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Prologue (1/14)

Prologue

시린 겨울바람을 차단한 채 맞는 아침 햇살은 포근했다. 얼굴을 가감 없이 덮는 매서운 햇빛에 눈을 뜨면, 꾸역꾸역 유지해 오던 나의 현재가 이어진다.

회피하고 싶었던 내일을 맞아서인지, 간밤에 먹었던 수면제가 문제인 것인지 몸이 무거웠다. 약에 취한 것처럼 축 처지는 몸은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수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버거웠다.

느릿하게 끔벅이던 눈을 반쯤 뜬 채 몸을 일으켰다. 책상 위에 놓인 여러 개의 약통 중 ‘Depressant(억제제)’라고 적힌 통을 집어 들었다. 이제는 습관성으로 아리는 아랫배를 한번 쓸고는 약 여섯 알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약에 의존한 세월만큼이나 축적되는 내성에 대한 근심은 물과 함께 넘어가는 이물감이 가시자 금세 멎어 들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아슬하게 지탱된 몸이 휘청거렸지만 괜찮았다. 수면제의 약효가 가시고 나면 어떻게 해서든 하루를 버텨 낼 수 있었으니까.

이런 나의 하루가 모여 현재가 되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멈출 줄 모르고 오늘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 하루들을 아득바득 이어 나갈 생각이다.

***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술이 일곱 시간 경과하면서 수술방의 분위기가 점차 늘어지기 시작했다. 다소 길어진 수술 시간 탓에 집중력이 흐려진 것이다.

수술 현미경에서 잠시간 눈을 떼며 침침한 눈을 감았다 떴다. 땀 때문에 시야가 가려 눈을 찡긋거렸으리라 오해한 보조가 하얀 천으로 내 관자놀이 부근을 훔쳤다.

오늘따라 유난히 컨디션이 저조했다. 진작에 끝을 보았어야 할 수술이 이렇게까지 늘어진 데에는 유달리 가라앉은 몸 상태가 한몫했다.

그 때문인지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들어오는 수련의의 모습에 날이 섰다.

“고개 쳐들 생각 없으면 나가.”

“죄, 죄송합니다!”

정적이 감돌던 수술실에 뒤틀린 목소리가 울리자 한차례 경고를 받은 수련의가 몸을 바짝 세웠다. 화들짝 놀라 커진 음성이 잔뜩 예민해진 신경을 건드려 작게 인상을 썼다. 목이 바싹 타들었지만 갈증을 해소하는 대신 혀로 입술만 축이고 말았다.

사실 꾸벅꾸벅 졸던 수련의에게 화가 났다기보다 컨디션을 따라가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평소보다 굼뜬 손이 신경질적으로 보조가 내미는 도구를 받아 들었다.

애초부터 제시간에 끝을 냈으면 벌어지지 않을 상황이었을 텐데. 수련의에게 향했던 비수가 돌연 방향을 바꿔 날 찔러 댔다. 이제 와 사방으로 뻗는 화를 가라앉힐 방법은 없었다.

쥐 파먹은 긴장을 흠씬 뒤집어쓰고 내 눈치를 보는 수련의가 거슬렸다. 그러나 나는 그를 한 번 더 쏘아붙이는 대신 수술 현미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1cm 너비로 절개한 뇌를 핀셋으로 벌렸다. 뇌실 내의 종양을 제거하자 생기는 출혈에 어시스턴트가 석션기를 가져다 댔다. 출혈 부위를 확인하고 지혈하는 움직임이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이었다.

두개(머리뼈)의 봉합만을 앞둔 채, 오랜 시간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은 목을 한 바퀴 돌리며 마무리 단계를 밟던 찰나였다.

“비켜.”

“네?”

귀신같은 직감이 날 뒤덮었다. 의료 도구를 든 채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그것이 착각이 아님을 알려 주듯이 손의 근육이 경직되면서 들고 있던 기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생님!”

날 부르는 목소리가 마치 다른 공간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수술대 근처에서 벗어난 몸은 극심한 졸음을 떨치기 위해 몸부림쳤다. 서서히 아득해지는 시야 사이로 내게 손을 뻗는 어시스턴트의 모습이 담겼을 때, 익숙한 어둠이 닥쳤다.

하늘이라 하면 보통 새하얀 구름이 끼어 있는 맑고도 푸른 하늘을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하늘에서 먹을 부어 놓은 듯 아주 새카만 암흑을 연상한다. 밤과 낮의 경계가 모호한 어두운 하늘의 본질을 가리는 건 해와 달이라 생각했다.

달빛 한 줄기 찾아볼 수 없는 짙은 밤하늘에 깔린 세상을 들여다보자면 꼭 내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세상은 발끝을 내려다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으니까.

그런 내게도 해와 달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해이자 달이 있었다. 좀처럼 진전하지 못하는 나의 세상을 어떨 때는 과감하게 비춰 주었고, 어떨 때는 은은하게 비춰 주었다.

그 빛은 나에게 있어서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과거형이 된 지금. 나는 내게 내리쬐지 않는 빛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그건 내 구원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고, 너를 놓지 못하는 내 어리석은 미련이었다.

너라는 구원이 내게 머문 세월은 자그마치 10년이었다. 그 가치는 감히 수로도 환산할 수 없다. 더러운 욕망에 치우친 나는 너를 저버렸고, 네가 없는 내 세상을 뒤덮은 건 어둠이었다.

또다시 그 어둠 속을 방랑한 지도 어느덧 9년이 흘렀다.

나는 무섭도록 익숙한 이 어둠이 싫었다.

가느다랗게 뜨인 눈이 새하얀 천장을 담았다. 낯익은 방 천장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려 했으나 무뎌진 정신은 의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눈을 몇 번이나 더 끔벅거렸을까. 나는 이마를 짚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병실이었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이 병실 베드라는 것을 자각하자 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머리를 강타했다.

수술 도중 정신을 잃었다. 수백 번의 수술을 집도하면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길면 하루 온종일 붙잡고 있었던 수술대에서 고작 일곱 시간 버티고 졸도했다니. 스스로도 기가 차 인상을 쓰며 원인을 되짚어 봤다.

일단 수면 장애를 앓으면서 먹기 시작한 수면제 탓은 아니었다. 수면제인 브로발린의 약효는 기껏해야 네 시간이었고, 두개를 열었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한 정신이었다. 졸음이 몰아치기 전 손에 힘이 풀리며 이 느닷없는 증상을 눈치챘다는 것이 더 찝찝했다.

주먹을 쥐는 듯 살짝 오므린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설마…….

“일어나셨어요, 선생님?”

무언가를 직감하고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이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병실 안으로 들어오던 수간호사가 굳어진 얼굴 근육을 억지로 펴며 웃었다.

그제야 간과해 버린 현실을 직시했다. 국가 고시와 전문의 시험에서 수석을 거머쥐며 2류 병원의 작은 희망이 되었던 의사는 어느새 환자의 머리를 열어 둔 채로 졸도한 형편없는 의사가 되었다.

“환자는 어떻게 됐나요?”

“수술은 잘 마쳤어요. 자세한 건 경과를 두고 봐야 하겠지만 Bleeding(출혈)도 잘 잡은 터라 CT에서도 별문제 없었구요.”

“……다행이네요.”

나름대로 잘 부지해 오고 있던 현실이었다. 암울한 세상으로 되돌아오면서 오히려 더 열심히 살았다.

어떻게든 잠들기 위해 약에 의존했고,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더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이번 일은 단순히 면허 정지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다 여겼던 나락은 사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선생님.”

“네.”

“저, 그게…….”

절망적이게 이어 가던 상념을 깬 수간호사가 머뭇거렸다. 곤란한 듯 아랫입술을 여러 번 깨무는 행동을 보니 다음으로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는 눈앞에 마주한 거대한 벽을 수용한 채 눈을 감았다.

“수면다원검사 한번 받아 보시겠어요?”

훗날 나의 구원자를 다시 보게 되는 날을 기약하며, 네가 없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찰나의 순간에 눈이 멀어 멀어져 가는 빛을 좇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너무 캄캄해서 보이지 않았다. 내 손의 형태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서, 구원을 저버린 대가로 생겨난 무수한 장벽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불혹도 채 넘기지 못한 나이에, 나는 네가 마지막으로 남겨 둔 흔적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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