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9 화
똑똑똑.
사무실 열리면서 상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퇴근 안 해?”
“아, 지금 하려고.”
“퇴근하고 맥주 한 잔 어때?”
“맥주?”
“어, 오늘 촬영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런 날 맥주 한 잔 해야지.”
상현이는 손을 까딱거리면서 맥주 마시는 시늉을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났다.
대전에 가서 직원들과 회식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술은 잘 마시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부터 일해야 하는데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힘들게 일해서 그런지 밥먹고 쉬고 싶은 생각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현이의 말에 맥주를 마시는 상상을 했는데 오랜만에 친구와 한 잔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먹자. 어디서 먹을까?”
“차 가지고 가야 하니까 그냥 집 근처에서 먹자. 또 요즘에 아홉시까지 밖에 술 못 먹잖아.”
코로나 확진자는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에 따라서 방역수칙도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저녁 9시까지 영업을 제한하고 5인 이상 모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는데 밤에 영업을 하는 자영업자들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우리 알로하는 대부분의 가게가 8시에 문을 닫는다. 늦어도 9시까지 영업을 하는 추세였고 대부분 매장을 방문하는 인원도 4인 이하였는데 덕분에 영업제한 수칙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든 자영업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우리 가게는 이런 이유 때문에 코로나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거리두기 같은 제한이 없으면 일을 하는데 조금 더 편할 것 같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이제는 오픈한지 1년이 넘어서 그런지 고정적으로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들이 많이 생긴 느낌이었다.
“그러자. 다른 애들도 부를까?”
상현이도 첨단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았고 이왕 마시는 거 다른 애들도 부를까 했는데 상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둘이 먹자.”
“둘이서?”
“어, 아홉시까지 밖에 못 먹는데 애들은 퇴근하고 오면 끝나겠다.”
나는 예전에 알바생을 쓸 때고 그렇고 지금 본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도 시간은 잘 챙겨주고 있다.
예전에 너튜브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직장인들이 가장 바라는 복지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이 1등이었다.
상현이도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정시 출근과 퇴근이 보장되어야지 생활에 여유가 있다고 했다.
항상 언제 야근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지금처럼 퇴근하고 친구들과 술 한잔 하자는 약속도 잡기 어려울 것이다.
또 다음날 출근을 일찍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저녁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어렵다.
출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직원들의 회사 만족도는 크게 올라가는 것이다. 일과 일상을 구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 그럼 오늘은 우리 둘이 간단하게 먹자.”
***
“여기 괜찮다.”
나는 상현이와 집에서 가까운 통닭집으로 갔다. 전기구이로 바비큐 통닭을 해주는 곳이었는데 간단하게 친구와 맥주 한잔 하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았다.
“짠 할까?”
잔을 부딪치고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하루의 피곤함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캬…그래, 이게 행복이지.”
상현이는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확실히 예전에 서울에서 봤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다.
“기분 좋아 보인다?”
“어, 이제야 사람 사는 거 같다.”
“그래? 뭐가 그렇게 좋은데?”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가 아들 고생해서 출근한다고 아침밥 차려주지. 점심에는 상사들 꼰대소리 들을 필요 없이 맛있는 밥 먹지. 야근도 없고 이렇게 퇴근 후에 친구랑 맥주 한 잔 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냐.”
상현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 나였어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현이는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매일 아침을 챙겨주시는 것 같았다.
아마 서울에 혼자 살 때는 굶고 출근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또 출근을 해도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거의 내 비서처럼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부서와는 상하관계보다는 협업의 느낌으로 일이 많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실제 친구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에게 싫은 소리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게 나랑 같이 일 하기 잘했지?”
“어, 그런데 아직 잘 믿기지 않는다.”
“뭐가?”
“내 친구가 프랜차이즈 회사 사장에 건물주라고 하니까 말이야. 불과 1년 전만 해도 네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야.”
하긴 내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나도 상상도 못했다.
로또 당첨으로 많은 돈이 생겼지만 그게 인생을 편하게 해줄 뿐 바꿔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인생이 180도로 달라져 버렸다.
아마 친구들도 그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보통 이럴 때 친구들끼리 멀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들었다.
친구들이 질투와 시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이제는 차이가 좀 있다고 생각해서 내가 거리를 둘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을 예전이랑 똑같이 대할 생각이다. 상황이 변했을 뿐 사람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래, 열심히 살다보니까 이렇게 된 것 같다.”
“그래도 네가 잘 돼서 나는 기분이 좋다. 대신에 너 돈 많이 벌었다고 나중에 우리 멀리 하면 안된다?”
“야, 당연하지. 그럴 생각이면 너 회사로 부르지도 않았다.”
나와 상현이는 웃으면서 맥주잔을 기울였는데 회사 일로 정신이 없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친구과 우정을 쌓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어, 정훈아, 퇴근했어? ]
“응, 퇴근했어. 무슨 일이야?”
전화의 주인은 정수아였다.
[ 오랜만에 같이 운동이나 할까? ]
본사를 만들고 대전점에 다녀오면서 뉴월드광주점에 갈 일이 없어졌다.
하연이와 한승이가 워낙에 일을 잘 해주고 있어서 특별히 신경을 쓸 일도 없었는데 그쪽에 갈 일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정수아와 만나는 일도 줄어들었다.
예전에 광주점으로 출퇴근 할 때는 커피도 한 잔씩 하면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단비 때문에 그녀와 조금은 어색해진 것 도 있었다.
“운동? 나 친구랑 맥주 마시고 있어서 오늘은 어려울 것 같은데…”
[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
“어, 우리는 다음에 보자.”
***
“조심히 가라.”
“그래, 내일 회사에서 보자.”
상현이와 헤어진 나는 집으로 걸어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갔는데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알딸딸한 이 기분이 좋았다.
집 주변에는 도로가 예쁘게 꾸며져 있었는데 확실히 비싼 아파트여서 그런지 관리도 잘 되었고 은은한 조명도 잘 되어 있어서 밤에 산책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정훈아.”
조경에 감탄하면서 걸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앞을 쳐다봤는데 정수아가 서 있었다.
“어, 수아야.”
“이제 집에 오는 거야?”
“응, 운동하고 있었어?”
“어, 헬스장에서 뛰니까 답답한 것 같아서 오늘은 산책할 겸 밖에 돌고 있었어.”
그녀는 편한 운동복 차림에 머리를 묶고 있었는데 땀도 조금 흘리고 있었다. 나와 전화를 끊고 계속 운동을 한 모양이다.
“어, 여기 산책하기에 좋은 것 같다.”
“이 근처에서 술 마신 거야?”
“응, 친구 집도 여기서 가깝거든 여기 앞에 통닭집에서 가볍게 한 잔했어.”
“그랬구나. 그럼 나도 갈 걸 그랬다. 이제 집에 가려고?”
“그래야지.”
“그럼 우리 집에 가서 맥주 한 잔 더 안 할래? 나도 운동해서 그런지 목 마르다.”
수아의 제안에 나는 단비가 생각났다.
그녀가 광주점에 퍼지는 소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수아와 나는 잘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좀 돈을 벌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재벌집 막내딸이었다. 살아온 세월과 환경이 다르다.
생명의 은인 타이틀로 친구까지는 어찌어찌 될 수 있겠지만 그녀와 연인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다니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이야기다.
나는 그랬지만 단비는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그녀를 생각하니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것은 조금 부담이 되었다.
그것도 수아의 집에서는 말이다.
예전에 친구들과 남녀 사이의 친구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친구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로 좋아하는 마음만 생기지 않으면 충분히 친구사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수아와도 친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남녀 사이에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연인 사이에서 이런 것을 알아서 조심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에 먹자.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배가 부르다.”
나는 말을 돌려서 거절을 했다. 그러자 그녀가 나한테 말했다.
“너 요즘 날 멀리하는 것 같다. 여자친구 때문에 그래?”
그녀의 말에 나는 놀랐다. 수아에게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 여자친구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 그런데 나 여자친구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 너 SNS에 보니까 팔로우 된 여자 1명 밖에 없던데? 그거 여자친구 아니야?”
“아.”
SNS는 거의 매장 홍보용으로만 관리를 한다. 뭐 다른 가게 사장들과는 맞팔을 하기는 했는데 일반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비밖에 없었다.
수아가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나혼자 비밀로 했다는 것이 조금은 창피했다.
“어, 근데 네가 말 안하길래 나도 안 물어보고 있었지. 왜 말 안한거야?”
“사실 여자친구가 뉴월드에 다니고 있거든 혹시나 이런 저런 이야기 나올까 봐 비밀로 하고 있었어.”
“진짜? 누군데?”
“현단비라고 식품팀에 있어.”
나의 말에 수아는 알았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아, 어쩐지 내가 저번에 SNS에서 보고 어디서 본 사람 같았는데 그 프리미엄 식품관 초기 기획안 쓴 직원 맞지?”
“어, 여자친구가 기획안 쓰고 내가 뽑혔잖아. 혹시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이야기 못 하고 있었어.”
나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친구가 없잖아. 그래도 너랑은 좀 잘 통하는 것 같아서 친해지고 싶었는데 요즘에 왠지 네가 벽이 있었거든…”
“내가 그랬나?”
“어, 은근히 철벽이었어. 내가 여자친구 때문에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
“그래, 고맙다.”
“이제 알게 됐으니까 다음에 나 여자친구 소개 시켜줘.”
그녀의 반응을 보니 내가 여자친구가 있는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 것이다.
역시 단비가 지레짐작 겁을 먹은 것 맞았다.
오히려 이렇게 알리고 나니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단비가 그녀에게 잘 보이면 단비의 직장 생활에 청신호가 들어오는 것이니 서로 알아도 나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다음에 소개 시켜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