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0 화
“13만 5천 원.”
원래 점심은 초밥을 간단하게 먹을 생각이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이것 저것 주문을 하니 금액이 꽤 많이 나왔다.
그래도 직원들이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한가하겠지.’
이제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버렸다.
보통 이 시간부터는 한가하기 때문에 직원들과 번갈아 밥을 먹을 생각으로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푸드코트 입구를 지나 우리 가게로 걸어갔는데 아직 가게 앞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뭐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처음에는 우리 가게에서 음식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손님들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무언가를 둘러 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고개를 비집고 안을 쳐다볼려고 했는데 하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용을 들어보니 하연이는 고객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를 보니까 아까 우동 컴플레인을 건 여자였다.
나는 사람들 사이로 간간히 대화를 들을 수 있었는데 하연이가 고객에 옷에 무언가를 흘린 모양이다.
내가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가지고 온 초밥을 옆에 테이블에 내버려 두고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는데 무릎을 꿇고 있는 하연이가 보였다.
그리고 순각적으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로이스에서 나와 경쟁을 하다가 밀려나고 지금은 제주도로 떠난 예전 부점장 최지연도 저렇게 무릎을 꿇은 적이 있었다.
상황을 키우기 싫어서.
자존심이 상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는데 결론적으로 그녀는 그날 이후로 변했다.
아무리 손님은 왕이고 장사꾼은 죄인이라고 하지만 꼭 저렇게 까지 몰아 붙여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로하를 최고의 브랜드로 만들고 싶지만 이렇게 까지 해서 장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바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있는 이하연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하연. 일어나.”
나의 손길에 하연이는 놀라서 바로 일어섰는데 얼굴을 보니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사장님.”
말과 함께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떨어졌는데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아까 둘이 대화하는 것으로 대략적인 유추가 가능했지만 일단 정확한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그녀에게 물었다.
“고객님과 부딪혀서 우동 국물을 흘렸는데 고객님께 사과를 드리고 있었어요.”
하연이가 우동 국물을 흘렸다면 그녀의 잘못이 맞다. 하지만 카운터에서 일하는 그녀가 고객과 부딪힐 이유가 없었다.
“왜 부딪히게 된 거야?”
“고객님이 다 드시고 치워달라고 하셨어요. 제가 쟁반을 치울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어나셔서 피할 수가 없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완전히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고객이 원인을 제공한 것도 있었다.
“저기요. 당신은 누구인데 끼어들어요.”
내가 하연이와 이야기를 들고 있자 여자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불렀는데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이 여자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나이가 50은 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가방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악세사리까지 종류별로 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아까 볼 때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가까이 보니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내 말 무시해요?”
내가 잠시 여자가 누구인지 생각을 하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 여자가 다그쳤다.
“죄송합니다. 저는 알로하의 사장 김정훈이라고 합니다.”
“사장이요?”
사장이라는 나의 말에 여자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아무래도 사장이 직접 올 줄은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네, 제가 사장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희 가게에 오셔서 불편한 경험을 드린 것 같습니다. 제가 버린 옷은 변상을 해드릴테니 이제 그만 화를 풀어주십시오.”
솔직히 말해서 여자가 하는 태도를 봐서 옷을 변상해 주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여자 말고도 다른 고객들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뒤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여자가 너무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나는 최대한 성의를 보여서 다른 고객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줄 생각으로 참았다.
“그것은 당연하고요. 직원 교육도 똑바로 시켜야 할 것 같네요. 아무리 배운 것이 없어서 이런 일을 하고 있더라도 사람이 기본적인 예의가 있어야 하는데 저 사람은 예의가 없네요.”
하연이 무릎을 꿇은 것 때문에 많이 화가 났다.
그럼에도 다른 고객들이 보고 있으니 한 번 참았다.
하지만 내가 한 발 물러나니 여자는 계속해서 선을 넘고 있었다.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성의 끈이 끊겨 버렸다.
“저희가 실수 부분에서는 적절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희 직원을 모욕하는 발언은 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칫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고객님도 예의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걱정이 되네요.”
“뭐라고요?”
나의 말에 여자가 톡 쏘듯이 소리쳤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완전히 저희 직원의 실수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몸을 일으켜 부딪힌 사람은 고객님이니까요. 그래도 저희는 나름에서는 최선의 배려를 해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계속해서 무시하시는 발언을 하시면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저희 직원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입니다.”
이곳은 뉴월드 백화점이다.
단비가 다니는 직장이고 친구인 수아가 지점장으로 있는 매장이다.
고객과 말다툼을 하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알로하에도 그렇게 좋지 않은 영향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냥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나의 말에 여자는 얼굴이 빨개시면서 분노를 끓어 올리는 것 같았다.
“당신 미쳤어? 너 내가 누구인 줄 알아? 나 백화점 VIP야.”
여자는 악을 쓰면서 소리쳤는데 그때 갑자기 몇 명의 사람들이 푸드코트로 왔다.
백화점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직원들이었다.
이렇게 소란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달려와 처리를 하는 직원들인데 컴플레인의 1선에서 가장 고생하는 직원들이다.
평소에 진상 고객들을 상대하는 것을 보고 멘탈이 진짜 강하다고 느꼈는데 나와 연관이 되어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객님. 무슨 일 있으세요?”
“한 팀장. 잘 왔어요. 내가 진짜 여기서 무슨 일을 당하는 지. 기가 막혀서 진짜. 뉴월드처럼 수준 높은 백화점에 어떻게 이런 저급한 브랜드가 들어왔는 지 모르겠네요.”
한 팀장이라고 하는 백화점 당당자가 알아보는 것을 보니 VIP라고 하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상인 여자는 팀장에게 자신이 유리한 대로 이야기를 이것 저것 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한 팀장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알로하 사장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일단 이곳은 사람이 많으니 따로 장소를 옮겨서 사과를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같이 가시겠어요?”
사과를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백화점 직원들까지 오자 구경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는데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것은 나도 찬성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고객 상담실에서 뵙겠습니다.”
한 팀장이라고 불린 여자는 진상 고객 옆에서 비위를 맞춰주면서 고객 상담실로 데리고 갔고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하연을 쳐다보았다.
“이하연. 괜찮아?”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는데 지금은 눈물을 그치고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항상 고객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것을 강조했던 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고객에게 이야기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사장님. 저희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고객이랑 싸웠으니 저희 패널티 받는 거 아니에요?”
“준다고 하면 받으면 되지.”
고객들과 말싸움을 하기는 했지만 후회는 없다. 만약 이것 때문에 패널티를 준다고 해도 기껏해야 서비스 교육 참석 정도일 것이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알로하 사장이 고객과 드잡이질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이다.
아까 보니까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앞뒤 안 가리고 저질렀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나의 말에도 하연이는 계속 걱정이 된다는 표정이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사 가지고 온 초밥을 건넸다.
“걱정하지 말고 이거 직원들하고 나눠 먹어라. 나는 고객 상담실 다녀올게.”
하연이는 내가 주는 초밥을 두 손으로 받았는데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원래도 그렇게 크지 않은 몸이었는데 주눅이 들어서일까?
하연이의 몸이 조금 더 작아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하연.”
나는 하연이를 불렀는데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장사하면서 자존심은 내려놨지만 자존감까지는 잃지 말자. 알았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축 처져 있는 하연이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듣는 다고 두서없는 나의 말에 하연이는 비로서 웃음을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존심하고 자존감하고 비슷한 거 아닌가요?”
“몰라. 그냥 알아 들어. 나 갔다 올 테니까. 매장 잘 보고 있어.”
***
나는 고객 상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진상 고객이 보였는데 상담실 직원들이 화를 많이 풀어준 것인지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든 것 같았다.
“사장님. 오셨어요.”
한 팀장이라고 불린 직원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리고 나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제가 계속 사과 드렸는데 고객님께서 옷 변상 해주고 사장님이 직접 사과하시면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겠다고 하시네요.”
“제가 사과를 해야 하나요?”
솔직히 그녀가 처음에 그냥 사과를 받아주고 넘어갔으면 이렇게 얼굴을 붉힐 일도 없었다.
이제는 나도 감정의 골이 심해져 사과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나의 반응에 직원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저분이 백화점 VIP인데 아마 이번 일 걸고 넘어지면 알로하에도 그렇게 좋지는 않을 거에요. 잘못하면 기사가 날 수도 있고요. 변상은 아까 해준다고 하셨고 그냥 눈 딱 감고 사과만 하고 넘어가시면 좋을 것 같은데…”
팀장이라고 불린 여자는 말을 흐렸는데 하긴 그녀가 무슨 죄가 있을까?
갑자기 사건이 터졌고 그녀도 자신이 저지른 일도 아닌 것을 대신 비위를 맞춰주고 있다.
그녀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왠지 나한테만 일방적으로 사과를 하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심한 말로 모욕은 받은 것은 바로 우리들인데 말이다.
‘백화점 VIP여서 그런가?’
솔직히 일반적인 고객들보다 백화점의 매출을 가장 많이 챙겨주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VIP들이었다.
특히 VIP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 연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의 대답에 한 팀장이라고 불리는 여자의 표정은 밝아졌다.
내가 사과를 하고 오늘 일어난 일이 잘 해결 될 수 있게 기대하는 것 같았는데 아쉽게도 내가 할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그런데 혹시 그거 알고 계세요? 저도 VIP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