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8 화
슥슥
조형우는 연마봉으로 칼을 갈더니 갑자기 당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조각하듯이 당근을 깎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야채 카빙을 하시려고 그러는 구나.’
야채카빙은 식품을 조각하여 접시를 데코하는데 주로 사용하는 요리 기술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가게의 음식 데코는 빈약한 구석이 있었다.
동그란 접시에 돈카츠와 양배추가 산을 이루듯이 올라간다.
높이 솟은 양배추가 시선을 끌기는 하지만 이번에 시식회에 참가한 다른 업체들에 비해서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지금보니 당근으로 꽃을 만들려는 것 같았는데 접시에 데코하면 시선을 확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시간이었다.
우동국물은 이제 끓고 있었고 아직 돈카츠는 튀기지 않았다. 양념을 해두고 잠시 숙성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시간이라는 시간 안에 다 끝낼 수 있을지 걱정이 조금 되었다.
‘아니야. 원래 우리는 15분이면 식사 나가잖아…’
돈카츠는 그렇게 조리가 오래 걸리는 음식은 아니다. 튀기고 기름을 빼고 10분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히려 너무 빨리 조리하면 돈카츠가 식어서 심사위원들이 식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최적의 타이밍을 계산하자.’
조형우가 따로 생각하겠지만 나도 머릿속에 작업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재미있네.’
로이스에 입사한 이후로 요리와 관련된 드라마나 TV프로그램들을 많이 봤다.
거기에 보면 이런 음식 대결은 빠지지 않고 나왔는데 막상 내가 이렇듯 요리를 하고 있으니 방송에 출연했던 것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부터는 조리를 멈춰 주시고 조리가 완료된 음식들을 이 앞에 있는 테이블에 놓아주시기 바라겠습니다.”
한 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줄 곳 옆에서 조리과정을 지켜본 서규철은 조리시간 종료를 알렸다.
이미 4개의 업체 모두 조리를 완료하고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늦어서 허겁지겁 움직이는 브랜드는 없었다.
“이제 바로 옆에 있는 심사장에서 시식회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오후 2시에 이곳에서 최종 발표에 참여할 브랜드 2곳이 선정될 예정이면 그때 발표되지 않은 브랜드는 탈락으로 생각하시고 돌아가시면 되겠습니다.”
힘들게 PPT를 준비했는데 시식회에서 떨어지면 발표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맛에서 밀리는데 구구절절 브랜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설명을 모두 마친 서규철 과장은 음식을 가지고 조리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먹는 순서 등 궁금한 것들이 있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인가…’
시간을 보니 11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발표가 나오는 오후 2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있었다.
“다들 아침 드셨어요? 몸을 좀 움직였더니 배고프네요. 어디가서 국밥같은 거 먹고 오는 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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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온 순서대로 명인카츠의 카츠동부터 시식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먹는 순서에 대해서 뉴월드 측에서도 고민이 있었는데 그냥 간단하게 조리장에 들어온 순서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3개의 메뉴를 브랜드마다 하나씩 시식을 진행하여 최대한 공평하게 나누려고 노력했다.
참여한 브랜드 중 하나인 명인카츠는 밥위에 돈카츠와 계란이 올라간 일종의 덮밥이 주메뉴였는데 계란 흰자와 노른자가 알록달록하게 뎦여있는 것이 맛있게 보였다.
“음…맛있네요.”
음식을 먹은 심사위원들은 다들 감탄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심사위원은 총 3명이 참석했는데 먼저 지점장인 정수아, 그리고 식품팀 팀장으로 있는 표주환, 거기에 백제호텔의 수석 셰프으로 있는 구길환이 특별히 초빙되었다.
“소스도 맛있고 괜찮네요. 그런데 덮밥에 뿌려진 간장소스의 맛이 너무 강해서 생각보다 돈카츠가 죽는 느낌입니다.”
구길환은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표현했는데 거기에 동의한다는 듯이 정수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명인카츠의 시식이 끝나고 다음은 로이스 차례였다.
“이번에는 로이스의 크림파스타돈까스입니다.”
서규철은 설명과 함꼐 심사위원들 앞에 음식을 놔두었는데 구길환이 음식을 보더니 말했다.
“오, 이건 좀 기대되네요. 이야기를 들으니 장용철 셰프가 만들었다고 하던데 맞나요?”
그의 물음에 표주환이 답했다.
“네, 맞습니다. 로이스의 메뉴개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와 인연이 좀 있습니다. 예전에 냉장고를 도와줘에 같이 출연했었는데 실력이 괜찮은 셰프였어요. 양식이 전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파스타와 돈까스라…어떤 맛일지 궁금하네요.”
구길환은 장용철 셰프와 안면이 있는지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음식의 맛을 보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도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오, 역시 맛있군요. 솔직히 프렌차이즈라고 해서 크게는 기대 안 했는데 이 파스타 제대로 만들었어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느끼한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크림은 선호하지 않고 토마토나 로제를 주로 먹는데 이것은 아주 맛있는 것 같습니다.”
표주환이 구길환의 말에 맞장구 치면서 로이스의 메뉴를 칭찬하였다.
‘맛은 있네.’
정수아도 음식을 먹었는데 두 사람의 말처럼 맛이 있었다. 하지만 아까 카츠동도 그렇고 이번에 크림파스타돈까스도 그렇고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바로 돈카츠였다. 지금 자신들은 돈카츠 가게를 뽑는 중이었다. 기본적으로 돈카츠가 가장 맛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로이스의 심사가 끝나고 다음은 올빼미돈까스라는 브랜드의 차례였다. 여기는 커다란 왕돈까스로 승부를 했는데 대체로 평가는 보통이었다.
‘이 다음은 알로하인가…’
정수아는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알로하가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굳이 정훈과 친구가 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맛에는 여기가 제일 입맛에 맞았다.
“다음은 알로하의 히레카츠입니다.”
심사위원들 앞에 음식이 놓여지고 정수아는 커팅 된 돈카츠를 한 입 가져갔다. 역시 예전에 먹었던 그 생각이 맞았다.
딱딱한 고기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씹히고 있었다.
‘역시 돈카츠는 알로하가 맛있네.’
그녀가 감탄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구길환이 말했다.
“음…히레카츠. 어떻게 보면 기본이 되는 일본식 돈카츠라고 할 수 있는데 방금전 왕돈까스처럼 실망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구길한은 솔직히 말해서 올빼미돈까스에 조금 실망했다. 백제호텔의 수석 셰프로 있는 자신이 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커틀렛인지 돈까스인지 구분도 안 되는 음식이었는데 맛집이라고 했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거기에 다음에 나온 히레카츠는 솔직히 안심 부위를 그냥 빵가루 묻혀서 튀긴 음식 특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앞에 먹었던 카츠동이나 로이스의 크림파스타돈카츠가 더 좋은 것 같았다.
‘아마추어들은 아마추어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구길환도 알로하의 히레카츠를 입 안에 넣었는데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겉바속촉!’
돈카츠를 가장 잘 살린 느낌이라고 하면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였다. 하지만 이것이 생각보다 잘 살리기가 어렵다.
빵가루를 튀겨서 겉이 바삭한 느낌은 잘 살릴 수 있었지만 속이 촉촉한 느낌은 구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치즈카츠가 인기가 많은 이유도 고기를 대신하여 치즈가 촉촉한 속의 느낌을 살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일본식 돈카츠 범상치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안심돈카츠인데 속이 촉촉하다.
기름에 둘러 쌓인 고기는 튀길수록 안에 있는 육즙이 세어 나온다. 그런데 아직도 육즙이 살아있는 것을 보니 아마 최적의 튀김 시간을 신경을 써서 조리한 것이 분명했다.
구길환은 젓가락을 이용하여 히레카츠의 속을 살펴보았는데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비계나 힘줄 부위가 말끔히 제거되어 있었고 마치 다지기라도 한 것처럼 고기가 한번 뭉개져 있었다.
‘어쩐지 부드럽다고 했더니 맛없는 부위를 다 제거하고 단단한 부위를 다져서 부드럽게 만들었군…대단한 정성이야.’
시식회였다. 평상시에는 이렇게 하지 않다가 이번만 이렇게 정성을 들여서 조리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다른 브랜드들도 같은 조건이었다. 그들과 비교하면 정성의 차이가 맛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기에 접시 옆에 있는 이 데코레이션 야채는 자신도 쉽게 할 수 없는 수준의 작품이었다.
‘이거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하군.’
****
“저희가 뽑힐까요?”
간단히 밥을 먹고 나와 조형우 실장님. 그리고 한승이는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승이가 물었다.
“글쎄.”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도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다. 절반의 확률 우리가 못 뽑힐 수도 있었지만 만약에 안 뽑힐 것이라면 로이스도 같이 떨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 마음 편하게 먹자. 3호점은 다른 곳에 해도 되니까. 백화점에 들어가는 것은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지.’
저번에 뚝불 사장님의 인수 제의를 했고 부산에 있는 양혜원 점장도 가맹점 문의를 한 이후로 가맹점을 내고 싶다는 연락이 최근 들어서 곧 잘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지금 진행되고 있는 리얼맛집탐방이 좀 더 방송이 되면 이런 문의가 더 많이 들어올 것 같았다.
‘이번 시식회 끝나면 부산에 한 번 갔다오고 가맹점 가이드라인도 잡아야 겠다.’
처음에 어느 정도는 직영점 위주로 운영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양혜원 점장 정도의 실력자라면 가맹점으로 바로 맡겨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단비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 오빠, 지금 어디에요? ]
“나, 지금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는 중이야.”
[ 그래요? 오빠 축하해요. 최종 2개 브랜드에 선정 됐어요. ]
“진짜?”
나는 단비가 알려준 즐거운 소식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모습에 조형우와 한승만도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 네, PPT 발표 준비하셔서 이따가 3시 30분까지 8층에 있는 대회의실로 오시면 되세요. ]
“오케이, 알았어. 아, 우리 말고 다른 곳은 어디가 뽑혔어?”
[ 어…로이스에요. ]
혹시나 로이스가 떨어지길 기대하고 물었는데 역시나 끝까지 살아남았다. 하긴 준비한 것이 있는데 여기서 떨어지면 조금은 아쉬울 것 같았다.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 그럼 이따가 봐요. 오빠. ]
전화를 끊은 나는 두 사람에게도 마지막 PPT 발표만 남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한승이는 통과했다는 사실을 기뻐하면서도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이거 발표…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내가 올라가 발표를 해야 했다.
솔직히 긴장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더군다나 대학생 때 이후로 이런 발표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로이스를 생각하니 전투력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떨렸지만 스스로 잘할 수 있다고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 나는 쏴버리는 놈이야. 준비한 거 제대로 보여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