도 뒤따를 거고, 우리가 시간과 감정을 모두 할애하면서까지 노력해도 원하는 만큼 성장하리란 보장도 없어.”
그런 말을 내게 건네는 형을 보니 어릿한 감정이 땅을 뚫고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스며들었던 웃음이 이제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애써 웃으며 형의 시선을 피했다.
“속상하다. 꼭 날 두고 하는 말 같아서.”
말 속의 의미에는 내가 있었다. 15년 전, 형은 처음으로 지는 싸움을 시작했었으니까.
“내가 걔를 너만큼 사랑하고, 헌신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서.”
측면으로 틀어진 고개를 용서할 수 없었던 형이 내 턱을 잡아 돌려세웠다. 그래 봤자 아래로 향한 시선마저 붙잡을 수는 없었으니, 나는 내리깐 눈꺼풀을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나한테 손 뻗었던 그때는? 그때는 나 사랑 안 했잖아.”
“충동적인 선택이긴 했지.”
“그래서 후회해?”
“누누이 말하지만 안 해.”
“지금은 후회할 것 같고?”
“아마도.”
소심하게 터져 나간 질문들을 형은 능수능란하게 대응했다. 왜 무신경하게 따라붙는 목소리가 나를 달래는 것만 같았을까.
“노력할 생각도 없지. 고집불통.”
“노력하지 않아도 넌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어떻게 한마디를 안 져.”
“내가 사랑하는 네가 사소한 것 하나 놓치는 게 싫어. 그뿐이야.”
부루퉁한 언사였어도 분명 속상함은 한층 누그러들었다. 나는 진작 백기 들었다고. 심술이 난 마음에 그 말을 구태여 토해 내진 않았지만.
“그러니까 더 노력해.”
“응?”
끝이 닳아 뭉툭한 말을 건네면서 내 등마루를 눌러 대던 손길이 불쑥 셔츠 안으로 끼쳤다. 실컷 거절해 놓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형에게 눈길이 꽂혔다.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더 노력하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그렇게까지 원하면 그 희생 다시 감수해 보겠다고.”
잘못 듣기라도 한 것처럼 눈가를 좁혔던 내가 가느다랗게 입술을 벌렸다. 허리께를 가감 없이 덮는 손길에도 표정이 얼떨떨하게 지어졌다.
“……형이 사랑해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사랑해 줄 것 같다며.”
“…….”
“…….”
뭐야. 대답이 왜 그렇게 짓궂게 들리지.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했던 정신이 그제야 들었다.
“나쁜 놈아.”
커다랗게 뜨일 새도 없이 왈칵 구겨진 인상이 결국 어이없음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이 형의 어깨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너 진작 이럴 생각이었지.”
조금의 밀림도 없는 게 못내 분했다. 주먹을 감싸 쥔 형이 내 손을 입가로 잡아끌었다. 부드러운 입술에 맞닿은 손 위로 형의 혀가 깔짝거렸다.
“나도 궁금해.”
“…….”
“너와 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
손을 애무하듯 말씨를 토해 내는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두려웠던 거야. 네가 후회하면 나 역시 후회하게 될 테니까.”
“…….”
“그러니까 간절했던 만큼 그 마음 자각하고 있으라고.”
내 후회를 두려워하는 형. 그게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고개를 숙여 형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비빈 내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기분 탓이었을까. 나처럼 가벼운 표정을 지어야 할 형의 얼굴이 싸하게 가라앉아 있는 게. 내가 영문 모를 표정을 하고 있자 형의 입술이 느긋하게 벌어졌다.
“대충 상황 정리 끝났으니까 이제 혼날 일만 남았지.”
살포시 지어졌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모호하게 얼어붙은 시선이 서느런 웃음을 짓고 있는 형에게 가 닿았다. 예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을 입꼬리에서 불현듯 작은 경련이 일었다.
“수틀린다고 말도 없이 이 시간까지 술 처마시고 들어왔잖아.”
“형, 그건……”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열이 받아서.”
맙소사. 놀라 휘둥그레 떠진 눈이 서둘러 형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잠시간 상실했던 겁이 뒤늦게 물밀듯 밀려들어 왔다.
깜박 잊고 있었다. 내가 귀가하던 찰나, 혹은 그 이전부터 나를 기다리며 차오르는 화를 애써 내리눌렀을 형을.
아니, 우리 방금까지만 해도 분위기 엄청 좋았잖아. 그게 이렇게 한순간에 뒤바뀐다고?
형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던 몸이 본능에 의해 흠칫 떨렸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아까부터 억눌러 왔을 형의 페로몬이 그 찰나의 순간에 무시무시할 정도로 개방됐다.
그러니까. 온 집 안에 밀도 높은 페로몬이 가득 찰 정도로.
“형.”
페로몬이 무서운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공기처럼 부피를 한정하지 않는 페로몬이 밀폐된 공간 안에서 계속 방출되면 숨을 쉬기가 곤란해질 정도로 빼곡히 들어차서.
페로몬의 양을 제멋대로 조절할 수 있는 우성은 페로몬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발이 바닥에 붙은 채 꿈쩍도 할 수 없음을 느꼈다.
“곧 주기 돌아온다고 했지.”
자리에서 일어선 형이 왼쪽 손목에 채운 시계를 풀었다. 툭, 소파 위에 무성의하게 내던져진 시계가 달빛을 받고 빛을 발했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허공을 메운 페로몬이 내게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늘 맡았던 페로몬이지만, 오늘따라 너무 적나라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득 형에게 물렸던 목덜미가 찌르르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눈가가 눈에 띄게 경직됐다.
“그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겠네.”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며 형이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 숨을 들이쉰 순간 기관을 타고 넘어오는 페로몬에 몸이 더워졌다.
단정하게 맨 타이를 풀어내는 손길은 우후죽순 격으로 돋아나는 페로몬에 비해 느긋했다. 형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타고 타이가 흘러내렸다.
몸에 맞지 않는 카페인을 흠씬 들이켠 것처럼 발작하듯 박동하는 심장이 큰 고동을 만들어 냈다. 그게 전율이 흐르는 것처럼 발끝까지 타고 내려갔을 때, 형이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
천 근을 인 듯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 무게를 무릅쓰고 힘겹게 걸음을 떼니 형은 호기롭게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 웃음을 마주하자 발끝까지 타고 내려갔던 감각이 다시 등마루를 타고 올라온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자비한 페로몬은 처음 맡아 본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무슨 느낌이냐면.
“어디까지 가려고.”
형의 페로몬이 꼭 내 발정기를 억지로 끄집어내려는 것 같은, 그런 느낌. 형이 상체를 에둘러 싼 와이셔츠의 단추를 톡, 톡 풀어내자 보기 좋게 올라온 근육질 몸매가 드러났다.
느닷없는 스트립쇼에 당황했다. 아까부터 뻐근하게 당겨 오는 아랫배에도 강압적이게 날 뒤덮는 페로몬에 선뜻 손을 뻗기가 힘들었다. 기어코 바지 하나만 겨우 걸친 형을 피해 뒤로 물러나던 몸이 제 발에 걸렸다. 뒤로 넘어지려는 나를 형이 손을 뻗어 붙잡았다.
“혼내겠다고 했지 잡아먹겠단 소린 안 했는데. 잘못한 걸 알긴 해?”
팔뚝을 붙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어중간하게 뜬 몸을 일으켜 세우는 손에서 정전기가 일어난 듯 스파크가 튀었다. 몸살감기에 걸린 것처럼 붙잡힌 살갗이 쑤셨다. 그 느낌이 석연치 않아 팔을 비틀면 비틀수록 형의 악력이 더 강해졌다.
“……아파.”
“유감이네.”
내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는 듯 내게 더 바짝 밀착한 형의 주위를 돌던 페로몬이 내 옷가지 속을 침투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연스레 한 발자국 더 뒤로 뻗게 되니 단단한 벽이 내 도피로를 가로막았다.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페로몬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사타구니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애액을 느끼자 하반신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단 한 순간도 틀어진 적이 없는 시선을 끊어 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형에게서 터진 뜨거운 숨결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던 순간, 입술 위로 다른 때보다 건조한 입술이 포개졌다.
“하아…….”
아랫입술을 씹어 무는 치아가 조금은 성급하게 내 입 안을 탐했다. 형의 손길에 의해 버클이 풀어진 바지가 다리 라인을 타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손바닥을 눌러 대는 손가락, 입술을 뜯어 먹기라도 할 것처럼 잘근잘근 씹어 대는 치아, 집어삼킬 듯 날 옭아매는 페로몬. 그 온갖 감각들이 고스란히, 아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잇새로 신음을 토했다.
“하으, 형…….”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형을 불러도 내 손은 어느새 형의 목을 두르고 있었다. 다시 입술이 맞닿았고, 형의 손이 내 엉덩이 한쪽을 세게 쥐었다. 흠칫 놀라 몸을 앞으로 빼니 밀착된 형의 허벅지가 내 성기를 더 강하게 짓눌렀다.
아랫배로 차가운 금속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 아래 단단하게 불거진 무언가가 느껴지기도 했다. 문득 아래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다리를 배배 꼬아 대고 싶었으나 내 다리 사이에 놓인 형의 다리가 이를 방해하고 있었다.
“으응…….”
잔뜩 추켜올려진 턱을 타고 누구의 것이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타액이 흘렀다. 그 온도가 내 체온보다 낮을 게 뻔한데도 기이하게 팔팔 끓인 액체처럼 뜨거웠다. 엉덩이를 움켜쥔 손이 떡 주무르듯 둔부를 주물렀다.
손에 힘이 실릴 때마다 구멍이 벌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간지러운 느낌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살살 흔들어 형의 허벅지 위로 둔덕 사이를 지분거렸다.
“후으, 형. 형, 나 진짜, 흣… 나 좀 어떻게 해 봐, 응?”
애가 달았다. 계속 호흡이 밭아지고 차오르는 흥분감에 온몸이 비틀렸다. 형의 목 뒤 탄탄한 살결을 한껏 거머쥐며 허전한 가슴팍을 형에게 치댔다. 물리고 싶었다. 형이 이를 세워 내 살갗을 씹어서 도려낼 기세로 깨물어 줬으면 했다.
단시간일지라도 각인한 알파의 노골적인 페로몬에 노출된 몸은 계속해서 더 큰 자극을 원했다. 머리가 아찔했다. 허벅지에 사타구니를 비비는 거로는 조금도 성에 차지 않았고, 목덜미에서부터 올라와 뒷머리를 세게 움켜쥐는 손길은 척추에 전기를 흘리는 듯한 감각을 동반했다.
마찰할 때마다 아랫배에 닿는 형의 성기가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져 있는 걸 눈치챈 구멍이 쉴 새 없이 벌름거렸다. 형의 바지를 적시다 못해 허벅지로 질질 흐르는 것 같아 미칠 지경이었다.
혼미한 정신으로 갈증을 느끼던 순간, 엉덩이 한쪽을 세게 틀어잡았던 손이 볼기를 받치고 날 들어 올렸다. 당황할 새가 없었다. 날 안아 든 형은 굳건했고, 등 뒤로 닿는 벽은 내가 더 물러날 수 없도록 날 지탱했다.
다리가 자연스럽게 형의 몸을 둘렀다. 몸이 술기운을 떨쳐 내지 못한 탓인지, 페로몬에 절여진 탓인지 손을 움직이고 있는 내게서 비현실감을 느꼈다.
손이 형의 입술을 찾아 짐작대로 얼굴을 더듬었다. 마침내 엄지가 타액으로 축축한 입술을 찾아냈을 때, 고개가 떨어지기도 전에 단단한 치아가 손가락을 씹어 물었다.
“아.”
말도 안 되는 쾌감이었다. 허리가 쭈뼛 서고, 하반신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아무런 예고 없이 볼기에 머물렀던 손가락이 구멍 근처를 서성거리더니 둔덕 사이에 뜨겁고도 단단한 게 닿았다.
“아흣, 응…….”
뇌가 그게 무엇인지 자각하기도 전에 먼저 뒷구멍이 반응했다. 허리가 곧추서고 형의 어깨를 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말렸다.
세운 상체를 앞으로 힘껏 기울여 형의 머리를 압박하는데도 형은 미동도 없이 서 뜨거운 숨을 뱉었다. 부드러운 듯 거친 허리 짓에 몸이 움찔 떨렸다.
하반신을 잠식하는 감각으로도 머리가 뻐근해져 사고 회로가 불통인데, 축축한 혀가 가슴팍을 배회하는 듯한 느낌도 이어졌다. 툭, 구겨진 셔츠의 앞섶을 여미던 단추가 치아에 걸렸다. 툭, 툭, 몇 번이고 치아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자 앞섶이 느슨해졌다.
품에 잠자코 안겨 있던 고개가 모로 틀어지더니 형이 이에 물고 있던 단추를 바닥에 뱉었다. 그에 자연스럽게 움츠렸던 몸을 떼어 내니.
“아읏!”
입구에 걸쳐지다가도 둔덕 사이로 빗겨 가던 성기가 불쑥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몸이 경직되다 못해 한껏 뒤틀렸다. 숨도 제대로 토해 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려 대는 몸이 무언가를 휘어잡아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형의 몸을 더듬어도 소용없었다.
이음매에서 심장이 쓸려 내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요동치는 박동이 느껴졌다. 알알한 통증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내가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호흡을 찬찬히 고르고 있었을 때.
“아! 아, 아파. 이해, 준, 읏, 나 진짜 아파.”
다시 한번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단단한 성기가 느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래에 처박혀 계속 부피를 팽창하는 성기는 내가 흐느낄 때마다 구멍 입구를 마찰하며 달싹거렸다.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면 그나마 좀 덜할 것 같은데, 문제는 몸이 계속 들썩거린다는 것이다.
“후으, 어디가.”
“……으으, 읏, 밑에, 밑이 너무, 응, 아파.”
“밑 어디.”
형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꼭 붙들고 칭얼거렸다. 형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공간에 여유가 생겼다. 형의 어깨를 짚고 최대한 굽혔던 등을 세웠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눈꼬리를 타고 물기가 흘러내렸다. 코를 훌쩍거리기 무섭게 살짝 빠졌던 성기가 다시 속을 꿰뚫었다.
“깊어! 아프, 흣, 흐으, 아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밑 어디.”
“네가 쑤시고 있는 곳, 개새끼야!”
“그랬구나.”
시답잖은 소리라는 듯 작게 웃으며 넘긴 형이 또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그럴 거면 왜 굳이 집요하게 물어본 건지. 예민하게 날이 섰던 눈매가 형의 움직임으로 인해 좁혀지더니 반사적으로 손마디가 구부려졌다.
“으흣, 읏, 응!”
악물린 잇새로 소리가 흘러나갔다. 형이 쳐올릴 때마다 작게 들썩였던 몸이 더 버티지 못하고 벽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에 숨을 몰아쉬던 형이 어깨에 얹은 손을 잡아당겼다. 속절없이 앞으로 기운 몸이 형의 머리를 끌어안자 뜨거운 체온이 허리께를 감쌌다.
약 올라. 억울함이 비죽 솟아 기댔던 고개를 들어 형의 귓바퀴를 씹어 물었다. 이가 꽤나 날카롭게 파고들었는지 견고하던 고개가 살짝 비틀렸다. 뜨겁게 터진 숨결에 욕을 씹은 형이 허리께에 두었던 손을 내려 둔덕 사이를 벌렸다.
“읏!”
가뜩이나 발갛게 올라 있을 곳을 서슴없이 매만지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귓바퀴를 더 세게 물었다. 비죽비죽 솟아나는 페로몬이 나를 빨아 당길 것처럼 더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내 돌발 행동에 잠시간 허리 짓을 멈췄던 형이 다시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을 콕콕 찔러 대는 선단이 평소와는 달리 자꾸 애먼 곳으로 튀었다. 일부러 전립선만 피해서 쑤셔 대는 게 눈에 보였다. 팔뚝으로 형의 어깨를 짓누르며 무게를 실어 허리를 돌렸다.
“으응… 후으, 흣.”
허리를 곧추세우고 몸을 뒤로 젖히니 까무룩 잊고 있던 벽에 어깨가 닿았다. 내가 허리를 움직이자 형이 성기를 꽂아 넣은 채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실눈을 뜨고 형을 내려다보니 형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스며들어 있었다.
자세가 너무 불편했다. 뒤로 자위를 해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라 전립선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게 이토록 원망스러워질 줄 몰랐다.
“그게 아니지.”
끙끙거리며 허리를 요령 없이 흔들어 대니 보다 못한 형이 입을 열었다.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내가 꾹 깨문 입술을 벌렸다.
“하읏!”
순간을 치고 들어온 성기를 내벽이 힘껏 조였다. 정확하게 전립선을 스치고 파고들었다. 손에 힘을 잔뜩 실어도 팔이 덜덜 떨렸다. 솜털까지 쭈뼛 서는 것 같은 쾌감은 늘 겪는 감각이었지만, 번번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는 건 똑같다.
형이 내 몸을 벽 쪽으로 밀고 허벅지를 붙들지 않았으면 하반신에서부터 타고 오는 향락을 이기지 못할 뻔했다. 옴짝달싹 못 할 체위에 자세가 적당히 고정되었다 싶었는지, 형은 계속해서 내 안을 쑤셔 댔다.
“읏! 흐읏, 응! 후으…….”
옷감이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벽에 쓸리는 몸이 아팠다. 벽을 가로로 가로지르는 나무 턱을 붙잡고 턱을 추켜들었다. 형의 탄탄한 복근에 밀착한 성기가 바르르 떨어 대며 사정할 기미를 알렸다.
이제는 형이 굳이 전립선을 스치고 지나가지 않아도 아래에 형의 성기가 물려 있다는 걸 인지할 때마다 허리가 곤두섰다. 고개를 숙여 풀어 헤쳐진 앞섶에 혀를 가져다 댄 형이 맨살에 혀끝을 굴렸다.
비틀린 몸에 의해 가슴을 내보인 앞섶 사이로 드러난 유두가 빳빳이 서 형의 혀에 파묻혔다. 내 입술을 삼키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려 가슴 한쪽을 죄다 물어 버린 형이 이를 세워 살갗을 씹었다. 헐떡이던 가슴팍에 잇자국이 남자 성기에서는 희멀건 백탁액이 위로 솟았다.
“으읏! 아아, 더, 더 씹어 줘, 형. 하아, 응, 좋아.”
형의 가슴팍 아래까지 튀어 번졌던 정액이 턱까지 미쳤는지, 손등으로 턱을 쓸어 닦은 형이 내 요구에 한쪽 눈썹을 치들었다. 아래로 내리깔려 형을 쫓던 눈이 내 가슴팍에 처박았던 고개를 떼는 형에게 흘렀다.
“그래?”
더해 달라니까, 왜. 비틀린 잇새가 그 말을 토하기도 전에 형이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사정을 하며 죽어 버린 성기가 형의 허리 짓에 바짝 기립했다.
“응! 후읏, 흣!”
얇은 턱에 짓눌린 손바닥이 아파 오기도 전에 다시 고개가 꼿꼿이 솟았다. 타액에 점철된 채 노출된 유두가 찬기를 느꼈다. 지칠 줄 모르고 안을 헤집는 성기를 씹어 물던 구멍에 힘을 잔뜩 실었다.
한껏 좁아진 시야로 몇 번이고 신음을 토했을 때, 강하게 들이닥치는 선단마저 포용한 구멍이 경직됐다. 쳐올렸던 힘이 너무 강해 내 힘으로는 버티지 못하리라 판단한 팔이 형의 목을 둘렀다.
“후으, 으…….”
잠깐 사이에 정액이 안을 가득 채웠다. 쓰러지듯 기댄 몸을 늘어트리자 형이 내 몸을 끌어안은 채 방향을 틀었다.
“아, 으응, 형, 형, 움직이지, 흣, 마.”
형이 걸음을 뗄 때마다 구멍에 짓이겨 파묻힌 성기가 안을 찔러 댔다. 바짝 선 내 성기가 형의 살결을 찔러 대는 듯한 감각 역시 피해 갈 수가 없었다. 씹어 문 이가 형의 어깨를 밀어 움직임을 저지했다.
그러자 바람대로 걸음을 멈춘 형이 나를 어딘가에 눕혔다. 등이 딱딱하게 배기는 느낌을 보면 침대는 아니고 천장을 흘깃 쳐다보니, 내가 누운 곳이 곧 식탁 위라는 걸 인지했다.
불현듯 불안한 상황을 감지한 내가 식탁 위를 손으로 짚어 뒤로 물러났다. 자연스레 밑구멍에 꽂혀 있던 성기가 시야로 드러났는데, 죽어 있어야 할 성기는 사정한 적이 없는 것처럼 흉흉하게 솟아 있었다.
선단에서부터 점성이 있어 보이는 액체가 가느다랗게 늘어졌다. 톡,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뒤로 물러나는 순간 끊긴 가는 선에 시선이 절로 들어 올려졌다.
내가 움직이는 모양새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형이 내 발목을 그러쥐어 당겼다.
“형……!”
“말해.”
식탁 바깥으로 당겨진 다리가 억지로 형의 허리에 둘러졌다. 발기한 중심을 다시 내 다리 사이에 밀어 넣은 형이 무신경하게 말했다.
“……나 힘들어.”
내가 다시 몸을 뒤로 물리려는 순간, 형이 내 허벅지를 붙잡았다.
“애 배고 싶다며.”
“…….”
“아직 노팅 안 했는데.”
벌어진 넥 칼라를 당기듯 쥔 형이 고개를 숙였다. 터져 나가는 응석을 그렇게 해서라도 틀어막겠다는 듯 내 입술을 집어삼킨 형이 내가 입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마저 끌렀다.
혀를 섞는 농도가 짙어질수록 안에 들어찬 성기가 부피를 키웠다. 기어코 셔츠를 전부 풀어 헤친 손이 내 상복부를 더듬었다. 긁듯이 손을 세워 내 몸을 간지럽히는 통에 입이 한껏 벌려졌다.
그 속을 성급하게 파고든 혀가 내 입 안을 훑었다. 울대를 지나 미약하게 새어 나가는 신음에 형이 내 골반을 쥐고 몸을 더 바짝 당겼다.
아차 할 사이에 깊이 쑤셔 박힌 성기에 얽던 혀도 놓아 버리고 고개를 숙였다. 이에 놓칠세라 한 손으로 내 턱을 쥔 형이 고개를 들어 올려 고정시켰다.
“하으… 데리고 가려면, 읏, 침대로 가지. 여기 등 배겨.”
“다음은 침대로 가서 하든가.”
“잠깐만 왜 또 다음이……!”
놀라 경악하는 입술 위로 입술이 포개어졌다. 허벅지를 감싸 쥔 손이 부드럽게 살결을 주물렀다. 밑에는 이미 한바탕 싸질러 놓은 정액 탓에 공간이 비좁을 것 같은데도 형은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응, 으응, 흣.”
허리를 유연하게 움직일 때마다 이음매에서는 찔꺽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고, 성기가 안까지 깊이 스며들수록 몸이 움찔 떨려 댔다. 내벽을 찔러 대는 성기가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상태라 벗어나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결국 체념한 채 형의 목을 감싸 안으니 치열을 훑던 혀가 서서히 뒤로 빠졌다. 아랫입술을 아쉬운 듯 두어 번 빨던 형이 고개를 떼자 감겼던 눈이 슬며시 뜨였다.
고개를 틀어 뺨으로 닿는 팔뚝에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형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 느낌이 좋아 하반신에 힘을 실어 응답하니 형이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자연스럽게 풀어진 손으로 식탁을 지탱해 상체를 일으켰다. 형의 입가에 감도는 웃음을 따라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형이 허리에 둘린 다리를 풀어 양 발목을 한 손에 그러쥐었다.
성기가 빠져나가 허전해진 아래가 훤히 드러났다. 다리를 왼편으로 들어 올린 형이 검지와 중지를 구멍 안으로 후벼 넣었다. 반사적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형의 팔뚝으로 손을 얹으니 팔이 금세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느긋이 날 내려다보며 내 애액인지, 형의 정액인지 모를 액체를 입가에 가져다 댄 형은 아랫입술에 닦듯이 액체를 묻혔다. 형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멀겋게 눈이 뜨였고 이내 구멍 안에 성기를 끼워 맞추고 천천히 기우는 몸을 느꼈다.
뒤로 밀려나지 못하게 허벅지를 단단하게 붙잡은 손 위로 내 손을 포갰다. 상체가 점점 가까워질 때마다 틀어진 채로 짓눌린 몸이 조금은 불편하다고 느꼈을 때.
“빨아.”
형은 정체 모를 액체가 묻은 입술을 들이밀며 말했다. 비식,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가끔씩 변태 같은 취향을 내세우는 게 귀여워 죽겠다.
“이러면, 하아, 형이 만족할 만큼 빨기 힘들어.”
“그래도 빨아.”
곧 죽어도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는지 형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럴 때 보면 형은 자신의 오메가가 몸이 생각보다 유연하지 않다는 걸 망각하는 것 같다. 아니, 말이 틀렸다. 망각하는 게 아니라 무시하는 거지. 하는 수 없이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죽을 둥 살 둥 힘겹게 입술에 묻은 액체를 핥아 먹는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계속해서 상체를 묵중하게 내리눌렀다. 결국 숨통이 막혀 혀를 내민 채로 끙끙대면 형은 고개를 깊게 숙여 입 맞추는 일이 수월하도록 도왔다.
“흐으, 읏, 응.”
잇새로 터지는 소리가 몇 번씩 형의 입 속을 채웠다. 허리를 뭉근하게 돌려 대며 선단으로 안을 지분거리던 형은 허리 짓이 이어질수록 발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곧 사정할 것처럼 저릿하게 올라오던 성기가 다시 한번 사정액을 뿜어냈을 때도 형은 고집스레 내 안을 쳐올리기 바빴다.
쉴 새 없이 차오르는 자극은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지쳐서 쓰러질 지경에 이르러야 그만둘 요량인지 형은 내 안을 끝도 모르고 휘저어 댔다.
나를 들어 올린 채로 한 번, 식탁에서 두 번, 이제 더는 못 하겠다고 밀어내는 나를 달래 기어코 침대까지 간 형은 온몸이 땀에 전 채로 나를 밀어붙였다.
“이제, 흣, 응! 이제 좀, 후으, 그만……. 아아, 흣, 그만, 해, 형.”
하도 소리를 질러 대는 바람에 목까지 쉬었다. 귀엽다고 했던 건 취소다. 아래가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고, 밀어내려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복부엔 내가 싸지른 정액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고, 백탁액을 뿜어내던 성기는 더 토해 낼 것도 없이 힘없이 발발 떨었지만, 형이 허리 짓을 할 때마다 금방 저릿하게 발기했다.
이제 진짜로 한계였다. 정신은 진작에 흐트러져 눈꺼풀을 감고, 뜨는 것조차 힘겨웠다. 한껏 젖혀진 고개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지도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형, 으응, 읏, 나 이제 진짜…….”
“아파.”
뭐?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하복부를 내리누르는 손등을 꼬집던 내가 형에게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를 아득하게 주워 담았을 때.
“아아, 아! 아파, 형! 이거, 이거 빨리, 윽, 빨리 빼!”
“못 빼.”
하반신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잇따랐다. 기력이 온전히 소모된 줄 알았던 몸을 허둥지둥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내 머리를 손으로 감싸 쥐고 상체를 낮추는 형의 어깨를 힘껏 밀어내도 소용이 없었다.
쇠로 된 갈고리가 속을 짓이기고 있는 것 같은 통증에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치솟았다. 형의 품에 갇혀 사그라들 생각이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나는 서러운 눈물을 왈칵 쏟아 댔다.
“괜찮아.”
내 위로 나직하게 떨어지는 음성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 빼내지 않아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정액 사이로 뜨거운 정액이 다시 메워졌을 때, 미약하게 깨워져 있던 머리로 알았다.
내 속에 처박힌 성기가 더 크게 팽창하면서 날 아프게 한 게 노팅이었다는 걸.
“하아…….”
숨을 길게 내쉬는 형이 내가 품을 수 있는 씨를 내 안에 가득 뿌려 댔다는 걸.
외전(2) Endless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