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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7/14)

Epilogue

“어서 오세요, 한음 씨.”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반기는 박미영이 있었다. 어느덧 박미영과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나는 박미영의 미소에 따라 웃으며 그의 앞으로 가 앉았다.

“지난주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약 먹는 걸 몇 번 잊어버렸어요.”

그사이 나는 레지던트가 되었다. 인턴 초반에 워낙 사고를 친 전적이 많았기에 수련의 점수를 그리 후하게 받지는 못했다. 다행이었던 건 신경외과에 지원한 인턴의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던 덕에 겨우 정식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레지던트 1년 차가 되니 인턴 때와는 다른 의미로 정신이 없었다. 분명 두 번째 겪는 과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사 생활이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다는 걸 작년부터 누누이 겪고 있었다.

“많이 못 드셨어요?”

“많이는 아니고 세 봉지 남아 있어요.”

“약 말고 특별히 안 좋았다거나 불안했던 적은 없었나요?”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내내 일하고 자기만 해서.”

지체 없이 이어지는 내 말에 박미영이 고개를 느긋이 끄덕이며 차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아마 박미영이 적고 있는 건 내가 약을 얼마나 빼먹었는지와 지난주와 비교해 보았을 때 내 상태가 얼마나 호전이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요새도 악몽 꾸세요?”

“자주는 아니고 오히려 꿈을 안 꿀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잠의 질도 좋아지고…….”

박미영이 혼잣말을 하듯 내 대답을 간략하게 줄이며 속삭였다.

“다행이네요.”

종이를 넘겨 손수 적었던 차트 속 내용을 확인하던 박미영이 안심을 하며 밝게 웃었다. 그런 박미영을 보며 내가 멋쩍게 웃었다.

“매번 볼 때마다 한음 씨 표정이 가벼워지고 있어요.”

“아… 그런가요?”

“네, 한음 씨는 그렇게 안 느끼세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항상 보던 얼굴이라 그런 건지. 그냥 마음이 가벼워진 건 알겠는데…….”

음, 박미영이 비음을 입 안으로 삼켰다. 나를 보는 박미영의 얼굴은 더 이상 심각하지 않았다. 그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박미영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 걸까. 순간 드는 물음에 고개를 살짝 내려 책상 앞에 비치된 탁자 거울을 보았다.

지금 내 표정이 박미영과 비슷한 표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지금 내가 짓는 표정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한음 씨, 여기 처음 왔을 때 기억나요?”

갑작스레 터져 나온 박미영의 목소리에 내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옮겨졌다.

“저는 기억나요. 그때 한음 씨는 정말 많이 지쳐 있었어요.”

“…….”

“한음 씨는 제 앞에서 단 한 번도 편안하게 웃은 적이 없었거든요. 그냥 억지로 웃어야 더 괜찮아 보일 것 같으니까 애써 웃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제가 본 한음 씨는 늘 그런 얼굴이었어요.”

“…….”

“그런데 지금 한음 씨 얼굴 봐 봐요.”

박미영은 내가 조금 전 들여다보았던 거울을 손짓했다. 박미영의 손짓에 따라 자연스럽게 넘어간 시선은 아까 내가 보았던 얼굴을 도로 담았다.

“한음 씨가 느끼기에 한음 씨는 지금 억지로 웃고 있는 것 같나요?”

나는 뒤이어 들려오는 박미영의 목소리에도 고개를 그에게 틀 수 없었다. 거울 속의 나는 작게 웃음 짓고 있었다. 가벼운 표정. 더 이상 우울하지 않은 낯빛.

“……아니요.”

“악몽을 꾸는 횟수도 줄었고, 불안할 틈 없게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됐고, 지금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웃을 수 있게 됐어요.”

“…….”

“사실 한음 씨한텐 저와 상담하는 이 공간에 찾아오는 게 너무 힘들었을 거란 거 잘 알아요. 이곳에 오면 하기 싫은 기억도 떠올려야 하고, 좋았던 일보다 좋지 않았던 일을 계속 얘기하게 되잖아요.”

“…….”

“한음 씨는 정말 용감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주기적으로 정신과 찾아와서 저랑 이야기하는 거, 그거 아무나 못 해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음 씨가 더 단단해지고 있다는 걸 한음 씨도 아셔야 돼요.”

무언가를 면밀히 파악하기 위한 얼굴이 아까보다 더 긴장했다. 거울 속 굳어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나를 박미영은 채근하지 않았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코로 숨을 크게 들이켰고, 길게 내쉬었다.

김재겸이 내게 말했던 우울한 얼굴과 무영이 걱정했던 내 지친 모습. 나는 그때의 나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거울 속의 내 얼굴과 비교했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예전처럼 문드러진 속이 너무 아파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터질 것 같은 울음이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얼마나 걸어왔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기 위해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벅참이었다.

행복해지고 싶어. 그 일념 하나로 내디딘 걸음은 생각보다 많았고, 예전의 내가 작은 점처럼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아. 왜 늘 그런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하던 김재겸에게 이제는 말할 수 있었다. 내 우울은 더 이상 내 무의식을 집어삼키지 않는다고.

그때와 지금의 내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던졌던 말에 반문했다. 아니었다.

“달라졌어요.”

나는 많이 변했다.

“그때보다 마음이 가볍고, 편안하게 웃을 수 있고, 안락하게 잠도 잘 수 있어요. 가끔 김중현을 떠올릴 때마다 숨이 안 쉬어지긴 한데, 예전에 비하면 그렇게 고통스럽진 않아요.”

그런 말을 꺼내는 내 얼굴은 감복에 겨워 있었다. 내가 바라던 고지에 거의 다다른 기분이었다. 무려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고개만 살짝 숙이면 2년이 되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나는 그런 내가 낯설었고 어색했지만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사회적 지위로 성공하겠다던 내 다짐을 이루었을 때조차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좋지도, 그렇다고 후련하지도 않았던 그때와 지금은 조금도 비슷한 점이 없었다. 아마 나는 그 이유가 내 잘못된 욕망에서 비롯된 마음이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그거 봐요. 한음 씨도 그렇게 느낄 줄 알았어요. 그러면 예전에 한음 씨가 정했던 목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진전이 있었나요?”

“선생님 말씀처럼 매일 저를 칭찬하고 있어요.”

나를 사랑하는 것. 일전에 내 목표에 대해 설명했을 때 박미영은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쌍수를 들고 반색했다. 목표는 어떻게 정했지만,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내게 박미영이 의견을 하나 냈다.

거울 속 나 자신을 보며 나를 칭찬하는 것. 그날 잘했던 일과 달라진 것에 대해 다독이는 것. 처음에는 그저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입을 여는 횟수가 점점 늘었다.

가끔 형과 마주 보고 앉아 선배들에게 칭찬받았던 일을 되새기기도 했다. 내 얼굴이 비칠 정도로 선명한 눈동자에 대고 나를 칭찬하는 건 아주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를 형은 비웃지 않았다.

나는 차분한 형의 웃음을 보며 불쑥 형을 칭찬한 적이 있었다. 나를 열등감에 빠지게 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인정하며 미안하다는 감정을 전했다.

알면 됐어. 형은 그날 내게 가볍게 딱밤을 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손으로 이마를 쓸던 나는 옅게 웃는 형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나와 마주했던 형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던 것도 같았다.

“아주 잘하고 있어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때요?”

시시각각 변하는 내 얼굴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며 잔잔하게 웃던 박미영이 다시 입을 열자 나는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을 다물었다. 소리 없이 달싹이던 입술이 이내 예쁜 호선을 그렸다.

“평범했어요.”

GS(일반 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한 무영이 자신이 존경한다던 선배의 무용담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공부와 담을 쌓았던 주혁이가 사회 복지사의 꿈을 새롭게 가지고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 것도, 꾸준한 재활 치료를 받던 유정이가 직업 조사를 한다며 내게 인터뷰를 요청했던 것도, 여전히 능글맞은 김재겸이 가끔씩 내게 가벼운 장난을 걸어오는 것도, 결국 교수로 위임된 형이 나를 위해 당직이 아닌 날에도 병원에 남아 함께 당직실에서 생활하는 것도.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평화로운 생활들이 이제는 더없이 소중하고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나는 조금 전보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박미영에게 인사하곤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상담실 앞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던 형의 옆으로 가 앉았다.

“이제 보름에 한 번씩 찾아와도 된대.”

“잘됐네.”

내 말에 안심이 되는 듯 작게 웃는 형을 보며 나는 주머니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코팅된 얇은 종이를 쓸어 만졌다. 우연히 형의 지갑 속에서 발견한 내 부적. 형의 유품이기도 했던 그 사진 속 형의 웃음이 지금 형이 짓는 웃음과 아주 흡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뻗는 형의 왼손 약지에는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가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앉아 있던 몸을 기꺼이 일으켰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프 날마다 찾아오던 이곳은 점점 주기를 늘릴 것이었다. 일주일이 보름이 되고, 보름이 한 달이 되고, 그 한 달이 언젠가 이곳에 발길을 끊을 수 있는 날이 될 때까지 나는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리턴(Re-turn)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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