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 화
“후, 저 이런 거 처음인데…떨리네요.”
12월 5일.
드디어 시식회가 진행되는 날이 찾아왔다.
뉴월드 백화점에 도착하자 한승이는 긴장이 된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렸는데 떨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실장님은 안 떨리세요?”
한승이는 같이 온 조형우에게 물었는데 실질적으로 요리를 해야 하는 그는 의외로 덤덤한 모습이었다.
“어, 나는 괜찮은데? 빨리 재료랑 챙겨서 들어가자.”
“네.”
우리 세 사람은 준비한 재료를 가지고 조리를 하는 백화점 지하 1층 조리장으로 향했다.
지하로 내려가 조리장 입구로 들어가는데 나는 안내를 해주고 있는 단비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눈인사를 했는데 그녀도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로하 맞으시죠? 자리는 이쪽으로 자리하시면 되세요.”
단비는 우리 일행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었는데 우리는 준비해 온 재료들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이미 먼저 온 다른 업체들은 시식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것 같았다.
“아까 안내해 준 분 여자친구 아니세요?”
한승이가 귓속말로 나에게 단비에 대해서 물었는데 가게에 몇 번 온 적이 있는 그녀를 알아본 모양이다.
“어, 맞아.”
“여기 직원이었어요?”
“어, 혹시 나중에 무슨 말이 나올까 봐. 여기서는 모르는 척 하기로 했어.”
“네.”
늦게 왔기 때문에 서둘러서 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단비의 상사로 보이는 남자가 조리장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남자의 말에 준비를 하고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는데 시선이 쏠리자 남자는 말했다.
“뉴월드 백화점 식품팀 서규철 과장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시식회 어떻게 진행되는 지 설명 드리려고 왔습니다.”
남자가 소개를 끝내자 단비가 준비한 프린터물을 참여한 업체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먼저 사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부터 조리를 시작하셔서 매장 당 3 개의 메뉴를 각각 3명이 먹을 분량으로 준비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미리 공지가 되었던 이야기다.
조형우와 상의를 한 끝에 우리 매장에서는 최근에 만든 체다모짜카츠, 히레카츠, 그리고 유부우동으로 시식회에 참여하기로 했다.
사이드로 우동과 소바 중에서 어떤 것을 할지 조금 이견이 있었는데 겨울이기도 하고 조형우가 우동이 조금 더 자신이 있다고 말해서 그것으로 결정하였다.
“현재 시간이 11시인데 12시까지는 조리를 완료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곳 조리장에서의 모습은 그대로 바로 옆에 있는 시식회장에 그대로 보여질 예정이니 신경을 써서 조리를 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서규철 과장은 간단한 시식회 진행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럼 지금부터 조리 시작하시면 되겠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말과 함께 조리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의 눈에 로이스를 알리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로이스 말고도 다른 2개의 업체가 있었지만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역시 로이스 였다.
‘강훈은 안 온 건가.’
로이스에서도 막 조리가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강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성격이면 분명히 왔을 것 같은데 조금은 의외였다.
‘뭐, 안 좋은 얼굴 안 보면 오히려 좋은 거지. 내 일에 집중하자.’
****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죠.”
“아, 제가 얼마 전에 종인이 형님을 만났는데 지점장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인지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요청을 드렸습니다.”
“저를요?”
“네, 형님께서 예쁜 동생이라고 자랑 많이 하시더군요.”
“오빠가요?”
정수아는 사실 지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오빠들하고는 쭉 떨어져 지냈었다.
친하다고 할 수 없고 어색한 사이였다. 더군다나 자신이 지점을 관리한다고 이야기하자 혹시나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닐지 견제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 오빠가 자신을 예쁘다고 칭찬했다니 입발린 소리가 분명했다.
“그것보다 할 말이 있다는 게 어떤 거죠? 이제 곧 시식회가 시작할 것 같은데 별 일 아니면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오빠의 후배라는 사실을 듣고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일 적으로 꼭 할 말이 있다고 만남을 요청해서 시간을 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미인과 있으니 시간이 빨리 가는군요. 사실 오늘 만나자고 말씀드린 이유는 참가한 브랜드 중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문제요?”
“네, 예민하다고도 할 수 있는 문제인데…지금 시식회에 참여한 브랜드 사장님 중에 저희 로이스의 직원이었던 브랜드가 있습니다.”
“직원이요?”
“네, 알로하라고 하는 브랜드입니다.”
알로하의 이름이 나오자 정수아는 놀랐다. 그녀는 김정훈이 생명을 구해준 이후로 그를 우연히 만나고 친구를 먹었다.
생명을 구해 주어서 일까? 이상하게도 그를 보면 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래서 친구가 되자고 했다.
다행히 그는 받아 주었고 나이도 비슷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혹시나 자신이 뉴월드 지점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부담스러워 할까 봐.
알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나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김정훈이 자신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많이 놀라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강훈이라는 남자가 알로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정훈이 예전에 로이스에 일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긴 아직 친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이런 사실 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지금 알로하 브랜드의 사장으로 있는 김정훈 씨는 예전에 저희 로이스의 직원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요식업에서 근무하다가 자기 브랜드 만드는 건 흔한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정수아의 말처럼 이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강훈은 흔한 일을 그렇지 않게 만들었다.
“네, 많이 있는 일이죠. 김정훈 씨는 올해 2월에 퇴사했는데 퇴사하기 전에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업무에도 불성실 했고 사실상 쫒겨나다가시피 했죠.”
강훈의 말에 정수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모르는 사람의 생명의 구해주고 가게에서 잠깐 일하는 모습을 봤을 때도 성실했다.
그리고 저번에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 나눌 때도 가게가 장사가 잘 되기 위해서 고뇌하는 모습을 봤을 때 불성실하게 일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강훈의 말을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네, 저희도 퇴사했으니 그 뒤로는 별로 신경을 안 썼는데 알고 보니 이 사람이 개업을 하고 저희 로이스의 노하우를 상당 부분 가져다가 썼더군요.”
강훈의 말에 정수아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전 직장이었으면 그쪽에서 있었던 경험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군요.”
“솔직히 전에는 개인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니 퇴직금이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터치를 하고 있지 않았으나…이렇게 만나서 경쟁을 하게 되니 아무래도 알고 계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만나자고 연락을 드린 겁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정수아는 강훈이 무엇을 어필하는 지 이해했다. 하지만 자신이 보이게는 두 회사 사이에 공통점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음식의 맛에 비슷한 점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아직 로이스 쪽 돈가스를 먹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음식을 먹어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훈은 다르게 받아 들인 것 같았다.
“좋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혹시 다음에 시간 되시면 식사를 같이 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아시는 지 모르겠지만 저희 브랜드가 프레쉬푸드의 자회사입니다. 서로 친분이 있으면 사업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네,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식품관 오픈 준비 때문에 바빠서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요.”
“그러시군요. 저는 언제든지 상관없으니 시간 되시면 연락주십시오. 이건 제 명함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
“국물에 들어가 있는 건더기 좀 건져 줄래?”
“네, 실장님.”
나는 조형우의 말에 맞춰서 조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본래 소스도 그렇고 다 공장에서 만들었지만 조형우는 이번에 한해서 직접 국물을 우려내고 소스도 직접 만들고 싶다고 하였다.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는데 아무리 공장에서 비슷하게 만들어도 여기서 직접 작업하는 것이 훨씬 맛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다들 고생하십니다.”
그렇게 조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왔다.
강훈이었다. 그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조리장에 모습을 비췄는데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서 인지 예전처럼 나에게 들이받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비웃음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테이블로 갔다.
자신의 테이블로 간 강훈은 열심히 조리를 하고있는 장용철 셰프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 하는 것 같았다.
장용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칼과 도마를 꺼내면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고기와 해물 그리고 야채를 손질하기 시작했는데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화구의 불까지 최대로 올리고 손질한 야채를 격하게 돌리는 장용철 셰프의 모습은 멋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바가 심한 것 같았다.
여기서는 보여줄 손님도 없는데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조리장에 모습이 촬영되어서 심사위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처음에는 위생과 같은 깔끔한 조리과정을 보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번 식품관에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푸드코트라는 것이다.
푸드코트는 요리사가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손님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화려한 퍼포먼스까지가 심사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훈이 그걸 말해준 건가…’
다른 두 곳에서는 자신의 요리만 하기에도 바빴다. 하지만 조리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몇몇 뉴월드 직원들의 시선이 장용철에게 꽂히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전략이 성공한 것 같았다.
‘방송에 많이 나가는 셰프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 잘 아는 군.’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지?”
내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옆에 있는 조형우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나에게 말했다.
“네, 일부러 시선 끌려고 화려하게 하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나도 실력을 좀 보여줄까?”
“실장 님이요?”
사실 우리 가게에서는 칼질이 그렇게 필요 없다. 기본적으로 고기는 다 손질해서 들어오고 야채 작업은 거의 한승이가 다 한다.
돈카츠 커팅을 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나도 할 수 있을 정도의 고도의 칼질을 요구하는 작업은 아니다.
물론 일식의 꽃이라고 하면 스시. 날카롭고 화려한 칼을 다루는 솜씨를 빠뜨릴 수 없다.
일식을 깊게 공부를 했던 그가 칼질을 못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칼로 손을 다쳤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무 신경 써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야, 나도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야겠어. 사실 그동안 칼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심심했거든.”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가지고 온 가방에서 가느다란 일식도 한 자루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