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hird step
유정이는 하필 알파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나는 알파 병동으로 향하는 복도를 보며 가운 주머니 속에 자리한 사탕을 손가락으로 굴렸다. 좁은 공간에서 차마 굴려지지 못한 사탕은 정중앙에 박힌 막대만 위치를 바꿀 뿐이었다.
“이한음.”
문득 데스크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나를 향한 질시가 담긴 눈이 내 몸을 훑었다. 김현재는 여전히 내 곁에 박혀 있는 형의 페로몬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쉬지 말고 일을 하라는 의미가 내포된 음성이 다시 한번 떨어지기 전 나는 고개를 숙이곤 몸을 움직였다.
오늘은 3월의 막바지를 가리키는 날이었고, 시계는 4월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면 병원에서 한 달가량을 수고한 인턴들을 위해 입국식이 진행되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이렇게 원통할 수 없었다. 시계를 보던 눈이 곧 데스크 안쪽 벽에 펼쳐진 달력으로 향했다.
내가 무슨 여유가 있어서 유정이를 돕겠다고 했을까. 머지않은 날짜가 점점 나를 압박했다. 바짝 깎인 손톱으로 사탕을 꾹꾹 눌러 댔다. 후회를 하면서도 사탕에 손을 뗄 수가 없는 게 모순이었다.
일단 당장 들기 시작한 의구심부터 해결하자. 내가 김현재의 눈을 피해 몸을 돌렸다. 형과 서재원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만일 그걸 막지 못한다면 형이 출국하는 일을 막으면 되는 거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1층을 누르는 성급한 손짓이 나의 불안함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옥상과 가까운 위치까지 올라갔고, 나는 하나둘 늘어나는 숫자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띵. 울리는 안내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를 박차고 나갔다. 내가 향한 곳은 형의 부친이 있을 원장실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원장실과 통하는 비서실에 들어가려던 참인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비서가 내게 물었다.
“병원장님 좀 뵈려고 왔습니다.”
“잠시만요.”
내 말에 의사 가운에 박힌 이름 석 자를 조용히 읊조리던 비서가 문고리를 돌렸다. 내 이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아무래도 내 존재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비서를 따라 들어가며 디렉터 룸이라고 적힌 문패를 눈에 담았다.
원장실 안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던 비서가 다시 자취를 드러내며 내게 들어가 보라며 손짓을 했다. 나는 서둘러 원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보는군. 이리 와 앉게.”
창가에 서 있었던 병원장이 내 뒤로 닫히는 문소리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병원장이 찻잔을 코에 가져다 대 차의 향을 맡은 후 살짝 들이켰다. 형과 닮은 예쁜 눈매. 병원장의 얼굴에서 찾을 수 있는 형의 흔적은 눈뿐이었다.
거리낄 것 없이 11층으로 올라왔다고 해서 병원장과 내 사이가 좋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실제로 병원장과는 얼굴을 마주한 적이 별로 없었다.
내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열여덟에 한 번, 본과 1학년에 처음 수석을 했을 때 한 번, 실습을 나왔을 때 로비를 걷다가 한 번, 형의 비보를 들었던 날 한 번, 우연히 납골당에서 마주쳤을 때 한 번. 도합 다섯 번이 다였다.
나는 병원장이 턱짓한 곳으로 가 앉았다. 가만히 차를 음미하던 병원장이 똑똑, 문가에서 울리는 인기척에 본인의 자리로 가 앉았다. 아까 보았던 비서는 가지고 들어온 차를 내 앞에 조심스레 올려 두었다.
“그래, 국시 수석으로 우리 병원 들어왔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네. 뭐, 원체 열심히 하는 건 알고 있었네만.”
병원장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뜨거운 기운이 아롱아롱 올라오는 차를 보다 병원장에게로 눈을 돌렸다.
“내게 축하를 받고 싶어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병원장의 매서운 눈초리가 온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아까 김현재에게서 보았던 시선과 엇비슷했다. 내 몸에서 형의 페로몬이 남아 있는 걸 보며 병원장이 혀를 찼다.
“제가 보기 싫으실 테지만,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그가 내 주변을 샅샅이 훑을 때도 입술을 다물고 있던 내가 운을 떼자 얼굴을 푼 병원장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찻잔을 도로 들었다.
“서재원, 아시죠?”
“알다마다.”
“병원에 도는 소문도 아시겠네요.”
“자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를 리 있겠나.”
병원장의 여유로운 얼굴에서 느껴졌다. 그 이야기가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나는 병원장의 얼굴에 시선을 박으며 고민했다. 돌려서 묻기엔 원하는 답을 듣기 애매했고, 그렇다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형은 서재원과의 약혼이 무산되고 해외로 의료 봉사를 떠난다. 아니, 의료 봉사를 떠난 후에 약혼이 무산되는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의료 봉사를 떠나는 건 형의 의지였을까, 아니면 병원장의 지시였을까.
나는 후자에 손을 들었다. 분명 형은 의료 봉사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어 보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굳이 원장실을 찾아온 것이니까.
나는 어떤 말로 방문의 요지를 드러내야 할지 조금 더 고심했다. 병원장이 들고 있던 차를 얼굴에 끼얹는 일이 있더라도 정확하게 하자. 형에게는 시간이 없고, 나에게는 여유가 없다.
“만약 그 일이 틀어지면, 형을 해외로 보내실 생각이세요?”
“해준이가 그러든?”
병원장의 눈빛이 모호했다. 내가 입술을 씹었다.
“내가 왜. 아니면 그놈이 자네에게 해외로 나르겠다고 했나?”
병원장의 여유롭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나는 병원장의 반응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장이 이런 격한 반응을 보여야 할 대목은 해외로 보낼 것이냐는 말이 아니라 약혼이 무산된다는 말이었다. 병원장은 차가 흘러넘칠 정도로 찻잔을 격하게 내려놓았다.
혼란스러웠다. 형도 모르고, 병원장조차도 모르면 형을 소말리아로 보낸 건 누구지. 왜 형은 그때 의료 봉사를 떠났던 거지.
형이 떠나던 날짜로부터 대략 보름이 남은 상황이었다. 나는 형과 서재원 사이에 존재할지도 모르겠다던 사건이 점점 희미해짐을 느꼈다.
약혼이 무산되고 형을 해외로 보내는 상황까지 초래했던 건 도대체 뭐 때문이지. 형은 서재원 때문에 의료 봉사를 떠난 게 아니었나. 형도, 병원장도 아니라면… 서재원의 부친이? 그러나 이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서재원의 부친이 병원장에게 그토록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을까.
“절대.”
어차피 엎질러진 김에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형을 해외로 보내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흥분해 있는 병원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절대 보내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겨우 내세웠던 가설마저 틀어졌다.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 여겼던 일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복잡한 심정에 머리를 쥐어뜯는 대신 고개를 억지로 숙였다.
“그놈이 여기 남아서 상속받아야 할 병원이 몇 갠데 미치지 않고서야. 자네야말로 그놈 어디 못 가게 꼭 붙잡고 있어. 내 말은 통 들어 먹질 않아서.”
병원장은 내게 형을 맡기고 있었다. 분명 헤어졌다는 말도 들었을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병원장이 앞으로 형을 맡겨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서재원이었을 텐데. 병원장은 형이 약혼을 한다고 해도 내가 옆에 남아 있는 걸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왜?
“그리고, 나는 자네를 싫어한 적이 없어. 그저 그 고지식한 놈이 못마땅했을 뿐이야.”
돌아섰던 몸을 다시 틀었다. 시야에 들어찬 병원장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 있었다. 흘러넘쳐 유리와 맞닿은 차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병원장은 내가 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는 모양인지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시 원점이었다. 나는 소란스러운 주위에 시선을 던지는 대신 앞에 놓인 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술이 달가웠다. 한 잔, 두 잔. 목구멍으로 쉴 새 없이 넘어가는 술이 물처럼 느껴졌다.
“자, 선생님들, 주모옥! 이제 우리 한성대학병원의 61회 입국식을 축하하며 우리 한성의 자랑스러운 써전! 정이훈 교수님의 건배사 제의가 있겠습니다! 모두 잔들 채워 주세요.”
가뜩이나 왁자지껄하던 공간에 폭발적인 호응이 가득 메워졌다. 웅웅 울리는 머리에 내가 고개를 들자 나를 쳐다보던 서재원과 눈이 마주쳤다. 서재원은 나를 보며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까지도 분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비워진 글라스에 소주를 따랐다. 그때 누군가가 내 자리에 숙취 해소제를 탁, 하고 놓았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던 무영이었다. 무영은 내 맞은편에 앉으며 잔을 채웠고, 건배사 제의를 위해 잔을 든 정이훈 교수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설마 교수님들 다 돌아가면서 한 번씩 하는 건 아니겠지.”
무영이 잔을 들며 내게 속삭였다. 인턴 입국식에 많은 교수가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주잔이 아닌 글라스에 따른 술을 참석한 교수의 수대로 마시자면 웬만한 주당이 아닌 이상 이 입국식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무의식중으로 서재원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지만 서재원은 무영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정이훈 교수의 길었던 덕담 끝에 잔을 든 신참 의사들은 간이 부서져라 술을 마셔 댔다. 내가 그들을 따라 술을 넘기니 무영이 천천히 마시라며 잔소리를 한마디 건넸다.
머리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길어지는 입국식에 결국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바람을 쐬기 위해 보도블록 위에 앉았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도 내 앞으로 지나가는 차는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
그만큼 거리는 한산했다. 지나다니는 차가 없는 걸 봐서 이미 한참 전에 자정을 넘긴 시간인 것 같았다.
아무리 한적하다 한들 도로 위로 다리를 뻗을 수는 없어 세운 무릎 위로 고개를 박았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속도 좋지 않았다. 간만에 마신 술은 내 주량보다도 빨리 정신을 놓아 버리게 만들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 전화를 꺼냈다. 매번 호출용 휴대 전화만 썼기 때문에 실로 오랜만에 보는 내 휴대 전화였다. 나는 휴대 전화를 켜 키패드를 꾹꾹 눌렀다. 곧 신호음이 들렸다.
“형.”
신호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내가 수화기 건너편에 있을 형을 불렀다.
─ 응.
형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잠을 자고 있었을까, 아니면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나는 깊게 잠긴 형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나 취했어.”
형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지만 수화기 너머의 형은 대답이 없었다. 형에게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통화 품질이 2018년도만큼 좋지 않은 탓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와 주라.”
결국 소리에 집중하는 것을 포기한 내가 어리광을 부렸다. 며칠 못 봤더니 형이 보고 싶었다. 추위에 떨던 내가 코를 한 번 훌쩍이자.
─ 기다려.
그제야 수화기에서 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끊어진 전화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고, 엄청 오래 기다린 것도 같았다. 나는 내 어깨 위를 덮는 묵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형.”
내가 형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형이 내 옆에 주저앉자 형의 샤워 코롱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예전에 형이 자주 쓰던 샤워 코롱 냄새였다. 그리고 나는 형에게서 그 냄새가 나는 걸 엄청 좋아했다. 그래서 전에는 형이 씻고 나오기만 하면 형의 품에 고개를 박고 뗄 생각을 안 했었다.
“그거 아직도 쓰네.”
내가 무릎에 손을 올리곤 손등 위로 뺨을 붙였다. 형 쪽으로 향한 고개는 형의 얼굴을 한가득 담을 수 있게끔 도왔다.
한때 내가 형의 페로몬보다도 이 냄새를 더 좋아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 샤워 코롱은 내가 예과 시절에 과외를 돌며 처음 벌었던 돈으로 형에게 했던 선물이었으니까.
샤워 코롱이 다 떨어져 가는 것 같으면 나는 다시 새로운 샤워 코롱을 사 형에게 선물로 줬다.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는 사 준 적이 없었으니까, 형은 내가 사 줬던 것과 같은 샤워 코롱을 직접 구매해 가며 사용했던 걸까.
입가에 도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계속 웃음을 흘리자 형의 고개도 내 쪽으로 틀어졌다.
“이한음.”
“응?”
형이 내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고 나는 그런 형의 음성을 귓가에 소중히 담았다. 형의 눈가에서 떨어지는 눈빛이 퍽 다정했던 것 같다. 내가 손을 뻗어 형의 눈가를 조심스레 쓸었다.
“누가 그렇게까지 퍼마시래.”
형 눈에는 내가 만취한 상태로 보였나 보다. 형이 가벼운 표정으로 나를 나무랐다. 그러면서도 작게 웃고 있는 모습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형도 내 예과 시절을 떠올리는 걸까.
형의 기억 속의 내가 살면서 술을 제일 많이 마셨을 때는 예과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형은 술에 절어 있는 나를 보며 인상을 썼지만, 지금의 형은 그런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형을 따라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나 오늘 형 아버지 만났다.”
“들었어.”
들었구나……. 내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잖아.”
뭐를? 감은 눈을 떴다. 형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눈을 느릿하게 끔벅였다.
“네가 생각하는 일 안 일어나.”
내가 생각하는 일 뭐? 나는 머리를 느릿하게 굴렸다. 내가 생각하는 일. 술기운에 묻혔던 기억이 점점 도드라졌다. 형이 소말리아로 의료 봉사를 가는 일?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무릎에서 떨어졌다. 내가 고개를 들어 형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술기운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게 뭔데?”
형이 눈치를 챈 걸까. 나는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형은 내가 서늘한 바람 때문에 추위를 타는 줄 알았는지 흘러내린 겉옷을 똑바로 걸쳐 주었다.
“약혼 안 한다고.”
그 말에 내가 다물려 있던 입술을 살짝 벌렸다.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형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물질처럼 따라붙었던 서재원이 저 멀리 밀려났다.
이로써 확신할 수 있었다. 형이 소말리아로 떠난 게 서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나는 형의 너머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서재원을 눈에 담았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서재원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와 가까워지는 서재원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내 시선이 서재원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않자 형이 고개를 느릿하게 틀었다. 그러나 형은 서재원의 얼굴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잠시 식당 밖으로 나왔던 무영이 서재원의 시선을 돌린 탓이었다.
서재원은 취했는지 몸을 휘청이며 무영의 손을 피했다. 서재원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려 하는 것을 무영이 붙잡았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서재원을 결국 등에 업은 무영이 우리를 한 번 쳐다보았다.
“가자.”
서재원과 무영 쪽으로 고개가 틀어졌던 형은 곧 흥미 없다는 듯 내 손을 잡고 끌었다.
“어딜?”
“집.”
나는 갑작스러운 이끌림에 잠시 동안 걸음을 버벅거렸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잡아야 했다.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형을 올려다보았다. 형은 평소 걷던 걸음보다 속도를 늦추며 나와 나란히 걸었다.
형의 옆에 선다는 것이 이처럼 기분 좋을 수 없었다. 꼭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저 형의 옆에만 있어도 모든 게 풍요롭게 느껴졌던 시절. 나는 크게 울리는 박동에 형의 손을 꽉 쥐었다.
“말도 없이 사라져도 괜찮을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나는 막 연애를 시작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 내 말에 형이 뭘 걱정하냐는 듯이 무심하게 말했다.
“봤잖아, 네 친구가.”
너 없어진 줄도 몰라, 형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나는 형이 걷는 길을 나란히 밟으며 바람을 느꼈다. 형을 의식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형이 사는 동네에 다다랐다. 지금 형과 함께 걷고 있는 이 길목은 과거로 돌아온 후 만취 상태로 형을 찾아왔던 그곳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는 하늘을 드리우던 어두운 구름이 달마저 삼킨 밤이었는데, 지금은 보석처럼 박힌 별이 캄캄한 하늘을 장식했다. 그런 하늘을 보며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얼마 만인지 가물가물했다.
“넘어지기 전에 앞 보고 걸어.”
내가 이 길목에 다다른 후부터 내내 하늘에 시선을 박고 있자 형이 나를 걱정했다. 나는 그 걱정이 좋아 부러 고개를 더 바짝 쳐들었다. 내가 넘어지면 형이 나를 잡아 줄 테니까. 그 확고한 믿음은 위험으로부터 나를 불감하게 만들었다.
“신기해.”
나는 선명하게 빛나는 달을 눈에 담았다. 달무리가 우리에게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내 기분이 하늘을 따라가는 건지, 하늘이 내 기분을 따라오는 건지. 볼 때마다 감회가 달라.”
내가 괴로움에 몸서리칠 때는 달빛 한 줄기 허락하지 않았던 하늘이었다. 꼭 달이 죽어 버린 것처럼.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형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매 순간 자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형과 함께 걷는 이 길을 밝게 비추는 게 희미하게 켜진 가로등이 아니라 저 달빛 같았다.
내 말에 형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려 형의 얼굴을 담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니까.”
내 눈을 올곧게 바라보는 형의 눈빛이 나를 지적하는 것 같았다. 형의 말에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형과의 이별을 결심했을 때에도, 형이 없는 긴 세월을 홀로 버텼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분명 내 눈을 가리는 감정에 맥없이 치우쳐져 있었다.
형은 꼭 그때의 하늘과 지금의 하늘이 같은 하늘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 그랬을까. 그때의 형과 지금의 형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도. 사실은 여전한 감정이었음에도 내가 다르게 해석했던 것이었을까.
“알고 싶어.”
“…….”
“그 후의 형은 어땠는지.”
내 시야가 좁았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알아야 했다. 나와 이별한 후의 형이 어땠는지. 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나를 잡아끄는 힘이 느껴졌다. 형은 말을 아끼는 대신 걸음의 보폭을 조금씩 키웠다.
그리고 그런 형이 도착한 곳은 우리가 함께 생활하던 공간이었다. 내가 집을 뛰쳐나간 후에도 형이 혼자서 생활했던 공간. 나는 실로 오랜만에 발을 들이는 이곳에 서서 숨을 멈추었다.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내 자취가 집 안에 가득했다.
맞춘 것처럼 두 개씩 자리하고 있는 흔적들은 내가 이 집을 나오기 전에도 있었던 것들이었다. 어느 한 군데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세 달이면 옅어졌을 법한 내 페로몬 잔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사용하고 대충 올려 두었던 소파 위의 담요, 탁자 위의 머그컵, 발코니를 가리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겨울용 암막 커튼까지도. 나는 집 안을 둘러보던 눈을 돌려 형을 보았다.
그랬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전처럼 그저 막연히 들었던 짐작이 아니었다. 눈가에서부터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조각나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홀로 남아 있었을 형이 그려졌다.
형은 그때의 형을 가감 없이 보여 주었다. 어느 것 하나 달라지지 않은 이 집이 나와 이별한 후의 형을 낱낱이 보여 주고 있었다. 말보단 직접 보는 게 낫다는 걸, 형은 몸소 알려 주고 있었다.
“잘 돌아왔어.”
그런 말을 하는 형의 차분한 목소리가 내 주변을 아스라이 맴돌았다. 형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는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내 눈물을 닦아 주는 형의 손길은 내 깊었던 향수를 자극했다.
한참 동안이나 눈물을 쏟는 나를 진정시킨 형은 우리가 항상 잠들던 침대 위에 날 눕혔다. 킹 사이즈의 침대에는 전처럼 내 베개와 형의 베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였다. 내가 있을 때에도, 없을 때에도. 형은 나와 함께하던 시절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가만히 누워 이불을 정리하는 형의 손을 꼭 잡았다.
“자.”
그러자 나를 달래는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은?”
“마저 하고.”
형이 턱 끝으로 서재 쪽을 가리켰다. 내가 전화를 걸기 전에도 형은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니 형이 내 손을 내려놓고 방을 나섰다. 정자세로 누워 있던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내 베개에서 형의 냄새가 났다. 맡아질 듯, 말 듯 아주 희미한 향에 옆에 놓여 있던 형의 베개를 끌어안았다. 형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니 쏟아지던 잠도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결국 형의 베개를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어 형이 있을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바르게 앉은 채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형이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개의치 않고 구석에 자리한 1인용 리클라이너에 몸을 눕혔다. 편한 자세를 취하며 눕는 나를 확인한 형이 다시 노트북에 시선을 박았다. 안경을 쓴 형의 모습을 보니 예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예과 시절에도, 막 바쁘기 시작했던 본과 1, 2학년 시절에도 종종 이런 경우가 있었다. 보드 시험(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랴, 논문을 준비하랴 바쁘던 형이 이렇게 일에 몰두하게 되면, 컨디션을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던 나는 이 의자에 누워 형이 공부하는 것을 관찰하다 잠이 들곤 했었다.
품 안의 베개에서는 형의 냄새가 났고, 서재 안에선 늘 그랬듯 익숙하고도 편안한 소리가 들렸다.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초침이 이동하는 소리, 노트북 자판이 눌리는 소리, 형이 뻐근한 뒷목을 푸는 소리.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은 서로 맞물려 효과 좋은 자장가 소리를 냈다. 형을 주시하던 눈이 서서히 감겨 옴을 느꼈다. 어느덧 시침이 4를 가리킨 짙은 새벽이 되었다.
아주 고요한 순간이었다. 곯아떨어져 있던 내가 그 고요함에 의문을 가지며 눈을 번쩍 떴다. 서재에서 자고 있어야 할 나는 형의 방에 누워 있었다. 나는 손으로 내 옆자리를 쓸었다. 형의 온기라도 남아 있어야 할 자리가 차가웠다.
순간 나를 감싸는 불안감에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전에 꾸었던 악몽이 떠오른 탓이었다. 창가를 드리운 커튼을 치우자 중천을 향해 뜨고 있는 해가 햇살로 내 얼굴을 덮었다. 아, 나는 내게 뻗어지는 햇살만으로도 안심을 할 수 있었다.
“형.”
진정을 한 차분한 음성이 형을 찾았으나 내게 되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11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너무 오래 잤다. 형은 이미 출근을 했을 테고, 어제 입국식이 있었던 탓에 인턴들은 오후 출근이었다.
나는 놀라 급하게 일으킨 몸을 추스르며 천천히 방을 나섰다. 욕실에 들어가 칫솔꽂이에서 내 칫솔을 들었을 때도, 미처 챙기고 나가지 못한 옷가지가 형의 옷장에 걸려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에도, 나는 울컥울컥 치미는 감정을 참아 냈다.
집 안 가득 배어 있는 형의 페로몬이 지난 새벽의 형처럼 나를 위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뒤늦은 출근은 쌓인 일을 처리하기에 그다지 알맞지 않았다. 나는 로비를 가로지르던 걸음을 다시 돌렸다. 로비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던 환자 중 알고 있는 얼굴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유정이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 기척을 느낀 유정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정면을 응시한 상태였기에 유정이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 겁에 질린 상태이리라, 나는 짐작했다.
내가 여전히 가운 주머니 속에 자리하고 있는 사탕을 꺼내 유정이에게 내밀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보게 된 유정이의 표정은 사탕을 받아 기쁜 표정을 짓는 대신 가늠할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아한다길래.”
이러면 친해진다더니. 나는 김재겸이 내게 알려 주었던 방법을 되뇌며 속으로 욕을 씹었다. 유정이는 사탕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자상하게 다가왔던 김재겸을 좋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정이는 사탕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그 사탕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사탕을 까먹는 대신 양손에 꼭 쥐고 있는 모양새가 사탕에는 영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까 줄까?”
내가 그런 유정이에게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다음에… 머글게요.”
그러나 곧 들려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낭패감이 들었다. 민망함에 귀밑을 살살 긁었다. 유정이와 나 사이에 감돌고 있는 침묵이 버거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유정이를 연신 흘낏거렸다. 그냥 갈까. 그러나 유정이를 사이에 두고 이어지던 고민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묻혔다.
“유정아, 검사실 가자. 어, 이 선생님?”
김재겸이었다. 김재겸은 손에 영수증과 카드를 들고 있었다. 나는 이로써 유정이가 왜 병원 로비에 앉아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손에 꽂힌 내 시선에 김재겸은 영수증과 카드를 가운 주머니 속으로 감추었다.
유정이가 나와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편안한 얼굴로 김재겸에게 다가갔다. 절뚝거리는 모양새가 어쩐지 저번보다 더 심해진 듯 보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김재겸이 유정이를 한 팔로 들어 올렸다.
“아, 이 선생님이 주신 거구나. 감사합니다, 했어?”
김재겸은 유정이 손에 들린 사탕을 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유정이는 김재겸의 목에 꼭 두른 팔을 느슨하게 풀고 나를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잘한다, 우리 유정이.”
엎드려 절 받기였다. 유정이는 김재겸을 볼 때와는 판이한 표정으로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고, 김재겸은 그런 유정이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유정이 검사받으러 갈 건데 안 바쁘면 같이 가실래요? 오늘 유정이 골수 검사도 하고, 방사선 치료도 하는 날이거든요.”
안 바쁠 리가 없는데. 나는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을 눈에 담으며 불쑥 튀어나오려던 목소리를 삼켰다.
김재겸과 나는 유정이가 방사선 치료를 하는 동안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들어가기 전의 순간까지도 김재겸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유정이가 떠올랐다. 김재겸을 온전히 의지하고 있던 유정이의 심리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어제 입국식 재미있었어요?”
“네, 뭐.”
김재겸의 물음에 나는 대충 대답했다. 사실은 재미없었다. 막 의사로 인정을 받은 인턴들은 좋아하던 술을 마시며 혹독한 병원 생활에서의 스트레스를 풀었을 테지만 그것을 두 번째 겪은 내가 그 일에 흥미를 가질 리 만무했다.
“아, 나도 참석하고 싶었는데 어제 갑자기 수술이 잡혀서 못 갔어요. 그랬으면 나도 오후 출근이었으려나.”
실없이 웃는 김재겸의 옆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김재겸이 그런 나와 눈을 마주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요?”
김재겸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곧 내 물음의 의중을 파악한 얼굴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
“돈이 남아돌아서?”
김재겸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내가 인상을 오묘하게 굳혔다. 그런 내 표정을 보며 김재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장난이에요. 그러는 이 선생님은요? 왜 그날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나는 김재겸의 우회 없는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내가 주겠다던 도움과 김재겸이 유정이에게 주는 도움은 확연하게 달랐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저는…….”
내 시선이 김재겸의 주위를 방황했다. 내가 두고 도망쳤던 아이들이 떠올라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김재겸은 잠자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싶더니 입을 열었다.
“제 방법이 무작정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 안 해요. 남들이 보기에 얼마나 바보 같은 짓으로 보일지도 잘 알고.”
“…….”
“뭐, 속죄 비슷한 거예요.”
“…….”
“동생이 엄청 아팠는데, 치료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치료를 못 받았어요. 가족 모두가 방치를 해서.”
그때 김재겸을 보는 내 표정이 어땠더라.
“유정이 보니까 동생 생각이 나더라고요. 하필 이름도 똑같아서. 제 동생 이름도 유정이거든요, 김유정.”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힘들고 괴로웠을 과거를 끄집어내는 표정이 추억을 회상하듯 지나치게 편안해 보였다. 그 흔한 변명조차 안 하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과오를 오롯이 받아들인 사람처럼 보였다.
“이 선생님도 유정이 볼 때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죠?”
비슷한 감정. 과연 그 감정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과거에 얽매여 있었고, 김재겸은 그 과거로부터 벗어난 모습이었다.
“그때 그 표정 보고 느꼈죠. 아, 이 선생님도 그냥은 못 지나치겠구나, 하고.”
사실은 잘 모르겠다. 동생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유정이를 대하는 김재겸의 모습이 정말 그 과거로부터 벗어난 모습인지. 나는 이번에도 내가 보고 싶은 면만 보고 있는 것일까.
방사선 치료를 끝내고 나온 유정이가 김재겸의 손을 붙잡았다. 김재겸은 고생 많았다며 유정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김재겸이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저는 OPD(Outpatient Department, 외래) 있어서 혹시 유정이 좀 병실에 데려다주시겠어요? 골수 검사는 몇 시간 뒤라. 유정아, 우리 예쁜 선생님 손잡고 병실 갈까?”
내가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게 아님에도 김재겸은 무릎을 구부려 유정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김재겸과 나를 번갈아 보며 고민하던 유정이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김재겸이 내게 유정이의 손을 내밀었다.
유정이가 또래보다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기에 나는 오랜 시간 고민할 수 없었다. 내 손에 감기는 작은 손이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내가 김재겸을 보자 그는 잘 부탁한다며 사람 좋게 웃었다. 김재겸이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유정이는 멀어지는 김재겸에게 손을 흔들었다.
김재겸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정적만 떠다녔다. 나는 내 손에 감긴 작은 손에 실리는 힘을 느꼈다. 내가 고개를 내려 유정이를 보자 유정이가 쌍꺼풀이 지지 않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유정이는 내게 사탕을 내밀었다. 조금 전에 내가 준 포도 맛 막대 사탕이었다.
“성샌님, 이거… 까 주세요.”
부정확한 발음으로 오물오물 말하는 유정이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유정이가 내민 사탕을 받아 들었다. 사탕을 받아 드는 손짓이 조금은 떨렸던 것도 같았다.
내가 사탕 껍질을 까 유정이에게 내밀자 유정이는 그걸 손으로 받아 드는 대신 고개를 들이민 채로 사탕을 물었다. 살짝 접히는 눈이 내게 향했던 경계가 조금 느슨해진 듯 보였다.
“이거 재겸이 성샌님이 주신 거죠?”
유정이가 사탕을 한쪽 볼에 밀어 넣고는 내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쳐다보자 유정이는 내 손에 들린 포장지를 가리켰다.
“재겸이 성샌님이 맨날 고양이 사탕 주거든요.”
포장지 가운데에 그려진 키티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결국 유정이가 내게 조금씩 경계를 풀 수 있었던 이유는 사탕이 아닌 김재겸이었던 모양이다. 김재겸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토록 눈치가 빠른 아이를 어떻게 자신의 품으로 감았을까.
내가 손을 뻗어 유정이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손이 뻗어지는 것을 보곤 잠깐 움찔 떨었던 아이가 이내 내 손길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이 썩으니까 너무 많이 먹지 마.”
많이 아팠지. 사실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상흔처럼 자리 잡은 얼굴 속 멍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나는 그런 뻔한 물음을 유정이에게 건넬 수가 없었다.
신체적인 고통이야 과거형으로 끝맺을 수는 있어도 정신적인 고통은 아마 유정이에게 현재 진행형일 것이었다. 내가 손을 뻗자 작게 반응이 왔던 몸이 유정이의 상처가 조금도 치유되지 않았음을 알렸다.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아픔은 어쩌면 나 역시도 현재 진행형이었으니까.
유정이를 병실에 보내고 나서야 긴장을 흠뻑 뒤집어쓴 몸을 풀 수 있었다. 내가 한 발을 내밀면 유정이는 두 번이나 절뚝거려야 했기 때문에 방사선실에서 NS 병동의 병실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알파 병동에는 얼씬도 말라던 변미현의 말을 되새기며 서둘러 빠져나왔다. 뭐, 그러던 중에 드레싱을 갈기 위해 병실을 돌던 무영과 마주치지만 않았으면 거의 완벽할 뻔했다.
“음아, 속은 괜찮아?”
무영이 드레싱 박스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느지막하게 출근했음에도 벌써부터 끼친 피로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어제 엄청 고생하는 것 같던데.”
내가 취한 서재원을 챙기던 무영을 떠올리며 물었다. 무영이 그런 내 물음에 어깨를 으쓱하며 주먹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말도 마. 걔 취하니까 장난 아니더라. 아직도 출근 못 했대. 아, 그 사람이랑은 이야기해 봤어? 그 소문 구라래?”
“응.”
서재원의 거침없는 행적에 고개를 대충 끄덕이던 내가 마지막에 붙은 소리에 아랫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었다.
거짓말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나 형은 약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지난 새벽에 겪은 형과의 일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진전이었다. 내 반응에 무영이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아, 내가 그때 괜히 나서 가지고. 아직도 이 선생님만 지나가면 심장이 다 벌렁거린다니까. 뒤끝 없겠지?”
심장 부근을 손으로 쥐고 말을 늘어놓는 무영에게로 몸을 틀며 내가 뒤로 걸었다.
“형 A형이야.”
“미친.”
내 장난스러운 말에 무영이 걸음을 우뚝 세웠다. 의사가 돼서 성격이 혈액형을 따라간다는 걸 믿는 것도 웃겼다. 무영은 형이 A형이라는 말 하나에 얼굴을 우그러트렸다. 계속해서 뒤로 걷던 내가 문득 등 뒤로 맞닿는 형체에 서둘러 등을 돌렸다.
“선생님들, 많이 한가하신가 봐요?”
강유한이 뒷짐을 지고 서서 무영과 나를 보았다. 꽉 다물린 잇새로 우수수 떨어지는 음성에 내가 얼굴을 굳혔다.
“강무영이, 드레싱 다 돌았어?”
“오메가 병동 가고 있었습니다, 선배님.”
“퍼뜩 움직여. 이한음, 너는 ICU(Intensive Care Unit, 중환자실) 가서 김중현 환자 상태 좀 체크해.”
“네?”
나는 강유한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강유한이 내게 들고 있던 차트를 넘기며 양팔을 위로 뻗어 스트레칭했다. 내 손에 들린 차트를 펼쳐 볼 생각도 못 한 채 굳어 있던 내가 성급하게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설마 김중현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었나? 김중현이 뇌사 상태에 빠진 후 진전이 되지 않아 결국 장례식을 치렀다는 말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돌이키고 보니 그 시기가 딱 이 시기였던 것 같아 내가 볼 안쪽 살을 깨물며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운이 좋으면 김중현이 죽는 걸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김중현이 죽는 걸 내 눈앞에서 보고 나면 이 지긋지긋한 과거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웃음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표정을 지었던 내가 서둘러 김중현이 있을 베드에 도착한 순간.
“아…….”
실망감이 내 온몸을 지배했다. 내가 알던 김중현이 아니었다. 그저 동명이인의 환자였다. 나는 베드 옆에 위치한 보조 의자에 앉아 김중현 환자의 얼굴을 보았다. 오른손을 들어 긴장으로 잔뜩 질린 얼굴을 쓸었다.
차트를 열어 환자의 정보를 살폈다. 지난밤에 인근 병원에서 트랜스퍼 온 환자였다. 김중현, 남, 만 64세, 형질 베타, 진단명은 Extradural tumor(경막외 종양)1), 집도의 김재겸.
나는 기록지에 김중현 환자의 바이탈을 적었다. 혈압과 맥박이 점점 좋아지는 걸 보니 의식만 찾으면 금방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게 안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딱히 추가해야 될 약물도 없어 보였다.
들고 있던 차트가 살살 진동하는 걸 보며 서둘러 손에 힘을 풀었다. 나도 모르게 너무 꽉 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김중현 환자의 손목에 꽂힌 링거 줄을 타고 올라가 수액이 잘 떨어지고 있는지와 떨어지는 양을 확인했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시간을 확인한 뒤 등을 돌렸다. 이 환자가 김중현과 관련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못된 마음이 들었다. 한 시간마다 김중현 환자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날 괴롭혔다.
답답한 속을 이기지 못하고 담배와 라이터를 구매했다. 담배와 함께 카운터 옆에 비치된 막대 사탕을 집어 들었다. 키티 얼굴을 단 막대 사탕이 없는 걸 보니 키티 사탕은 김재겸이 따로 구매를 해 둔 건가 싶었다.
옥상으로 올라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심지에서부터 시작된 연기가 내 머리 위로 스멀스멀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넓게 퍼졌다.
담배를 한입 더 깊게 빨았다. 연기가 넘어가는 게 그리 시원시원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잔기침이 나오지도 않았다. 폐를 한 바퀴 맴돈 연기가 입에서 길게 뿜어져 나왔다.
검회색의 재를 한 번 털고 나니 아무도 없던 공간에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옥상으로 통하는 비상구 쪽 구석에 앉아 내가 있음을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 속 뒤집어질 것 같아. 아까 스크럽 들어갔다가 토할 뻔했잖아, 나.”
“그러니까 미리 슈크림빵 먹으라니까.”
앞에 들렸던 목소리는 처음 듣는 목소리고,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목소리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제 있었던 입국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목소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나는 어느새 바짝 타들어 간 담배를 바닥에 짓이겨 불씨를 껐다. 올라오기 전 미리 챙겼던 가그린을 머금고 입 안을 헹구는 움직임이 불시에 멈추었다.
“야, 그런데 어제도 걔네 존나 잠잠했더라? 이한음 성질머리에 분명 치고받고 싸울 줄 알았는데.”
“이 선생님은 재원이한테 관심도 없어 보이던데.”
“관심이 중요하냐. 집안 사정이 중요하지. 이한음 걔가 얼굴은 반반해도 고아잖아. 그래서 병원장님이 서재원이랑 엮으려는 거 아니야?”
나는 입 안에 고여 있는 액체로 입 안을 마저 헹궜다. 나를 아는 듯한 음성과 함께 들리는 낯익었던 목소리의 주인을 대충 알 것 같았다.
박이영. 나는 3월에 나와 함께 NS 인턴을 돌았던 안경잡이를 떠올렸다. 어느새 길게 자라 눈가를 찌르는 앞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나는 한음이보다 재원이가 더 괜찮던데.”
노골적으로 나를 저격하던 목소리 뒤로 소심하게 혼잣말처럼 따라붙는 박이영 목소리에 나는 입에 물고 있던 가그린을 바닥에 뱉었다. 안주 삼아 지들끼리 떠드는 이야기에 배알이 뒤틀렸다. 그놈의 고아라는 소리는 언제나 내 뒤를 수식어처럼 따라붙는다.
“뭐야.”
느닷없는 물소리로 인해 옥상 위에 제3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거친 목소리가 조금은 겁을 먹었다. 몸을 일으켜 구석으로부터 모습을 내비치자 내 얼굴을 본 두 사람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굳어졌다.
내 무감한 시선이 박이영의 옆에 선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쟤 이름이 뭐더라. 얼굴이 낯이 익은 게 어디선가 대면한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둘을 무시한 채 닫힌 옥상의 문고리를 돌리던 내가 불쑥 떠오르는 이름에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문을 열려던 움직임보다 뒤를 돌아보는 움직임이 더 앞섰다.
“노수민이었나. 그래도 터진 입이라고 나불거리는 것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먹이 하나 던져 줄게. 가서 열심히 떠들어, 그 헛소문이 사실은 서재원 원맨쇼였다고.”
노수민은 내가 재수해서 의대에 진학했을 때 현역으로 들어왔던 의대 동기였다. 원체 떠들어 대는 걸 좋아해서 뜬소문을 잘 부풀린다는 소리를 언뜻 들었던 것도 같았다. 음침하게 남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해 대는 놈이나 그 옆에서 장단을 맞추는 놈이나.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을 마친 내가 문을 열어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수빈아, 괜찮아?”
그러곤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박이영의 목소리에 그때 알았다. 노수민의 이름이 노수빈이었다는 걸.
***
저녁 시간을 맞은 병원은 어쩐 일로 한산했다. 간만에 갖는 휴식에 할 일을 끝낸 인턴들이 휴게실에 모여 저마다 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다.
한데 모여 앉은 인턴들이 껄끄러워 나는 숙직실에 들어가기 전 무영이 주었던 샌드위치를 가지고 로비로 내려갔다. 건물 정문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 저무는 해를 눈에 담았다.
샌드위치를 한입 문 내가 이내 눈을 감았다. 사실 허기가 진 배보다 몰려드는 피로를 푸는 일이 더 간절했으나 이제 와서 숙직실로 돌아가기엔 내가 누울 자리가 없을 것 같았다. 치아에 짓이겨지는 샌드위치를 조금 더 느리게 씹었다.
내가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밥을 먹고 있는 것인지 알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코끝에 형의 페로몬이 끼치는 것 같아 감았던 눈을 떴다. 형은 내 앞에 서 있었고, 퇴근하는 길이었는지 하얀 가운을 벗은 상태였다.
“따라와.”
내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보던 형이 금세 등을 돌렸다. 나는 내 옆자리에 내려놓았던 남은 샌드위치를 들고 형의 뒤를 쫓았다. 형이 향한 곳은 병원 근처에 있는 백숙집이었다. 나는 그제야 형이 내 식사를 제대로 챙겨 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형은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새벽 늦게까지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알았으나 도대체 며칠을 제대로 못 잔 것인지 걱정이 됐다. 그런 형을 보니 지난날의 내 과오가 떠올랐다. 내가 형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이유.
형은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형이 우성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남들보다 빠른 나이로 의대에 진학하고, 병원 근무를 시작한. 처음에는 형이 워낙에 일에 열정적이라 천재라는 걸 몰라봤었다.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본과에 올라가게 되면서였다.
예과 시절 종종 형을 기다리던 병원 카페에서도 형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려왔다. 하나를 배우면 백을 깨우치는 천재. 나는 그 이야기를 하던 의사들이 평소의 형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우수한 형질임에도 버금가는 노력을 했으니 형이 남들보다 뛰어난 건 당연한 일이라고.
본과에 올라가서 알게 된 사실은 형뿐만이 아니라 모든 의사가 그런 노력을 불사한다는 것이었다. 의사라는 직종 자체에도 우성 형질은 간혹 찾아볼 수 있었으나 형은 그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노력하는 천재. 나에게 고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처럼 형에게는 노력하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예과며, 본과며 모두 수석을 거머쥐고 졸업했으나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내게 던져지던 칭찬의 끝에는 항상 형이 있었으니까. 결국엔 형의 칭찬으로 막을 내렸었으니까. 차라리 내가 유급을 면할 정도로만 했으면 당시에 덜 비참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자랑스러웠던 형이 미워지던 것은 한순간이었다. 태어났을 적부터 애정에 굶주려 있던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감정을 느낀 순간부터는 형보다 늦게 자기 위해 애를 썼다.
형보다 늦게 잤고, 형보다 일찍 일어났으며, 형과 함께 운동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전공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랬던 노력이 쉽게 허물어지는 건, 그럴수록 나에게 형이라는 꼬리표가 짙게 남는다는 걸 인식한 순간이었다.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대신 타들어 가는 목을 물로 축였다.
내가 물컵을 내려놓자 둘만 있던 공간에 타인이 끼어들었다. 타인은 형과 내 앞에 닭백숙을 올려 두고 자리를 떴다. 나는 젓가락을 들어 샌드위치가 채우지 못했던 허기를 도로 채우기 시작했다. 입맛은 없었지만 꾸역꾸역 넘기는 게 정말 살기 위해 먹는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형은 젓가락조차도 들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형의 눈치를 보자 형은 그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일은.”
형이 시선을 백숙에 고정한 채 물었다.
“그냥 뭐, 정신없지.”
“그런 것치고는 잘하던데.”
내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형의 무심한 말투를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모호했다. 형의 말로써 알게 되었다. 형이 나를 줄곧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형은? 별일, 없어?”
정작 나는 일에 치여 형을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내 물음에 형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했다.
“별일?”
마치 무슨 일이 있어야 하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니… 그냥 논문 준비 잘되고 있냐고.”
아무 일 없구나. 내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를 보며 형이 코웃음을 치듯 짧게 웃었다. 형은 내 변명과도 같은 말에 대답이 없었다. 마치 내 물음의 목적이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처럼.
“짐 옮겨.”
형은 대신 다른 소리를 했다. 내가 형의 말에 백숙에 꽂았던 시선을 도로 들어 올렸다. 형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아주 멍청한 표정일 게 뻔했다.
아마 형이 말한 짐은 내 집에 박스째로 쌓여 있을 짐을 말하는 것 같다. 함께 살던 집으로 다시 들어오라는 소리일까.
“……당분간 집에 들어갈 일도 없는데?”
“그러니까 옮기라고.”
내 멍청한 물음에 형이 눈을 내리깔며 잘게 잘린 살덩이를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우아했다. 형이 먹고 있는 것이 닭이 아니라 예술적인 플레이팅이 가미된 고풍스러운 음식처럼 보였다.
“월세일 거 아니야.”
“아…….”
이어지는 형의 말에 이사한 집을 세로 들어갔던 것이 떠올랐다. 인턴 생활을 하며 딱히 돈이 들어갈 데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형.”
내가 어렵사리 입을 떼자 형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형은 그때, 왜 날 도와준 거야?”
진작 알았어야 할 일을 이제야 물었다. 묻는 와중에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집으로 돌아오라던 형을 보니 문득 떠올랐다. 그때의 형은 왜 일면식도 없던 나를 거두었고,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었을까.
형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의 형은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러니까 왜? 그때의 나는 형을 향한 의구심이 가득했으나 차마 형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이유를 캐묻고 의심하면 형이 나를 내칠 것 같아서. 애써 드는 의문을 무시하며 형이 건네는 도움을 받아들였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조건 없는 호의를 놓치기 싫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형을 바라보던 눈이 옅게 떨렸다. 나는 그걸 형이 알아채기라도 할까 봐 시선을 돌렸다. 백숙을 뒤적거리는 젓가락이 괜스레 볼품없어 보였다.
“도움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그러나 형의 말에 내 시선이 도로 형에게 가 꽂힌다. 형의 대답은 담백했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돕는 이유에 답할 수 있는 제일 무난한 말이었다. 형의 말은 지독하게 담백했으나 반대로 나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굳이 내가 아니었더라도 도왔을 것이란 말인가. 쓸데없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거창한 이유 없어.”
“…….”
“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고. 계속 신경이 쓰였으니까.”
궁금해했던 물음에 대한 답을 들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정말 아무 뜻이 없어 보이는 형을 보며 나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가지지 못한 자를 대하는 가진 자의 여유를 보는 것 같았다.
가진 게 없는 나는 유정이를 사소하게 돕는 일에도 많은 고민을 했지만 모든 것을 가진 형은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야 할 일에도 그다지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은 듯 보였다. 내가 알던 형은 절대로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대단하진 않더라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다.
내 오묘한 표정에 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컵을 들어 입을 가볍게 헹구듯 물을 넘긴 형이 테이블 위로 물컵을 내려놓았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섬세했냐면, 물컵과 원목 테이블이 마찰하는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나한테 동정이 받고 싶은 거야?”
형의 날카로운 눈이 내 심장을 찔렀다. 막연히 언젠가는 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도움을 받았으니 언젠가 그 도움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그건 동정을 받고자 함이 아니었다. 형 눈에는 이유를 묻는 내가 그렇게 보였을까.
아니, 아니었다. 형은 꺼림칙한 것이다. 동정으로 시작했던 그 순간을 이제 와서 나에게 설명하기가. 결국 우리가 동등하지 않다고 여겼던 건 나뿐이었다.
“후회한 적 없어.”
내 굳어진 얼굴이 형의 입술에 머물렀다.
“내가 후회하는 건 그때 너를 놔줬던 거 하나야.”
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후회라는 단어에 나는 충격을 먹었다. 아니, 후회라는 단어를 뱉는 형의 표정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밀도가 다른 듯 섞이지 않아 불균일한 것 같던 단어가 원래는 알맞게 녹아들어 있었던 것처럼, 형의 눈이 짙은 후회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 위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형이 내게 왜 그런 말을 해명하듯 꺼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헤어질 당시 형에게 후회하지 않냐고 물었던 것이 나였으니까. 전에 내게 죽도록 후회한다고 다그쳤던 형은 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손해를 보지 않는 형과 나를 기꺼이 도왔던 형. 나를 앞서가는 형과 나와 나란히 걷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던 형. 이별을 받아들였던 형과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한 발 물러선 형. 하나를 배워도 열을 깨우치는 형과 노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정도로 일에 열정적이던 형. 항상 의연하던 형과 깊은 후회에 좌절하는 형. 무심한 형과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내게 신경을 쓰던 형.
나는 형의 표정을 통해 이제야 형을 오롯이 볼 수 있었다. 내가 보고자 했던 모습과 애써 외면했던 모습. 내 구원자의 완벽한 모습은 사실 내 동경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그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사실 내게는 형을 시기할 이유가 없었다. 형은 늘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긴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때는 그에 따른 노력을 인정했으면서 형의 노력에는 인색하게 평가하고 시샘했던 나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런 형의 노력을 대단하다고 생각했으면서. 아마 내가 만들어 낸 형의 모습은 형을 질투하던 내 감정이 일조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를 경시했다. 내 불우했던 과거, 나를 나락으로 끌어당기는 트라우마. 나와는 정반대였던 형을 보며 형을 동경했지만 그 동경은 곧 나를 향한 멸시로 이어졌다.
결국은 형을 향한 열등감조차도 형의 옆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를 운운하던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결국 그 모든 피해자는 내가 아니라 내게 휘둘렸던 형이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니까.’
그 말이 사실은 그동안 눌러 담았던 형의 속내였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한 나 자신을, 나는 그 순간에도 끝없이 힐난했다.
짙은 새벽이 세상에 가라앉았다. 나는 소등이 되어 있는 병실을 찾았다. 코끝을 찌르는 알파의 페로몬 잔재가 유독 둔하게 느껴졌다. 나는 유정이 베드 옆에 달린 보조석에 앉았다. 자고 있는 유정이 뺨으로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도움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고, 계속 신경이 쓰였으니까. 형이 내게 말했던 건 전부 내가 유정이를 볼 때 해당하던 말이었다.
유정이는 도움이 필요했고, 그런 일을 앞서 겪은 나는 유정이와 아픔을 공유할 수 있었다. 상처를 낫게 해 주지는 못해도 유정이와 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유정이가 계속 눈에 밟혔다.
유난히 의미 부여에 목을 맸던 것 같았다. 무슨 이유가 더 필요했을까 싶었다. 형의 말대로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봉사를 한다든가, 후원을 한다든가. 사람들은 개개인의 사정이 있어서 그들을 도왔던 것이 아니었다.
물론 김재겸처럼 그런 사정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의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다른 때보다 더 깊게 신경 썼고, 도움을 줄 여유가 있었기에 기꺼이 도왔다.
자고 있는 유정이의 얼굴을 보니 그동안 망설이며 고민했던 내가 너무 한심한 사람이었음을 느꼈다. 단 한 번도 트라우마에 갇힌 나를 돌아볼 생각조차 안 했기에 극복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유정이는 그런 트라우마를 극복했으면 좋겠다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나는 그 소망 역시 나에게 빗대어진 생각이었다는 걸 알았다. 나를 더 깊게 파헤치지 않고, 사랑하지 않았던 나 자신을 돌이켜봤다. 그런 내가 형의 마음에 해를 입힌 것까지도.
잠을 자던 도중 몸을 뒤척이며 베드에 올려졌던 내 손을 꼭 붙잡는 유정이의 손이 느껴졌다. 미성년의 인간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다. 의지할 곳이 없더라도 내면에서는 보호해 줄 무언가를 무의식중에 찾아다닌다. 나는 그 무의식으로 인해 형을 만났고, 형에게 의지했으며 형을 동경했다.
꼭 봐야만 했던 것들이 분명했음에도 날이 선 자기방어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잊게 만든다. 나는 유정이가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았으면 했다.
부디 너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기를. 그래서 나처럼 후회하지 않기를. 나는 내 손을 잡은 유정이의 손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빌었다.
***
머리를 아스라이 맴도는 손길이 느껴졌다. 쉽게 부서지는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에 왠지 기분이 좋아 나는 계속해서 잠을 청했다. 불현듯 소란스러워지는 주위가 느껴졌지만 그 소란스러움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멎어 감은 눈을 살짝 떴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침구류와 나무판자에 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병실이었다. 보조석에 앉은 채 베드에 엎드려 자던 내가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주위를 훑었다.
베드의 주인인 유정이는 상체만 일으킨 채 입술에 검지를 세로로 가져다 댄 상태였다. 병실 안 환자들의 시선이 온통 내게 꽂혀 있었다. 환자들의 시선뿐만이 아니었다.
“밤새 여기 있었던 거예요?”
막 출근을 한 모양인지 흰 가운을 걸치지 않은 김재겸 역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얼굴에 열이 끼쳤다.
“아… 사탕, 사탕을 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선이 대뜸 김재겸을 피했다. 저번에 사 뒀던 사탕을 가운 주머니에서 꺼내며 유정이에게 건넸다.
빨리 받아라, 빨리. 타들어 가는 내 속을 알아챘는지 유정이가 내 손에 들린 사탕을 바로 건네받았다. 내 손에서 사탕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나는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언제 잠들었지. 머릿속을 맴도는 말은 나를 질책했지만 나도 모르게 든 잠에 답을 내려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상가상이었다. 뒷덜미를 한 손으로 쓸던 내가 알파 병동을 벗어나기도 전에 변미현과 마주쳤다.
“너 어디서 기어 나오냐?”
변미현이 눈가를 좁히며 물었다.
“죄송…….”
“아, 제가 이 선생님한테 간밤에 부탁한 환자가 있어서요.”
차마 변명할 여지도 없이 고개를 숙이려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내 말을 단칼에 자르고 훅 들어오는 김재겸의 목소리가 가뜩이나 정신없는 머릿속을 더 헤집었다.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던 김재겸이 어느새 내 뒤에 바짝 붙었다.
“아… 그러셨어요?”
열이 오른 몸이 쉽게 가라앉질 않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인 채 후끈거리는 목덜미만 연신 쓸어 만졌다. 붉게 올랐을 내 뒷덜미 위로 김재겸의 웃음소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괜찮으면 이 선생님 좀 빌려 가도 될까요?”
“네, 뭐. 그러세요.”
김재겸의 말에 변미현이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나를 지나치는 김재겸의 음성이 다시 내게 쏟아졌다. 나는 나보다 앞서 걷는 김재겸의 뒷모습을 보며 변미현에게 다시 고개를 숙인 후 그를 쫓아갔다.
“급하게 출근하느라 밥을 못 먹었거든요. 어디 보자. 아침 회진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같이 밥이나 먹어요.”
김재겸이 왼쪽에 찬 손목시계를 보며 말을 조금 더디게 이어 나갔다. 내가 고개를 대충 끄덕이자 김재겸이 다시 웃음을 흘렸다. 원체 웃음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왠지 그 웃음이 유정이의 병실에서 깜빡 졸은 내 모습을 연상하며 웃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분명 유정이 얼굴만 조금 보다가 나올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잠이 들었는지. 나는 이른 아침의 찬 공기를 느끼면서도 더위를 탔다. 앞서 걷던 김재겸이 불현듯 자리에서 멈추었고 그에 내 걸음도 따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 머리가 뻗쳤길래.”
김재겸이 내 뻗친 머리를 손으로 살살 다듬었다.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않는 손에 내가 김재겸의 손을 치웠다. 손으로 김재겸이 건드렸던 부근을 꾹꾹 눌러 댔다. 그러자 김재겸이 그런 나를 보며 실실 웃었다.
“그만 좀 웃죠.”
내 불퉁한 목소리가 김재겸에게 닿았다.
“그러죠, 뭐.”
김재겸은 내 말투를 따라 하며 불퉁한 음색을 냈지만 내게 뱉어 낸 말과는 달리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아침을 굶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많이 드세요, 이 선생님.”
김재겸과 도착한 곳은 구내식당이었다. 김재겸은 굳이 내 식판 위에 고기를 듬뿍 올리며 웃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김재겸을 올려다보았지만, 김재겸은 이미 음식을 종류별로 담은 식판을 들고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부터 끼쳐 오는 피로를 느끼며 김재겸의 뒤를 따랐다.
김재겸의 맞은편에 앉은 내가 숟가락을 들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따뜻한 국이 놀란 속을 한차례 진정시켜 줬다. 김재겸이 밥을 크게 한술 떠 입 안에 넣는 것이 보였다.
가만 보면 김재겸은 형과 상극이었다. 밥을 먹는 습관부터 말투, 행동, 분위기 그 어떤 것도 형과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김재겸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김재겸이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양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때 말씀드렸던 유정이 골수 이식은 어떻게 됐어요?”
“유정이가 누군데.”
그에 고개를 저으며 유정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으나 김재겸의 목소리 대신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옆에서 불쑥 들어오는 음성에 김재겸에게 향했던 고개가 옆으로 틀어졌다. 놀란 눈이 휘둥그레지게 뜨였다.
“이 선생님, 출근하셨어요?”
형이 내 옆자리에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당황한 내가 사레에 들려 기침을 하자 김재겸이 서둘러 물을 떠 왔다. 나는 김재겸이 내미는 물컵을 받아 들곤 물을 벌컥벌컥 넘겼다.
“아… 김재겸 선생님 담당 환자. Neuroblastoma(신경아세포종) 환자인데, 어쩌다가 알게 돼서.”
내 말에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으로 밥을 떠먹었다. 형의 그런 모습이 그렇게나 신기할 수가 없었다. 형은 아침을 잘 챙기지 않았으니까. 형이 이른 아침에 밥을 먹는 건 열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나와 형을 번갈아 쳐다보던 김재겸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리듬을 타듯 고개를 위아래로 살살 흔들었다. 김재겸은 형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아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사이좋아 보이던데.”
“정말요? 이해준 선생님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봐요. 우리 사이 되게 좋아 보인대요.”
형이 짧게 뱉은 말에 김재겸이 퍽 반가워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되게 좋아 보인다고 한 적은 없는데. 내가 속으로 김재겸의 말에 딴지를 걸며 형의 눈치를 봤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음식물을 얼마 넘기지 않았음에도 체기가 단단히 돌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유정이 이식은 아마 이번 달 말에나 잡힐 것 같아요. 재판이 그때쯤 끝나니까, 판결 나면 바로 일정 잡으려고요. 골수 항원이 얼추 맞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타 병원에서 연구 중인 교수님께도 연락드렸고, 아마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마워요, 방법 찾아 줘서.”
김재겸은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았음에도 입을 쉴 새 없이 놀렸다. 형은 옆에서 묵묵히 밥알을 씹고 있었고, 나는 손에 쥔 젓가락으로 밥을 휘젓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김재겸을 보며 억지로 웃었다. 유정이가 골수 검사에 들어가기 전, 김재겸이 예전에 유정이 부모가 골수 검사를 한 이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며 웃었던 게 떠올랐다.
검사 결과가 좋게 나온 건 정말 다행이었지만 유정이 생각만으로 이 난감한 분위기를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형의 페로몬 잔재가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 선생님.”
눈치라고는 도통 찾아볼 수 없는 김재겸이 말을 이어 나가자 형과 내 시선이 김재겸에게 꽂혔다. 김재겸은 동시에 고개를 든 형과 나를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아, 이한음 선생님이요.”
형이 들었던 시선을 다시 식판에 박고는 밥을 깨작거렸다. 그런 형을 잠시간 눈에 담았던 내가 고개를 들어 김재겸을 보았다.
“유정이 골수 이식할 때 같이 지켜봐 주실 거죠?”
눈을 반달로 접으며 내게 묻는 김재겸을 멍하니 보았다. 나는 형의 주위로 가라앉아 있던 형의 페로몬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걸 느꼈다. 말도 안 돼. 침을 억지로 삼킨 내가 온 신경을 형에게 쏟았다.
아침을 먹지도 않던 형이 구내식당을 찾은 것도, 김재겸의 말을 고의로 무시하는 것도, 함께 있어 달라는 김재겸의 말에 페로몬을 노골적으로 개방해 내 주위를 옭아매는 것도.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설마 했던 감정에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형은 김재겸을 질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갈수록 짙어지는 페로몬에 놀란 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형의 페로몬이 내 주위를 스멀스멀 웃도는 걸 눈치챈 김재겸이 한층 굳어진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공장소인데. 당혹스러움을 모조리 쓸어 담은 내가 서둘러 형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형은 내 이끌림에 일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같이 있어 달라잖아.”
형이 내게 오른쪽 팔을 허용한 채 물었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몸이 기가 찼다. 아니, 도대체 무슨 대답을 바라고 이런단 말인가. 김재겸이 함께 있어 달라는 소리에 다짜고짜 페로몬부터 흩뿌렸으면서 그걸 왜…….
“…….”
설마 여기서 거절하라고? 문득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형은 내 속마음을 듣기라도 했는지 어서 거절하라는 듯 나를 빤히 응시했다. 형의 페로몬이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 주변에 있던 병원 내 근무자들 몇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마 베타를 제외한 형질의 시선일 것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싫다고 하는 건 아니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정인데?”
내 난감한 표정을 보며 김재겸이 서운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재미있다는 표정인가.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 한술 더 뜨는 김재겸이 얄미웠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 눈치를 주는 듯 조여드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탓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솔직하게 말해서 일정이 정해진다면 유정이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질척하게 달라붙는 형의 시선이 마음에 걸린다.
형이 도대체 어디서 질투를 느끼는지 의아했다. 형은 내가 무영과 친하게 지낼 때에도 이런 기류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재겸은 왜?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도 머리를 끊임없이 굴렸다. 일단 식당 안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일부터 피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이 페로몬을 거둬야 하는데, 형은 원하는 대답을 듣기 전까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상황을 가장 합리적이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아무도 기분이 상하지 않을 그런 방법이 있을까. 나는 입술을 씹으며 고뇌에 빠졌다.
내가 계속 아무런 말이 없자 결국 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형에게 향한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내가 형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 김재겸에게 눈인사를 하곤 형의 뒤를 쫓았다.
“형.”
뒤를 쫓는 내 기척이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 뻔한데도 형은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화났나? 내가 안 하겠다고 말하지 않아서?
형은 꿋꿋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형이 걷고 있는 길은 형의 연구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형이 도어 록을 풀어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기 전에 내가 형을 따라 들어갔다.
“형, 나는 형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형이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형에 의해 말이 끊긴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입술을 씹었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그냥 거절할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막심했다. 형이 걸음을 내디뎌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나도 모르는 걸 네가 무슨 수로 알겠어.”
형의 무거운 시선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형은 김재겸에게 질투하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모르겠다고 했다. 당혹스러움이 물씬 깃들은 시선이 형의 표정을 살폈다.
“알 필요 없어. 나도 굳이 알고 싶지 않으니까.”
형이 내게 더 바짝 다가왔다. 나는 괜스레 부끄러움을 느끼며 형에게 향했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사이가 너무 가까워 형의 숨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 뛰어 댔다. 가슴팍 가까이에 대야 맡을 수 있는 체취가 페로몬에 섞여 내 곁을 감쌌다.
또다. 형은 또다시 페로몬을 개방해 내 주위를 틈틈이 메우고 있었다. 그게 꼭 삽입 섹스를 하기 전의 전희를 느끼는 것처럼 아주 농밀했다. 뇌에서 분비된 옥시토신이 가슴께를 마구잡이로 휘젓는 기분이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고개를 들었다. 형은 내 입술에 꽂혀 있던 시선을 들어 나와 눈을 마주했다. 형이 눈을 내리깐 통에 가느다랗고 긴 속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형이 손을 내게 뻗었다. 내 턱을 쥐어 고개를 고정한 형이 입술을 포갰다.
나는 떨리는 손을 형의 팔뚝에 얹은 채로 눈을 감았다. 형이 아랫입술을 깨물자 그런 형을 받아들이기 위한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참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하던 분위기가 입술이 맞닿음으로써 밝은 색채를 띠었다.
김재겸에게 향한 질투를 부정하던 형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페로몬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게 묻은 김재겸의 페로몬 잔재를 털어 내려는 듯이. 실제로 김재겸 주위에는 페로몬 잔재가 그리 요동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아……!”
내가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인지 형이 이를 더 날카롭게 세우며 입술을 씹어 댔다. 내가 작은 탄성을 내며 형의 팔뚝을 세게 쥐자 형이 고개를 더 바짝 틀어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입술 위를 구르는 혀가 씹힌 부분을 마사지하는 것도 같았다. 그게 퍽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웃음이 공기 중으로 퍼지기도 전에 형이 혀를 내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터졌던 작은 웃음은 형에게 먹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싶었다.
형이 내 턱을 쥐었던 팔을 내리며 몸을 더 밀착했다. 형의 힘에 밀린 내 등 뒤로 연구실 문이 닿았다. 형의 손이 내 허리께를 웃돌았고, 내 손은 어느새 형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형의 혀와 섞여 들었던 내 혀가 문득 갈 곳을 잃었다. 형이 갑작스럽게 몸을 낮춘 까닭이었다.
형의 단단한 팔뚝이 내 허벅지를 받쳤다. 형이 살짝 구부렸던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내 몸이 붕 떴다. 내가 화들짝 놀라며 형의 목을 끌어안았다.
“……놀랐잖아.”
형의 뺨에 얼굴을 붙이고 나니 흥분을 머금은 열기가 형의 체온을 높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엉덩이가 곧 형의 연구실 책상 위에 안착하고, 나는 손으로 형의 뺨을 감쌌다. 형의 입술이 내 타액으로 인해 번들거렸다.
“그래서 꼭 해야겠다고?”
불현듯 터지는 형의 말에 내 얼굴이 의문을 가득 담았다. 내 눈가에 닿는 눈초리가 유난히 불퉁했다. 아아, 그 시선에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린 내가 소성을 뱉었다. 내가 눈매를 휘며 웃자 형이 눈가를 좁혔다.
“싫어?”
내 허벅지를 쓸어 만지는 형의 손길이 미적지근하면서도 농후한 게 마치 깊은 시름에 빠진 것 같았다. 내가 형의 허리에 다리를 둘러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까는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던 형이 이번에는 순순히 딸려 왔다.
“김재겸 선생님 때문이 아니라 유정이 때문인데.”
형이 내가 했던 말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봐 굳이 정정했다. 형은 내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다시 입술을 맞댔다. 나와 섞이고 있는 형의 혀가 질척하게 달려들었다. 그게 꼭 한발 물러나겠다는 의미인 것 같아 나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기분 좋은 웃음이 입술을 가르고 터지자 허벅지를 주무르던 손이 불쑥 아랫배로 향했다.
“……읏.”
형은 손을 뒤집어 어루만지듯 앞섶을 가볍게 건드려 댔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던 순간 형의 허리를 감았던 발목이 붙잡혔다. 바지 밑단 속을 은밀하게 맴도는 체온이 느껴졌고, 천 위로 성기를 짓누르던 손이 조금 더 무게를 실었다.
“형.”
“왜 그렇게 떨어.”
형은 마치 내가 아무런 자극 없이 혼자 달아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묻냐고. 샐쭉 뜨였던 눈이 더 가늘어지고 미간은 자연스레 좁혀졌다. 언더웨어와 수술복 하의, 두 겹으로 거듭 둘러싸인 성기가 갑갑하다며 계속 고개를 쳐들었다.
비좁은 곳에 갇혀 꺼덕거리는 게 느껴졌는지 형이 낮은 소리로 웃어 댔다. 형의 어깨를 짚은 손에 차츰 힘이 실렸다.
발목부터 느슨히 훑고 올라온 손이 허벅지를 지나쳐 상의 안을 침범했다. 평소보다 차가운 듯한 손이 골반과 옆구리를 스치고 올라오자 몸엔 더 큰 반동이 일었다.
성기를 지분거리는 손을 응시하던 고개를 드니 느른하게 뜨인 눈매가 시야에 들어찼다. 무언가 차근히 음미하는 듯한 표정인데. 그게 내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이라는 걸 깨닫자 간신히 틀어막고 있던 페로몬이 한순간에 퍼져 나갔다.
“흣…….”
그게 퍽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순간 빳빳하게 선 유두를 스친 엄지가 말려 올라간 상의 밑단을 쥔 채 내 입가로 다가왔다.
딱히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았다. 입을 벌려 옷자락을 물며 눈치껏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허리춤을 둘러싼 고무 밴드를 쥐고 단숨에 끌어 내려진 하의가 어느샌가 수직으로 늘어진 다리를 타고 수직 낙하했다.
어느 정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던 형의 고개가 목표를 갖고 전진했다. 훤히 드러난 유두를 가볍게 이로 짓이긴 형은 이를 앙다문 채 부르르 떨어 대는 날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형의 무게에 밀린 몸이 책상 위로 눕혀질 것처럼 젖혀졌고, 팔꿈치에 눌린 종이가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리로는 구겨지고, 찢겨졌을 종이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몸은 형이 주는 자극에 너무 쉽게 휘둘렸다.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 알아?”
유두를 문 채 흘러나오는 말씨조차 내겐 또 하나의 자극이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터진 뜨거운 숨, 말을 짓이길 때마다 노골적으로 닿아 오는 혀, 유륜을 짓누르는 말캉한 입술.
“어, 떤데?”
양팔로도 지탱하기 버거운 몸이었지만 한쪽 손을 뻗어 형의 머리를 감쌌다. 부드럽게 감기는 감촉이 좋아 마디를 구부리면 한 줌에 쥐어진 머리칼이 내 손아귀에 단단히 포박되었다.
“으응…….”
한순간의 자극조차 놓치기 싫어 감긴 눈꺼풀은 내 시야를 차단했지만 바람대로 오감을 더 예민하게 달궜다. 일말의 틈도 없이 내게 밀착하는 형의 페로몬, 드로어즈 위로 느껴지는 손길.
중력을 타고 아래로 늘어졌던 다리가 향락을 이기지 못한 채 다시 형의 허리를 얽었다. 어느새 내 체온과 동화된 손길이 골반을 쥐었다.
딱딱하게 선 유두가 팽팽하게 늘어날 정도로 집요하게 빨아 대던 형이 고개를 들던 찰나, 골반을 단단하게 쥐었던 손이 날 바짝 잡아당겼다.
“흣!”
“내 좆을 절반쯤은 씹어 먹은 얼굴이야.”
불시에 당겨진 몸이 책상 모서리를 타고 미끄러질 것 같아, 서둘러 손으로 모퉁이를 붙잡았다. 내게 우수수 떨어지는 질 낮은 언사를 인식한 머리가 곧추선 성기를 더 팽팽하게 발기할 것을 종용했다.
다리 사이에 옹골지게 맞닿은 두툼하고도 단단한 무언가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한 줌의 불꽃처럼 분산된 형의 페로몬이 공기를 녹녹하게 적셨다.
페로몬에 그득히 잠겨 정신이 혼미했다. 흥분감이 샅샅이 들어찬 눈동자는 내 구멍 속에 처박혀 있는 성기를 상상하듯 짙게 일렁이고 있었다.
야해. 원단을 꿰뚫을 것처럼 발기한 선단의 자취를 검지로 살살 긁는 형의 얼굴은, 다리 사이까지 흠뻑 적실 정도로 야했다.
“형 얼굴은, 읏, 어떤 줄 알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닳아 버린 얇은 실처럼 이어지는 음성에 형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 아랫배에서 교묘히 깔짝거리던 손이 사타구니에 묻힌 성기를 풀어 주려는 양 버클 쪽으로 향했다.
“글쎄.”
달칵, 작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흉흉하게 곤두선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랑이로 느껴져서 그 안 속 상황을 얼추 알고는 있었다만 저렇게까지 발기해 있을 줄은 몰랐다. 혀 밑에서 솟아난 침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너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건 대충 알겠어.”
한순간에 먹이를 낚아채는 최정상 포식자처럼 손으로 내 뒷덜미를 움켜쥔 형이 거칠게 입을 맞췄다. 무자비하게 덜컥 집어삼켜진 입술이 고른 치아에 아무렇게나 짓눌렸다.
형의 손길에 의해 드로어즈 밖으로 고개를 내민 성기가 뜨겁게 부풀어 오른 형의 성기와 맞닿았다. 큰 손으로 두 개의 성기를 맞잡은 형이 허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내 기둥을 지나 아랫배를 콕콕 찔러 대는 선단이 느껴졌다.
“하으, 응.”
가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볼기짝을 짓누르는 책상 모퉁이에 의해 자세는 너무나도 불편했지만 불만을 토로할 여유가 없었다.
내 혀를 옭아매기 위해 한껏 숙인 형의 상체가 점점 더 무지근해졌다. 형이 의도한 바가 맞는지 뒷덜미를 에둘러 싼 손이 천천히 기울어져 책상 표면에 닿았다.
형이 고개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형의 입술이 내 입술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뒀다. 혀가 입술에 번진 타액을 한번 훔쳤다.
형이 하반신과 바짝 밀착한 내 허벅지를 가볍게 내리쳤다. 여전히 형의 머리칼에 뒤엉켜 있던 손을 떼어 내고, 다리에 들어갔던 힘을 풀자 성기 아래 걸쳐진 드로어즈가 벗겨졌다.
형의 동선은 깔끔했다. 드로어즈를 벗기며 붙잡힌 발목이 형에 의해 넓게 벌려져 모퉁이에 간신히 걸쳐졌다. 훤히 드러난 회음부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전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축축하게 젖은 곳을 건드렸다.
“으읏, 흣.”
“너 때문에 옷까지 갈아입어야 할 지경이야.”
형은 내 밑구멍과 닿아 있던 바지에 얼룩덜룩 묻어난 애액을 눈짓하며 말했다. 겨우 검지 한 마디만 걸치듯 삽입한 형이 내벽을 가볍게 문질렀다.
“혀엉, 그냥, 그냥 넣어 줘. 응?”
“그랬다가 종일 뒤뚱거리려고? 히트 사이클도 아니면서 몸 안 사리지.”
안으로 들어차는 손가락의 개수가 하나 더 늘어났다. 기다란 손가락이 구멍에 깊이 쑤셔 박히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을 조이는 감도에 찬찬히 구부려진 마디가 성급하지 않게 안을 휘저었다. 움직일 때마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넘실거렸다.
형은 좀처럼 내 아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꿀렁거리는 목울대와 욕정이 깃들어 있는 페로몬과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손을 뻗어 형이 맨 타이의 앞자락을 잡아당기자 구멍에 질척하게 달라붙어 있던 눈길이 위로 이동했다.
“그런 배려 안 해 줘도 되는데.”
발갛게 오른 눈가로 조심스레 형을 꾀어내자 형의 눈이 때를 기다리던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타이를 쥔 손과 책상을 짚은 손목을 한 손에 쥐고 머리 위로 이동시킨 형이 내 입술 위로 버드 키스를 했다.
구멍 속을 헤집던 손으로 기둥을 쥐어 선단을 입구에 문대는 감각이 아래에서부터 여실히 올라왔다. 귀두를 몇 번이고 내 구멍에 점철해 대던 형이 불시에 구멍을 채웠다.
“으윽……!”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득 채워지는 이물감에 주먹이 세게 쥐였다. 허벅지 살이 겉에서부터 갑작스레 닥쳐오는 감각에 바들 떨리자, 형의 손이 허벅지를 감쌌다.
잇새로 밭게 터지는 숨이 살결을 간지럽혔다. 무언가를 쥐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머리맡의 모퉁이를 잡았다. 형의 성기를 받아들이려 힘을 풀기 위해 애써도, 아래는 형의 성기를 밀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옥죄었다.
“후으…….”
“아파… 찢어질, 흣, 찢어져, 그러다가. 형.”
“네 장단, 맞춰 줄 여력 없으니까 그냥 참아.”
형의 손이 내 양 손목을 쥐어 터트릴 것처럼 세게 옭아맸다. 천천히 진입했던 것과는 반대로 기둥의 절반을 삼켜 내자 형이 이를 악물고 힘껏 들이받았다. 뿌리째 처박힌 단단한 성기가 생경하게 느껴지니 가까스로 뱉어지던 숨마저 멈추었다.
온몸이 발발 떨렸다. 우악스러운 밀어붙임을 버티지 못한 다리가 책상 아래로 추락했다. 안쪽 다리로 느껴지는 단단하게 선 다리를 무의식중에 감았다.
그사이 숨을 한 번 차분히 들이마신 형이 허리를 뒤로 뺐다. 빈틈없이 들어찼던 내부가 긴장을 뒤집어쓰기 무섭게 퍽, 다시 한번 강하게 쳐올린 성기에 허리가 비틀렸다.
“혀, 형!”
가슴팍이 거세게 들썩였다. 생리적인 현상으로 새어 나오는 눈물을 끊어 내듯 눈이 질끈 감겼다. 불규칙하게 빠지고 치기를 반복하는 허리 짓에 맞춰진 숨은 벌써부터 무질서했다.
“후으, 응! 흣!”
벌어진 입술이 뜨겁게 달궈진 공기를 무작정 들이켰다. 제대로 트여 있지 않은 아래에 억지로 길을 만들듯 거칠게 쑤셔 박히는 성기의 모양을 되새겼다.
아랫입술을 세게 씹어 물자 그 위로 형의 입술이 포개졌다. 자극에 취약해 제멋대로 휘둘리던 몸은 맞닿은 형의 입술을 느꼈으면서도 입술을 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를 감지한 형이 내 전립선을 스치듯 속을 긁자.
“아!”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제야 입술 사이로 빼꼼 드러난 혀가 정신없이 형의 혓바닥을 옭아맸다. 손목을 옥죄던 손이 모퉁이를 잡은 손 위로 겹쳐졌다. 덕분에 자유로워진 한쪽 손으로 형의 머리카락을 잡아채듯 세게 쥐자 혀가 잘근 씹혔다.
“아아, 흣. 좋아, 응!”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 위를 형의 타이가 간지럽혔다. 형의 움직임에 맞춰 유두를 스치는 타이가 형의 손길이라도 되는 양 허리께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아으, 읏! 조금만, 후읏, 조금만 천천히, 응! 형, 너무 빨, 라, 흣.”
닫혀 있던 입술을 벌리게 하기 위해 전립선을 스쳤던 성기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전립선을 치받았다. 얼마나 세게 쳐올리는지, 책상이 잘게 진동하며 뒤로 밀리기까지 했다.
바짝 밀착해 형의 와이셔츠에 쓸리던 성기에서 무언가 새어 나오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형의 혀를 빨아 댈 여유가 없어 입이 잔뜩 벌어진 채 숨을 토해 내기 바빴다. 등 밑으로 몇 번이고 구겨지는 서류가 현재 우리가 얼마나 경황없이 배를 맞대고 있는지 알려 줄 뿐이었다.
“우윽, 흐, 읏. 그만, 그만!”
온몸을 잠식하는 쾌감이 너무 지독해서 몸을 떨어 대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성기에서는 쿠퍼액으로도 모자라 희멀건 백탁액까지 쏟아 냈지만 형은 내 속을 헤집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내게 머리칼이 휘어잡힌 채 쇄골에 입술을 묻은 형이 등을 굽히며 이를 날카롭게 세웠다. 고개를 잔뜩 젖히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내가 무의식중에 형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을 때.
“으응, 흣. 아아, 형, 후으, 형, 제발……!”
“후윽!”
형은 성기를 내 속에 깊게 처박은 채 뜨거운 정액을 울컥 토해 냈다. 아아, 멈춘 행위 속에서도 터져 나가는 밭은 숨은 우리가 속한 공간을 계속해서 데웠다.
팔을 들어 시야를 가린 나는 여운을 흠뻑 들이켠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애썼다. 턱밑으로 흐트러져 살갗을 간지럽히던 머리카락이 서서히 떨어졌다.
형의 성기를 씹어 무느라 닫히지 않은 구멍이 잠자코 꾸물거렸다. 얼굴을 가리는 팔을 손수 떼어 낸 형이 내 이마에 입술을 꾹 붙였다.
발갛게 오른 눈가가 천천히 뜨였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대신 형의 목을 둘러 안았다. 한바탕 정액을 쏟아 낸 성기가 아까보다 느긋한 속도로 내 안을 맴돌았다.
쪽, 이번엔 입술에 입을 맞춘 형의 눈길이 참 다정하게도 얽혀 들었다. 음미하듯 혀를 내어 입술을 핥는 형을 더 세게 끌어안자 형은 땀으로 얼룩진 내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관계가 끝난 후에 사그라들었어야 할 형의 페로몬은 내 주변을 오래 둘러쌌다.
허리가 뻑적지근했다. 꽤 긴 시간을 책상 모퉁이에 짓눌려 있던 엉덩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두드려 대던 나는 ER에서 찾는 호출에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외래에서 진료를 보기엔 상대적으로 급하고, 응급이라고 하기엔 비교적 별것도 아닌 모호한 환자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실에 붙잡혀 응급 처치를 하고, 노티를 하는 한두 시간가량은 허리에서 느껴지던 통증조차 잊힐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겨우 돌린 한숨에 손으로 뒷덜미를 감싸 주무르며 응급실을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저기…….”
문득 누군가 날 부르는 듯한 소리에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세 걸음 정도 떨어진 채로 우물쭈물 서서 날 바라보고 있던 박이영은 손에 레빈 튜브를 들고 있었다.
4월이 되면서 타 과로 이동한 박이영은 딱히 나와 마주칠 일도, 말을 섞을 일도 없었다. 왜 나를 불렀을까. 저번에 옥상에서 벌어졌던 일 때문인가.
그 이유가 뭐였건 당장 안 들으면 미쳐 버릴 정도로 궁금하진 않았다. 금방 털어 버리고 병동으로 올라가고 싶었으나 내게 달라붙는 눈빛이 퍽 간절해 보여 굼벵이 기어가듯 느릿한 입술이 어서 움직이길 기다렸다.
“왜.”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박이영보다 참을성이 부족했던 나였다. 가뜩이나 시간도 부족한데 이런 식으로 발목이 잡혀 버리니 귀찮다는 생각이 앞서 들었다.
“미안한데… 혹시, L 튜브 삽관할 줄 알아? 그, 의식이 없으면 어떻게든 해 보겠는데… 잘 들어가지도 않고…….”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고 선 박이영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눈이 뒤편으로 넘어갔다. 꽤 여러 명에게 물어보고 다녔던 모양인지, 베드 위에 앉아 있는 환자 주변으로 얼굴만 겨우 익힌 인턴 몇이 함께 서 있었다.
저거 하나 삽관 못 해서 네 명이 모여 있었나. 무리가 아닌 듯 맞는 듯 하나같이 동떨어져 있긴 했으나 인턴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 향해 있었다.
“혹시 바쁘면…….”
“손 씻고 올 테니까 새 거로 다시 가지고 와. 그거 사이즈 몇이야?”
“이거 지금 18.”
“너무 굵어. 보니까 체구도 작으시던데, 일반 성인이면 16으로도 충분하니까 그 사이즈로 준비해 줘.”
“응, 잠시만.”
최대한 빨리 삽관하고 올라갈 생각이었다. 응급실 구석에 배치된 개수대에서 서둘러 손을 씻었다. 물기를 얼추 닦고 종이컵에 생수를 담아 빨대를 꽂고 나니 새 레빈 튜브를 쥔 박이영이 내 뒤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이리 줘.”
“여기.”
부탁하는 주제에 시건방을 떨 수는 없겠지만 지나치게 고분고분한 게 꼭 잘 키운 강아지 같았다. 나도 모르게 콧숨을 짧게 내쉬자 박이영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을 무시하고 환자에게 다가가 서빙 카트를 살폈다. 미리 잘라 모퉁이에 붙여 놓은 반창고와 거즈 위에 짜여 있는 수용성 윤활제, 실린지, 일회용 장갑. 마지막으로 박이영의 목에 걸린 청진기까지 확인한 뒤 새로운 거즈 위에 윤활제를 짰다.
“왜 또 어린놈이 왔어. 어설프게 할 거면 애초에 직급 높은 의사 데리고 오랬잖아!”
환자는 언뜻 보기에도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오른쪽 콧구멍이 붉게 부어오른 채로 성질을 내는 게 왜 내게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좌위로 똑바로 앉아 계시면 금방 도와 드릴게요. 설명은 박 선생님께 들었죠?”
“들었어! 들었는데, 이거 봐! 저거 때문에 내 콧구멍 다 헐게 생겼다고!”
“그러네요. 반대쪽으로 넣어 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고 흥분 가라앉히세요. 비위관 삽관할 때 많이 힘들어요. 협조 잘해 주셔야 금방 끝납니다.”
레빈 튜브의 포장지를 뜯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환자는 내게 화를 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콧김을 세게 뱉고 말았다.
환자에게 미리 물을 떠 온 종이컵을 쥐여 주고 식도에 이물감이 느껴지면 침을 삼키고, 그마저도 힘들면 빨대로 빨아서 물을 마시면 된다 미리 일러 주었다.
“머리 앞으로 살짝 숙여 주세요.”
그 뒤로는 질질 끌 게 없었다. 왼쪽 콧구멍에 튜브를 맞추고 천천히 삽관했다.
환자가 지나치게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삽관을 멈추고 호흡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진정한 것 같으면 튜브를 마저 삽입했다.
“호흡하기 불편하세요? 괜찮으시면 고개만 끄덕여도 돼요.”
성격상 불쾌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튜브를 빼는 둥 난리를 칠 줄 알았던 환자는 생각보다 잘 참았다. 내 말에 고개를 두어 번 주억이는 환자의 낯빛을 확인하며 손을 뒤로 뻗었다. 자연스럽게 내 손으로 넘어온 청진기를 귀에 끼웠다.
호흡도 괜찮고, 기침도 없다. 얼굴빛으로 보아 청색증도 없었고, 튜브에 실린더 속 공기를 주입할 때마다 상복부에서 울리는 소리도 잘 들렸다.
“잘 참으셨어요.”
“고마워…….”
장갑을 벗고 반창고로 튜브를 마저 고정하자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쉰 박이영이 입을 열었다.
딱히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도와준 건 아니었다. 비위관 삽관이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 데다가 초턴 때야 어렵지 말턴이 되면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이었다. 오히려 이런 소리를 듣는 게 더 민망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잘 안 들어간다고 한쪽에만 고집하지 말고 반대쪽으로도 넣어 봐, 괜히 무식하게 쑤셨다가 Epistaxis 나면 상황 난처해지니까. 고무로 된 L 튜브는 얼음물에 담가 두면 삽관하기 더 쉬워.”
“응…….”
“에피스 뭐? 그건 또 뭐야. 나 큰일 날 뻔한 거지, 그치?! 염병, 나 이거 계속 달고 있어도 괜찮은 거 맞아?”
“Epistaxis는 코피입니다, 환자분. 별거 아니에요. 코피보다 삽관 안 하는 게 환자분께는 더 위험한 일이에요.”
작게 속삭인다고 노력했으나 어떻게 또 주워들었는지 잠자코 있던 환자가 뒤늦게 발끈했다. 환자를 대충 어른 뒤 박이영의 팔을 쥐고 베드로부터 떨어졌다.
“삽관 잘 참는 환자 몇 없으니까 그냥 네 페이스대로 부드럽게 삽입해. 너무 힘들어하면 물 가져다줘도 되고, 구역질이나 기침 심하게 할 땐 좀 쉬면서 호흡 짧게 유지시켜 주면 되고.”
“너는 많이 해 봤나 보다. 엄청 능숙해 보였어. 이론으로는 알고 있었어도 막상 해 보면 나는 그게 잘 안 되던데. 정말 고마워……. 그리고 저번에 그 옥상에서…….”
무신경하게 떨어지는 말씨에 구구절절 자신을 포장하던 박이영이 뒤에 가선 지금 상황과 전혀 연관 없는 소리를 했다. 해야 할 일도, 전해 줄 말도 모두 끝났으니 응급실을 빠져나가려던 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신경 안 써. 쓴다고 해도 안 변할 거잖아, 너희는.”
“그래도… 불쾌했었다면 미안해…….”
중대한 잘못이라도 한 사람인 양 시선을 바닥에 처박고 중얼거리는 박이영을 그대로 지나쳤다. 이상하게 그렇게 돌아선 게 찝찝한 기분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일하면서 들었다거나 그저 예의상에 불과했던 사과는 적지 않았지만 사적으로 얽힌 일에 대한 사과는 받아 본 적이 손가락으로도 꼽혔다.
원체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 없었다. 불혹이 되는 나이까지 내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은 형과 무영이 전부였으니까.
한성에 온 뒤로는 참, 겸연쩍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신없이 주어진 업무를 해결해 나가다 보니 알 겨를이 없었지만, 원내에서는 소문이 생각보다 빠르게 돌고 있었다. 노수빈에게 선심 쓰듯 건넸던 내용은 아니었으나 소문은 그것과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소문에 서재원뿐만 아니라 김재겸이 함께 껴 있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구내식당에서 형이 내게 페로몬을 덧씌우면서 일어났다. 형과 내가 헤어진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던 병원 관계자들 모두가 이제는 형과 내가 재결합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게 구내식당에서 그 일이 일어나고 나서 불과 반나절 만에 벌어진 소문이었다. 일전에 내가 형의 페로몬을 뒤집어쓰고 출근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판이했다. 그때는 서재원과의 약혼 이야기가 더 떠들썩했던 것 같은데.
분위기가 종이 뒤집듯 뒤집힌 이유에는 출근을 하지 않는 서재원이 한몫했다. 무영은 서재원이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려나 봐, 라는 소리를 경쾌하게 내뱉었다.
반면에 나는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서재원에 대해 아는 바는 없어도 이렇게 쉽게 물러날 정도로 유약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단단히 엉킨 실타래처럼 좀처럼 풀리지 않던 일들이 술술 풀리기 시작하니 불안했다. 마치 여기서 만족하고 내가 제일 중대하게 여기는 일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말라며 싹을 자르는 기분이었다.
피곤해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나는 또 아무도 답해 주지 않을 질문을 쏟아 냈다.
“그래서 김 선생님은 뭔데?”
무영이 라면을 호로록 삼키며 물었다. 손톱을 물어뜯던 내가 무영에게 대답하는 일을 잠시 미뤘다. 김재겸이 형과 나 사이에 휘말려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병원 근무자들은 내게 추파를 던지던 김재겸을 형이 페로몬 샤워를 통해 견제한 것이라고 떠들어 댔다. 그때 김재겸을 보던 형의 시선이 지나치게 안 좋았다나 뭐라나. 그간 김재겸과 몇 번 함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사람들이 그걸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야, 뭔데. 설마 진짜야?”
“진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넌지시 던져 본 무영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날카로운 반응이 튀어 나갔다. 무영이 아랫입술을 비죽이며 젓가락으로 얼마 남지 않은 라면을 건졌다.
“그냥 환자 때문에 몇 번 대화 나눴던 게 다야.”
“그렇게 대답하면 저 섭한데요, 이 선생님.”
그런 무영의 반응에 멋쩍게 대답했던 내가 성급하게 몸을 돌렸다. 문 열리는 소리는 안 들렸는데. 내가 휴게실 문틈에 기대고 있는 김재겸에게서 눈을 떼 무영을 보았다.
무영은 내 시선을 피하며 컵라면 용기에 든 라면 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무영은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내가 무영을 흘기다 말고 김재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내 떨떠름한 목소리에 김재겸이 서운하게 구겨졌던 얼굴을 펴며 웃었다.
“이 선생님 보러 왔죠.”
크흡, 김재겸의 말에 무영이 입에 머금은 라면 국물을 뿜어내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이어서 매운 국물에 사레가 걸린 듯 기침을 해 대는 무영을 뒤로하고 나는 김재겸의 손을 잡고 휴게실을 벗어났다.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해요?”
비상구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내가 김재겸에게 따지듯 물었다. 김재겸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퍽 아쉬운 표정을 했다.
“대답 안 해 줬잖아요. 그날 같이 유정이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김재겸이 이내 장난스러운 웃음을 얼굴에 달았다.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필 지금 이런 때에 그걸 물으러 오는 김재겸이 답답했다.
“유정이 옆에 있을 거예요. 있을 건데, 당분간은 이런 식으로 저 찾지 마세요.”
“왜요?”
“몰라서 물어요? 선생님도 소문 다 들으셨을 거 아니에요.”
“들었는데 그게 왜요?”
속이 타들어 가는 내 마음을 눈치도 못 채는 김재겸이 순진한 얼굴로 반문했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으면서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건지, 나는 김재겸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계속 이런 식으로 저 찾으면 헛소문에 날개 달아 주는 꼴밖에 더 돼요?”
내가 피곤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김재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 눈을 짙게 들여다보던 김재겸이 입을 열었다.
“어… 아까 섭하다고 했던 거 취소. 방금이 더 섭섭했어요.”
“네?”
말로는 서운하다고 하면서 표정은 전혀 서운함을 띠고 있지 않았다. 내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로 김재겸을 쳐다보았다.
“헛소문 아닐 텐데, 그거.”
“그건 또 무슨…….”
“이 선생님한테 추파 던졌던 거 맞아요. 사람이 이렇게 눈치가 없나.”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살다 살다 김재겸한테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답답함에 거칠어지려는 숨을 겨우 골랐다.
“장난칠 기분 아니에요, 저.”
언뜻 보아도 끓어오르는 열을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였다. 내가 목소리를 낮게 가라앉히자 김재겸은 팔짱을 낀 채로 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잘 생각해 봐요. 정말 내가 선생님한테 흑심 없이 다가간 게 맞는지.”
김재겸은 골똘히 생각하던 얼굴을 금세 바꾸었다. 방긋 웃으며 대답한 김재겸이 비상구 문을 열었다.
“아, 그리고 말 바꾸면 안 돼요.”
김재겸은 비상구를 빠져나가기 전, 내게 받아 냈던 약속을 다시 한번 되짚었다. 순간 어지럼증을 느낀 내가 이마를 짚고 벽에 등을 기댔다. 페로몬으로 나를 만류하는 듯 종용했던 형이 떠올랐다.
그저 형이 곡해하는 줄로만 알았다. 내가 단순히 오메가였기 때문에 주는 관심치고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던 김재겸이라서. 처음과 마찬가지로 일관적이었던 태도와 유정이에 대한 김재겸의 진심이 어느 순간 내 경계심을 무너트린 것도 모르고.
싫었다. 형이 김재겸과 내 사이를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형이 아닌 다른 알파와 이런 식으로 엮이는 것도 싫었다. 형이 서재원과 함께 있었을 당시 느꼈던 엿 같은 감정을 형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고 있었던 것 같아 화가 났다.
혼란스러움으로 불안정하게 넘실거리는 페로몬이 느껴졌다. 내 기분을 곧이곧대로 따라가는 페로몬이 원망스러워 곁눈질로 훑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와 김재겸이 사라진 길을 똑같이 따라 밟았다.
내게 대했던 김재겸의 태도를 그저 오지랖 넓은 성격으로 치부하고 말았다니. 이제 와 생각하니 내가 너무 멍청했다. 어찌 되었건 김재겸은 알파였고, 나는 오메가였는데. 무영과 내 관계에 대한 영향이 서로의 형질을 망각하게 만들었던 걸까.
“잠시만요.”
내가 서둘러 김재겸의 팔을 잡고 그를 돌려세웠다. 김재겸은 내 목소리에 곤란한 표정을 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당분간은 마주치지 말자면서. 저야 소문에 날개까지 달리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 선생님은 곤란하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아직 이 선생님 대답을 들을 준비가…….”
“준비고 자시고 김 선생님 사정 같은 거 저한테 중요한 일 아니고요. 저는 선생님 마음 받을 생각 없어요.”
발톱을 숨기고 때를 노렸던 것처럼 단번에 치고 들어오는 김재겸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 마음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빙글 웃으며 능청스럽게 말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소문 후 마주한 김재겸은 지나치게 태평했다. 마치 그 소문의 주도자가 자신이었던 것처럼. 소문을 이루는 주는 형과 나의 재결합이다. 어느 누가 보아도 형의 질투는 일방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상황에 덜컥 고백이라니. 아무리 헤아려 보려고 해도 김재겸의 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뭐라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배신감? 분노? 배신감이라는 말을 덧붙이기엔 그렇다 할 유대 관계가 없었으니 분노가 맞는 거겠지.
가벼워 보이는 듯한 태도에 더 열이 받았다. 겨우 풀어져 있던 경계는 한층 더 날을 세웠다. 빈틈을 내비친 탓이다. 전과 같은 사이를 유지했더라면 괜한 소문으로 남들 입방아에 오르지도, 쓸데없는 시름이 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어쩌다 생겨난 허점이었을까. 유정이와 유대감을 쌓으면서? 유정이에게 다정하게 구는 김재겸을 보며 나도 모르게 마음을 열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면 김재겸은 언제부터 그 마음을 홀로 키워 왔을까. 내가 유정이를 만나기 전? 아니면 후?
“이 선생님…….”
“앞으로 공적인 일 외에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 소문, 저한테는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불쾌하거든요.”
아니, 궁금하지 않았다. 그게 언제부터였건 그 마음이 커지는 데에는 분명 내가 한몫했을 테니까. 그게 중요했다.
그 마음의 근원을 추궁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유정이가 거론된다는 게 이렇게까지 절망스러울 수 없었다. 그 생각은 내게 유정이에 대해 설명하던 김재겸의 진심을 의심하게 만들었으니까.
유정이 편에 서 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 보니 이 병원에서 김재겸의 평판이라면 유정이의 편에 서 줄 사람은 차고 넘쳤다. 인턴에 불과한 내 도움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소리다.
김재겸은 내게 항상 무해(無害)한 낯으로 웃으며 다가왔지만 돌연 그 웃음이 이 순간의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왜 마음을 놓고 있었냐고. 정말 자신을 믿었냐고.
왜, 왜 자꾸 유정이의 불행한 상황을 도구로 사용한 것 같은 이 거지 같은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는 거냐고. 차츰 일그러지는 내 얼굴에 당황한 김재겸이 손을 뻗었다. 나는 김재겸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몸을 틀어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이 선생님!”
김재겸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음에도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강하게 내리꽂혔다. 나는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 걸음을 더 빨리 내디뎠다. 그러나 내 걸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강제로 김재겸에게 돌려진 몸이 최악이었다.
김재겸의 행보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처음엔 돌아서는 나를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김재겸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뒤늦게 쫓아오던 김재겸은 이제 몇 걸음 채 걷지 않아서 나를 붙잡았다.
김재겸이 마음가짐을 달리한 이유가 나에게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무참했다. 경멸스러웠다. 나는 벌레라도 붙은 양 김재겸의 손을 다급하게 뿌리쳤다.
“치워요. 불쾌하다고 했잖아!”
“잠시만요. 이 선생님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 왜 이 선생님을 이렇게 화가 나게 하는지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내 마음 받아 달라고 강요한 게 아니잖아요.”
“강요 안 하면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미 소문은 소문대로 퍼졌고, 저는 그 일 때문에 머리가 아파요. 김 선생님 때문에 그 빌어먹을 소문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게 날 숨 막히게 한다고요. 저한테는, 그럴 여유가 없단 말이에요.”
“이 선생님.”
“자꾸, 자꾸 유정이에 대한…….”
“……성샌님.”
자꾸 유정이에 대한 당신의 진심까지 왜곡하게 된단 말이야. 거기까지 말을 끝맺었어야 했다. 설령 뒤에서 유정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했을지라도. 여기서 끝내는 건, 제3자가 듣기에도 오해의 소지가 너무나 다분했으므로.
김재겸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향했다. 나는 등 뒤로 들려오는 유정이의 목소리가 거짓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움이 적나라하게 뒤섞인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랜 시간 감겨 있지 않고 드러난 동공이 두 사람을 무시하라 종용했다.
김재겸을 등 뒤에 둔 채 걸음을 옮기던 내가 유정이마저 지나치려 했을 때, 옷깃을 잡아끄는 자그마한 힘이 느껴졌다.
울먹울먹 뜨인 눈망울이 내게 향하고 있는 걸 견디기 힘들었다. 어찌해야 할 줄 몰라 덜덜 떨렸던 몸이 유정이의 몸을 안아 들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페로몬 잔재에 숨을 쉴 수가 없었던 탓이다.
유정이와 함께 멀어지는 나를 김재겸은 더 이상 잡지 않았다. 우리가 말도 제대로 섞지 않았던 그때처럼.
나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유정이와 나란히 앉았다. 사탕이 들어 있지 않은 주머니는 언제나와 다르게 허전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유정이가 걸려 볼 안쪽 살을 집요하게 씹어 댔다.
실수를 했다. 유정이가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너무 크게 흥분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손가락을 꼬물거리고 있는 유정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눈길이 닿은 곳은 어쩔 줄 몰라 작게 꿈틀거리는 운동화 앞코였다.
“유정아, 아까 그 말은…….”
“……저 때문에 싸우신 거죠?”
상황을 다르게 포장하기 위해 터졌던 목소리가 불시에 멎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유정이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놀라 유정이를 쳐다보자 유정이는 퍽퍽하게 말라붙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눈동자 속에 든 유정이의 단념과도 같은 감정을 읽었다.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서 너 때문에 싸워.”
“엄마랑 아빠가 늘 그래서 저는 괜차나요.”
다소 서두르듯 뱉었던 대답조차 이제는 나오지 않았다. 이게 정녕 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인지. 왜 그걸 이토록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지. 나는 유정이가 알고 있는 유정이의 세상에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게 네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 유정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유정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유정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만져 주었다.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유정이가 입술을 소리 없이 방긋했다.
“선생님도 유정이 같았던 때가 있었거든. 그래서 선생님은 알아. 그 세상은 전부가 아니고, 그게 절대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거.”
유정이의 자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으니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 하나로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 줘야 했던 시절. 정작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김중현의 화를 더 받아 가면서까지 아이들을 최대한 보호해야 했고,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평범한 아이들 역시 맞고 사는 줄 알았던 내 세상은 그야말로 우물 속이었다.
“……성샌님도 아팠어요?”
맑은 음성 사이로 스며든 아픔에 목구멍이 콱 틀어막혔다. 나는 덜덜 떨려 오는 손에 힘을 실으며 쓰게 웃었다.
“너무 아파서 겁쟁이처럼 도망도 쳤어. 다 버려두고.”
“그건 겁쟁이가 아니에요!”
나는 완강하게 소리치는 유정이의 목소리에 지었던 웃음을 조금씩 지웠다. 그러나 유정이의 견고한 표정은 곧 허탈한 웃음으로 나를 뒤덮게 만들었다.
“그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자나요. 너무 아팠으니까…….”
유정이는 나보다 강한 아이 같았다.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내 편에 서서 나를 변호하는 유정이가 나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선생님이랑 약속 하나 할래?”
호기심을 담은 유정이의 말간 눈이 내 눈을 끈질기게 좇았다. 나는 새끼손가락을 유정이에게 내밀었다. 유정이가 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손가락을 단단하게 걸었다. 그 웃음이 마치 이제는 안심하라는 듯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무슨 약속이요?”
“남 탓하기.”
“네?”
“네 세상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을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그게 선생님이랑 할 약속이야. 쉽지. 그리고 아까 그건, 정말 오해니까… 마음 안 써도 돼.”
안심하라는 듯 억지로 지어진 미소를 더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나는 유정이가 조금은 더 나쁘게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정이의 첫 세상은 유정이에게 가혹했으니까, 반대편에 치우쳐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은 유정이가 조금은 나쁘게 자라도 유정이를 너르게 안아 주리라 믿는다. 내 말에 유정이가 눈썹 사이를 좁혔지만 이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복도를 지나가다 우연스럽게 만나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유정이가 나와 걸었던 새끼손가락을 휘휘 흔들며 해맑게 웃었다. 유정이가 간호사의 손을 꼭 붙잡고 검사실로 이동하는 걸 눈에 담았던 내가 고개를 돌렸다.
내게 향한 김재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부러 그 시선을 무시했다. 할 말이 많은 듯 내 뒤를 서성이는 시선이 강렬했지만 다행이었던 건 김재겸이 주변을 의식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김재겸의 시야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더 빨리했다.
“김중현 환자 의식 찾아서 일반 병실로 옮겼습니다, 선배.”
“어어, 아까 들었어. 마침 잘 왔다. ICU 가서 최병철 환자 채혈 좀, 어라, 쟤 걔 아니야? 서재원?”
멀리서 보였던 강유한의 옆에 서서 말을 건넸던 내가 강유한에게서 흘러나오는 이름에 표정을 굳혔다. 서재원? 강유한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복 차림의 서재원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나는 서재원 쪽으로 아예 틀어진 몸이 긴장을 뒤집어쓴 것을 느꼈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쟤 왜 여기에 있어. 설마 이번 달에는 NS 인턴이 넷이야?”
강유한이 황당하다는 듯 눈을 더디게 껌벅거렸다. 나는 서재원에게 향했던 고개를 틀고 강유한을 보았다.
“최병철 환자 혈액 채취하고 채혈실로 가면 되죠?”
“어? 어어.”
서재원이 왜 출근 시간을 한참이나 넘기고 나서야 병원에 왔는지 굳이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에게 트집을 잡으러 왔든, 며칠이나 이어진 무단결근에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왔든 알 바 아니었다.
왜 자신의 과가 아닌 NS 병동에 와서 나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되도록이면 서재원이 입을 열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무슨 말이든 그 말은 나를 불안에 떨게 하기 아주 적절하리라.
서재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강유한은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정말 4월에 NS 인턴이 넷으로 늘었는지 어쨌는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강유한은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했다. 나는 그런 강유한과 서재원을 지나쳐 중환자실로 향했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서재원이 이내 내 뒤를 쫓았다. 서재원의 표정을 언뜻 살폈을 때 그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내 뒤를 쫓는 것인지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서재원이 투명인간인 양 내가 해야 할 일을 서둘러야 했다.
최병철 환자는 11번 베드에 누워 있었다. 나는 중환자실에 들어오기 전 미리 챙겼던 채혈 도구를 들고 보조석에 앉았다. 죽은 듯 누워 있는 최병철 환자의 팔에 지혈대를 감았다.
“너 아주 무시하는 데 도가 텄다?”
내가 최병철 환자의 팔에서 정맥을 찾으려고 했을 때 서재원이 입을 열었다. 넓은 시야로 서재원을 알아본 의료진이 서재원에게 손가락질하며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내 옆에 선 서재원에게 시선을 던지는 대신 최병철 환자의 팔에 에탄올을 발랐다.
“야.”
도드라진 정맥에 바늘을 꽂고 최병철 환자의 혈액을 담을 파란색 튜브를 연결했다. 서재원은 자신을 무시하는 내가 기가 찼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나는 꿋꿋하게 혈액이 어느 정도 담긴 튜브를 제거하고 홀더에 노란색의 튜브를 맞춰 최병철 환자의 혈액을 마저 담았다. 나는 열이 받은 것처럼 거친 숨을 토하는 서재원에게 쏠리는 정신에 그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환영받고 싶은 거면 딴 데 가서 알아봐. 귀찮게 굴지 말고.”
다섯 번째 튜브까지 혈액을 채취한 내가 최병철 환자에게 맨 지혈대를 풀었다. 용기 속 혈액이 항응고제와 골고루 섞일 수 있도록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혈실로 가기 위한 몸이 서재원 쪽으로 틀어지면서 알게 됐다. 서재원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일 정도로 화가 났다는 사실을.
“너,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아?”
서재원이 꽉 물린 잇새로 낮게 지껄였다. 나는 강제로 틀어진 몸을 애써 지탱하곤 서재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드디어 정신 차리고 일하러 왔나 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서재원의 손을 뿌리쳐 중환자실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걸었다. 며칠을 내리 결근한 서재원을 과연 해당 과에서 환대해 줄지는 잘 모르겠다.
가뜩이나 바쁜 병원 일에 잡다한 일을 함께할 인턴이 한 명이라도 줄면 남은 인턴들은 겨우 자던 잠마저 쪼개 가며 일해야 했다. 인턴뿐이랴, 레지던트들 역시 불편함을 금치 못할 것이었다.
오자마자 수련 과에 달려가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왜 내게 이토록 집요하게 구는지. 나는 서재원이 나에게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심장은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하고 쿵쿵 뛰어 댔다.
“야!”
서재원은 계속되는 내 무시에 진저리가 났는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어깨를 거칠게 돌려세웠다. 놀란 와중에도 최병철 환자의 혈액이 담긴 튜브를 떨어트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식을 넘어선 행동에 눈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장난해?!”
어깨를 짚은 가녀린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일순 머리끝까지 치솟은 화에 핀트가 나가 다짜고짜 서재원의 멱을 쥐었다.
“MD 어떻게 땄어, 너. 지금 여기가 병원이라는 거 자각은 하고 있는 거야?”
힘껏 잡아당기는 힘과 반대로 더 다가오지 못하게 진입 경로를 가로막는 팔뚝에 서재원이 놀란 듯 잇새로 신음을 토했다. 치미는 부아를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몰아붙이려던 성미가 울먹거리는 눈매를 마주하자 잠시 행보를 멈추었다.
어떻게 된 게 의사라는 놈이 정도를 몰라. 왈칵 짜증이 복받쳤다.
“네가 원하는 대화 실컷 해 줄 테니까 떽떽거리지 말고 기다려.”
경고하듯 한 자 한 자 짓이기는 음성에 서재원은 차오르는 울화를 억누르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작 나를 괴롭히고 있는 건 본인이면서 뭐가 그렇게 억울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주먹이 잘게 떨릴 정도로 힘주어 움켜쥐었던 손을 짜증스럽게 풀었다. 불시에 떨어져 나간 서재원은 여전히 내게 향한 독기 어린 눈빛을 숨길 줄 몰랐다.
그대로 돌아선 나는 서둘러 중환자실을 벗어났다. 채혈실로 내려가기 위해 성큼성큼 뻗어지는 걸음은 현재 내가 얼마나 열이 받은 상태인지 두드러지게 보여 주었다.
“그것도 다 능력이 되니까 딴 거야. 어차피 난 여기 그만둘 거고, 이 볼 것도 없는 나라에서 의사 해 먹을 생각 추호도 없었어. 넌 쥐뿔도 없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해?”
지치지도 않는지 곧바로 따라붙어 조잘대는 목소리에 머리가 아팠다. 굳이 네가 보태지 않아도 난 충분히 벅차다고.
운 좋게 우성으로 발현해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을 게 뻔한 서재원이 과연 다른 나라에 가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할까. 굳이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뻔했으니까.
입 안에서 터져 나오지 못하고 뭉뚱그려진 말을 꾸역꾸역 삼켰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서재원과 내게 향한 의료진들의 시선이 불편했다.
초점은 주로 서재원에게 맞춰져 있었지만, 서재원이 내게 불만 섞인 목소리로 따지고 들 때마다 그들의 시선이 나를 한 번씩 스쳤다.
아랫입술의 안쪽 살을 꾹 씹으며 채혈실 문을 열었다. 채혈실과 통하는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담당 간호사에게 최병철 환자의 채혈 튜브를 내밀었다.
“NS에서 왔어요. 지금 맡기면 결과는 언제쯤 알 수 있을까요?”
“먼저 온 혈액이 많아서 아무리 빨라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
“너 내가 우스워?!”
기어코 검사실까지 따라 들어오는 서재원을 애써 무시하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저 성질머리를 그간 어떻게 숨기고 있었던 건지, 화가 수시로 들어찼다.
속을 가다듬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불현듯 검사실로 들어온 훼방꾼에 미간을 좁힌 간호사가 내 뒤에 선 서재원과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급한 건이라 바로 좀 부탁드릴게요. ICU 환자예요.”
“네, 뭐. 최대한 노력은 해 보겠는데…….”
떨떠름한 시선이 계속 뒤로 향하는 걸 보니 서재원이 우리 병원의 인턴이었다는 걸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지끈 울리는 이마를 손으로 감싸 쥔 내가 이제는 더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네가 그렇게 보면 뭐 어쩔 건데?”
“입 닥치고 따라와.”
서슬 퍼런 음성이 서재원에게 메다꽂혔다. 서재원을 지나쳐 사무실을 빠져나오니 안에서 일어났던 소란이 바깥까지 들린 모양인지 채혈을 하던 환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굳은 얼굴을 애써 펴고 채혈실에서 마저 벗어나는 내 뒤를 서재원이 귀신같이 따라붙었다.
“내 말 뭐로 들었어. 무슨 말을 지껄이건 다 들어 줄 테니까 기다리라고 했잖아. 안 말리니까 그만둘 거면 그만두라고. 다른 데 가서 잘해 보라고 격려라도 받고 싶은 거야?”
억눌러 참던 성미가 터진 건 기척 하나 없는 비상구에서였다. 까칠한 목소리에는 서재원을 향한 조금의 애정도 엿볼 수 없었다.
“내가 너 따위한테? 네가 방해만 안 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어. 나한테도 책임감은 있다고!”
“책임감이 있다는 새끼가 일하는 사람 붙잡고 징징대? 내가 한가해 보여?”
“이게 싫다고! 네가 뭐가 잘나서 자꾸 사람을 벌레 보듯 하찮게 쳐다봐?”
암담함이 가미된 피로에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서재원을 어떻게 쳐다보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형과 엮였던 것까진 백번 이해해도 내가 서재원을 그렇게 쳐다본 이유는 분명했다.
“너만 아니었어도 나 이런 취급 안 받았어.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 왜 사람들이 자꾸 나만 보면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냐고!”
형을 당연하게 네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어서.
“몰라서 물어?”
“몰라! 왜 나타나서 훼방을 놔. 네가 있든 없든 어차피 우리는 결혼할 사이였는데, 왜…….”
우리 사이에 끼어든 건 너면서 자꾸 나를 훼방꾼 취급해서.
“너 뭐 착각하나 본데…….”
“다 버리고 왔어. 그 잘나셨다는 이해준이랑 결혼하려고!”
“서재원.”
“걔가 너랑 만나고 있을 때부터 예정돼 있었던 결혼이었단 말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이 병원은 내 거였어! 그러니까 헤어졌으면 알아서 꺼졌어야지! 왜, 왜 이 사달을 만들어!”
그러나 피로에 젖은 얼굴이 곧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서재원의 악에 받친 외침에 숨이 멎어 들어갔다.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내가 이러려고 한국에 들어왔는지 알아?!”
형과 내가 만나고 있을 때부터 결혼이 예정되어 있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캐묻기도 전에 서재원의 화는 점점 범주를 넓혔다. 속사포처럼 떨어지는 말씨엔 의도와는 다른 색을 띤 화살촉이 나를 겨냥했다.
하, 폐부에 들어찬 허탈감이 입 밖으로 터져 나갔다. 그래서 그렇게 뻔뻔하게 굴었어? 그래서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형의 옆을 네 자리라고 주장했어?
턱이 주체하지 못하고 떨릴 것 같아 입술을 다물었다. 앙다문 잇새 안에 갇힌 신음이 채 삼켜지지 못하고 내보내 달라 아우성이었다.
터질 듯한 속을 억지로 짓눌렀다. 그러나 그러한 내 노력에도 흘러나오려는 덩어리들을 보니 저것들을 모두 담아내기엔 이미 쌓인 울화가 지나치게 많았던 것 같다.
“그게 억울했으면 어떻게 해서든 살렸어야지.”
“……뭐?”
내 말에 서재원이 놓아 버렸던 이성에 헛손질을 했다. 닿을 듯 말 듯 흔들리는 이성에 손을 뻗은 서재원은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구겼다.
“넌 나한테 불만 토로할 자격 없어.”
서재원이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애써 참고 있던 감정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서재원을 꾸역꾸역 담은 눈가가 조금씩 시려 왔다. 눈시울이 발갛게 충혈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서재원은 나를 보더니 비웃음을 크게 뱉었다.
“너 설마 아직도 그 소리야? 네가 미래를 보느니 뭐 그런 거? 아,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내가 이런 정신병자한테 그 꼴을 당했다고?”
서재원의 조롱이 내게 날아들었다. 나는 허공에서부터 힘없이 떨어졌던 주먹을 세게 쥐었다.
긴 시간 끌 것도 없이 곧바로 벌어지려던 입술이 순간 열리는 비상구 문에 멈추었다.
“아니, 분명 이쪽으로 갔다고… 씨발, 드디어 찾았네. 나 선생님! 서재원 여기 있어요!”
불시에 들이닥친 의료진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서재원의 팔을 잡았다. 활짝 열린 문틈으로 서재원의 소식을 큰 소리로 뱉어 내던 의료진의 손을 서재원이 손을 크게 비틀며 뿌리쳤다.
“이거 놔! 내가 아직 한성 의산 줄 알아?!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어딜 손대고 있어, 재수 없게.”
“뭐? 뭐라고 했냐, 너?”
“너한텐 할 말 없으니까 이거 놓으라고! 안 그래도 내가 그 개새끼한테 그랬거든, 네 애인 제정신 아닌 것 같다고.”
“…….”
“끝까지 나랑 약혼할 생각 없다고 뻗대면서 지킨 네 애인이! 널 그렇게 저주 못 해서 안달이라고. 그 정신 나간 새끼랑 지지고 볶고 잘 살아 보라고!”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내 하얗게 질린 얼굴에 서재원의 조소가 더 선명해졌다. 뒤늦게 서재원의 행방을 찾아 달려온 의료진은 이게 다 무슨 소리냐며 눈살을 찌푸렸고, 느닷없이 일어난 소란에 기웃거리는 의료진들 역시 하나둘 늘어났다.
평소였더라면 의료진들의 눈치를 볼 법한 상황이었으나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 머릿속에 맴도는 물음은 하나같이 서재원에게 향하는 것들이었다.
도대체 언제? 언제 형한테 그런 말을 한 건데? 나한테 오기 전에? 아니면 예전에? 나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원망했다.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형은 나한테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전보다 더 다정하게 굴었고, 나를 더 신경 썼고. 나를 관찰하듯 쳐다본 것만… 관찰. 그래, 그거였다.
“그 소리를 듣고도 네 옆에 보란 듯이 붙어 있는 게, 또라이들 둘이 아주 잘 만났다 싶었지. 어떻게 지를 죽이려고 저주까지 퍼붓던 새끼랑 붙어먹어?”
아아, 내가 작게 신음했다. 기어코 내 의구심을 해결해 주는 서재원은 악마의 탈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유독 내게 짙게 꽂혀 있었던 형의 시선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그게 언제부터였더라. 나는 그 시선들의 시초를 찾으려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떠오르지가 않았다. 분명 서재원이 내 노트를 발견했을 때부터 찬찬히 기억하면 됐을 텐데도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 네 그 표정을 보니까 이제야 좀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네. 어디 잘해 봐. 날 엿 먹여 놓고 둘이 그렇게 행복하면 안 되지.”
“…….”
나를 향한 서재원의 원망은 저주로 끝이 났고, 조소로 막을 내렸다.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간 서재원을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이 새끼야, 너 어디 가!”
얼떨떨한 얼굴로 서재원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의료진이 순간 서재원의 뒷덜미를 낚아채 병동 안으로 질질 끌었다.
“그만둘 거라고!”
“이게 말로만 그만둔다고 뚝딱 해결되는 일인 줄 알아?!”
온 힘을 다해 선배에게 저항하는 서재원이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무너지고 있는 몸을 느꼈다. 눈물을 토해 내지도,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몸을 맥없이 받아들였다.
“지금 누가 싸운… 이 선생님?”
인상을 찌푸리며 모여든 인파를 뚫고 들어왔던 김재겸이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도.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가서 일들 안 해?!”
서재원과 나를 둘러쌌던 무수한 시선들을 김재겸이 물릴 때에도. 내 몸은 하염없이 오한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김재겸의 외침에 내 귓가에 울렸던 웅성거림이 이명이나 환청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서재원이 뱉었던 말이 병원을 한 바퀴 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란 걸 나는 알고 있다. 형이 없었던 절망스러운 세월을 마치 내가 원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때의 세월은 내가 형을 미워하며 저주했다는 거짓된 소문으로 와전된 채 내 뒤를 쫓아다니겠지.
“이 선생님 일어설 수 있겠어요?”
내가 그걸 버틸 수 있을까. 나는 믿기지 않는 상황 속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서재원이 이런 식으로 무너질 나를 계획했던 거라면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형이 왜 서재원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서 단 한 마디의 언질조차 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웠다. 서재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무시한 것이었는지.
“그 손 떼.”
나는 코끝에 흐드러지는 페로몬에 고개를 겨우 돌릴 수 있었다. 내 어깨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을 뿌리칠 힘이 없었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형의 움직임에 따라 턱 끝을 더 들어 올렸다. 형이 한 발자국 뗄 때마다 내 어깨를 힘 있게 쥐었던 손길이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얼굴이 조금씩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 형. 나는 정말 그걸 원한 게 아닌데, 내가 원한 게 아니었는데. 울분으로 인해 벌어지는 입술은 내 속에 맴도는 말보다도 울음을 토해 내기에 여념 없었다. 얼굴에 맞닿는 형의 어깨가 그날따라 더 서러웠다.
나는 형의 품에 안겨 내 속을 꽉 채웠던 묵은 덩어리들을 패대기치듯 쏟아 냈다. 그 감정이 형에게까지 닿았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내 뒷머리에 닿은 손길에 덜컥 안심할 수 있었다.
형은 서재원의 말을 믿지 않는다. 형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열등감으로 인해 형에게서 떠났던 육체가 아니라 그 세월을 감내할 수 있는 내 단단한 정신을 말이다.
형이 유자차와 커피를 양손에 쥐고 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형이 내미는 컵을 받아 체온을 높였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에 나는 차차 진정하고 있었다. 형의 연구실을 가득 메우는 형의 페로몬 잔재가 나를 포근하게 감싸는 기분이었다.
형은 내 앞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순간까지도 형의 시선은 줄곧 내게 닿아 있었다. 내가 손에 들린 컵을 입에 가져다 댔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따뜻하고도 달큼한 향이 온몸을 순환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내 눈길은 결코 한 곳에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내 시선이 굴러가는 곳은 주로 바닥이었다. 나는 형의 다리 위로 올라가지 않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게 불안정하게 보일 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상태가 위태하다는 것을 형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진을 빼서 숨길 필요가 없었다.
하도 많이 울어서 눈두덩이가 아팠다. 나는 머그컵을 쥐고 있던 한쪽 손을 떼 눈을 비볐다. 형의 시선이 내 손끝에 매달렸다.
형은 지금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서재원과 일으킨 소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한심하게 생각할까? 서재원이 형에게 저지르듯 했던 말부터 해명할까?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질문을 하나둘 나열했다. 누구를 먼저 던질까. 나는 서로 먼저 튀어 나가겠다며 아우성인 질문들을 보며 머리가 쪼개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안.”
공교롭게도 먼저 입을 연 건 형이었다. 형의 다리 끝을 끊임없이 방황하던 시선이 형의 입술까지 올라갔다. 나는 눈동자를 조금 더 위로 이동했다. 형의 눈. 나는 나를 바라보는 형과 눈을 마주했다.
“내 선에서 끝냈어야 했는데.”
형은 내가 서재원에게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걸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그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나 알고 있을 테니까. 온몸의 긴장이 한순간에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아마 형이 연구실을 나서는 순간 형은 내가 서재원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걸 알 것이었다.
“……들었다며.”
주저하던 내가 입을 열자 형은 머그컵을 올리던 행동을 멈추었다. 형의 한쪽 눈썹이 위로 들렸다.
“내가 형을…….”
목구멍이 턱 막혔다. 무영에게 꺼냈을 때는 불편함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왜 형의 앞에만 서면 그때의 일을 꺼내질 못하겠는지 의문이었다.
“안 믿어.”
눈물을 글썽거리던 내가 손을 들어 눈을 세게 비볐다. 그러는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봇물이 터지듯 자꾸 흘러내린다. 나는 시선을 내려 형이 타 주었던 유자차를 보았다.
“내가 생각한 건 좀 다르거든.”
그러나 나는 고개를 오래 숙이고 있을 수 없었다. 다르다고?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다물고 형을 올려다보았다. 형은 무언가를 체감한 듯 가라앉은 눈으로 내 손을 보고 있었다.
내가 형의 시선을 따라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안감이 물씬 끼칠 때마다 뜯어 댔던 손톱은 볼품이 없었다. 내가 엄지를 손바닥에 붙이고 주먹을 쥐어 손톱을 숨겼다.
“그러니까 말할 수 있을 때 말해.”
“…….”
“기다릴 테니까.”
나는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던 서재원을 떠올렸다. 나도 과거로 떨어졌을 당시에는 모든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내 정신은 불혹을 바라보던 나이였지만 신체는 이립에 가까워지는 상태였다. 마치 긴 꿈을 꾸었고,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의 내가 꿈인지, 지금의 내가 꿈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게 꿈이라면 꿈에서 깨어나기 싫었고, 그때가 꿈이었다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를 절망에 빠지게 했던 그때도, 혼란에 빠지게 하는 지금도. 절대 꿈이 아니다.
그 증거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애초부터 형에게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던 내 머릿속에 가득 찬 의학적인 지식과 너무나도 선명하게 달라붙는 페로몬의 감촉.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나를 내가 겪고 있기에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형은? 형도 서재원처럼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지 않을까. 그 노트를 한낱 저주로 치부하던 서재원과는 달리 형은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가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다는 걸 예감했던 걸까. 말도 안 돼.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나조차도 믿기 힘들었던 걸 믿는 게 이상하다.
나는 이번엔 그 괴상한 일을 올곧게 믿은 무영을 떠올렸다. 순간 입술이 소리 없이 방긋거렸다. 무영도 믿었으니까 어쩌면 형도 그 말을 믿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형에게 추억을 회상하듯 그때의 시절을 꺼낼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러면 형도 나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마음 한가운데에 잔잔하게 일어나는 물결의 파동을 느꼈다. 부디 그 파도가 내 세상을 부수는 거친 해일로 변질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내가 NS 병동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드레싱 박스를 들고 있던 무영이 서둘러 내게 다가왔다. 앞머리가 휘날리도록 빠르게 걸어오는 무영은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내 손을 쥐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무영이 제일 높은 층의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내가 형의 연구실에 있고 나서 얼마나 지났더라. 나는 무영의 등 뒤에 서서 시계를 확인했다. 내가 최병철 환자를 채혈했던 게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으니까. 그 일이 터지고 나서 두 시간하고도 20분가량이 지나 있었다. 같은 과라 소식을 빨리도 전해 들은 것인지, 병원 내에 소문이 빠르게 돈 것인지 알 겨를은 없었다.
“어디야.”
옥상 문을 연 무영이 내 몸을 여기저기 살폈다. 퉁퉁 부은 눈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가운 손으로 눈꺼풀을 꾹꾹 눌러 대던 움직임을 멈췄다.
“뭐가?”
“그 또라이가 너 때렸다며. 어딘데. 그렇게 안 봤는데 존나 용의주도한 새끼네, 그거. 내가 씨발, 그때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나를 종잇장처럼 휙휙 잡아당기며 몸을 살피던 무영이 쭈그리고 앉아 드레싱 박스를 열었다.
“드레싱 다 돌았는데 이거 가지고 있느라 눈치 보여서 혼났어. 어디야. 빨리 말해.”
나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곤 나를 보는 무영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둔하게 굴러가던 머리가 번뜩였다. 원내에 도는 소문에 서재원이 나를 때렸다는 말이 더해진 게 분명했다. 나는 이 황당한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을 멍청하게 끔벅이기만 했다.
“아, 존나 답답…….”
“안 맞았어.”
부동으로 서 있기만 하는 나를 보던 무영이 몸을 벌떡 일으키자 내가 입을 열었다.
“안 맞았어?”
무영은 좁혔던 미간을 서서히 풀었다. 무영의 시선이 엉망진창으로 펼쳐진 드레싱 박스로 향했다.
“내가 걔한테 왜 맞아.”
기가 찼다. 서재원보다는 내가 키도 더 컸고, 근력도 더 좋았다. 삐쩍 곯아서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서재원에게 내가 맞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에 인상을 썼다.
살이 많이 빠졌나. 한동안 거울을 들여다보지 못해서 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손을 들어 뺨을 쓸었다.
“존나 놀랐잖아. 아, 노수빈 씹새끼. 또 쓸데없이 소문만 부풀려서 가지고 왔어.”
무영이 투덜거리며 드레싱 박스를 정리했다. 무영에게 와전된 소문을 전한 것이 노수빈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무영이 노수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을 상기했다. 내가 따라 쭈그리고 앉아 무영을 도왔다.
“믿어도 걔 말을 믿냐.”
“조금 전 일이라길래 진짜 그런 줄 알았지. 그 미친 새끼 마주치기만 해 봐.”
내 한심한 음색에 무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돌돌 말린 거즈를 던지다시피 드레싱 박스에 넣은 무영이 나를 보았다.
“그나저나 너 괜찮아? 그 새끼 또 이상한 소리 잔뜩 하고 돌아다니던데.”
“무슨 소리?”
나는 병원에 소문이 어떻게 떠다니나 들어 보기나 하자라는 심산으로 무영을 쳐다보았다. 무영이 곤란한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뭐, 네가 사실은 이 선생님한테 복수하려고 한성에 인턴 지원했다고. 존나 웃긴 게 곧 죽어도 이 선생님 쪽으로는 입 안 털더라. 권력이 무섭긴 무서워? 간사한 새끼.”
무영이 노수빈을 씹으며 그를 비웃었다. 사실 그 내용으로 노수빈만 콕 집어서 욕할 수는 없었다.
원내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관계자가 그랬다. 흥미로운 소문에는 득달같이 달려들면서 형과 관련된 일이라면 다 같이 합죽이가 된 듯 입을 다물었다.
서재원과의 약혼 소식과 나와의 재결합 소식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와 서재원을 가지고 소문을 부풀릴 뿐 형에 대한 안 좋은 소리는 일절 금했다. 부친이 병원장에, 조부가 이사장이면 말 다했지.
사람들은 형에게 밉보이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 나는 무영의 말에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어느새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던 무영이 내 눈치를 보며 담뱃갑을 도로 집어넣었다.
“나도 하나만.”
“……뭐를?”
그 담뱃갑을 뚫어지게 보던 내가 무영에게 한마디 던졌다. 무영이 목소리를 떨며 묻자 내가 무영의 손에 들린 것을 향해 눈짓했다. 망설이던 무영이 뒷주머니에 반쯤 걸린 담배를 도로 꺼냈다.
“뭐야. 언제부터 했는데?”
“그게 중요한가.”
무영이 내미는 연초를 받아 든 내가 필터를 입에 물었다. 무영은 그런 나를 보며 입술 위에 장초를 걸치듯 물고는 불을 붙여 주었다.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연기가 내 속에서 휘몰아쳤다. 어쩐지 심장이 조금 둔하게 뛰는 것 같았다. 그만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서재원이 그러더라.”
내가 담배 연기를 토해 내며 말을 꺼내자 무영이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부싯돌을 돌려 댔다. 라이터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바람에 의해 금세 꺼졌다. 무영은 굴하지 않고 부싯돌을 계속 돌렸다.
“내가 형이랑 만나고 있을 때부터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고.”
“그 씨발…….”
무영이 욕을 하다 말고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나는 무영에게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페로몬에 살짝 웃었다. 무영이 또 열을 내고 있었다.
“그 새끼 허언증 아냐? 그때 이 선생님이랑 이야기 다 끝낸 거 아니었어?”
나는 불만스럽게 터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잔잔하게 지었던 웃음을 거두었다.
“흥분해서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듯 말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알겠는 거야.”
“…….”
“아, 형은 내가 언제인지 모를 그때부터 서재원을 무시하고 있었구나.”
서재원이 나를 도발하기 위해 떠들어 댔던 말에 잠시 놀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침 회진마다 서재원과 함께 형을 보았을 때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던 형을 떠올렸다. 마치 인턴1을 대하는 듯했던 모습이었다. 형이 왜 처음부터 내게 서재원의 존재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전 애인과 약혼자. 보통 사람이라면 꺼림칙하게 생각했을 경우 속에서도 형은 혼자 여유로웠다. 그건 단순히 내가 전 애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형이 처음 약혼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부터 서재원을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을 게 눈에 훤했다.
형이 그 상황 속에서 여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서재원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과 더불어 약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Rrrrr
나는 가운 주머니에서 울리는 호출에 손가락으로 담배를 튕겨서 버리곤 전화를 받았다.
“NS 인턴 이한…….”
─ 너 어디야.
수화기 너머에서 거친 호흡과 함께 들리는 목소리에 내가 휴대 전화를 귀에서 뗐다. ‘오래?’ 무영이 나를 보며 입 모양으로만 속삭였다. 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싱 박스를 들었다.
“형?”
나는 다시 호출용 휴대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대며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형을 불렀다.
─ 어디냐고.
“……옥상인데.”
무영이 무슨 영문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화를 끊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닫혀 있던 문이 낡은 쇳소리를 내며 열리고.
“너 서재원이 헛소리 지껄였던 거 그때 왜 말 안 했어.”
형의 날카로운 눈이 내게 꽂혔다. 나는 형이 무슨 소리를 듣고 와서 내게 열을 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토끼 눈을 뜨고 형을 보자 형이 시선은 나에게 고정한 채로 무영에게 나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내 옆에 서 있던 무영이 형의 손짓에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옥상 문고리를 돌렸다.
“예전부터 결혼 이야기 오갔다던 거. 왜 안 물어봤냐고.”
예전부터 오갔다던 건 거짓이 아니었구나. 형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약혼 이야기에도 덤덤하던 형이 이 순간 까무러치게 뛰어와 내게 묻는 것이.
나는 형의 말에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벙긋거렸다. 문고리를 돌려 옥상을 빠져나가던 무영이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무영은 문을 닫기 전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무영이 입 모양으로만 내게 전했던 말이었다. 멍청한 시선을 다시 형에게로 돌렸다. 나는 이 상황에서 웃어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 고민했다.
형의 흐트러진 머리를 눈에 담았다. 형은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 커다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형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대는 것이 보였다. 그게 꼭 잠시 불어닥쳤던 화를 억누르는 모습으로 보였다.
“이한음.”
낮게 깔린 음성이 내 이름을 토해 냈다. 나는 대답 대신 형의 얼굴을 가리는 손과 이어지는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손이 형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고 복잡한 기색이 한가득 맺힌 형의 눈이 드러났다.
“……형이 그렇게 알려 줬잖아.”
“…….”
형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었던 인상이 풀어지는 것도 같고, 곧바로 일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수시로 탈바꿈을 하는 형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형은 그동안 내게 수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걸 가르쳐 줬다. 혼자 살아가는 법, 혼자 일어서는 법, 혼자 이겨 내는 법. 형은 내게 권유를 하지 않는다. 다만 충고를 해 줄 뿐.
생각하는 것도, 결정을 내리는 것도. 여태까지 모두 내 선택이었다. 문젯거리가 있다면 나는 형이 이끌어 준 만큼 자라지 못했다는 것 하나였다. 그 노력 끝에도 나는 우물 안에 앉아 편협한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했다는 것.
형은 그렇게 나를 기다리다가 내가 재기 불능 상태가 되면 조용히 손을 뻗는다. 그러면 나는 그 손을 잡고 한동안 빠져들 늪을 대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몇 번이나 겪었을지 모르는 그 많고 많은 기회가 있었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게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형이 가르쳐 준 대로.
“나도 똑같아.”
내 말에 형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형도 서재원한테 그 소리 듣고서 나한테 아무 말 없었잖아.”
형의 손이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나는 중력을 느끼는 형의 손목을 고집스레 잡았다.
“그건…….”
“나도 형이랑 같아. 걔 말 안 믿어.”
형이 답답한 듯 내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목에 맨 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형의 흐트러진 모습을 유독 많이 본다. 나와 만나고 있을 당시에도 보호자처럼 굴었던 형이 내게 흐트러진 모습을 종종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형이구나. 나는 그간 내가 알고 있었던 형의 모습에서 새롭게 알게 된 형을 끼워 넣었다.
“사실 조금 놀라긴 했는데.”
“…….”
“형이 그랬잖아, 약혼 안 한다고.”
변화를 보이는 형에게서 나는 형의 마음에도 작은 파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형과 마주한 눈을 반으로 접었다. 뺨을 찌르는 입꼬리의 감각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는 형 믿어. 말을 마저 이으려던 내가 말끝을 뭉개며 입술을 닫았다. 형이 내게 잡혔던 손을 틀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 움직임은 곧 부드럽게 나를 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내 몸을 끌어안은 게 형의 페로몬인지, 형인지 잠시 혼동했다. 내 등에 맞닿은 형의 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순간 차오르는 감정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얼굴을 느꼈다. 갑자기 왜 이러지. 나는 나조차도 알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자 당혹스러움에 몸을 떨었다. 그런 나를 형이 더 깊게 끌어안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방 꺼질 불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랬어.”
나를 다독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하잘것없이 흔들렸다. 나는 형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형은 나에게 약혼에 대해서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던 형을 해명하고 있었다.
같은 병원에 종사하다 보면 작은 해프닝으로라도 언젠간 들리게 될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형의 무심한 성격은 결국 나를 배려하지 않았던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미 다 끝난 얘긴 줄 알아서, 그래서.”
나는 비로소 내게 끼쳤던 감각에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웬만하면 찾지 않았던 담배가 눈에 들어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나 역시도 몰라볼 정도로 꽁꽁 숨어 있었던 감정을 찾아낸 형은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수십 번이나 속삭였다. 나는 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형의 가운을 세게 쥐었다. 내가 주먹을 쥐는 모양대로 구겨지는 가운을 형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