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That day (8/14)

외전(1) That day

그날의 예보

“권의준 지금 어디 있어? 이 새끼 왜 콜 안 받아!” 

태양도 이제 막 고개를 빼꼼 내밀었을 7시. 강유한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로 의국에 박차고 들어왔다. 원체 목청이 좋았던 강유한이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했다.

강유한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의국 구석에 있는 2층 침대를 뒤지는 까닭은 그리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10월 이후로는 업무를 최소화하고 보드 시험을 준비하던 강유한의 일과는 1년 차에게 오더를 내린 후부터 시작이었다. 시작을 함께 울려야 할 1년 차의 행방을 쫓는 강유한은 무척 후줄근한 상태였다.

잠들 새도, 씻을 새도 없이 시험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는지 눈은 퀭했고, 머리는 기름이 져 있었다. 요 몇 주간 병원 내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만 주야장천 해 대는 통에 기력이 없어야 할 강유한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권의준을 찾는 것을 보며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꽤 잘 버틴다고 생각했던 1년 차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게 충동적으로 벌어진 해프닝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수련 포기로 이어진다면 제일 곤란할 사람은 강유한이었다.

3년 차인 김현재나 2년 차인 내가 최대한 뛰어다닌다고 해도 잡다한 일을 죄다 도맡아 하는 1년 차의 공백을 온전히 메울 수는 없었다. 결국 강유한은 시험공부 대신 다시 병원 일에 매진해야 할 수도 있었다. 잠을 최대한으로 줄인다고 해도 둘 다 병행하기엔 한계가 있으니까.

강유한이 울 것처럼 얼굴을 우그러트리며 침대맡에 앉았다. 강유한의 머릿속에는 이미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하고 재수를 하게 될 본인이 뇌리에 깊게 새겨진 모양이었다.

그런 강유한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회의 준비를 하다 말고 의사 가운에서 휴대 전화를 빼 들었다. 혹시 권의준이 뭐라도 남기진 않았을까 싶었던 내가 메시지 하나 오지 않은 화면을 보며 권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의준 본 사람 없대요?”

“내가 병신이냐, 본 사람이 있는데 병원을 이 잡듯 뒤지게?!”

왜 나한테 성질이야. 힘없이 앉아 있다가도 예민해져서 베개를 집어 던지는 강유한을 보며 김현재가 작게 중얼거렸다. 브리핑 때 사용할 PPT를 검토하는 김현재 역시 짜증이 났는지 신경질적으로 날이 서 있었다. 나는 긴 신호음 뒤 끊기는 번호에 다시 발신을 넣었다.

“나 이제 어쩌지. 나 진짜 수능 재수했을 때 다시는 재수 안 할 거라고 결심했었는데, 씨발. 가뜩이나 합격률도 높은데 나만 똑 떨어져 버리면 나는 진짜…….”

저년 차의 수련 포기는 흔한 일이었지만 강유한은 겪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하필 지금, 다른 때도 아니고 전문의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4년 차 말에 이런 일을 겪으니 멘탈이 터질 만도 했다.

그렇다고 다른 팀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는 일이라 여러모로 걱정이 많은 탓에 해야 할 일을 망각해 버린 것처럼 강유한은 멍청하게 굴었다.

나는 다시 끊긴 전화에 휴대 전화를 귀에서 떼곤 천천히 키패드를 두드렸다.

[확인하면 전화해. 강 선배도 화 많이 안 났으니까 괜히 겁먹지 말고.]

물론 화가 많이 안 났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권의준이 돌아온다면 강유한은 물론이고 김현재에게도 대차게 혼날 게 뻔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1년 차가 깡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겁을 주면 줄수록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 일단 연락이 돼야 설득을 하든, 달래든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

“병동 돌고 올 테니까 찬물 마시면서 정신 좀 차려요.”

“……마음 편하게 네가 계속 1년 차 해 주면 안 되냐, 한음아? 너는 말 안 해도 척척이었잖아.”

“헛소리는 안 받아요.”

나는 강유한이 들고 있는 차트를 빼앗아 지난날 새로 입원한 환자가 포함된 명단을 펼쳤다. 왼손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막 10분이 지나고 있었다.

오늘은 수요일이었고, 매주 수요일에는 라운딩(회진) 전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콘퍼런스가 있었다. 아침 라운딩이 진행되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 더 서둘러야 했다.

“김 선생님이 책임지고 강 선생님 깨워서 브리핑 준비 좀 끝내 줘요. 저 금방 다녀올 테니까.”

“나도 바빠 뒤져요.”

“선배.”

“귀찮게. 알았으니까 썩 꺼져.”

귀찮다는 듯 손을 설렁설렁 휘젓는 김현재를 뒤로하고 의국을 빠져나왔다. 뛰다시피 병동을 가로질러 금일 진행될 수술 환자라든가, 간밤 사이 이상 증세를 보였던 환자, 새로 입원한 환자의 질환과 증세를 위주로 파악했다. 하필이면 특이 사항을 보인 환자가 지난날보다 많아서 발을 바닥에 붙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어, 권 선생님은 어쩌고 왜 이 선생님이 돌아요?”

“오늘은 쉬라고 했어요.”

최종적으로 차트를 체크하며 의국으로 뛰어가는 내게 의아한 듯 물어 온 건 NS 병동 하 간호사였다. 어차피 한두 시간 뒤면 병동 내의 모든 의료진이 알게 될 일이었지만 권의준의 일로 발이 묶여 있는 피곤한 일을 내가 도맡아 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시계를 확인하며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티 내자 하 간호사는 “아, 그렇구나…….” 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게 권의준을 향한 하 간호사의 마음을 의도치 않게 알아챈 기분이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피곤하실 텐데 이거라도 드세요, 이 선생님.”

왜 그런 표정을 짓냐며 걸고넘어질 것도 없이 돌아서는 나를 하 간호사가 다시 불러 세웠다. 나는 하 간호사의 손에 들린 병으로 된 오렌지 주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권의준에게 주려던 주스일 게 뻔한데.

“이건 권 선생 책상 위에 올려 둘게요.”

안 그래도 병동을 도는 내내 권의준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료진, 환자 할 것 없이 권의준을 찾는 사람들에게 대충 둘러대는 것도 슬슬 질릴 타이밍이었다. 이쯤 되면 온갖 데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던 권의준이 왜 돌연 사라진 건지 의문이었다.

하 간호사의 손에 들린 오렌지 주스를 받아 들며 말하자 하 간호사가 얼굴을 붉혔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만 방긋거리는 하 간호사에게서 두 번째로 등을 보이고 나서야 나는 의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차피 나는 오늘 수술 일정도 별로 없었으니까, 3분이나 늦었다, 이한음. 1년 차 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거북이 다 됐냐?”

“살아난 건 좋은데 시간 밀린 건 제대로 계산해요. 정신 차리고 바로 명단 넘겼으면 3분 더 일찍 끝냈지.”

들고 있던 병을 권의준의 책상 위에 올려 두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강유한과 김현재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강유한이 내 말에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하여간 우리 후배는 말하는 것도 존나 예뻐요. 특이 사항은?”

“Op(Operation, 수술)는 예정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은데. 411호에 김민철 환자요, 오늘 새벽에 Sz(Seizure, 발작)까지 왔었는데 계속 Disch(Discharge, 퇴원)하겠다고 성화예요.”

“411호? Epilepsy(뇌전증) 환자? 그 환자 사브릴 먹고도 효과 없어서 adm(Admission, 입원)했잖아.”

“그냥 더 센 약으로 달라는데 일단 용량 늘려서 Formula(처방)할까요?”

“병원비 때문인가?”

“병원비 얘기는 따로 없었는데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피곤한 듯 손으로 하관 주위를 쓸던 강유한이 이제는 범위를 넓혀 마른세수를 했다.

“싫다는데 뭘 붙잡으려고 해요. 그냥 이한음 말대로 용량 늘려서 퇴원시켜요, 전에도 약 몇 번 빼먹어서 효과 부실했던 건지 누가 알아. 안 그래도 병실 부족해서 대가리 터지겠는데,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다시 오라고 해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현재가 한마디 보탰다. 의사가 돼서 그딴 말을 지껄이냐며 김현재를 흘겨본 강유한이 더 고민을 하려는 듯 이마를 긁었다.

“이따 라운딩 시작하기 전에 내가 가 볼게. 이왕 빵꾸 나서 메우는 김에 내가 권의준 몫까지 할 테니까 너희는 짬 생길 때마다 와서 좀 도와. 나는 3시에 Op 들어가니까 3시부터는 둘이 번갈아 가면서 콜 받고.”

“네.”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피곤한 일만 생기네. 권의준 이 새끼를 어떻게 조지지.”

여러모로 머리가 아픈지 의자에 기대 다리를 쭉 뻗은 강유한이 욕을 해 댔다.

“영영 사라지고 나서 후회하면 늦어요. 조질 생각 말고 달랠 생각을 해.”

“한음아, 대가리 좀 컸다고 아까부터 말이 짧다?”

책상 위에 놓인 CT 필름과 기록지를 집어 들며 한심하다는 듯 터트린 말에 강유한이 불만을 토했다. 문을 등으로 미는 도중에 못마땅한 표정의 강유한과 잠시간 눈이 마주쳤다.

“꼰대.”

“야!”

고개를 저으며 의국을 벗어나자 강유한이 나를 소리쳐 불렀다. 맞는 말 했는데, 왜. 뒤에서 들려오는 김현재의 목소리에는 고소하다는 듯 낄낄 웃는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때 옅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하던 내 위로 그림자가 지더니 들고 있던 자료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뭐가 그렇게 좋아.”

“형.”

잔잔한 물결처럼 희미했던 미소가 더 크게 번졌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우리를 지나치기 전 먼저 판독실로 향하려던 김현재가 형에게 인사를 건네자 형이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언제나와 같은 짙은 시선이 내 눈길과 닿았다가 문득 위로 올라갔다. 형이 손을 들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윗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뭐가 묻어 있었던 모양인지 찰나에 닿았던 손을 거둔 형이 먼저 몸을 틀었다.

“나 데리러 왔어?”

형의 뒤를 따라 밟으며 묻자 형이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세 떨어져 나간 시선이 아쉬워 옆구리를 콕 찔렀다. 섭섭한 척 입술을 비죽거렸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얼굴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웃음기가 더 빛을 발했다.

“내일 오프지.”

형이 판독실로 가기 위해 코너를 돌았다. 이제는 뒤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따라 걷던 내가 헛숨을 내쉬었다.

“반납해야 될 것 같은데.”

예정대로라면 내일이 열흘 만에 갖는 오프였지만 지금 상황에서 덜컥 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납이라는 소리에 걸음을 우뚝 멈추고 선 형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1년 차가 사라졌어. 강 선배도 공부 때려치우고 와서 업무 보는데 내가 어떻게 쉬어.”

“전화해 봤어?”

“안 받아.”

“집에는.”

다소 불만스럽게 피어난 어조들이 말을 뱉는 족족 따라붙었다. 집에는 안 해 봤는데. 굳이 입 밖으로 토해 내진 않았으나 형은 이미 알아챈 듯했다.

“해 봐. 갈 데가 집 말고 어디 있겠어.”

형이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판독실 문을 당겼다. 평소 같았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형이 불쾌감을 표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형도 내일 오프인가. 문이 닫히기 전에 C자 모양의 손잡이를 붙잡은 내가 뒤이어 판독실로 들어섰다.

콘퍼런스는 평소와 같이 이어졌다. 권의준의 공백 탓에 PPT의 화면을 넘기고 CT 필름과 판독 사진을 배분하는 건 내 역할이었다.

번갈아 가면서 진행했어야 할 브리핑을 김현재가 단독으로 끝을 냈다. 교수들의 쏟아지는 질문을 모두 받아야 했던 김현재가 무난하게 지나간 콘퍼런스에 깊은숨을 내쉬었다. 남모르게 들어와 쥐 죽은 듯 브리핑을 듣던 강유한은 판독실을 나서려는 형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전했다.

“오늘은 권 선생님이 없네요?”

눈치가 없는 듯 있는 김재겸이 박제원 교수의 뒤를 따라서 나가려다 말고 내게 말을 건넸다. 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김재겸은 의미 없는 고갯짓을 반복했다.

“이번 오프 때는 뭐 해요? 오프 맞춰서 유정이 보러 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김 선생님 혼자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오늘따라 유독 내 오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달에 한 번은 함께 유정이를 만나러 갔던 김재겸까지 오프 이야기를 꺼내니 그제야 권의준의 빈자리를 실감했다.

유정이를 못 본 지가 얼마나 됐더라. 저번 오프 때는 히트 사이클과 겹쳐서 종일 집에 처박혀 있었고, 그 전 오프 때는 병원에 다녀온 뒤 형이랑 뮤지컬을 관람했다. 그러니까 이번 오프까지 넘기게 되면 얼추 한 달은 못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열 살이 된 유정이는 골수가 성공적으로 생착 되어 작년부터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이 퍽 재미있는지 시설에 가고 나서도 일주일에는 한 번 꼴로 병원에 놀러 오던 유정이는 갈수록 발길이 뜸했다. 그래도 가끔 시설 번호로 전화가 왔기 때문에 딱히 서운할 건 없었다.

아니, 사실 조금 서운한가. 잘 지내고 있는 걸 확인하니 다행스럽다가도 얼마나 좋은 친구들을 만났길래 얼굴 한 번 보기가 이렇게 힘든 건지.

물론 나보다는 김재겸이 더 섭섭해했다. 가뜩이나 매일 보던 얼굴 자주 못 봐서 속상한데, 좋은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에게 자랑하는 게 그렇게 서운했단다.

함께 술을 마시며 한탄을 들어 주었던 다음 날에는 아침부터 유정이에게 전화가 왔었다. 술에 잔뜩 취해서 택시를 잡더니 집이 아니라 시설을 찾아갔던 모양이었다.

‘재겸이 선생님이 계속 뽀뽀하고 껴안아서 잠을 못 잤어요. 술 냄새는 또 얼마나 나는지, 제 머리가 다 아팠다니까요? 어른이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수화기 너머로도 전해지는 불만스러운 어조에 한참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웃어서 배가 당길 즈음에야 유정이는 성이 난 것처럼 씩씩대던 숨을 갈무리했다.

‘다음에는 꼭꼭 말려 주세요. 저 진짜 어제 너무…….’

‘……정아, 누구랑…….’

‘으, 술 냄새. 선생님은 출근 안 해요?’

그때는 유정이에게 떠밀리듯 쫓겨난 김재겸이 울상으로 출근할 때까지도 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요? 유정이가 이 선생님 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어, 갑자기 왜 웃지. 뭐 좋은 일 있었어요?”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며 이유를 추궁하던 김재겸의 모습이 그때와 얼핏 닮은 것 같아 웃음을 흘리자 김재겸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저는 항상 좋은데요. 하여튼 이번에는 안 돼요. 유정이 보면 다음에 꼭 보러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아, 이 선생님, 같이 가요. 저번엔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 유정이 보고 왔으면서.”

“시끄러워요.”

“진짜 너무해. 나한테 이럴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애 같은지. 예전에는 그저 서글서글한 성격에 가끔 보여 주는 어른스러운 면모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날이 갈수록 징징거림이 심해진다.

혀를 차며 버려지듯 널브러진 자료들을 하나둘 모았다. 계속 내 뒤에 따라붙어 같이 가자며 입술을 비죽이는 김재겸을 무시한 채 고개를 들자 열린 문틈에 기대고 서 있는 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어디까지 하나 보려고.”

형이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왜 페로몬을 못 맡았지. 의아하게 들어차는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하기도 전에 약을 오래 복용하다 보면 페로몬에 둔감해질 때도 있을 것이라던 박미영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가 아닌 김재겸에게 시선을 꽂은 채 무덤덤하게 말하는 형을 보다가 남은 자료들을 서둘러 모았다. 형은 여전히 김재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김재겸과 함께 있는 것을 달가워하진 않아도 말리진 않았기에 김재겸을 경계하는 형이 마냥 귀여울 따름이었다.

“저거 봐. 이 선생님한테 말만 걸려고 하면 맨날 이 선생님이 눈치 준다니까? 여기 내 얼굴 봐요. 안 뚫렸어요?”

김재겸이 내게만 작게 속삭이며 오른쪽 뺨을 문질렀다. 예전에는 둘이 함께 있을 때면 ‘이한음 선생님’, ‘이해준 선생님’ 하고는 이름을 붙여서 불렀었는데, 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둘이 동시에 반응하는 게 재미있는 모양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둘이 있어도 호칭을 통일했다. 하여간 유치해.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토해 낼 필요도 없이 나는 혀를 찼다.

“멀쩡한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재겸에게서 등을 돌리자 “이래서 커플은 안 돼.”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플이란 소리에 호선을 그리려던 입술에 형의 시선이 꽂혔다. 나는 자료를 들지 않은 손으로 형의 가운을 잡아끌었다.

“없어지면 제일 티 나는 사람이 왜 이렇게 굼떠. 가끔 형 찾는 콜이 나한테 오는 거 알아?”

“그랬어?”

당기면 당기는 대로 발걸음을 내딛는 형을 나무란 내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잠자코 내 뒤를 따라오며 싱겁게 되묻는 형을 흘겨봐도 형은 눈썹만 들썩이고 말았다. 의국에 들러 자료를 내려놓고 성급하게 움직였다.

충성심이 가득한 대형견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오던 형을 라운딩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들 사이에 밀어 넣고는 내 자리를 찾아갔다.

라운딩은 담당 스탭들을 위주로 여러 무리로 이루어졌다. 라운딩을 돌고, 안 돌고는 교수의 재량이었다. 매일같이 라운딩을 도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격일로 라운딩을 도는 교수도 있었다.

형은 아침저녁 할 것 없이 매일 라운딩을 돌았고, 형의 소속인 내가 김현재의 뒤에 서서 무리의 속도에 맞게 걸음을 내디뎠다.

“아직도 연락 없지?”

평소와 비슷한 수준의 회진이 이루어지고, 작은 수첩을 꺼내 형이 내리는 처방에 대해 필기하던 내게 강유한이 속삭였다. 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강유한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는 듯 콧김을 뱉었다.

뒤따르고 있던 인턴 하나가 강유한의 눈치를 보며 오늘 하루 닦달당할 일에 대한 걱정스러움을 내비치는 것이, 아무래도 한시라도 빨리 권의준의 집에 연락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30분가량의 짧은 회진이 끝이 났다. 권의준에게 연락을 할 새도 없이 불려 가 수술을 준비하고, 강유한을 도왔던 나는 잠깐 생긴 휴식으로 인해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복도에 비치된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 고개를 벽에 기댔다. 두 눈을 감은 채 넋을 놓고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리곤 가운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 전화를 들었다.

─ 여보세요.

“권의준.”

─ 선배…….

신호음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집으로 전화를 걸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은 권의준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동굴 같은 음성이 내 목소리를 알아채곤 희미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나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심이 되다가도 말문이 막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복귀할 거야?”

─ ……화 안 나셨어요?

“도망치는 애들 붙잡고 매번 화내는 것도 귀찮으니까 대답해. 여태까지 잘 버텨 놓고 이제 와서 때려치울 거야?”

─ 선배…….

강유한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울먹거리며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면 당장에 때려치울 마음은 없어 보였으니까. 내일부터는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겠네. 권의준과 연락이 되자 그제야 피곤이 몰려왔다.

“네가 쏟아부은 세월이며, 노력이며 안 아까운 게 없잖아. 오늘은 푹 쉬고 늦지 않게 와. 내 오프 미룬 값은 해야지.”

혹여나 안 오겠다는 말이 들려올까 봐 성급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 퇴근하면서부터 이어질 오프를 의도치 않게 하루 더 미루게 되었다. 전화가 끝나고 나면 제일 먼저 형에게 연락해 하루만 미루게 될 것 같다고 전할 참이었다.

─ 저 많이 혼나겠죠……?

“장난하냐? 혼나는 걸 무서워할 게 아니라 네가 팽개치고 갔던 환자를 더 먼저 생각해야지. 오늘 너 찾은 환자 수만 몇이었는지 알아? 와서 혼날 건 시원하게 혼나. 불만을 말하는 것도, 들어 주는 것도 다 그다음 일이야.”

주저하듯 전해지는 말씨에 치미는 짜증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려다가 참았다.

─ 불만이 아니라… 그냥 너무 힘들어서 홧김에…….

“의준아, 힘들어서 쉬는 건 문제가 안 돼. 어쨌든 우리는 한 팀인데 네가 그렇게 독단적으로 나오면 빠른 대책을 세울 수가 없잖아.”

─ ……죄송합니다.

책임감 없이 도망쳤던 권의준 탓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도맡아 하는 우리야 그렇다 치고, 권의준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힘들면 말해, 불만이 있으면 말해. 늘 그렇게 저년 차들을 안심시켜 놓고도 막상 불만이 터져 나오면 우리는 그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없었으니까.

권의준도 말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권의준의 일을 돕기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바빴고, 그나마 한가한 강유한은 보드 시험을 대비해서 공부해야 했다.

나는 내가 두 번째로 겪었던 일이었음에도 숨 가쁘게 뛰어다녔던 작년의 나를 떠올렸다. 내가 더 챙겨 주어야 했을까.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부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1년 차가 들어올 때마다 매번 챙겨 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 가만히 고민하던 나는 이번에도 한숨만 토할 수밖에 없었다. 내 뜻대로 인력을 늘리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고, 설령 병원장을 설득해 인력을 더 보충한다고 해도 신경외과는 늘 자리가 비었다.

“일단 내일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 네……. 죄송합니다, 선배.

걱정은 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울먹거리는 듯했던 권의준과의 통화가 끝이 났다. 형에게 콜을 넣어 오프에 대해 말을 꺼내자 형은 별다른 소리 없이 알았다는 대답 하나만 던질 뿐이었다. 의국으로 들어선 내가 뒤늦은 점심을 김밥으로 때우려는 김현재의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권의준이랑 통화됐어요.”

“뭐라는데. 걔 지금 어디래?”

김밥 하나를 입 안에 밀어 넣으며 김현재가 물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데면데면하던 김현재와의 사이가 풀어진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현재는 나에게 불평이 많았고, 단둘이 있는 것을 껄끄러워했다.

형이 내 뒤에 버티고 서 있었기에 대놓고 혐오하진 않았지만 눈빛에 서려 있는 감정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김현재와의 건조한 사이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내가 그에게 먼저 다가갔던 이유는 하나였다.

김중현의 일이 터지고 나서도 김현재는 나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저 변함없이 나를 싫어할 뿐이었다.

막 2년 차에 접어들고 몇 주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노골적으로 김현재를 도왔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학술 대회를 위해 준비 중이었던 구연에 대해 포인트를 짚어 주기도 했고, 교수가 연구 과제를 내줄 때면 당직이 아닌 날에도 남아 밤새웠던 김현재를 돕기도 했다. 처음에는 마냥 인상을 찌푸리며 기피했던 김현재도 어느 순간부터는 내게 먼저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경계가 풀어졌을 때쯤엔 내가 속한 2팀에 회식 날이 잡혔다. 김현재의 앞에 앉아 술잔을 채워 주던 나는 내 도움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혐오를 끄집어냈다.

대화를 유도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매번 찾아갔던 박미영과의 상담을 떠올리곤 박미영의 대화 방법을 조금 모방했다. 서린 경계심을 술기운으로 잠재운 김현재와 처음 발생했던 트러블을 되짚은 뒤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경계심 하나 푸는 것만 꼬박 세 달이 걸렸다.

“집이요. 내일은 복귀하겠대요.”

“미친놈이 따로 없네. 병원을 학교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미안해서 죽으려고 하던데.”

“그럴 거면 그냥 뒤지라고 해. 누구 좆뱅이 치게 만들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누군가에게 생기는 불만을 서슴없이 표현하는 김현재가 생각보다 뒤끝이 길다는 것을 그 세 달 사이에 깨달았다.

권의준의 앞날이 걱정되면서도 그래도 한참이나 어린 후배인데 나보다는 너그럽게 대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먼지 하나 끼어들 틈이 없게 좁혀진 미간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애 또 도망가면 저는 책임 안 진다고 말했어요. 강 선배는요?”

“도서관. 슬슬 올라올 텐데. 너도 이거 먹고 내려가든가.”

어쩌면 협박성 짙은 말투에 김현재가 눈을 치켜뜨다가 말고 내 앞에 검은색의 비닐봉지를 던졌다. 안에는 김현재가 먹고 있던 김밥이 세 줄 정도 남아 있었다. 그중 한 줄을 꺼낸 내가 호일을 펼쳐 한 조각을 입에 넣자 김현재의 호출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 씨발. 아직 덜 먹었는데.”

서둘러 김밥 세 조각을 든 김현재가 입에 대충 욱여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휴대 전화를 받아 들곤 의국을 나서는 김현재를 멀뚱히 바라보며 김밥을 오물거렸다. 뒤이어 두 조각을 더 먹고 나서야 울리는 호출기에 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정이훈 교수가 집도하는 수술방에서 콜이 왔다. 2시에 예정된 수술에 들어와서 참여하라는 호출이었다. 2년 차가 되고 나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수술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말이 참여지 사실은 들어가서 두개를 직접 열고 뛰쳐나오는 일이 태반이었다.

가끔 콜이 안 들어오면 수술실에 들어가 한 시간가량을 세컨 어시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도 흔하지 않은 기회가 권의준이 없는 지금 시점에 찾아올 리 없었다.

이미 수술복 차림이었기 때문에 굳이 경의실을 들릴 필요는 없었다. 바로 스크럽 룸으로 향한 내가 포장된 일회용 솔을 뜯었다.

하도 솔로 피부를 쓸어 댄 탓에 팔뚝 피부는 날이 갈수록 거칠어졌다. 유독 연약한 피부를 걱정하며 무영이 선물해 준 핸드크림을 몇 번 바르고 캐비닛에 처박아 둔 게 생각이 났다.

과가 다른 무영과는 부딪치는 일이 웬만하면 없었다. 1년 차 때까지만 해도 자주 마주쳤었는데 지금은 밥을 먹는 시간도, 잠을 자는 시간도 모두 들어맞지 않았다. 가끔 응급실에서 마주치면 대충 눈인사를 건네곤 서로 해야 할 일을 찾아 뛰어다녔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같은 상황이었으니까 아마 무영과 제대로 된 왕래를 되찾으려면 족히 2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까마득한 미래를 머릿속에서 대충 흘려보내며 세면대를 무릎으로 탁, 쳤다. 기다렸다는 듯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물로 베타딘 용액을 전부 씻어 낸 내가 마스크를 하나 뽑았다.

“바이탈 괜찮나요?”

수술실 안에는 아주 작은 기계 소리만 웅웅 울렸다. 멸균이 된 상태로 수술 환자의 바이탈을 체크하고 있는 의료진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네, 오늘 수술 무리 없을 것 같아요.” 하며 고개를 끄덕인 의료진을 확인한 내가 수술 기구를 준비하고 있을 즈음에 정이훈 교수가 들어왔다.

수술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환자의 바이탈을 정확하게 체크하고 나서 수술 부위에 맞춰 절개 라인을 잡는다. 정이훈 교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피부부터 건막, 뼈막, 두개골 순으로 환자의 머리를 오픈한다. 환자의 수술 진행 방법이 어떻게 되는지, 수술 후 나타날 수 있는 후유증은 어떻게 되는지, 후유증이 나타날 때의 처치는 어떻게 되는지. 중간중간 정이훈 교수가 질문을 하면 나는 지체 없이 대답해야만 했다.

원래라면 두개골까지만 오픈하고 나서 쫓겨났을 자리를, 정이훈 교수는 뇌막 절개까지 내게 맡겼다. 거의 몇 년 만에 건드리는 뇌막이었지만 손이 굳지 않도록 계란 껍질막으로 수천 번도 넘게 연습했었다.

계속 내게 질문을 퍼부었던 정이훈 교수도 내가 뇌막에 메스를 가져다 대자 말을 아꼈다. 숨 막히는 정적이었지만 그 적막은 내가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었던 탓일까. 뇌막을 모두 절개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다음 수술 기구를 요구하려던 입술과 뻗어지던 손이 순간 굳었다.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를 바라보는 정이훈 교수의 시선이 오묘했다.

“그래, 나가 봐.”

꺼림칙한 시선 처리에 나는 건조하게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가슴팍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치는 심장이 거슬렸다. 정이훈 교수에게 인사를 한 뒤 도망치듯 수술실에서 빠져나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방심했다. 방심해도 너무 방심해서 하마터면 수술을 계속 진행할 뻔했다. 내가 요구한다고 해서 기구가 전달되리라는 보장도, 정이훈 교수가 나를 말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수술실 내의 모든 의료진의 황당한 눈빛을 받을 뻔했다.

긴장으로 손바닥에 차오르는 땀을 바지에 대충 닦았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그런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수술실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걸려오는 콜을 받으며 서둘러 응급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의 일과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막을 내렸다. 인력이 부족한 신경외과의 업무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지만 일단 공식적인 할당량은 모두 끝이 난 상태였다. 그래도 권의준의 몫을 나눠서 추가로 업무를 본 것치고는 일찍 끝난 수준이었다.

하루 종일 김밥 몇 조각으로 버틴 게 다라서 공복인 배가 뒤늦게 아우성을 쳤다. 배는 고팠지만 씹을 기력은 없었고, 위장은 비어 있었지만 아침저녁으로 약을 복용해야 했기에 힘없이 가운 주머니를 뒤적였다.

엉망으로 구겨진 약봉지를 뜯고 입 안에 알약을 털어 넣었다. 대여섯 개 정도 되었던 작은 약들이 물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물병에 입을 댄 순간 갈증이 심하게 일어 결국 앉은 자리에서 500mL의 물을 전부 넘겼다. 물배만 채운 기분이라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등받이에 기댄 채로 앉아 있던 내가 형의 연구실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조금 전에 사 온 거니까 먹고 자.”

당직이 아닌 날에도 병원에 제집처럼 눌어붙어 있던 형이 유리 테이블 위를 눈짓했다. 형의 눈짓대로 시선을 이동하다 보니 종이로 된 쇼핑백이 보였다.

쇼핑백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는 없었어도 상표를 보면 도시락이라는 걸 얼핏 알 수 있었다. 형이 이 늦은 시간까지 나를 기다린 이유는 나와 함께 퇴근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내일을 위해선 특히나 더 퇴근할 수 없었다.

“이따가……. 나 30분 뒤에 깨워 주라, 형.”

“왜.”

“최연호 환자 수술 리포트 써야 돼.”

“……정이훈 교수?”

뒤늦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전달이 되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었던 끄덕임이었지만 용케도 알아챈 형은 “또 시작이네.”라며 헛숨을 내쉬었다.

응급실 업무를 보던 도중 두개를 봉합하기 위해 다시 불려 갔던 정이훈 교수의 수술실에서 그만 지뢰를 밟고 말았다. 최연호 환자와 비슷한 케이스의 수술 영상을 찾아보고 연구해 오라는 것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가 언제인데 리포트냐며 비명을 지를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수술실에서 보였던 사소한 실수가 집도에 대한 욕망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정이훈 교수는 내게 넉넉하게 3일의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그 3일에는 무려 내 오프가 껴 있었고, 나는 그 하루를 과제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평화로운 오프를 보내기 위해서는 당장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리포트를 끝내야 했다.

최연호 환자는 뇌동맥류3)로 입원을 했고, 뇌동맥류가 흔한 질병인 만큼 비슷한 케이스도 꽤 많았다. 물론 뇌 질환에 대해서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었지만 그 방대한 양을 모두 담아내기에 한두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니까 30분만 자는 건 괜찮겠지. 절망적이게 흐려지는 목소리에는 어느새 잠기운이 깊게 스며들었다. 소파의 등받이 부분과 마주하는 상태로 돌아누워 눈을 스르륵 감았다.

“……고기도 먹고 싶고, 떡볶이도 먹고 싶고, 회무침도 먹고 싶어. 나 너무 배고파.”

수면욕을 채우기 위해 식욕도 마다했건만, 무의식중으로 웅얼거리는 헛소리에 형이 웃음 짓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마지막으로 필름이 끊긴 것처럼 정신 뚝 끊겨 버렸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연구실 안에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빈 공간을 한 번 훑었다.

어둡네. 달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고 있는 연구실을 한 바퀴 둘러보기도 전에 다시 눈을 감았다. 1초, 2초. 무겁게 이동하는 간결한 소리가 다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때,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몇 시지. 몇 시야. 당황한 눈초리가 서둘러 시계로 향했다. 3시 24분. 혹시나 잘못 보기라도 했을까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때마침 부지런히도 움직이는 초침에 의해 분침이 한 칸 앞으로 이동을 했다.

30분만 자려고 했던 것을 도대체 얼마나 잔 건지. 지금 리포트를 작성하기 시작한다고 해도 출근까지 네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언제부터 덮여 있었는지 모를 담요를 치우고 서둘러 연구실을 나섰다.

분명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형이 보이지 않았다. 왜 나를 깨우지도 않고 자리를 비운 것인지 알 겨를이 없어 마냥 답답하기만 했다.

아니, 애초에 깨워 달라는 말을 하긴 했던가?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속으로만 말했나. 졸음이 뇌에 녹아들어 제대로 된 기능을 유도하지 못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서 제시간에 퇴근하려고 했는데. 목표를 실현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나를 시름에 빠지게 만들었다.

NS 병동 스테이션을 지나 서둘러 의국으로 향했다. 혹시 누군가 쪽잠을 자고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불이 희미하게 켜져 있는 의국으로 들어서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낯익은 뒤통수가 있었다. 오묘한 표정으로 천천히 걷자 주인의 정체가 명백한 뒤통수가 기척을 느끼곤 뒤를 돌아보았다.

“형.”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건 형이었다. 놀란 눈이 형에게서 떨어져 의국 곳곳을 살폈다. 강유한도, 김현재도 없이 형은 홀로 의국 안에 있었다.

“여기서 뭐 해?”

“도시락은.”

“도시락?”

“도시락 먹었냐고.”

떨떠름한 얼굴이 형과 점차 간격을 좁혔다. 3시 30분을 향하고 있는 시각. 의국에는 볼일이 없을 형이 이 안에서 남몰래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내용은 뇌동맥류에 관한 것이었다.

“이거 뭔데?”

“해야 한다며.”

“내가 그걸 말했어?”

멍청한 물음의 연속이었다. 술을 웬만큼 마셔도 블랙아웃을 겪어 본 적이 없었는데 맨 정신으로 잠에 취해 그 순간의 기억이 희미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자 형이 황당하다는 듯 모니터에 박았던 시선을 들어 올린다.

“아니, 해야 하는 건 맞는데……. 그걸 왜 형이 하냐고. 안 잤지?”

“한숨 자고 내려왔어.”

형의 눈길이 다시 모니터로 떨어졌다. CT 필름을 따오며 알파벳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내가 할게.”

“됐으니까 올라가서 밥 먹고 와.”

“밥이라면 여기도 있을걸.”

밥이라는 소리에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았던 배에서 뒤늦은 허기짐이 몰려왔다. 형의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아 있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날 먹다 남은 김밥을 찾았다.

그 뒤로 아무도 의국에서 쉬지 못했던 모양인지 까만 비닐봉지에는 두 줄의 김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혹시 쉬었을까 봐 냄새를 맡은 후에 김밥을 가지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 교수님 이런 과제 자주 내주셔? 내용은 어떻게 알고 또 이렇게 기가 막히게 적어?”

“한 번 걸리면 몇 달은 이 짓거리 해야 돼.”

형은 마치 직접 경험해 본 것처럼 말했다. 형도 정이훈 교수한테 걸렸었구나. 의미 없는 속삭임이 적적한 공간을 울렸다.

내가 김밥 한 조각을 들어 형의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형은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국 내 입 안으로 들어온 김밥을 부지런히 씹었다.

시침이 4를 지나쳐 5에 머물고 6으로 달리고 있던 시각. 컴퓨터 앞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리포트를 완성하는 사이 동쪽에서는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병동은 늘 그렇듯 부산스러웠다. 6시가 되기도 전에 쭈뼛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권의준을 보며 강유한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를 냈다. 권의준은 고개가 꺾인 인형처럼 바닥에 시선을 박고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 반복했다.

강유한이 화를 참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만큼 보드 시험에 대한 부담감이 컸던 모양이다. 10분가량 분을 쏟아 내던 강유한은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씩씩거리다가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잘 왔어. 한동안 숨을 고르던 강유한이 권의준에게 끝내 내뱉은 말은 잘 왔다는 말이었다.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다리를 분질러 버릴 줄 알아. 미적거리지 말고 빨리 병동 돌아, 이 새끼야! 자아가 두 개인 것도 아니면서 뒤이어 서슬 퍼런 욕설이 터졌다. 권의준은 눈물을 글썽이는 대신 서둘러 병동 스테이션으로 움직였다.

권의준이 돌아오면서 업무가 줄어들었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새벽부터 자욱하게 깔린 안개 탓에 인근에서 사고가 크게 났다. 안 그래도 베드가 부족한 응급실에 환자가 몰렸다.

수술 준비를 하다 말고 불려 가서 응급 처치를 하고, 위급한 환자 순으로 CT 검사실에 올려 보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닥친 환자의 CT 필름을 재촉하고, 인턴에게 환자의 피 검사를 지시하는 사이 수술실에서 콜이 왔다. 그러면 나는 또 서둘러 수술실로 달려가 수술을 준비해야 했다.

끊이지 않고 몰려오는 환자를 감당하기 힘들 때쯤에는 오전 수술을 끝낸 강유한까지 합세했다. 응급실과 수술실을 번갈아 가며 이동해야 했던 경황없는 상황은 3시가 되도록 이어졌다.

새벽에 꾸역꾸역 씹어 먹었던 김밥이 오늘 역시 공복으로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복선이었을 줄이야.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리며 복도에 설치된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러나 1분도 지나지 않아 울리는 호출에 다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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