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2 화
“엄마, 그만 물어봐. 체하겠어. ”
갑자기 찾아온 단비와 우리 가족은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가 단비에 대해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면서 흡사 인사 청문회 같은 분위기가 될 뻔 했는데 다행히 은정이가 중간에서 제재를 해주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아니에요. 어머님. 궁금하신 것 다 물어보세요”
“어머님?”
엄마는 단비가 어머니라고 불러주자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단비는 그런 엄마의 궁금증에 다 답해주고 있었는데 나는 단비가 혹시나 그런 엄마를 부담스러워 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시간이 좀 흐르자 본래 은정이는 조심하는 분위기였는데 단비가 적극적으로 질문에 대답해주자 자신도 궁금한 것들을 조금씩 물어보기 시작했다.
“뉴월드 백화점에서 일하시면 오빠랑 자주 보겠네요.”
우리 둘 다 뉴월드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만났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단비는 프리미엄 식품관의 최초 기획자였고 나는 그 프로젝트로 들어간 입점업체 사장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결정권은 없었지만 혹시 이것 때문에 이런저런 받았다는 말이 나올까 봐 백화점에서는 서로 아는 척을 자제하고 있었다.
“아니야, 괜히 연애 한다고 하면 말 나올까 봐. 백화점에서는 서로 모르는 척 하고 있어.”
단비를 대신해서 내가 말했는데 은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사내 연애니까 조심해도 괜찮은 것 같아.”
***
저녁도 먹고 간단하게 술도 한 잔 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단비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 정훈은 집을 나섰다.
“엄마가 질문 많이 해서 힘들었지?”
“아니야, 오빠. 오히려 관심 가져주시니까 고마운 걸?”
단비는 정훈의 말에 고개을 저었다. 사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방문이었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이 모두 자신을 반겨 주었고 자신도 편하게 적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온 거야?”
“응? 그냥 오빠 가족들 어떤 분들이신 지 궁금해서 왔어.”
“진짜? 그래서 우리 가족을 만나 본 느낌은 어땠어.”
“어…좋으신 분들 같아. 특히 어머님은 오빠, 진짜 아껴주시는 게 느껴지더라.”
단비는 정훈에게 아무런 말하지 않고 왔기 때문에 혹시나 그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있었다.
자신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과감하게 움직였다.
정훈은 잘 모르고 있지만 지금 백화점 직원들 사이에서는 정훈에 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지점장인 정수아와 알로하 사장 김정훈이 연인 사이 일 수도 있다는 소문 말이다.
원래 소문이라는 것이 다 그렇겠지만 처음에는 단순히 지인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친구 사이라고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연인 사이로 까지 발전했다.
단비도 처음에는 실제 연인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봤을 때 진짜 사귀는 사이가 맞아. 지점장님 원래 포커페이스인 거 유명하잖아. 그런데 그 알로하 사장님한테는 안 그런다니까?”
“에이, 그래도 지점장님은 재벌이시잖아요. 알로하가 장사가 잘 된다고 해도 그냥 입점업체 사장인데 급이 너무 다르지 않아요?”
“아니야, 지점장님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외롭게 지냈다는 이야기 다들 들어봤지? 여기 내려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잖아. 알로하 사장님 보니까 친절하던데? 지점장님이 그런 거에 호감이 생겼을 수도 있어.”
“맞아요. 그 사장님이 장선우 어머님 수술비도 지원해줬다고 했잖아요. 엄청 착한 사람은 맞는 것 같아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이제는 자신이 있는 사무실에서까지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문득 정훈은 아니겠지만 지점장님이 호감을 가질 수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녀에게 정훈이 생명의 은인이었고 그의 다정다감한 성격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와 몇 개월 동안 사귀었지만 아직까지 다툼을 하거나 싸운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동안 대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정훈을 봐서는 지점장님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정훈이 관심이 없어도 지점장님은 정훈에게 관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만약에 지점장님이 그 마음을 정훈에게 표현한다면 그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훈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믿고 싶었지만 상대는 재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빨리 회사에 자신과 정훈이 사귄다는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마침 정훈이 가족들과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에 알리기 전에 정훈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관계를 더욱 단단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원래 성격이라면 절대 안 했을 것이지만 그녀는 정훈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정훈의 가족들과 많이 친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까 자기 아버님이랑 어머님께 인사 드리기로 했었는데…”
정훈의 말에 단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정훈을 너무 궁금해 해서 만나기로 했는데 서로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아서 미뤄지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나도 인사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응, 엄마한테 물어볼게.”
정훈의 말에 단비는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그가 부담스러워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는데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다정했다.
술을 먹어서 운전히 힘들고 비교적 단비의 집과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걸어가고 있었는데 아직 밤의 날씨는 차가웠다.
정훈이 단비의 손을 잡아서 자신의 자켓 주머니에 넣어주었고 단비는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
“출근하시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침에 들어온 식자재들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면접을 통해서 총 8명의 신입 사원을 뽑았다.
처음에 몇 명을 뽑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었다. 본래 6명 정도 뽑으려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만두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인원을 더 충원하였다.
상무점에서 4명, 그리고 뉴월드광주점에서 4명, 절반으로 나누어서 일을 가르치기로 했는데 갑자기 직원들이 많아져서 가르치느라 정신이 좀 없긴 했지만 신입들이 적응해서 일이 익숙해져야 내가 쉴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을 내고 있었다.
“저희 식자재는 뉴월드푸드에서 입고를 해주고 있는데 이렇게 냉동식재는 냉동고에 냉장식재는 냉장고에 분리를 해서 넣어줍니다. 들어온 식재는 여기 있는 발주식재표를 보고 제대로 물건이 들어왔는지 검사를 하면 됩니다.”
“혹시 안 들어온 물건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디지컬랜드에서 일했던 김철수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사실 조형우 실장님은 본래 요식업에서 일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친절했던 그의 모습을 믿고 직원으로 채용하였다.
지금도 자그마한 수첩을 들고 나의 말들을 적고 있었는데 열정은 마음에 들었다.
“여기 발주식재표에 보시면 뉴월드푸드 담당자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여기에 전화를 하셔서 확인을 하면 됩니다. 아마 뉴월드에서 누락된 상품이라고 하면 다시 물건을 보내주던지 매장에서 지금 당장 필요 없는 식재라고 하면 다음날 보내 달라고 요청해도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 혹시 뉴월드 쪽에서 실수가 아니라 우리 쪽 직원들이 실수해서 꼭 필요한 식자재를 누락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 바로 저나 인차지인 조한승에게 연락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픈 시간 전에 무슨 해결책을 내 놓을 테니까 말이죠.”
“네, 알겠습니다.”
신입사원들은 씩씩하게 대답을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예전에 내 생각도 나는 것 같았는데 열정이 가득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가 사장이라는 사실이 확 체감이 되었다.
“식자재 정리를 완료하면 다음은 바로 튀김기에 기름을 부어야 합니다. 기름은 온도가 올라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아침부터 준비를 해두어야지 깜빡하고 지체한다면 오픈 시간까지 준비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
아침에 일어난 나는 출근을 준비했다.
뉴월드광주점의 매출이 늘어났고 신입사원들의 교육도 같이 진행하면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일하는 사람이 늘어나니 확실히 일이 줄어들기는 했다.
신입들이 자그마한 일이라도 도와주기 시작하니 나와 다른 직원들이 하는 다른 일이 줄어들었는데 그들이 빠르게 적응하고 있어서 이번 주만 지나면 내가 매장에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쉬어야겠다.’
바쁘게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몸이 쉬는 거지 일을 쉬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는 가맹점 문의도 해결해야 하고 본사를 만드는 일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출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 박상현 >
오랜만에 걸려온 상현이의 전화였다. 최근에 일이 바빠서 통화를 못했는데 나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 정훈아. 지금 통화 가능해? ]
“응, 가능해. 아침부터 네가 무슨 일이냐?”
[ 나 이제 광주 내려간다. ]
“광주? 발령 받았어?”
갑자기 뜬금 없이 광주로 온다는 말에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광주에도 녀석이 다니는 회사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으로 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회사 그만 뒀다. ]
“회사를 그만 뒀다고? 왜?”
[ 진급 떨어져서 고민을 좀 했는데 그냥 퇴사하는 게 맞는 것 같아. ]
저번에 진급을 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올해 진급을 하지 못하고 미끄러진 모양이다.
“왜, 떨어질 수도 있지. 올해 열심히 하면 진급시켜 줄 수도 있잖아.”
[ 아니야, 원래 나 밀어주던 이사님 계셨는데 줄을 잘못 선 것 같아. 이사님이 짤렸거든 아마 몇 년 동안 진급 못할 것 같아. ]
예전에 서울에서 같이 술을 마실 때 사내 정치가 심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고 말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 광주에서 뭐 하려고?”
[ 일단은 이직 준비하면서 집에서 좀 쉬려고 멘탈이 너무 털려서 안 되겠어. ]
하긴 나도 예전에 쫓기듯이 로이스를 나오고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알로하를 시작하면서 겨우 마음을 잡았는데 몇 년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으니 상현이도 우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광주와서 좀 쉬어라. 언제 오는데? 애들이랑 한 번 뭉쳐야지.”
[ 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다. 나 15일까지 일하고 그만두기로 했거든? 그 이후로는 언제든지 가능하니까 날짜 잡아보자. ]
15일. 나는 달력을 봤는데 그 이후라면 나도 아무 때나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나도 상관없을 것 같아. 그럼 내가 애들이랑 연락해서 날짜 잡을까?”
[ 어, 그러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
“됐다. 백수한테 얻어 먹어서 뭐하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욜, 장사 잘 된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사장님은 다르구나. 근데 나 완전히 백수는 아니다. 투자자라고 할까나? 코인으로 재미 좀 보고 있다. ]
“너, 코인 아직도 하고 있었냐?”
[ 당연히 하고 있지. 이번에 이직 준비하면서 쉬는 동안 재미도 해볼 생각이다. 수익이 나쁘지 않아. 요새 코인 많이 올랐잖아. ]
“그래?”
[ 너는 어때? 저번에 해본다고 하지 않았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