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second step (3/14)

The second step

형이 내 머리 위로 대충 펼쳐진 수건을 던지듯 얹었다. 형과 내 밑으로는 천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흥건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뚝뚝 떨어지는 빗물이 어쩐지 부끄러워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터는 대신 내 의사 가운을 쥐어짰다.

비 냄새와 섞인 형의 페로몬이 방향제처럼 형의 연구실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게 좋았다. 나 역시도 형의 페로몬에 둘러싸이는 기분이라서.

사실은 그럴 정도가 되려면 형의 의지가 담긴 페로몬이 한껏 방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계속 의사 가운을 쥐고 있자 형이 내게 다가왔다. 그 움직임이 내 머리 위에 올려진 수건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터는 행위로 이어졌고, 나는 놀라서 굳을 수밖에 없었다.

“감기 들어.”

내가 얼어붙은 걸 눈치챈 형이 무던한 목소리를 뱉었다. 그럼에도 나는 몸에 힘을 풀 수가 없었다. 형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위로 올렸지만, 수건은 내 눈이 형을 담아내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문득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눈물이 이렇게 많았던가. 형의 죽음을 인정했다고 여긴 후부터, 나는 웬만하면 울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는 꼭 그때 쌓아 두었던 울분이 뒤늦게서야 터지는 것 같았다.

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터는 형의 손등 위로 겹쳤을 때, 형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번에도 수건이 내 시야를 철통 봉쇄 하고 있었다.

“……형.”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형에게 닿았다. 아니, 닿았을까. 나는 형의 반응이 궁금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형은 나를 용서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적선하듯 베풀어 주는 호의일까. 이번엔 눈을 깜박거려도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내 손안에 갇혀 있던 형의 손이 수건 끝자락을 타고 내려갔다. 덕분에 허공을 헤맬 뻔했던 손으로 수건을 끌어 내렸다.

시야가 트였다. 그토록 궁금했던 형의 얼굴을 눈에 담고, 형의 표정을 살폈다. 형의 표정은, 아까 내게 우산을 펼쳐 주었을 때와 같이 고요했다.

나는 그 고요함을 담은 눈이 좋았다. 무신경한 눈초리였지만 그 눈을 마냥 들여다보고 있을 때면 형의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번 그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이렇게 기대를 거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형이 내게 가운을 덮어 줘서, 내게 우산을 씌워 줘서, 내 머리를 말려 줘서.

기대하지 않겠다 굳게 세웠던 다짐이 파도에 쓸리듯 허물어졌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나 보다. 형을 마주하게 될 때면 두 달 그 이상을 바라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내 본심을 형에게 전하지 않았다. 두려웠다. 또다시 욕심을 부리는 내게 질린 형이 나를 내칠까 봐.

탁.

그때 조용한 공간을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무언가 무겁게 튕겨져 나가는 소리였다. 형은 내게 등을 돌려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형의 단정한 등을 좇던 내가 형의 움직임보다는 빠르게 근원지를 응시했다.

커피포트였다. 머그컵에 티백을 우리던 형에게 다가갔다. 형의 허리를 끌어안고 널찍한 등에 이마를 박았다. 어쩐지 형이 날 밀어낼 것 같지 않았다. 언뜻 들었던 생각이 확신으로 굳어지던 순간이었다.

Rrrrrr

가운 주머니에서 울리는 소리가 이 공간을 무서운 기세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의 등에 박은 얼굴을 떼지 않았다. 내가 입고 있던 옷은 여전히 축축했지만 목덜미를 타고 흘렀던 빗물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

숨이 턱 막혀 왔다.

‘죽어.’

‘……컥.’

내 목을 옥죄는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악력이 어찌나 센지,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최대한 비틀며 힘겹게 눈꺼풀을 끌어 올렸다.

누구지. 도대체 누구길래 나를……. 가까스로 벌어진 시야 안에 검은 형체가 들어찼다. 남자다. 머리를 듬성듬성 채우는 결이 가느다란 짧은 머리카락.

‘차라리 뒤져 버려.’

남자의 얼굴을 고집스럽게 들여다보던 내가 순간적으로 몸에 힘을 풀었다. 남자가 그걸 눈치채고는 더 억센 손길로 내 목을 옭아맸다.

김중현. 자글자글하게 올라온 주름이 남자가 세월에 좀먹었음을 나타내 주었지만 알 수 있었다. 전보다 노쇠한 그가 김중현임을, 나는 그의 눈동자 속에 담긴 겁에 질린 내 얼굴을 보고 알아챘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 같아 내 목에 꽂혀 있는 듯한 김중현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손을 최대한 밀어내기 위해 손에 힘을 싣자 김중현의 팔뚝에 내 손톱이 하나둘 박히기 시작했다.

살려 줘, 살려 줘……! 내 발악에도 불구하고 목을 조이는 손길에서는 조금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내 힘으로는 김중현에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김중현의 팔뚝에 생채기를 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매끈하게 깔린 장판을 더듬었다. 자신의 팔에서 핏방울이 한 방울 흘러내리는 것을 본 김중현이 소리를 내지르며 더 노여워했다.

제발…….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끅끅거리는 호흡이 내가 낼 수 있는 소리의 전부였고, 그런 내 발악을 덮는 김중현의 정신 나간 웃음이 나를 무아지경에 빠트렸다.

장판지 위를 필사적으로 더듬는 손의 힘이 차츰 죽어 갈 즈음이었다. 김중현을 담았던 시야가 다시 좁아지고, 호흡이 순환하지 못한 머리에서는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그때 손끝에 걸리는 무언가를 느낀 내가 손을 최대한으로 뻗었다. 그리고 그것을 김중현의 어깨에 냅다 꽂아 넣었을 때, 내 몸 주위로 페로몬이 폭발하듯 개방됐다.

“……헉.”

감은 눈을 뜨며 자리에서 반쯤 일어선 내가 목 부근을 부여잡았다. 얼빠진 사람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며 거친 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했다. 근 몇 년 동안 한 번도 꿔 본 적이 없던 꿈이었다.

김중현이 왜 다시 내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 향하던 눈빛, 내 목을 조르던 손.

꿈인 것이 분명했음에도 이상하게 꿈 같지가 않았다. 바르르 떨리는 손끝이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뒤늦게 차오르는 분노에 욕설만 미친 듯이 짓이겼다. 온몸에 방랑하는 열이 김중현의 손길이라도 되는 듯 내 숨을 틀어막았다. 누워 있던 자리에 앉아 호흡을 거칠게 내뿜던 내가 뭐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둘러싼 공포는 쉬이 가시질 않았다. 무작정 벗어나야 할 것만 같았다. 등 뒤로 오소소 돋는 소름이 귀신이라도 본 듯 서늘하게 돋아났다.

“……뭐야, 이거. 이거, 너 지금…….”

숙직실 2층 침대에서 쪽잠을 자던 인턴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무언가 이상한 듯 주변을 둘러보던 눈빛이 내게 꽂힌 걸 느꼈음에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숙직실의 문이 닫히기 전, 차갑게 가라앉은 시야로 당황한 듯 보이던 OS(Orthopedic Surgery, 정형외과) 인턴 김현진의 얼굴이 들어왔다.

열을 먹은 몸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움직였다. 어쩔 도리 없이 벽을 짚자 손바닥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보다 더 맹렬히 공격해 대는 불쾌한 열감은 김중현에 대해 치밀었던 분노마저 잊게 만들었다.

맞닿은 옷자락에 쓸리는 피부가 쓰라리듯 아팠다. 옷자락뿐만이 아니었다. 식은땀이 살결을 타고 흐르는 자국 자국마다 열기가 돋았다. 여전히 달달 떨려 오는 손끝. 가빠지는 숨. 벽에 지탱하고 선 나를 돌아보는 시선들.

설마…….

단순한 감기가 아님을 눈치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희미하게 끼치던 페로몬이 차차 짙어지자 그 역겨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역겨움이 아니다. 지독하리만큼 단 알파의 페로몬.

“야, 너 설마 히트……. 이한음!”

맞은편에서 이상한 낌새를 맡고 다가오던 서재원이 내 이름을 부르자 몸이 반대쪽으로 기울어졌다.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지난 수년 동안 히트 사이클을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없어서 주기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과거로 돌아온 후 겪었던 한 번의 히트 사이클에서도 갑작스레 다가온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집에 틀어박힌 채 어서 이 주기가 끝나기만 손꼽아 기다렸던 기억이 불현듯 또렷하게 들었다.

제대로 체크했어야 했는데……. 온 신경을 형에게 쏟아부은 탓에 보건 휴가를 쓸 새가 없었다. 하루만 버텼으면 오프였는데. 하루만 더 버텼으면.

“이한음!”

“하아…….”

뒤에서 서재원이 나를 쫓고 있었다. 나는 서재원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발을 거칠게 굴렸다. 여기저기서 풍겨 오는 페로몬에 호흡을 참으려 해도 성급한 달음박질에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곳.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곳이 어디였더라. 희미하게 잡혀 있는 정신에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잠깐만 서 봐! 야!”

점점 멀어지는 듯싶던 서재원의 페로몬이 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바로 가까이에 위치한 비품실의 문을 열었다. 아무도 이곳에 들어와선 안 된다. 설령 그게 같은 오메가인 서재원이더라도.

비품실의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최대한 구석진 곳에 가서 살갗을 맹공격하는 옷을 벗었다. 옷의 안감에 쓸린 피부가 발갛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속옷만 입은 채 잔뜩 웅크려진 몸을 바르작거렸다. 막을 새도 없이 뻗어져 나가는 페로몬에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식은땀이 어느새 온몸을 장악했다. 가랑이 사이에서 질질 새어 나오는 애액에 속옷마저 흠뻑 젖은 듯했다. 한껏 일으켜진 성기는 비품실 곳곳에 배어 있는 알파의 페로몬에 발발 떨며 반응했다. 일파만파로 퍼지는 페로몬이 알파를 찾아 사방으로 손을 뻗었다.

“제발…….”

잠긴 문고리를 향해 저절로 뻗어지는 손을 막기 위해 있는 힘껏 몸을 웅크렸다. 이래서 매번 찾아오는 히트 사이클이 싫었다. 이래서 내가 오메가임을 죽도록 원망했다. 이래서…….

“이한음!”

문틈으로 스멀스멀 풍겨 오는 누군가의 페로몬이…….

“이한음! 문 열어!”

형의 페로몬이다. 형의 페로몬을 맡자 질끈 감았던 눈이 반사적으로 떠졌다. 온몸을 맴돌던 잡다한 페로몬들 사이에서 익숙한 형의 체취가 느껴졌다.

“씨발!”

흥분한 형의 음성마저 살갗을 찔러 댔다. 안 돼. 보이고 싶지 않아. 돌아가……. 제발 돌아가.

애써 틀어막은 울음이 비집고 나왔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자 얼마 가지 않아 비릿한 향이 입 안을 맴돌았다.

주먹을 하도 세게 쥐어 손바닥이 아릿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고통마저도 곧 쾌감으로 바뀌었다.

지독했다. 너무 지독해서 혀라도 깨물고 죽고 싶었다. 나는 형이 돌아간 듯 잠잠한 문 너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더 서러운 울음을 토해 낼 때였다.

쾅! 쾅!

반대쪽에서 힘을 받은 문고리가 진동했다. 머지않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빛을 한꺼번에 쏟아 냈다. 그 사이로 무게 있는 발걸음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해준. 형은 열려 있는 문을 도로 닫았다. 닫아 내는 힘이 제법 셌는지 지탱할 것이 없던 문고리가 힘없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 씨발, 보건 휴가 왜 안 냈어.”

잔뜩 화가 난 형이 단정하게 매고 있던 타이를 늘어트리며 다가왔다. 내 페로몬에 페이스 조절을 잘하는 형조차도 견디기가 힘들었는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내 머리채를 형이 한 줌에 쥐었다. 당겨 오는 두피보다도 형의 페로몬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형에게서 페로몬이 방출되기 시작한 걸 알아챈 순간 반쯤 불거진 성기가 사정할 것처럼 당겨 오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것도 아니면서 자극은 있는 대로 다 받는 것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형… 형 나 너무…….”

“조용히 해.”

바르작거리며 뻗어지는 손을 쳐낸 형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거칠게 파묻었다. 목으로 닥쳐오는 감촉에 허리를 쭈뼛 세운 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형의 어깨에 가져다 댔다.

저지하려던 움직임은 곧 등마루를 쓸어내리는 형의 손길에 멎어 버렸다. 자제력을 잃은 형이 나를 터트릴 듯 끌어안으며 목덜미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페로몬을 깊게 들이켰다.

그래서 형의 머리를 끌어안고 더 바짝 당겼다. 등마루를 타고 내려가던 손길이 속옷 안까지 침범했다.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던 형의 첫 움직임은 내 몸을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형의 입술이 스치고 지나가는 곳곳들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형은 내 몸을 입으로 애무하며 입고 있던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곧 박힐 것이라 인지한 아래는 알파를 받아들이기 위해 애액을 마구잡이로 흘려 대고 있었고, 성기는 잔뜩 발기한 채 저릿해 왔다.

“아으, 으읏! 형, 형 얼른.”

“입, 다물라고 했지.”

“아아, 흣!”

예민해진 신경에 곤두선 젖꼭지를 이로 씹어 대다 말고 내 속옷을 끌어 내린 형이 가랑이를 잡아 양껏 벌렸다.

형이 흥건하게 젖은 아래에 잔뜩 불거진 성기를 맞추었다. 훅, 하고 숨을 들이켠 채 성기의 삽입을 시도한 형에 허리께부터 찌르르한 쾌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아래를 거침없이 꿰뚫어 버린 성기에 대한 아픔인지, 가득 채워진 아래에 대한 만족감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형의 손길이 닿는 구석구석마다 뜨거운 쾌감이 넘실거린다는 것이었다. 한껏 오므라든 발가락과 이어진 다리가 그의 허리를 둘러싸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힘주어 막았다.

“아흑……!”

형이 성기를 강하게 쳐올리자 형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이 쥐어지지도 못한 채 힘껏 펴지며 경련했다. 온몸을 잠식하는 쾌락에 고개를 젖힌 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안에 담는 게 버거울 정도로 크게 팽창한 형이 느껴졌다.

흥분을 감당하지 못해서인지, 그저 오랜만에 맺는 관계 때문인지.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것이 생경하게 전해졌다. 눈물방울의 자극에도 뜨거운 열기가 오르는 것이 새삼 히트 사이클의 무서움이 느껴졌다.

“흐으, 흣! 응! 형, 형!”

형의 것으로 가득 찬 아래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형이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몸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간신히 뜬 눈에 형이 쾌감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녹녹하게 흘러내렸던 애액이 형의 성기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밀착하며 열기를 북돋아 주었다.

“아아, 앗! 흣!”

이를 악물은 채로 허리 짓을 하는 형은 성대를 긁으면서 나오는 숨소리만 토해 내었다. 내벽이 힘주어 둘러싼 성기의 핏줄 하나하나가 전부 느껴졌다. 내 얼굴 옆을 팔로 지탱하고 찢어 죽일 듯이 나에게 눈을 꽂은 형은 흡사 발정 난 개와도 같았다.

형의 성기가 드나드는 아래에서 찔꺽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형의 허벅다리와 수십 번 맞닿은 엉덩이 바로 아래의 살은 벌겋게 익어 아린 감각을 주었다.

“하아…….”

“하윽, 읏. 이해, 준. 이해준……. 으응, 읏!”

몸을 섞지 않은 지 분명 10년이라는 공백의 시간이 존재했지만 막상 몸을 섞고 나니 어제도 했었던 것처럼 익숙한 감각이 몸을 지배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눈물은 곧 퍼석하게 메마른 얼굴을 엉망으로 적셨다.

“미안, 해……. 흣. 미안해…….”

내 몸에서 욕정하는 형에 대한 그리움으로 얼룩진 마음이 입술을 통해 새어 나왔다. 울음소리와 함께 튀어나오는 형의 이름에 형의 움직임이 더 격해지는가 싶더니 구멍 깊숙한 곳을 파고들던 성기가 불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창 관계가 좋았을 때도 형은 섹스를 할 때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괜찮았다. 꿀 같던 고운 음성을 흩뿌리는 대신 내게 다정하게 입을 맞춰 주는 게 형의 방식이었다.

그랬던 형이 이제는 나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형은 아까 비품실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보다 더 열이 받아 있었다. 페로몬에 서려 있는 감정이 나를 거세게 몰아세웠다.

당혹스러운 시선이 형의 주위를 아슬아슬 맴돌았다. 척추를 타고 흐르던 쾌감에 가쁜 숨을 내쉬며 그 여운을 느끼기도 전에 가슴이 아려 왔다.

중간에 멈추어 버린 행위에 바짝 선 성기에서는 찌르르하는 울림과 함께 뒤늦은 정액이 토하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땀으로 인해 머리가 흐트러질 정도로 불같은 성질을 뿜어 대며 개처럼 허리 짓에만 집중하던 형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직 토정하지 못해 천장을 향해 바짝 치켜든 성기를 속옷 안으로 억지로 욱여넣었다.

형은 바닥을 구르는 나를 내려다보며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언제부터였는지 형의 페로몬이 하나둘 걷히기 시작했다. 형이 자신도 모르게 개방했던 페로몬을 억지로 쑤셔 넣은 것이다.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정사에 몸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괜찮아진 것도 아니었다. 형은 허물 벗어 놓은 듯 문에서부터 떨어져 있는 옷을 주워 내게 다가왔다.

천천히 속옷부터 입혀 주는 손길은 화가 난 얼굴에 비해 다정했다. 그래서인가.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새어 나왔다.

“울지 마.”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화를 내는 대신 내 울음을 달래 주었다. 형은 내 눈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내 눈은 집요하게 형의 얼굴을 좇았다.

차게 식어 덜덜 떨려 오는 몸에 작게 한숨을 내쉰 형이 바지 버클을 채워 줄 때까지 나는 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엉망으로 구겨진 가운을 내 어깨 위로 걸쳐 준 형은 내게 등을 보였다.

“형……!”

등진 형이 그대로 비품실을 빠져나가려는 줄 알고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형은 말없이 내 앞에서 몸을 낮출 뿐이었다.

“빨리.”

형이 나를 뒤돌아보며 어서 업히라는 식으로 말하자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형에게 몸을 맡겼다. 형에게 뻗은 손은 아직까지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내 허벅지를 감싸는 형의 단단한 팔에 또 왈칵 울음이 터질 것 같아 형의 어깨에 얼굴을 폭 묻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형에게 얼굴을 묻기 전, 복도 끝에 굴러다니는 익숙한 약물병을 발견한 후로 파묻은 고개를 좀처럼 뗄 수 없었다.

전처럼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누그러진 듯한 형의 행동에 나도 몰래 불쑥 떠오른 멍청한 생각이 이내 한없이 짓눌렸다.

형은 그저 나의 페로몬에 휘둘렸을 뿐, 나와 몸 섞을 생각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저 약물병은 형과 내 사이가 발전하기 전 내 히트 사이클을 잠재우기 위해 형이 자주 사용하던 안정제였으니까.

***

당시에 형이 즐겨 타던 애스턴마틴 밴티지가 도롯가를 부드럽게 달렸다.

나는 어깨 위에 걸친 의사 가운의 앞섶을 조금 더 당겨 몸을 움츠렸다. 내가 그런 행동을 취한 까닭이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히트 사이클의 부작용으로 인한 오한이라고 여겼는지 형이 난방을 틀었다.

그런 형의 마른 손가락에서 힘줄이 돋아난 손등으로, 와이셔츠 소매가 가린 다부진 팔뚝으로. 시선은 형의 손으로부터 이어지는 곳을 천천히 훑어 형의 얼굴로 향했다.

형은 내 시선을 느꼈음에도 내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나는 형의 냉랭함에 눈길을 내 다리로 돌렸다. 밑창이 닳고 닳은 운동화, 잔뜩 구겨진 면바지, 부끄러움을 느끼며 꼼지락거리는 볼품없는 손. 서러움에 드문드문 차오르는 울화가 어서 이 공간을 벗어나라며 성화였다.

차 안의 공기가 어느덧 후덥지근하게 올랐다. 포장된 도로를 매끄럽게 달리는 밴티지 속에는 내가 내뱉는 작은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이 숨 막히는 적막을 깨고자 형에게 말을 걸고 싶어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토해 낼 감정이 많은 듯 보이는 목구멍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울음을 먼저 토해 낼 것 같았다.

별안간 찾아온 히트 사이클, 복도를 굴러다니던 안정제, 살갗을 맹공격하던 페로몬이 가시자 끝나 버린 관계, 내 속을 한껏 휘젓고 나왔음에도 끝내 사정하지 못했던 형. 애액에 뒤덮힌 채로 여전히 발기해 있었던 형의 중심.

그래, 토정하지 못해 빳빳하게 서 있던 것을 억지로 욱여넣었던 형의 손길, 나를 내려다보던 그때 그 표정. 그 표정이 아직까지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형의 하반신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돌리곤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눈물을 보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더 이상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나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그 어떤 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 자부했다.

그랬던 내 꼴을 보라.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비참했다. 한순간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나를 손가락질하는 무수한 형체들과 대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다. 또 나는 나에게 끼치는 무력감을 온몸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Rrrrrr

쥐 죽은 듯 앉아 조용히 곱씹던 회의감이 단숨에 삼켜졌다. 내 쪽에서 나는 걸 보니 아마 나를 찾는 호출임이 분명했다. 내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 형의 눈치를 보자 형이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줘.”

그 손을 가만히 주시하며 머뭇거리던 내가 형의 손에 호출용 휴대 전화를 올렸다. 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그것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 이한음, 너 도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네 페로몬 때문에 알파인 환자들한테 단체로 러트 사이클 오게 생겼어. 알아?

형이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는 서재원의 것이었다. 형은 말을 속사포로 뱉어 내는 서재원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고, 나는 그런 형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뜯을 뿐이었다.

아, 그제야 내가 큰 사고를 쳤다는 걸 깨달았다. 과거로 돌아온 뒤에는 늘 이런 루트였다. 차라리 수련의 과정을 포기하고 형에게 무작정 매달렸어야 했을까. 뒤늦은 후회가 막심했다. 때마침 신호가 걸렸고, 형은 차를 멈춘 후에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 지금은 좀 진정됐어? 그러게 도망가길 왜 도망가. 그렇게 잘난 척 뻗대더니 주기도 제대로 못 맞추…….

“서 선생.”

─ …….

서재원의 목소리는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형이 서재원을 불렀을 때, 서재원은 이상함을 느꼈는지 잠시 동안 침묵을 선택했다.

─ 이 선생님?

뒤늦게서야 울리는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움이 물씬 섞여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형이 액셀러레이터를 부드럽게 밟았다.

“서 선생이 보건 휴가 좀 대신 처리해 줬으면 하는데.”

─ …….

형의 덤덤한 목소리에 서재원이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처박았던 고개를 들어 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형이 들고 있는 휴대 전화를 말이다.

─ 그럴게요.

형은 볼일을 끝낸 듯 정면을 응시하며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 ……별일, 없었죠?

그런 형의 움직임보다도 빨랐던 게 서재원의 음성이었다. 형은 귓가에서 한 뼘은 떨어진 휴대 전화를 도로 가져다 댔다.

“그건 병원에 남아 있는 서 선생이 더 잘 알겠지.”

그 후로 형은 서재원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통화를 끊어 버렸다. 다시 까만 화면이 되어 내게 돌아온 휴대 전화를 나는 두 손으로 꼭 쥐었다. 휴대 전화에서 형의 온기가 느껴졌다.

형의 밴티지는 행선지에 다다름과 동시에 멈추었다. 형은 차를 대충 정차한 상태로 기어를 파킹으로 돌렸다. 나는 그제야 창밖으로 시선을 던질 수 있었다. 형의 밴티지가 도착한 곳은 형과 갈라선 후 내가 이사했던 동네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출발하기에 당연히 형의 집으로 갈 줄 알았다. 내가 무거운 침을 간신히 삼키며 형을 보자 형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형의 움직임이 곧 근처 상가에 열려 있는 약국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한심했다. 여태까지 잘 홀로 섰다 여겼지만 형과 엮이는 일이 생기면 어쩐지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약국에서 검은 봉지를 쥐고 조수석의 문을 연 형이 그걸 내 무릎 위로 툭 던졌다. 그런 형을 바라보던 내가 봉지를 손에 꾹 쥐자 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

낮게 내려앉는 목소리가 다시 심장을 후벼 팠다. 입술을 꾹 다문 내가 차에서 내렸다.

형은 조수석 쪽 앞 범퍼에 걸터앉듯 몸을 기대며 나를 쳐다봤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다. 그 의미를 알아챈 내가 형을 지나쳐 걸었다. 아니, 걸었다는 표현이 맞았을까.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형을 돌아보며 주춤하는 나를 본 형이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형의 작은 얼굴을 감싼 큰 손이 한동안 이마를 문지르더니 이내 결심한 듯 형이 몸을 일으켰다.

차 키를 이용해 문을 잠근 형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지나치는 형의 체취가 페로몬과 섞여 시원한 향기를 흩뿌렸다.

내 시선이 형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형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만 틀 뿐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형이 뒤를 돌아보았고. 아……. 나는 그제야 작은 신음을 내며 형의 뒤를 따라 밟았다.

형의 뒤를 쫓는 동안 형과 나 사이를 채우는 소리는 땅과 형의 구두 굽이 마찰하는 소리였다. 형은 형과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듯싶으면 제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 느릿한 내 걸음을 맞춰 주고 있었다. 그런 형의 뒷모습을 보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물음은 많았다.

형은 내가 비품실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번에도 병원을 이 잡듯 뒤지며 나를 찾았을까. 형이 내 히트 사이클에 격한 반응을 보였던 건 예전처럼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일까. 속이 답답했다.

형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에 놀란 내가 형을 따라 걷던 걸음을 멈추었을 때, 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들어가.”

형은 더 이상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형이 정한 기준을 넘지 않는 한 화를 표출하지 않는 것. 형은 원래 그런 성향이었다. 나는 그동안 형이 정했던 기준을 매번 넘나들었던 것일까. 나는 나를 지나쳐 가려는 형을 붙잡았다.

“왜.”

형이 내게 물었다. 고개를 들어 형의 시선을 마주했다. 형의 눈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게 형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내비치는 일이 없는 게 형이었다. 아까처럼 내게 시선으로 화를 쏟아부었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이게 내가 익숙하도록 겪었던 형이었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진 않지만 나는 그런 형의 모습이 퍽 인간적이라고 느꼈다. 형은 나와 깊은 관계를 맺었을 당시에도 화를 내는 법이 별로 없었다. 형에게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헤어짐을 고했을 때에도 형은 화를 내며 따져 묻는 대신 묵묵하게 뒷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러나 형은 내가 과거로 돌아온 후 많은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형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가를 좁혔다. 나는 형이 걸어온 길을 되짚었다. 형이 먼저 걸어왔던 이 길은, 아까 그 대로변에서 우리 집으로 오는 정확한 경로였다.

나는 형에게 내가 이사 온 곳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일절 꺼내지 않았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상황에서도, 과거로 돌아온 이 상황에서도.

형의 눈짓에도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형은 내 물음의 출처를 짐작이라도 한 듯 좁혔던 눈가를 풀었다.

내게 큰 동요를 보이는 형.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게 있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

바람을 타듯 공기 중을 유영했던 사진. 형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유품. 미약한 미소였지만 형이 나와 함께 웃고 있던 사진. 내 손에 들린 안정제. 틈을 내주기 시작했던 그 순간.

눈에 띄게 달라진 건 나뿐이 아니야, 형. 나는 그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기웃기웃 저무는 해가 지구의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황빛을 머금은 하늘과 그 하늘에서부터 뻗어지는 공기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손에 쥔 형의 손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나는 형에게 하고 싶었던 수많은 물음을 형이 모르게끔 촘촘하게 덮었다. 형이 내게 입을 여는 순간 나를 궁금케 했던 그 많은 물음의 답이 한순간에 내려질 것 같았다. 형은 내 물음의 의도를 파악했음에도 미동이 없었다.

나는 그런 형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형이 내 걸음을 기다려 주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 기다림은 내가 다짐한 후부터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형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찾아왔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형의 목소리가 한적한 골목길을 메우는 순간, 나는 그만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어졌다.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았던 시간 속에 형은 굳은 결의를 다진 얼굴이었다.

언제? 도대체 언제부터? 꼬리를 잇는 물음표는 내 머릿속에 여유를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내 상황을 굳이 입을 엶으로써 내비치지 않았다.

“몇 번이고 계속.”

나는 형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사진의 무게를 느꼈다. 형은 내 일방적인 이별에 응한 게 아니었다. 형은 내가 고한 이별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좋았던 옛 추억을 회상하고자 했던 사진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떠나간 이에 대한 단순한 미움이 화로 번진 게 아니었다.

내 발목을 9년 동안 옭아맸던 사진에 담긴 무게가 그 증거였고, 낯설었던 동요가 그 증거였다. 나의 표정을 살피던 눈,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 나에겐 트라우마가 되었던 그 시절의 형이 어느새 내 앞에 있었다.

기다렸을까. 형을 찾지 않았던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지독한 열등감에 눈이 멀어 상처 주었던 그날을 떠올리며 형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형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불쑥 나타나 제멋대로 일상을 휘저었던 나를 보며 얼마나 화가 났을까.

내가 제일 먼저 형을 찾아가 해야 했던 말은 떠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미안했다고, 내가 형에게 큰 실수를 했다고, 그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고. 형에게 향하고 있는 마음은 열등감 따위가 아니라 여전히 형을 사랑하고 있는 내 마음이라고. 그 일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였다.

그날의 굴레 속에 처박혀 괴로워했던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어쩌면 형은 나보다 더, 깊이 그 시간을 헤맸다. 형의 죽음을 막고 싶었다는 말로 포장하기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염치가 없었던 것 같다.

형의 눈을 피하고 싶어졌을 만큼 양심의 가책이 온몸을 구석구석 찔러 댔다. 그러나 피하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회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적어도 내가 느꼈던 처절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방식이 형에게는 더 큰 상처로 남을 수 있었으나 더 이상 망설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천 근쯤의 무게를 지닌 한 발자국을 뗐다. 형의 손을 잡았던 손에 힘을 크게 실었다. 형의 붙잡힌 한쪽 팔이 내 쪽으로 기울고, 나는 형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쿵, 쿵. 무감각하던 표정과는 상반되는 심장 박동이 나를 맞았다. 나는 그 소리에 덜컥 안심했다.

그 흔한 가전제품 하나 들어차지 않은 곳. 황량하기 그지없는 공간을 채우는 사람은 형과 나 둘이 전부였다. 어떤 말로 설명해야 이 기분을 정의 내릴 수 있을지 종잡을 수 없었다.

오랜 세월 머물렀던 집이더라도 내겐 아주 낯설기만 한 곳이었는데, 그 안에 형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곳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가 되었다.

사람의 온기가 좀처럼 맡아지지 않는 집은 찾아온 객을 형식적으로 맞이할 수도 없을 정도로 초라했지만, 형은 기꺼이 발을 들였다. 그간의 내 생활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기분이라 그게 참 부끄러우면서도 기뻤다.

형의 손에 남은 흉터를 엄지로 쓸었다. 전에 내가 피우던 담배를 손바닥으로 짓이겨 끈 대가로 남은 흉이었다.

문득 정수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시선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형은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형의 시선을 받으며 쥐고 있던 형의 손을 들어 올렸다.

느리게 끔벅이며 다정하게 맞닿았던 시선이 이내 내 입술로 향했다. 나는 작게 짓던 웃음을 형의 손안에 숨겼다. 내가 형의 흉터에 입을 맞추자 형의 손이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떨림이 큰 파동을 일으켰다. 희미하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맞닿은 손에 막혀 푸스스,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말갛게 뜨였을 눈이 반달을 그리며 접히자 형이 손목을 돌려 내 손을 잡았다. 그것에 의아함을 갖기도 전, 나를 당기는 힘에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 입술이 가속도를 느끼며 형에게 무겁게 포개졌다.

몸을 뒤로 기울며 내 무게를 받치는 형에게 포갠 입술을 작게 벌렸다. 윗입술을 아프지 않게 씹어 물던 치아 사이로 혀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기꺼이 벌어진 입 안으로 들어서는 혀는 익숙하게 치열을 훑었다. 나는 형의 목에 팔을 두르며 더 깊은 곳까지 허락했다.

내 혀에 맞닿은 형의 혀는 뜨거웠으나 그 주변의 공기가 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형의 뜨거운 숨이 내 입 안 곳곳에 퍼지기 시작하고, 방을 둘러싼 공기의 온도 역시 난방을 틀지 않았음에도 더운 기운을 띠었다.

“하아…….”

촉, 맑은 소리와 함께 포개졌던 입술이 떨어졌다. 감겨 있던 눈꺼풀 사이로 형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형은 한쪽 손을 뒤로 뻗어 자신의 무게와 내 무게를 지탱했다. 자유롭던 손이 내 허리를 둘렀다. 나는 형의 다리 양옆에 두었던 무릎을 세워 형보다 눈높이를 높였다.

그런 나를 따라 천천히 올라오는 형의 고개를 양손으로 감싸자 그제야 형의 입술에서도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쪽. 내가 형의 뺨과 이어지는 귀밑을 감싼 채로 입술을 한 번 붙였다 떼자 침으로 번들거리던 입술 사이로 타액이 짧게 늘어졌다.

형에게서 점차 퍼지기 시작하는 페로몬이 내 주위를 감쌌다. 묘한 흥분을 담은 페로몬이었다. 나는 형의 노골적인 페로몬에 잠자코 응했다.

신발장 위에 올려놨던 안정제와 가지런히 놓인 두 켤레의 신발. 형은 내가 형에게서 벗어나려 새로 맞이했던 공간에 하나둘 흔적을 남겼다.

육면체를 이루는 방 안에 페로몬을 가득 흩뿌리는 것이 마치 뒤늦게서야 영역 표시를 하는 듯 보였다. 예전에 무영이 드나들며 남겼던 희미한 페로몬의 잔재가 형의 페로몬에 삼켜지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면서 벗어 두었던 가운에서 호출기가 울렸다. 그러나 그 소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형과 내 시선은 여전히 얽혀 있었다.

얼마나 조밀하게 엉켜 있는 것인지, 그 시선을 풀어내려면 아마 긴 새벽이 다 가도록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옆구리를 손끝으로 살살 쓸어 만지던 형이 턱을 추켜올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보이는 혀가 탐스러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던 것 같다.

시선만큼이나 진득하게 얽히는 혀의 감촉이 허리를 쭈뼛 서게 만들었다. 내가 뜨겁고도 달큼한 숨을 토해 내자 형의 손길이 허리께를 지나 둔덕 사이를 침범하고 있었다.

“……이한음.”

형의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기 무섭게 내 속에 잠겨 있던 페로몬이 일파만파로 퍼져 형의 페로몬과 얽히고설켰다.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히트 사이클의 기운이 메마른 땅을 뚫고 나왔다. 엉덩이 골을 쓸던 중지가 궤도를 이탈했다.

허리께를 힘주어 당긴 형이 몸을 반쯤 일으켰고, 형의 힘에 뒤로 밀린 내가 형의 목에 서둘러 팔을 둘렀다. 순식간에 자세가 뒤바뀌었다. 형의 목울대에서 이어진 몸을 한번 훑은 내가 불거진 형의 중심을 눈에 담았다.

그러나 시야에 담겼던 형의 앞섶은 귀밑에 코를 박으며 몸을 밀착하는 형으로부터 차단이 됐다. 형이 내 바지를 끌어 내렸다. 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내가 뒤로 완전히 넘어가자 형이 고개를 들었다.

아아, 형의 눈을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바깥 공기와 맞닿은 살갗이 바들 떨렸다. 흥분에 싸인 형의 얼굴에 가슴이 벅찼다. 형은 내 속옷까지 말끔하게 벗기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내 몸을 쓸어 만지던 손이 바지 버클로 향하자 내가 그 손을 저지했다.

형의 허리에 둘러져 있던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기자 뭉툭하게 올라온 속옷이 보였다. 그 안에서도 짙게 퍼지는 페로몬에 내가 얼굴을 묻으려 하자 형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밀었다. 내 장골을 바짝 당기던 형이 살짝 말아 올라간 티셔츠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읏…….”

차가운 혀가 갈비뼈를 훑었다. 형의 손길이 장골에서부터 내 옆구리로, 내 옆구리에서 내 유두로 올라갔다.

아까처럼 투박하고 억척스러운 손길이 아니었다. 형은 내가 알던 모습을 곧이곧대로 내비치며 내 유륜에 대고 혀를 굴렸다.

날카롭게 세운 치아가 유륜 근처를 몇 번이고 씹었다. 치아의 감촉뿐이 아니라 말캉한 혀까지 느껴지는 걸 봐서 형은 내 가슴팍에 울혈을 남기는 듯 보였다.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쾌감이 허리를 떨게끔 만들었다.

유두를 꼬집던 손이 이제는 내 다리 사이로 내려갔다. 형이 가랑이에서 흘러내리는 애액을 쓸어 내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함께 쏠려 들어간 형의 손가락을 문 구멍이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듯 벌름거렸다.

“형, 흣……!”

밑에서 느껴지는 손가락이 점차 내 체온에 물들어 갔다. 내 내벽을 한 바퀴 훑는 손가락이 짙은 이물감을 남겼다. 내가 형의 머리로 인해 불퉁하게 올라온 티셔츠 위로 손을 얹었다.

티셔츠 밖으로 빠져나온 형의 움직임은 쉼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뻗친 머리가 내게 기울었다. 형은 손으로 내 안을 헤집으면서 내 눈가를 핥았다. 그제야 내가 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작 손의 움직임만으로 찔꺽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형은 내 아래를 쑤시던 손으로 자신의 언더웨어를 끌어 내렸다. 하늘로 치솟은 귀두가 허리 밴드에 의해 탄력을 받고 한 번 튕겼다. 단단하게 발기한 형의 성기를 보자 아래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형이 내 아래에 터질 것처럼 붉게 오른 선단을 맞췄다. 기둥을 쥐고 입구에 귀두를 비비던 형이 열에 찬 신음을 뱉으며 허리를 떠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리… 빨리, 형…….”

재촉하며 상기된 얼굴이 우그러졌다. 참다못한 내가 형의 옷깃을 당겼다. 형의 혀가 아랫입술을 교묘히 맴돌았다. 형이 선단을 내 아래에 불쑥 껴 맞추니 허리가 살짝 튕겼다.

“흐윽, 응!”

“……이름.”

아랫입술의 라인을 따라 유영하던 혀가 턱선을 타고 올라가 귓불을 씹었다. 고개가 형의 반대쪽으로 틀어졌다. 뜨거운 숨이 귀밑에 쏟아졌다. 그에 반응한 몸이 형의 귀두를 집어삼킨 구멍에 힘을 싣게 만들었다.

“이, 해준……. 이해준.”

내가 눈을 질끈 감으며 형의 이름을 곱씹자 형이 성기를 뿌리째 처박았다. “아!” 동시에 터진 높은 탄성이 형의 머리맡을 간지럽혔다.

여전히 옷깃을 쥐고 있던 손을 크게 둘러 형의 어깨를 감았다. 성기를 촘촘히 감싼 내벽이 길을 틀어막고 있었으나 형은 개의치 않았다. 움직임이 성급하진 않았지만 안을 쳐올리는 강도가 꽤 강했다.

“하으, 읏! 응!”

하도 고개를 쳐들어 정수리가 바닥과 맞닿았다. 형이 쳐올릴 때마다 머리가 얼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한껏 드러난 내 목울대 위에 혀를 굴리고 있던 형이 동시에 상체를 일으켰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 내 허벅다리를 쓸었다. 내 다리 바깥으로 팔을 두른 형이 종아리에 입술을 짧게 맞췄다. 그대로 발목을 그러쥔 손은 형의 어깨 위에 내 발목을 안착시켰다.

허리 짓을 할 때마다 위로 쏠리는 내가 불편했던지 형의 커다란 손이 내 허벅지를 안쪽까지 움켜쥐고 더는 밀려나지 못하게 저지했다. 형은 다른 손으로 내 아랫배에 달라붙은 성기를 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후으…….”

“아, 아아, 흣! 응!”

형의 손이 귀두를 조일 때마다 한껏 더 움츠러드는 아래에 형이 인상을 썼다. 어깨에 걸쳐져 팔랑거리던 다리가 형의 팔을 타고 내려가 팔꿈치 안쪽에 자리 잡았다. 형과 이어진 이음매가 불에 델 듯 뜨거웠다.

주먹을 쥐었던 손을 풀어 아래로 최대한 뻗었다. 손끝에 형의 살결이 만져졌지만 그것을 그러쥘 수가 없어 결국 내 성기를 압박하는 형의 손등 위로 겹쳐 잡았다.

형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선단을 조이며 내 속을 헤집었다. 발발거리며 떨리는 성기에서 쿠퍼액이 새어 나왔다. 형이 때를 놓치지 않고 엄지로 내 선단에 쿠퍼액을 고루고루 펴 발랐다.

“그만……. 후윽, 읏! 그만! 형, 제발…….”

앞뒤로 끼치는 자극이 너무 강렬해서 고개를 휘저었다. 형은 내 말을 들은 체도 안 했다. 점성 액체가 마르기도 전에 다시 울컥 뿜어져 나오는 프리컴에 선단을 집요하게 문지르던 형이 기둥을 쥔 내 손에 프리컴을 묻혔다.

내 손목을 끌어당겨 프리컴이 묻은 부분을 혀를 내어 핥는 형은 가히 관능적이었다. 자극을 받다 만 성기가 아랫배에 달라붙은 채 희멀건 점성액을 토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정하는 모양새를 빤히 쳐다보던 형이 몸을 납작 엎드려 내 귀밑에 코를 박았다. 사정을 하고 나면 페로몬이 점점 옅어지기 때문이다.

형은 내 페로몬을 모조리 흡수할 것처럼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형의 뒷덜미를 손으로 감싸며 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만지자 형이 내 속을 드나들던 성기를 아주 깊게 처박았다.

“사랑해…….”

형의 속에서 울컥 차오르던 뜨거운 액체가 내 안 구석구석을 가득 채웠다. 작게 흘린 내 말에 형이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사랑해, 형…….”

다시는 형에게 꺼내지 못할 줄 알았던 말을 건넸다. 가슴이 뜨겁게 휘몰아쳤다. 형의 붉어진 눈시울이 내게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형과의 관계 후 늘어지는 몸을 반쯤 일으켜 다시 형의 입술을 삼켰다.

우리의 첫 관계,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첫 순간. 나는 기억을 더듬어 꼭꼭 숨겨져 있던 그 순간을 찾았다. 그때의 간절함이 꼭 지금과 비슷해서.

‘네가 제정신이야? 히트 사이클에 어딜 싸돌아 다녀!’

흠칫, 페로몬은 물론이거니와 음파에도 민감하게 달구어지던 몸이 잘게 떨렸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꾹 움켜쥐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을 때가 있었다.

씨발, 형은 다시 한번 욕을 씹더니 따라 들어오는 낯선 페로몬을 문밖으로 밀어 버리곤 문을 거칠게 닫았다.

‘이한음!’

‘그냥 가!’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에 몸을 한층 더 웅크렸다. 화가 많이 난 것인지 재빠르게 다가와 뒤덮인 이불을 들추는 움직임이 성급했던 것도 같았다.

‘왜! 왜!! 그럼 어떻게 해! 안 그래도 예민한 몸이 형 페로몬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발정 나는데 어떡하냐고, 그럼! 저리 가!’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불 너머로 드러난 형의 몰골이 아주 엉망이라는 것만 겨우 알아차렸다.

급하게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단정하던 머리칼은 바람에 헝클어져 있었고, 목 끝까지 채우던 와이셔츠는 윗단추 두 개가 풀어져 있었다. 형의 눈동자처럼 새카만 재킷은 이미 바닥에 널브러진 채였다.

‘그래서. 히트 사이클 올 때마다 번번이 밖으로 나돌아 다닐 생각이야? 집이라도 하나 구해서 내보내야 얌전히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래?’

‘저리 가라니까!’

여전히 거친 숨을 토해 내던 형은 목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지 핏대가 선 상태였다. 형이 곧장 내 위로 올라타자 나는 또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가란 말이야!’

‘가만히 좀 있어!’

내 위로 자리 잡은 형이 나를 거칠게 억누르며 바지 주머니에서 일회용 주사기를 꺼냈다. 히트 사이클 기간만 되면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던 형이었다.

유난히 혹독하게 치를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형은 내 전화 한 통에 달려와서 저것을 투약해 주곤 했었다. 안정제. 익숙한 유리병 속에 담긴 액체를 보고 단박에 알아차렸다.

‘내가 할게, 내가 할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가! 나 이제 애 아니야!! 내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옷깃에 쓸리는 족족 데일 정도로 피부가 아렸다. 아래는 밑 빠진 독처럼 애액을 질질 흘려 대고 있었다. 자제한다고 자제하는 중임에도 형 몸에 묻은 잔재들을 기가 막히게 캐치한 몸은 한창 절정을 맞은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 상황을 형이 알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내게 발정하지 않는 형이 그 사실을 알고 날 한심하게 볼까 봐 무서웠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혈관을 찾아 주삿바늘을 꽂아 넣은 형이 서러움에 우짖는 내 위에서 내려왔다.

그게 쉽사리 진정되지 않아 꺽꺽거리면서 울음 섞인 숨을 토해 내고 있는데 문득 머리를 덮는 온기가 느껴졌다.

여전히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손은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만졌다. 이상하게 나를 맹공격하던 잡다한 페로몬의 잔재가 서서히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열기에 바들바들 떨리던 몸이, 고작 면의 감촉만으로도 뜨겁게 오르던 피부가, 거짓말처럼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을 떨어 대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다시 일어났을 때 형은 내 옆에 없었다. 욕실 쪽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샤워 중인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기운이 전부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약의 효과는 훌륭했다. 물소리를 배경 삼아 두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나에게 히트 사이클은 해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한바탕 뒤흔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리는 해일. 내 정신을 교란한 후 사라진 해일은 늘 그랬듯 잔뜩 어지럽혀진 흔적까지 몰고 가진 못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 주기가 지나갈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형에게 러트 사이클이 오지 않아서.

히트 사이클을 맞은 오메가의 페로몬과 접한 알파에게는 러트 사이클이 오기 마련이다. 내 페로몬이 별로인 건지, 형의 자제력이 지나치게 좋은 건지 헤아릴 겨를은 없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형의 페로몬만큼 나를 괴롭히는 것은 없었다. 형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고 나서부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잡다한 잔재들이 섞인 모텔도 기꺼이 찾아 몸을 숨길 정도로.

아직도 여운이 남아 달달 떨리는 손끝을 응시하다 또다시 밀려오는 서러움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마 서러움을 토해 낼 재간은 없어서 몸을 일으켜 형이 지난날 내팽개친 재킷을 집어 들었다.

툭, 투둑, 데구르.

‘뭐야, 이거.’

재킷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은 원기둥 모양의 작은 통이었다. 누가 봐도 약통 같은 생김새였다. 형이 약을 먹었었나? 이제는 물소리가 끊긴 욕실 문을 힐끗 쳐다본 후 약통을 집어 들었다.

‘Depressant.’

달싹이던 입술을 온전히 다물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때, 닫혀져 있던 욕실 문이 열렸다. 틈새로 퍼지는 증기와 함께 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 내.’

내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한 형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빠른 걸음보다도 먼저 뻗어지는 손에 반사적으로 약통을 뒤로 숨겼다.

‘억제제잖아, 이거. 뭐야?’

‘달라고 했지.’

‘뭐냐니까?’

‘이한음.’

형이 짐짓 표정을 싸하게 굳히고 날 내려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맞지?’

형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거 맞지?’

다시 한번 되묻자 형은 그제야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서 러트 사이클이 안 온 거지?’

‘그럼 내가 무슨 수로 우성 오메가 페로몬을 견뎌. 이리 줘.’

말도 안 돼. 좋아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저 입술만 멍청히 벌리고 크게 뜨인 눈을 끔벅이자 형이 손을 내 뒤로 뻗어 약통을 낚아채 갔다.

‘……왜 굳이 이걸 먹는데?’

‘몰라 물어?’

‘그냥, 그냥 날 취하면 되잖아.’

이상했다. 이상할 정도로 과보호다. 취하고 싶을 땐 마음대로 취하고 그러다 질릴 땐 버리면 그만이었다. 대가 없는 안식은 없었으니까. 7년이면 충분히 긴 시간이었고, 성인이 된 나를 형이 무리해 가면서까지 보살필 이유는 없었다.

‘헛소리하지 마.’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인상을 쓴 형은 곧 바닥에 떨어진 재킷까지 주워 들곤 내게 등을 보였다. 머리를 털면서 자리를 피하는 형에게서 희미한 스킨 냄새가 났다.

‘불편하면 집 따로 알아봐 줄게. 앞으론 거기서 지내.’

‘그럴 정도로 싫었어? 몸에 좋지도 않은 걸 굳이 찾아 먹을 정도로?’

과보호가 아니었나. 형도 날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뭐라고 설명이라도 좀……!’

‘그럼. 그럼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 네 말처럼 네 의견 따위 묵살하고 강제로 취해? 네 페로몬에 취해서 내 멋대로 굴기를 바라? 그래, 어쩌다가 내가 네 페로몬에 못 이겨서 널 겁간했다고 치자. 그러고 나선 넌 어떻게 할 건데? 평소처럼 나 대할 수 있어? 내가 씨발, 그딴 꼴 보자고 여태까지 이 좆같은 거 처먹고 참은 줄 알아?’

‘아니야.’

‘뭐?’

‘강제 아니라고! 내가 왜 멀쩡한 집 놔두고 거지 같은 모텔을 찾은 건데. 환기시켜도 사라지지 않는 저 잔재들 속에 뒤섞여서 왜 히트 사이클을 견디려고 했을 것 같은데!’

페로몬의 잔재가 넘실거리는 허공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형의 표정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형이 좋아서, 형 페로몬만 맡으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안아 달라고 사정사정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평소 감정을 많이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음에도 형은 표정을 수시로 갈아치웠다. 흘러가는 일분일초가 지나치게 더뎠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는 형에게서 답답함을 느꼈다.

‘씨발.’

‘형.’

‘해 봐, 그럼.’

‘어?’

형의 거친 손길에 의해 종잇장 같은 몸이 침대 위로 냅다 던져졌다.

‘한번 발정해 보라고.’

형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페로몬을 개방하는 순간, 안정제의 효과가 거짓말처럼 가시기 시작했다. 그것이 형과 나의 첫 관계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첫 순간이었다.

해가 뜨지 않는 낮이었다. 의아함을 느낀 내가 휴대 전화를 켜 시간을 확인했다.

AM 11:00. 배터리 잔량 옆에 표시된 시간은 틀림없이 오전 11시였다. 여유가 없어 블라인드조차 달지 못했던 창가에 다가갔다.

굳게 닫혀 있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밖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검은색의 도화지를 눈앞에 펼쳐 놓은 것처럼. 바깥의 상황을 살피고 나서야 불안감이 넘실거렸다.

형, 형! 소리쳐 형을 부르려던 움직임이 삽시간에 굳었다. 목소리 대신 쇳소리가 흘러나오는 목에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댔다. 긴장이 한가득 담긴 침을 넘기는 순간 울렁이는 울대가 느껴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파르르 떨리는 다리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때 허벅지로 느껴지는 딱딱하고도 잘 다듬은 듯 뭉툭한 감각에 성급하게 뒤를 돌았다.

하얗게 센 얼굴을 한 몸이 이번엔 자리에 주저앉았다. 코끝에 풍기던 향내가 내 주위를 둘러쌌다. 발꿈치로 땅을 밀어 뒤로 물러났다. 나는 눈에 가득 들어찬 형의 영정 사진을 보며 숨을 거칠게 들이켰다.

윗옷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이 한두 방울로 그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손으로 땅을 짚으며 형의 영정 사진으로부터 조금 더 물러나려 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이 불안했다. 두려움을 집어삼킨 시야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손을 들었다. 지레 겁을 먹은 몸은 스스로의 의지로 끌어 올리는 손조차도 거북스러워했다. 시야 안으로 손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돌덩이 같은 침을 억지로 삼킨 내가 손을 뒤집었다.

그 순간 끼쳐 오는 피비린내에 헛구역질을 했다. 허리를 숙인 채 헛구역질을 하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이 피는 내 몸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밀려오는 토기에 듣기 역한 소리를 낼 때마다 흉골이 폐를 압박했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갈 때마다 내 하반신에서는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넋 놓고 지켜보다 고개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영정 사진 속 형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성대를 긁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꿈이다. 그러니 깨야 한다. 나는 형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깜깜한 공간이 점차 부서지기 시작했다. 회백색의 재가 내가 열어 두었던 창문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무너지는 공간을 체념한 채 바라봤을 때, 눈물이 가득 맺힌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을 때.

“이한음!”

나는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한동안 막혀 있던 숨을 힘겹게 뱉어 냈다. 놀란 눈이 나를 소리쳐 불렀던 형을 담자 형은 낮게 욕을 짓이겼다. 순간 하반신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서둘러 상체를 일으킨 내가 내 몸을 꽁꽁 덮고 있던 이불을 들췄다.

다행히 검붉은 피를 쏟아 냈던 하반신은 말끔한 상태였다. 다리 사이에 꽂혀 있던 시선을 위로 이동했다.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형의 뺨에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댔다. 형의 체온이 조금 차갑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형에게서는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났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피부와 창문에서 새어 들어와 방 안을 비추는 햇빛. 나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 여전히 덜덜 떨리는 몸을 느꼈다.

“……형.”

그리고 조금은 쉰 듯한 목소리가 나오자 꿈이었다는 것을 직시한 몸이 눈앞의 형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형의 낮은 음성이 내 귓가에 안정적이게 와닿았다. 형은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이내 내 등을 살살 쓸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숨 가쁘게 토해지는 간헐적인 호흡이 현재 내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알렸다. 가만히 내 등을 쓸던 형이 내게서 멀어졌다. 형은 내 어깨를 부드럽게 밀었다.

“누워 있어. 너 아파.”

형은 손에 들린 검은 봉지 속에서 해열제와 수액 봉지를 꺼내 들었다. 형이 덜어 낸 물약 타입의 해열제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목구멍으로 억지로 삼켰다.

형이 나를 자리에 눕히곤 내 팔에 지혈대를 둘렀다. 수액 봉지와 링거 줄을 연결한 형이 내 팔꿈치 안쪽에 도드라지는 혈관을 찾았다. 곧 알코올스왑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포장지를 뜯은 형이 바늘을 내게 꽂으며 링거 줄과 연결했다.

“병원 다녀왔어?”

“부탁했어.”

형은 침대 헤드 부분에 박힌 못에 수액 봉지를 걸었다. 수액 양을 조절하던 형이 내 목덜미를 쓸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제야 내 몸에 감도는 열감을 느꼈다.

형은 내가 들췄던 이불을 도로 내 몸 위에 덮었다. 형이 이불 속에 감춰졌던 수건을 집어 들었다.

열이 오른 지 꽤 됐구나. 나는 내 이마 위에 올려져 있었을 수건에 고정했던 눈을 들어 올렸다. 간혹 히트 사이클을 보내고 후유증을 혹독하게 치를 때가 있었다. 나는 오늘이 오프였다는 걸 더듬더듬 떠올렸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형이 한층 가벼워진 내 얼굴을 보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 형의 얼굴이 문득 영정 사진 속 형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이불 속에 숨겨진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근래 들어서 악몽을 꾸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냈던 김중현부터 오늘 꿨던 그 악몽. 그저 개꿈으로 여기고 웃어넘기기엔 나를 공포감에 떨게 하는 전개였다.

본과 3학년 때 배웠던 정신과학을 떠올렸다. 악몽과 관련된 부분이 있었던가. 아, 가만히 전공 책 속 내용을 되뇌던 내가 입술을 벌렸다.

극심한 스트레스나……. 수액이 꽂혀 있지 않은 팔을 들어 이마를 감쌌다. 그다음에 쓰여 있던 내용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극심한 스트레스나……. 머릿속을 맴도는 글자들이 분해가 되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울리는 머리가 더 아파지는 것 같아 기억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약효가 돌고 있는지 정신이 굼뜬 게 느껴졌다. 피로를 가득 담은 눈이 계속해서 감겼지만 잘 수 없었다. 그때의 그 상황이 다시 나를 덮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형의 옷깃을 쥐었다. 형은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는 내 눈을 보곤 가슴팍에 손을 얹어 살살 토닥이기 시작했다.

“……무서워.”

형에게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형은 괜찮다는 듯 계속 내 가슴팍을 토닥였다. 자고 싶지 않았다. 형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끌어당기는 수마는 내 시야에 형을 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깊은 어둠이 나를 잠식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을 때였다. 형은 내게 죽을 들이밀었고, 내 앞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형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 이상 냉기를 띠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나를 관찰하는 듯한 짙은 눈빛이 내게 어서 한술이라도 뜨라며 재촉했다. 결국 내가 죽을 휘저었던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죽이 몇 번 씹지 않았음에도 술술 넘어갔다.

내가 식사를 끝내자 형이 차를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형이 대로변에 대충 정차해 두었던 밴티지를 떠올렸다.

아니, 정차라고 하기보다는 불법 주차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괜찮을까. 형의 밴티지를 걱정했던 생각이 짧게 끝났다. 견인됐으면 차를 가지고 오겠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형을 기다리는 동안 욕실에 들어가 이를 닦았다.

“어…….”

“타.”

내가 눈앞에 선 차를 보며 두 눈을 끔벅였다. 형은 조수석 창문을 내린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얼떨떨하게 차에 올라탄 내가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형이 끌고 온 차는 밴티지가 아니었다.

역시 견인된 게 맞구나. 형이 가지고 있는 차 중 내가 모르는 모델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조수석에 올라탄 차는 처음 보는 차였다.

“차 돌리고 싶으면 말해.”

나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형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 순간 몸살에 밀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머리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원내에서 터진 히트 사이클과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지난날의 기억. 나는 열이 떨어졌음에도 아파 오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사실은 도망가고 싶었다. 형이 안 된다며 나를 말려도 차 좀 돌려 달라고 사정하고 싶었다. 한심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뱉어도 그 감정이 해소가 안 될 만큼 아주 짙었다.

나는 내가 수술 중 졸도했던 일을 떠올렸다. 이게 기면증 때문에 쫓겨났을 때보단 나은 상황일까.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어떤 일이 더 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해 판가름을 하고 있을 때 차가 병원 정문을 통과했다. 형이 비어 있는 공간에 주차를 하곤 먼저 차에서 내렸다.

내가 내리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손톱만 뜯고 있자 형이 나를 등지고 서서 왼쪽에 찬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형이 주머니 속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형이 담뱃갑 속에서 꺼낸 장초를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얼마 안 가 잿빛의 연기가 형 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형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형은 차 문이 닫히는 소리에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형의 얄팍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다 이내 사라졌다. 반쯤 남은 담배를 땅에 던져 구두로 짓이겨 밟았다.

형과는 조금 떨어진 상태로 형이 걷는 길을 따라 밟았다. 내가 걷던 걸음을 더 빠르게 굴려 형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을 때였다.

“음아!”

건물 바로 앞에서 모습을 보이던 무영이 빠르게 걸어와 형을 지나쳐 내 손을 붙잡았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전화도 안 받…….”

걱정으로 뒤덮여 있던 무영의 눈이 순간 화로 얼룩졌다. 굳어진 얼굴이 나를 샅샅이 살피더니 곧장 반대편으로 튀어 나갔다.

“무영아!”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무영의 팔을 잡았다. 무영을 바라보는 형의 표정은 멱살이 잡힌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무감각했다.

“당신 뭐야. 뭔데 애를 저 꼴로 만들어 놔.”

“내 꼴이 뭐! 그 손 안 놔?”

무영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형에게 몰아쳤다. 내가 아무리 무영을 밀어내도 형질이 알파인 남자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강무영!”

내가 결국 무영의 이름을 크게 불렀을 때.

“너 병신이야? 이 새끼가 너한테 페로몬 덧씌울 때까지 가만히 있었어?”

“신경 꺼.”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일그러진 내 얼굴이 형을 향했고, 형은 나를 쳐다보는 대신 무영에게 차갑게 말했다. 형의 손이 유유히 올라가 무영의 손목을 쥐었다.

분명 무영의 손목을 가볍게 쥐고 있는 듯 보였으나 무영은 낮은 신음을 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얼마 가지 않아 형에게서 떨어진 무영이 불만스럽게 비뚤어진 얼굴로 한 발 물러났다. 암만 알파라고 해도 열성인 무영이 우성인 형의 힘을 견뎌 낼 수 없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페로몬 샤워. 나는 그제야 느꼈다. 내 주위를 아스라이 돌고 있는 것이 형의 페로몬이라는 것을. 계속 형과 함께 있어서 못 느꼈다. 마냥 형에게서 끼치는 페로몬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

“신경을… 당신이 행동을 똑바로 해야 내가 신경을 안 쓸… 씨발. 존나 좆같네, 진짜!”

무영이 헛웃음과 함께 형의 말을 뒤늦게 받아쳤다. 그러나 형에게 꽂힌 내 시선에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통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 무영이 욕을 짓이기며 본인의 머리를 헝클었다. 형이 무영의 의미심장한 말에 잠깐 인상을 썼지만 곧 무표정한 얼굴로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했다.

“이리 와.”

형이 셔츠를 단정하게 정리하곤 내게 손을 뻗었다. 잠시 주저하던 내가 형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어딜 가. 너 그거 안 지우면 너나 서재원 둘 중 하나 병신 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무영에게 고개를 틀었다. 왜 갑자기 무영의 입에서 서재원의 이름이 나오는 것인지, 형이 내게 페로몬 샤워를 한 게 서재원과 무슨 상관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서재원이 내게 꺼냈던 약혼 이야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사실을 무영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그사이 서재원이 병원에 약혼과 관련된 소문을 퍼트린 게 아니라면.

나는 서재원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형은 나와 몸을 섞지 않았을 테고, 내게 페로몬 샤워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형은 유품으로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 사진의 무게를 실감했다. 그런데 왜?

무영은 답답한 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러나 무영은 내 기다림에도 대답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눈치를 보던 무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신경 쓸 필요 없어.”

형의 손을 잡은 채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형이 내 손을 힘주어 잡고는 내게 속삭였다. 그래서 나는 무영을 지나쳐 걸었다.

“들었어.”

그러나 그 걸음도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들었다고, 내가. 그날, 휴게실에서.”

내가 뒤를 돌아 무영을 바라보았다. 보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 얼굴이 지금 하얗게 질려 있다는 것을. 아침에 먹은 죽이 뒤늦게 얹힐 것 같았다.

‘아, 삼각김밥 다 떨어졌대. 이야기 중인 것 같길래 기다리고 있었어.’

그때 무영의 표정은 그랬다. 입꼬리를 끌어 올려 작게 짓던 웃음. 지금 되뇌어 보면 당시 무영은 표정 관리가 어색했던 것도 같았다.

‘들었어?’

긴장을 흠뻑 들이켠 내 목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뭘? 근데 왜 나왔어? 얘기 다 끝났으면 들어가서 먹을까?’

‘아니…….’

분명 무영은 못 들었다고 했다. 진중하게 가라앉았던 얼굴이 금세 펴지며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늉을 하길래 거짓말이 아닌 줄 알았다. 사실 그때 나를 둘러싼 피로가 너무나도 농후해 깊게 파헤치고 싶지 않았던 것도 같았다.

나는 무영이 했던 그 말을 믿었다. 믿고 싶었다. 굳이 피곤한 일을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트 판에 세게 꽂힌 다트처럼 무영의 시선이 내게 강하게 닿았다. 그것을 무식하게 빼내면 다트의 심이 다트 판에 꽂힌 채로 빠질 것 같았다.

결국 형의 손을 놓았다. 순간 내 손가락에 힘을 싣던 형의 손길이 느껴졌던 것도 같아 무영에게 향하던 고개를 억지로 틀었다.

형은 형의 손에서 빠져나간 내 손을 들여다보는 대신 사색이 된 내 얼굴을 살폈다. 형은 내 표정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허공에 뜬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고개가 다시 무영에게로 향했다. 무영에게 뻗어지는 내 둔한 걸음이 퍽 답답했던 모양인지 무영이 내 손을 잡고 형의 반대편으로 끌기 시작했다.

억지로 이끌리듯 시원스럽게 뻗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형을 돌아봤다. 형과 시선이 맞닿았다. 형은 무영이 코너를 돌아 우리 둘의 모습이 감춰질 때까지 미동 없이 나를 쳐다봤다. 마치 가지 말란 듯이, 아주 짙은 시선이었다.

“놓고 이야기해.”

형과 멀어진 거리를 어느 정도 체감했을 때, 내가 무영의 손을 원망스럽다는 듯 털었다. 내 목소리에는 내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주 차가웠다는 뜻이다.

무영이 그런 나를 착잡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나는 무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영과 맞닿은 내 시선이 결코 부드럽진 않았을 것이다.

“미안해.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들렸어.”

무영은 내게 대뜸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받으면 무엇 할까. 무영은 이미 내게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한두 번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계속.

“그거 말고 서재원부터 얘기해. 형이랑 서재원, 아무 관계 아니잖아.”

그런데 왜 무슨 관계가 있는 것처럼 말해? 성대를 역류하는 말은 삼켰다. 펌프질을 해 대는 심장은 평소보다 더 격렬했고, 목이 타기 시작했다. 무영은 머뭇거리며 뒷덜미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너랑 저… 하여튼 둘이 그렇게 사라지고 서재원 아버님이 찾아오셨어. 병원장님이랑 아시는 사이, 같더라고.”

병원장이라면 형의 부친이었다. 나는 이어 말하라는 듯 떨리는 시선으로 무영의 눈을 고집스레 좇았다. 무영은 내 눈을 쳐다보기도 하고, 가끔씩 내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들으면 괜히 상처받을까 봐 말하기 싫었는데. 서재원이랑 그 새… 아니, 이 선생님, 결혼하나 봐. 누가 소문낸 건진 모르겠는데, 아버님 오시고 나서부터 둘 약혼 이야기가 병원에 파다해.”

“…….”

아아, 썩어 들어가는 마음이 담긴 소리가 입 안을 맴돌았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날 내게 읊조리던 서재원의 목소리가 내 주위를 맴돌며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드디어 무영에게 향했던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내 시선이 그의 주위를 방랑했다. 내 곁을 포박하는 형의 페로몬을 볼 순 없어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러면서 왜 나랑 잔 거지. 왜 내게 페로몬을 덧씌운 거지.

“……음아.”

“그런 소리 없었잖아.”

그런 소리 안 했잖아, 그때.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었다. 나는 무영이 내가 형과 헤어지고 1년가량 전해 주었던 내용을 되새겼다. 내가 잊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러나 아무리 되뇌어도 무영이 서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한 기억이 없었다. 나는 그 이름을 이 병원에 와서 처음 들었단 말이야. 속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형편없었다.

“나도 어제 알았어.”

“…….”

“음아…….”

무영은 내가 그때의 시절을 이야기하는 줄은 꿈에도 모른다.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숨을 쉬기가 힘들었고, 침을 넘기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가만히 내 이름을 부르던 무영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몸을 느꼈다. 그런 말 안 했잖아, 나한테. 차마 형을 미워하지 못하는 내 속내는 무영에게 원망의 목소리를 냈다.

정말, 그냥 정말 나를 떠보는 말인 줄 알았단 말이야. 형과 내 관계는 뒤늦게 스카우트된 김재겸조차도 알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거짓말인 줄 알았단 말이야. 네 말을 믿었단 말이야. 얼굴이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형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울렸다. 뭘 신경 쓰지 말라는 걸까. 형은 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었다.

그러면 적어도 지금 병원의 상황을 몰랐어야 맞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형은 무영이 알고 있는 걸 눈치챈 기색이었다. 내 곁을 돌고 있는 형의 페로몬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했다.

“음아…….”

죽은 듯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무영이 다시 한번 불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다. 서재원의 멱살을 쥐고 싶었다. 형에게 얼씬도 말라며 주먹으로 뺨을 내려치며 흠씬 두드려 패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침착해야 했다. 마냥 충격적인 이 상황에 좌지우지되기만 해서는 안 됐다. 나는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을 잠시 덮었다.

“……들었다던 건 뭔데.”

감정을 뒤덮으려 노력했어도 그 감정이 표출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날카로운 내 시선이 다시 무영에게 향했다.

“……너랑 서재원이 하는 이야기.”

하, 내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어디부터.”

내 냉소적인 말투에 무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또 그렇게 어이없을 수가 없었다. 무영은 그날 내게 거짓말을 했다. 무영은, 애초에 편의점에 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

다시 이어지는 물음에 무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무영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어.”

나는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자학하고 싶었다. 속이 너무 답답했다. 채 소화가 되지 않은 음식물이 내보내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그게 음이 네가 마음을 바꾼 이유였는지.”

그러나 내게 닿은 무영의 말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했다. 머리칼을 쥐어뜯고 손톱으로 온몸에 흠집을 내던 머릿속의 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다 들었다며. 전부, 들었다며. 그런데 왜 날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아? 왜 그런 걸 물어봐?

“말도, 안 되잖아……. 미래를 안다니… 그건…….”

“네가 그랬잖아. 너는 계속… 살리고 싶어 했잖아, 그 사람을.”

내 존재를 부정하던 산만한 목소리를 무영은 단숨에 잠재웠다. 무영이 나 홀로 서 있던 그 공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고, 생채기가 난 몸에 연고를 발라 주고 있었다. 나는 내 머릿속의 무영을 들여다보는 대신 내 앞에 선 무영을 넋 놓고 보았다.

“그 이유 때문에 믿는다고……? 그걸……?”

“못 믿을 건 뭐야, 내 친구가 그렇다는데.”

무영의 말에 내 얼굴에 불신이 담겼다. 역시 말이 되지 않는 이유였다. 우정을 빌미로 믿기에는 그때 내가 했던 소리가 정신 나간 소리지 않았나. 내 표정을 확인한 무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사실은 못 믿었어. 못 믿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더라고. 그래서 믿어 보려고. 음아, 나한테는 네가 소중해. 하루가 멀다 하고 핼쑥해지는 너를 보면서 내가…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그게 그 이유 때문이었다면, 믿을게. 믿을 거야, 나는.”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흐트러지고 있는 건 내 머리카락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형을 곱씹으며 터트리다가 만, 내 몸을 둘러싸고 있던 형의 페로몬이 함께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해 줘.”

“…….”

“네가 알고 있는 것 전부.”

무영은 나를 회유하고 있었다. 그런 무영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떨까. 아까처럼 파리하게 질린 낯일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에게 먼저 향해야 했던 말은 내가 느꼈던 9년의 세월보단 조곤조곤했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단 하루도 마음 놓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시간은 무영과 내가 밖에 있는 순간을 압박했지만 아무도 병원으로 걸음을 떼지 않았다.

무영은 마치 소설 속 줄거리를 듣는 것 같았다. 몇 번씩이나 놀라서 커지는 눈이, 이해된다는 듯 작게 끄덕이는 고개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살짝 벌어진 입술이.

“그래서였구나.”

나를 덮쳤던 불신이 이번에는 무영에게 향할 차례였으나 무영은 불신을 단번에 끊어 냈다.

“……뭐가?”

내 떨리는 음성에 무영이 “아.” 탄성을 짧게 뱉었다.

“아니, 인턴들 사이에서 네 이야기 영웅담처럼 떠도는 거 모르지. 매번 레지한테 쓸모없다고 구박만 당하는데 인턴 대표해서 우리가 그렇게 쓸모없지 않은 걸 보여 줬다고.”

“……그럴 리가.”

“야, 진짜라니까. MD 딴 서재원조차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엄청 추켜세워. 그런데 그럴 만했던 일이었네. 존나 멋있다, 너.”

자랑스럽게 뻗어지는 웃음이 내게 향했다. 나는 그 웃음에 따라 웃을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9년 뒤에는 너도 훌륭한 의사가 돼. 그 말을 뱉고 싶었다.

“신기하다. 내가 그때도 음이 네 친구구나.”

“…….”

무영은 정말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어떻게? 나는 후련한 마음이면서도 찝찝한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과는 별개로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알아?”

“……모르지.”

“어떻게 하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형이 어쩌다 의료 봉사를 떠나게 됐는지조차 난 모르니까. 그건 무영조차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던 거였다. 무영은 형이 떠나고 나서 내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나는 다시 무영과 두 눈을 맞췄다.

“할 수 있는 건 다해 볼 거야.”

“내가 뭐 도울 만한 일이 있을까?”

“…….”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한 조력자가 생긴 기분이었다. 내가 무영의 말을 잇지 않아도 무영은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솔직히 진짜 열받거든. 서재원이랑 너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것도 아니고. 약혼했다는 소리 들린 후에 너랑 나란히 나타나는 거 보고 눈 뒤집힐 뻔했거든. 아, 사실 뒤집혀서 멱살 잡았던 건 맞아. 나 이제 병원 생활 좆된 거지? 아, 당장 4월부터 NS 돌아야 하는데.”

장난스럽게 말하던 무영이 큰일 났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무영의 얼굴을 가렸던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남은 무영의 표정은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놀라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 그렇게 되고 내가 아무 이야기도 안 했다며. 그, 약혼했다는 말.”

“……응.”

“그러면 지금 여기서 끝인 게 아니지 않을까? 나라면, 그 사람이 그렇게 되고 그 사실 때문에 힘들어하는 너를 9년 동안 지켜보고 있었던 나라면, 약혼했다는 거 말했을 것 같거든. 그래야 남은 사람에게 있는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질 테니까. 적어도 미련을 덜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시절의 무영을 제일 잘 아는 건 지금의 무영이었다. 무영이 가진 의아함이 내 마음을 울렸다. 무영은 그때 왜 내게 형이 서재원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이 새끼들이! 야! 거기에 처박혀서 벌써 농땡이질이냐?! 이리 안 와?!”

“아, 씨발, 미래 생각할 것 없이 지금 당장 좆되게 생겼네.”

멀리서 들려오는 의료진의 목소리에 무영이 얼굴을 구겼다. 나는 뺨에 번진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찝찝했던 마음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덕분에 후련한 마음만 남았던 것 같다. 나는 무영보다도 앞서 걸었다.

“안 뛰어?!”

땅을 기는 듯한 걸음이 못내 불만족스러웠는지 의료진이 소리쳤다. 나는 천천히 뻗던 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굴렸다.

“차라리 직접 물어봐, 네가. 혼자 생각하지 말고.”

뛰기 전 무영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무영과 나누었던 대화가 조금은 위로가 되었던 것 같았다. 혼자 떨어져 버린 과거에서 나는 내 조력자를 만났다.

그게 고마웠다. 지금 내게 이런 반응을 보여 준 무영이.

어느새 나보다 앞선 무영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마 지금보다 더 이성적이게, 조금은 오래 버텨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새끼들이 벌써부터 빠져 가지고.”

무영과 내 귀를 한쪽씩 손에 쥐고 건물 후문으로 들어선 의료진이 이를 갈았다. 얼굴도 모르는 의료진이었으나 말하는 본새를 봐선 레지던트인 것 같았다.

무영은 귀를 너무 세게 당기시는 것 아니냐며 앓는 소리를 냈고, 나는 그저 인상만 쓰고 의료진의 손에 끌릴 뿐이었다.

“이한음? 뭐야. 걔는 우리 인턴이고, 그 옆에는…….”

그때 ER로 들어가려던 강유한이 내 얼굴을 보고 걸음을 우뚝 멈췄다. 큰 키를 구부정하게 세우고 자신의 귀를 잡은 의료진에게 몸이 쏠려 있는 무영을 보던 강유한이 기억났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아아, 네가 걔구나. GS 인턴. 그… 강, 뭐더라.”

“걔고, 자시고. 내가 이 새끼들 농땡이 피우고 있는 거 잡아 왔다니까.”

의료진의 손이 귀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손길이 무척이나 억세 못마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들어 귀를 쓸었다. 의료진이 내 팔뚝을 잡아 강유한에게 던지다시피 밀었다.

“무슨 농땡이. 얘네 이 선생님이 심부름 보냈다고 하셨는데. 이한음, 일단 너는 의국으로 올라가고. GS, 너는 빨리 네 자리 찾아서 가.”

“이 선생님?”

“이해준 선생님. 아, 이것들이, 빨리 가라니까 안 움직이냐?”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봐선 의료진 역시 2년 차 레지던트인 듯 보였다. 땅을 내려다보며 얼얼하게 당겨 오는 귀를 손에 쥐고 있던 내가 강유한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심부름? 강유한의 모호한 말에 이상함을 느낀 건 무영도 마찬가지였는지 강유한을 얼빠진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곧 무영과 눈이 마주쳤다. 무영이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무영과 내 시선이 맞닿은 걸 본 강유한이 결국 화를 냈다. 몸을 서둘러 틀었다.

“설마 쟤가 걔야?”

“걔가 뭔데.”

“그, 왜, 이해준 선생님 이거 있잖아.”

“전 애인이 왜 이 선생님 페로몬을 두르고 있어, 빙딱아.”

“페로몬을 두르고 있다고? 페로몬 샤워? 씨발, 어쩐지 행동 존나 굼뜨더라. 야, 그런데 이 선생님 약혼자 있다며?”

“몰라, 씨발. 붙지 말고 꺼져. 나 바빠.”

“야, 그러지 말고 좀 말해 봐. 우성 알파면 약혼자랑 애인 둘 다 둬도 괜찮은 거냐? 이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베타로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형질 때문에 머리에서 밀려, 힘에서 밀려, 이제 하다 하다 애인까지……. 베타로는 서러워서 못 산다고. 다음 생에는 꼭 우성으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꺼지라고, 꺼지라고, 꺼지라고!”

레지의 말에 강유한이 진저리를 치며 성을 냈다.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NS 병동에 위치한 의국으로 향하며 불편한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인턴은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의국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강유한이 내게 의국으로 가라던 이유가 지난번의 일 때문이라 생각했다. 사고를 쳐 놓고 연락 한 통 없이 쉬었으니까. 의국 앞에서 선 내가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의국 안에는 강유한을 제외한 레지던트들과 박이영 그리고 서재원이 있었다. 3년 차 레지던트 변미현 앞에는 박이영과 서재원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눈치껏 그들 사이에 껴 변미현 앞에서 섰다.

변미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변미현뿐만이 아니었다. 서재원과 김현재의 시선이 내게 강하게 꽂혀 있었다.

나는 내 주위를 떠도는 페로몬을 느꼈다. 이들이 내게 이런 시선을 보내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서재원, 그제 러트 온 환자 수가 몇이지?”

“셋입니다.”

정신을 차린 변미현이 돌연 서재원에게 질문을 했다. 그리고 변미현의 물음에 서재원은 지체 없이 재깍 대답했다. 그녀가 러트가 온 환자의 수를 묻는 까닭은 내게 내가 일으킨 소동에 대한 결과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먼저 선수 치며 변미현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김연석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변미현이 서 있는 이유는 김연석이 싫은 소리를 지나치게 못하는 탓이 컸으리라.

내가 걸음을 옆으로 비켜서 그간 고생했을 다른 레지던트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변미현이 그런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은 서재원이 더 많이 했어. 네가 뿌리고 간 페로몬 빨리 조치 안 취했으면 러트 온 환자 수가 셋이 아니라 열댓으로 늘었을 거야. 하필 네가 있던 곳 근처가 알파 병동이었던 거 알지.”

알파와 오메가는 특성상 같은 병실을 쓸 수 없었다. 베타야 남는 병실에 입원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형 병원에서는 하나의 병동에서도 알파 병동과 오메가 병동으로 나누어졌다.

나는 내가 히트 사이클이 왔을 당시 유난히 알파의 페로몬을 많이 맡았던 것을 떠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페로몬으로부터 도망을 가려던 게 나도 모르게 알파 병동 쪽으로 움직였나 보다. 나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너 자칫 잘못했다간 인사 위원회에 끌려갈 뻔했어. 교수님들이 기껏 보건 휴가 안건 통과시켜 놨더니 제때 안 쓰지. 열성도 아닌 놈이 제 주기도 제대로 안 챙기면 어쩌자는 거야. 생각해 봐. 제 몸 하나 건사 못 하는 의사한테 진료받고 싶어 하는 환자가 있겠냐?”

“환자분들께는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속 편한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번에는 병원에서도 어찌어찌 잘 수습해서 괜찮았지만 다음에는 짤없다, 너. 잘리기 싫으면 똑바로 해. 징계는 일단 경고로 끝났고 당분간 알파 병동은 얼씬도 하지 마. 일 있어도 다른 인턴 보낼 거니까.”

“네.”

“그리고…….”

이어지는 변미현의 말에 내가 바닥에 처박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변미현은 난처한 얼굴로 나와 서재원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치정 드라마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일터에서까지 그런 광경을 보고 싶지는 않거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둘이 멱살 잡고 싸웠다더라 하는 소리는 안 들리게 해.”

변미현은 피곤한 얼굴로 의국을 나섰다. 변미현이 떠나간 공간 속 남은 인원을 쳐다보던 내가 고개를 다시 한번 숙이고 등을 돌렸다.

“대단한 빽 두셨어, 아주.”

그리고 비웃음이 가득 담긴 김현재의 목소리가 내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뼈가 담긴 말이었다. 나는 부러 또박또박 걸으며 의국에서 벗어났다.

발걸음이 병동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공개적인 공간은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병원을 뛰쳐나갈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그런 내 발걸음 뒤로 성난 발걸음이 하나 더 따라붙었다.

“얘기 좀 해.”

서재원이 내 손목을 쥐어 당기며 말했다. 나는 서재원의 눈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변미현은 서재원과 내게 치정과 관련된 일로 소란스럽게 만들지 말라며 경고했지만 나는 내가 수시로 차오르는 충동적인 감정을 억누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서재원은 나를 건물 옥상으로 끌었다. 서재원 주위로 분노를 먹은 페로몬이 넘실거렸다. 그러나 그 페로몬이 내게 노골적으로 향하진 않았다. 서재원 역시 끓어오르는 화를 짓누르고 있었다.

“지워.”

서재원이 내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나는 서재원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형의 페로몬을 두고 꺼낸 말이었다.

“내가 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서재원 눈높이에 맞춰 살짝 내리깔린 눈에 열이라도 받았는지 서재원이 이번에는 제 페로몬을 노골적으로 쏟아 냈다. 나는 그 불쾌한 페로몬에 눈가를 좁혔다.

나 역시도 서재원을 페로몬으로 위협할 수 있었으나 굳이 그러진 않았다. 내게 위협적으로 쏟아지는 페로몬은 서재원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 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서재원과 형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으니까. 왠지 그때의 내 모습이 지금의 서재원과 겹쳐 보였다.

겁을 먹었구나. 무엇이 서재원을 두려움에 떨게 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 유리한 게 나라는 건 틀림없었다. 나는 그날의 서재원처럼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내비쳤다.

“들었잖아. 이 선생님이랑 나.”

서재원이 악문 잇새로 내게 페로몬을 지울 것을 종용했다. 나는 형의 페로몬에 덜 덮인 내 페로몬을 완전히 지웠다. 그러자 내 주위에 감도는 것은 우성 알파인 형의 페로몬뿐이었다.

“들었지. 그런데 그게 뭐?”

“그런데도 안 지우겠다고?”

눈을 치켜뜨고 내게 묻는 서재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재원이 내게 분노를 표할수록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내게 먼저 반응하는 서재원이 고마웠다. 만일 서재원이 평소처럼 여유롭게 나를 대했으면 지금쯤 페로몬을 쏟아 내고 있는 건 그가 아닌 내가 될 수도 있었다.

“누가 그러던데, 내가 형 페로몬을 두르고 있으면 너나 나 둘 중 하나는 병신 될 거라고.”

“…….”

“너는 그게 누가 될 것 같아?”

입꼬리가 뺨을 찔렀다. 내 말에 분노한 서재원이 내 멱살을 잡아 밀었다. 갑작스러운 힘에 벽으로 몰린 내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는 그 손아귀에서 금세 벗어났다.

나는 형이 무영을 바라보았던 표정으로 서재원을 무감각하게 쳐다봤다. 서재원은 그러는 내게 더 열이 받은 모양이다.

“미친 새끼야! 네가 그럴수록 이 선생님이 더 난처해지는 건 알아?!”

나는 손에 힘을 실어 서재원의 손목을 비틀었다. 서재원이 인상을 쓰며 자신의 손목을 부여잡은 내 손 위로 손을 포갰다.

본과 시절 형을 따라 운동을 다녔던 걸 감사히 여겼다. 그때는 체력을 기르기 위한 일이었으나 지금은 그게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되었다.

3개월을 쉬었어도 근력이 죄다 빠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서재원이 지나치게 약골이라든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

“형은 손해 볼 짓 안 해.”

내 눈이 서재원과 내 사이를 매섭게 가르고 그에게 꽂혔다. 서재원은 나에게 잡힌 손목을 흠칫 떨었다.

“난처해지는 사람은 형이 아니라 네가 될 거란 소리야.”

서재원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분노를 가득 집어삼킨 눈길이 곧 서재원의 손목을 붙잡았던 내 손으로 떨어졌다. 서재원은 내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 형 소리 좀 집어치워. 그래 봤자 이 선생님은 나랑 결혼하게 될 거야.”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내 목소리는 결코 확신에 차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무영을 믿기로 했다. 내게 형의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그때의 무영과 형과 직접 이야기해 보라던 지금의 무영을.

서재원과 약혼을 한다던 형과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 의료 봉사를 떠났던 형. 나는 내가 알던 과거와 차이가 나는 두 상황 속에서 갈등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형과 나 사이에 서재원이 끼어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불현듯 서재원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서재원은 형이 의료 봉사를 떠나게 된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금 더 면밀히 따질 수 있었다. 과거에도 서재원과 형이 약혼을 했든, 안 했든 약혼이 무산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굳이 내가 서재원을 자극하지 않아도.

그때 무영이 내게 전했던 것 중에 더 다른 점이 있었나. 가만히 머리를 굴리던 내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성에 인턴을 지원함으로 인해 자잘하게 변화했던 것을 제외하면 서재원처럼 특별히 두드러질 만한 게 없었다.

그때의 형은 곧 있을 교수직 임용을 위해 활동적으로 수술을 집도하기보다는 논문 준비에 열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만일 형이 의료 봉사를 가지 않았다면 서재원과 결혼을 했을까. 속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부정했지만 섣부르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내린 가설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이미 그 다짐은 무너졌다. 형이 내게 틈을 주기 시작한 이후로 그 형체는 눈에 띄게 녹아내렸다. 여전히 내 주위를 배회하는 형의 페로몬을 느낄수록 내 욕심은 하늘을 찌른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형을 살리고 앞으로의 미래 역시 형과 함께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나는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는 상황 속에서 수없이 갈등했다. 내 바람대로 끝을 맺는다면 그보다 행복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과연 하늘이 내 편에 서 줄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만일 형이 의료 봉사를 떠났던 일에 서재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형의 출국은 막았어도 형과 서재원의 관계는 막지 못한다면.

순간적으로 토기가 밀려와 이를 악물었다. 계속 형과 함께 찍었던 그 사진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더 나은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하나라면 나는… 꼼짝없이 형을 보낼 수밖에 없겠지. 그러기 위해 내가 이곳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저릿했다.

차트를 대충 훑으며 복도를 걸었다. 분명 두 눈에 차트 속 글자를 담은 건 맞는데 난독증 환자라도 된 것처럼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차트를 덮으려던 손짓이 불시에 멈췄다. 깜짝 놀란 손이 차트를 놓쳤다. 이어서 날카로운 굉음과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아야!”

나는 인상을 쓰며 내 앞에 엉덩방아를 찧은 남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나와 충돌한 아이는 바닥에 찧은 엉덩이가 아팠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엉덩이를 쓸어 만지고 있었다. 내가 얼어붙은 채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아이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 그 순간 아이를 내려다보던 내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내가 무릎을 굽혀 아이의 겨드랑이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팔에 힘을 실어 아이를 일으키자 아이가 내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섰다.

“……감사합니다.”

내게 고개를 한 번 푹 숙이고 뒤편으로 사라지려는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이 층은 NS 병동인 데다가 한쪽 다리를 저는 몸짓이 신경에 문제가 있어 입원을 한 듯 보였다.

아이가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아이의 어깨를 그러쥔 채 얼굴을 살폈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아이가 고개를 틀었다.

“누가 그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은 아이의 멍든 얼굴에 향했다. 눈가부터 광대까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군데군데 작은 피딱지가 박혀 있었다. 아이가 내 말에 크게 당황하며 몸을 떨었다.

“……너, 넘어졌어요.”

거짓말이다. 저런 모양의 상흔도, 당황하며 아무렇게나 내뱉는 변명도. 내가 성장하며 조금 더 다채로운 표현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수십 번도 넘게 봐 왔던 모습이었다. 아이의 반응을 보아서 아이에게 처한 상황이 따돌림과 같은 상황이 아님을 알아챘다.

나는 순간 떠오르는 김중현의 얼굴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지내던 고아원의 원장인 김중현이 나를 포함한 여린 아이들에게 저질렀던 만행들이 떠올라 가슴에 바위를 끼얹은 듯 속이 불편했다. 그 불쾌감은 형과 서재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머릿속을 새하얗게 밀어 버렸다.

나는 내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듯 몸을 비트는 아이를 보며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아이에게서 떨어진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떨어졌던 차트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이가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곤 다시 뒤를 돌았다.

지난번의 악몽이 떠올랐다. 내 목을 양손으로 조이며 나를 죽이려고 했던 김중현. 사실 그건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아원을 뛰쳐나오기 전, 김중현이 내게 행했던 마지막 폭력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목을 한 번 쓸어 만졌다. 절뚝절뚝 병실로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눈에 고집스레 담았다.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게 나보다 어렸던 아이들을 두고 도망친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내 손은 몇 번이고 아이를 향해 뻗어지려 했다. 결국 아이에게 도달하지 못한 손은 곧 누군가에게 잡혔다. 내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한음 씨.”

나를 향해 싱긋 웃은 김재겸이 몸을 틀어 나와 부딪혔던 남자아이를 보았다.

“유정이에요, 조유정. 이름 예쁘죠.”

이제는 사라져 버린 아이가 걸음을 내디뎠던 자리로 도로 시선이 닿았다. 머지않아 아이가 지나간 길을 반대로 훑은 시선이 김재겸에게 꽂혔다.

“원래 유정이랑 친해지기 되게 힘든데, 원하면 금방 친해지는 방법 알려 줄게요.”

김재겸의 눈에는 내가 아이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한 듯 보이는 아이는 형을 만나 잊게 됐던 내 지난날을 떠올리게 한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 과거를.

무려 내 인생의 절반을 그 고통 속에서 살았다. 나는, 조유정이라는 아이와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는 내가 긍정의 뜻을 비춘 것이라 여긴 김재겸이 의사 가운 속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거 진짜 아무한테도 안 알려 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김재겸이 내게 내민 것은, 사탕이었다. 하, 기가 차 반사적으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애를 뭐로 보고. 김재겸이 잡은 손목을 다른 손으로 떼어 냈다.

“관심 없는데요.”

나는 김재겸에게서 멀어지려던 걸음을 다시 바닥에 붙였다.

“그리고 같은 의사로 취급해 주기 싫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이름 석 자로 부르세요.”

김재겸의 오지랖은 나를 꾸준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런 내 태도에도 김재겸은 자존심이 없는 사람처럼 내 뒤를 따라붙었다.

“에이, 거짓말. 사실은 궁금하잖아요, 유정이 얼굴.”

그런 김재겸의 말이 나를 화나게 했다. 아픈 상처고, 평생토록 새겨질 남의 치부를 아무한테나 까발리고 싶은 걸까. 내가 걸음을 우뚝 세웠다. 김재겸의 웃는 낯이 미치도록 꼴 보기 싫었다.

“환자의 사적인 정보를 제가 알아야 하나요?”

내 차가운 말씨에 김재겸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물들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까 물어보는 걸 들어서.”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걸 굳이 말하려는 의도가 뭐예요?”

아이는 기껏해야 초등학생 저학년쯤 돼 보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이 무언가를 감추는 이유는 그만한 상처가 자리 잡고 있어서였다.

아이는 어른인 나를 경계하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아주 잘 알았다. 형을 만나기 전까지 항상 내가 짓던 표정이었으니까.

나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는 김재겸의 시선을 피했다. 눈가가 시큰하게 올라왔다. 분노로 인해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때의 나는 내 치부였다. 그래서 들키고 싶지도, 더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건물 후문에 위치한 벤치에 몸을 눕히듯 앉혔다. 목 받침대가 없어 뒤로 한껏 젖혀졌던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눈꺼풀을 꾹꾹 눌러 댔다.

내게 가해지던 무수한 손찌검, 급기야는 나를 겁탈하려 들었던 난폭한 움직임은 떠올리기만 해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잊은 줄 알았던 고통이었다. 형에게 치우쳐져 마치 없는 과거인 듯 굴었던 그날의 그 고통은 평생 나를 괴롭힐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고통은 그 아이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안식처가 필요했다. 내 숨통을 트이게 해 줄 형이 필요했다. 호흡이 거칠었다. 무작정 들이쉬고 내쉬기만 하던 숨이 은은하게 다가오는 페로몬에 멎어 들어갔다. 형의 페로몬은 아니다.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올렸다.

“미안해요. 화나게 하려던 건 아니었고, 나는 유정이가 걱정돼서… 그래요, 이 말도 뭔가 이상하게 들리겠죠. 그런데 일단 오해는 풀고 싶어서요.”

내 앞에 선 김재겸이 밭은 숨을 열의 없이 뱉었다.

“……유정이는 지금 보호가 필요해요.”

김재겸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진지했다. 김재겸을 마주하고 난 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보호. 나는 그 시절 내게 가장 간절했던 단어를 곱씹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유정이 편에 서 줄 사람이 필요해요.”

“……."

“들어 줄래요?”

나는 대답 대신 김재겸을 향해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김재겸은 어느덧 안정적이게 변한 호흡을 정리하며 내 옆에 앉았다.

“유정이는 가정에서 학대를 받은 아이예요. 유정이 부모는 지금 재판 중이고요. 처음에는 Bruise(타상)가 심해서 입원을 했는데, 다리를 저는 게 이상해서 제가 멋대로 추가 진료 진행했어요. 유정이 친모 되는 사람이 Epileptic(간질 환자)인데 임신한 상태로 항경련제를 복용했었나 봐요. 뭐,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유정이 척수에서 Neuroblastoma(신경아세포종)가 발견됐다는 거예요.”

신경아세포종은 신경 세포가 암으로 변질된 소아암이었다. 다리만 절고 있는 걸 봐선 종양이 생긴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신경아세포종은 악성이었기에 금방 다른 부위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그 아이는 나보다 더 혹독한 운명을 타고난 것 같았다.

“Bone marrow transplantation(골수 이식)을 해야 Prognosis(예후)가 좋은데 맞는 공여자도 없고. 혹시 5%의 확률을 빌어서 바라더라도 과연 부모가 선뜻 골수를 줄지 의문이라서요. 그래서 유정이한테는 이번 재판이 특히나 더 중요해요.”

아닌가. 나보다는 나았을까. 유정이는 적어도 나보다 더 빨리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고, 자신을 챙겨 줄 좋은 의사도 만났다.

같은 아픔임이 분명한데도 나는 유정이와 내 상황을 비교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내가 과연 유정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때처럼 도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자신이 없었다.

“부탁할게요, 이 선생님.”

김재겸은 가만히 앉아 있는 내게 아까 내밀었던 포도 맛 막대 사탕을 다시 뻗었다. 김재겸의 손에 들린 사탕을 받기가 망설여졌다. 김재겸 역시 내게 그 사탕을 억지로 쥐여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재겸의 표정이 점점 아쉬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내 주위를 감싼 형의 페로몬이 나를 질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형은 왜 그날 내 손을 잡아 주었을까. 나는 지난 10여 년간 갖지 않았던 의문을 그제야 제기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그때의 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직접 겪어 보고 나니 그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김재겸이 내게 형처럼 유정이를 책임지라고 한 게 아니었음에도 나는 그 부탁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다.

이기적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손을 쥐고 그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왔으면서, 나보다도 어린 유정이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었다.

‘형! 어디 가?’

순간 내가 고아원을 뛰쳐나올 때 나를 쳐다보던 아이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너희를 두고 달아나던 나를 보며 너희는 그렇게 물었었다. 어딜 가냐고, 언제 올 거냐고. 병원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성급하게 걷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씨발, 진짜.”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혹시 김재겸이 자리를 떴을까 봐 병원 후문 벤치로 향하는 뜀박질이 아주 조급했다.

내가 숨을 몰아쉬며 벤치 앞에 도착했을 때, 사라졌을 줄 알았던 김재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김재겸의 손에 들린 사탕을 빼앗아 들었다.

“골수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항원 세 개만 맞으면 부모한테서도 받을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반일치 골수 이식 말하는 거예요? 최근에 임상 수술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직 진행 중인 연구인 데다가 안전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안전이 보장된 의술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면역에 부작용 일으키는 세포 없애고 생착만 성공하면 문제없을 거예요.”

내 단호한 목소리에 김재겸은 멍하게 벌어진 눈을 가만히 깜박였다. 자식의 골수가 부모와 맞을 확률은 고작 5%에 불과했다.

2008년도에는 형제와 골수가 맞지 않는 경우에는 다른 공여자를 찾는 방법밖에 없었겠지만 아마 이맘때쯤부터였을 것이다. 항원이 전부 들어맞지 않더라도 부모의 골수를 채취해 반일치 골수 이식을 처음 시도했던 것이.

실제로 그 임상 수술이 성공해 2018년도에는 골수가 맞는 공여자가 없을 경우에는 반일치 골수 이식으로 진행했다. 예후가 특별히 좋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 해 볼 것도 아니었다.

전공은 아니었어도 반일치 골수 이식으로 골수를 정상적으로 생착시켰다는 연구 논문을 보기도 했었고, 그 원리도 이해했다. 내 말에 김재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런 김재겸을 보며 손안에 든 사탕을 세게 쥐었다.

그것은 진정으로 김중현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나의 첫 도약이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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