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 화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런 곳에서 또 만나네요.”
저번에 중식당에서 내가 목숨을 구해준 여자가 런닝머신 옆에 서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이 아파트에 사셨군요.”
“네, 이사 온 지 좀 됐습니다.”
그녀는 엄청 반가운 표정으로 나에게 아는 척을 했는데 나는 런닝 머신에서 내려왔다.
“저는 최근에 이사왔는데 진짜 신기하네요.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그러게요.”
광주가 좁은 도시라고들 이야기 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원래 호텔에서 생활했는데 광주에 좀 오래 있을 것 같아서 이번에 그냥 집을 구했어요.”
“그러셨군요. 그럼 잘 선택하신겁니다. 여기 아파트가 전망도 좋고 시설도 좋아서 살기에 좋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강을 보니까 마치 한강을 보는 기분이던걸요?”
“아, 전에는 서울에 사셨어요?”
“네, 본집은 서울이에요.”
“그러셨군요. 저도 그 기분 잘 알고 있습니다. 강을 쳐다보면서 마시는 모닝커피는 진짜 꿀맛이죠.”
“아, 정훈 씨 집에서도 강이 보이나보군요. 혹시 몇 동에 사세요?”
“저는 104동에 살고 있습니다.”
“진짜요? 저도 104동에 살고 있는데…”
“헐, 혹시 몇 호세요?”
같은 동에 살고 있다는 말에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몇 호인지 물었다.
“저는 1001호에요.”
“아, 저는 3301호에 살고 있습니다.”
“같은 동에 살고 있다니 진짜 신기하네요. 그런데 33층 무섭지 않으세요. 저도 처음에 고층으로 하려다가 너무 높은 것 같아서 포기했어요.”
“저도 처음에는 그랬는데 좀 살다보니까 금방 적응 되던데요.”
내가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기는 하지만 이런 곳에서 만나니 조금 어색했는데 의외로 대화가 잘 통했다.
그때 문득 그녀가 저번에 5백만 원을 결제하고 도망간 것이 생각났다.
“저번에 결제 왜 그렇게 많이 하고 가셨습니까…제가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아, 생명의 은인이시잖아요. 그냥 음식값만 계산하기에는 좀 부족한 것 같아서 그렇게 했어요.”
“그래도 너무 과하셨습니다. 돈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닌데…”
“좀 부담되셨나 보네요.”
“네, 솔직히 그랬습니다. 음식은 맛있게 드셨나요? 혹시 다음에 가게로 오시면 제가 또 직원들이랑 드실 수 있게 포장해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5백만 원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또 오면 포장을 더 해줄 생각이었다.
“돈카츠는 맛있게 먹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별로 기대는 안 하고 먹었는데 엄청 맛있던데요.”
그녀를 떠나서 가게에 찾아오는 고객들은 음식을 드시면 언제나 맛있다는 말을 해주고 가신다.
특히 방송을 보고 온 사람들은 계산을 할 때면 진짜 맛있다고 말해주고 최강자전 우승하라고 이야기 했는데 맛있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것 같다.
또 음식 장사를 하고 있는 나에게 큰 힘이 되는 말이었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진짜 다음에 꼭 오십시오.”
내 말에 그녀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혹시 그때 결제한 것 때문에 그러시면 이러는 건 어떨까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지?”
“사실 제가 서울에서 살다가 내려와서 광주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혼자 밥을 먹는데 시간 될 때 저랑 같이 밥 먹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가 쓰러지기 전에 중식당에 혼자 쓰러졌다는 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대학생 시절 혼자 자취방에 살면서 나도 혼자 밥을 참 많이 먹었다.
지금은 그게 익숙해져서 삼겹살 빼고는 어떤 메뉴던 지 혼자 먹을 자신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많이 외로웠었다.
“밥 친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는 올해 31살입니다.”
“오, 저랑 나이 똑같네요. 그럼 그냥 친구하는 건 어때요?”
“친구요?”
그녀는 친구를 하자고 나에게 말했는데 이렇게 인연이 되었으니 친구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네, 그렇게 하시죠.”
“반갑다. 친구야.”
그녀는 말을 하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생각보다 적극적인 그녀의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악수를 했다.
“그래, 반갑다.”
악수를 하면서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근데 나 아직 너 이름도 모르네. 내 이름은 알고 있지?”
“어, 김정훈. 생명의 은인인데 이름을 잊어 버리면 안 되지. 내 이름은 정수아야.”
“그래…수아야. 갑자기 친구가 생겨서 좀 당황스러운데…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친구된 기념으로 오늘 저녁 같이 먹는 건 어때?”
“저녁?”
“어, 운동했더니 배가 좀 고픈 것 같네.”
잠시 고민을 했는데 나도 조금 뛰어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그래, 그러자.”
“오케이, 그럼 핸드폰 번호 알려줘.”
수아는 나에게 핸드폰을 건네 주었는데 나는 핸드폰을 받은 후 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럼 나는 집에가서 좀 쉬고 있을 게. 너 운동 끝나면 연락줘.”
“그래.”
수아는 그 말을 끝으로 헬스장을 나갔는데 나는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처다보았다.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친구가 생겨버렸다.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솔직히 친구라는 것을 만들기가 어려운데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친구가 생긴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재밌네.’
****
“너는 무슨 일을 해?”
“나?”
“어, 저번에 20인분 사는 거 보니까 직원이 꽤 많은 것 같은데…”
나는 그녀와 집 근처에 있는 초밥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자주 가는 곳이라고 해서 왔는데 적당히 밥먹기에 나쁘지 않았다.
“무슨 일 하는 것 같아? 맞춰봐.”
내가 질문을 했는데 수아는 오히려 나에게 퀴즈를 내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예전에 생각한 것을 말했다.
“쇼핑몰 사장님?”
“오, 왜 그렇게 생각해?”
“음…패션에 관심이 많아 보이고…직원이 있다고 하니까 그런 것 같았어. 맞아?”
수아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딱보기에도 패션이 범상치는 않았다. 일반인 답지 않고 모델같은 포스가 느껴졌는데 얼굴도 예뻤다.
“비슷하기는 한데 좀 달라. 나 마트를 운영하고 있거든.”
“마트?”
생각지도 못한 직업이 나왔다.
“원래 아버지가 마트 하셨거든 내가 도전 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기회를 주셨어.”
5백만 원을 아무렇지 않게 결제하는 것도 그렇고 저번에 보니 운전기사도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마트로 돈을 번 지역 유지신가…’
“나도 대학교 때 마트에서 아르바이트 했었는데 은근히 힘들던데…”
“진짜?”
“어, 계산도 하고 진열도 하고 오토바이로 배달까지 했었어.”
대학생 때 학교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때 힘들기는 했지만 마트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체험해서 진짜 진지하게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마트를 차릴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나는 매장관리 위주로 하고 있어. 그런데 너도 마트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하니 신기하다. ”
“그러게 신기하네.”
같은 식당에서 만나서 생명을 구해주고 부모님의 생일도 같았다. 또 같은 아파트에 살고 나이도 똑같았다. 생각해보면 은근히 비슷한 점이 많았는데 신기했다.
그렇게 같이 밥을 먹으면서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아가 물었다.
“원래 운동 좋아해?”
“운동?”
“어, 나는 운동 좋아하거든. 그래서 헬스장 자주 갔었어.”
“그랬구나. 나는 원래 운동은 별로 안 했어. 근데 오늘은 머리가 좀 복잡한 문제가 있어서 좀 뛰고 싶더라고.”
“복잡한 문제?”
“어, 가게 일 때문에 신경쓰고 있는 게 있는데 잘 될지 안 될지 고민이야.”
“그렇구나. 너무 걱정하지마. 잘 될거야.”
솔직히 로이스랑 경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계속 신경이 쓰였다.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일전에 반대편으로 가게가 왔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거는 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것이었다.
맛에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뉴월드 본사에 까지 영향을 주는 로이스의 정치력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강훈이 올 것 같은데…’
아마 강훈도 분명히 시식회에 올 것 같았다. 만약 거기서 로이스에 밀리게 되고 우쭐대는 녀석의 표정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헬스장으로 가서 런닝머신을 달렸다.
달리면서 땀을 좀 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잘 되야지.”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도 있잖아.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준비하고 나머지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거지.”
“오, 예전에 드라마에서 본 대사 같은데…”
“나는 책에서 봤는데? 괜찮은 말 같아서 기억하고 있었어. 내가 저번에 먹었을 때 알로하 돈카츠 진짜 맛있었어.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아.”
나는 수아에게 무슨 일 때문인지 말을 안 했는데 그녀는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잘 되야지. 나 이번일 꼭 성공 시킬거야.”
****
수아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일단 체다모짜카츠는 꼭 넣어야 겠지.’
시식회에서 선보일 메뉴를 생각했는데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로이스에서는 어떤 메뉴로 나올까?’
크림파스타돈까스를 만들어 낸 장용철이 들어왔다고 했으니 아마도 그 메뉴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이길 수 있을까?’
상대는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셰프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너튜브로 요리를 배운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조형우 실장님이 제대로 요리를 배웠고 맛에서는 유명 셰프에 밀리지 않는다고 믿고 있지만 그래도 이름값에서는 밀렸다.
그때 방금 전 자신감을 가지라는 수아의 말이 떠올랐다. 로이스에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지 알로하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걱정할 것 없어. 상무점만 봐도 우리가 훨씬 장사가 잘 되잖아. 하던대로만 하면 이길 수 있어.’
그렇게 메뉴를 정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단비의 전화였다. 오늘 야근을 한다고 했는데 이제 일이 끝난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 어, 오빠. 나 이제 일 끝났어. ]
“고생했어. 피곤하지?”
[ 응, 피곤해 죽겠어. ]
“저녁은 먹었어?”
[ 응, 아까 직원들하고 같이 먹었어. 오빠는 먹었어? ]
“어, 나도 먹었어. 근데 무슨 일을 그렇게 오래한 거야?”
[ 아, 입점 결정된 업체들 관리하고 시식회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 ]
“그렇구나. 나도 시식회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어.”
[ 그랬구나. 아, PPT도 준비하고 있지? ]
“어, 그것도 내일부터 준비하려고 가게 홍보 관련된 거 준비하면 되는 거 아니야?”
시식회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대표가 가게를 홍보할 시간을 준다고 알려왔다. 내일부터는 그것에 대한 준비도 선영이와 같이 할 생각이었다.
[ 보통 그렇기는 한데…내 경험상 아마 다른 가게에 대한 비방도 어느 정도는 나올거야. ]
“그래?”
[ 어, 1등을 하려면 우리 가게 자랑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가게 약점 찾는 것도 효과가 좋거든…혹시 공격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것에 대한 준비도 해야 돼. ]
“그래, 너무 걱정하지마.”
[ 알았어. 나 오늘은 피곤해서 그냥 집으로 가서 쉴게. 우리는 내일 보던 지 하자. ]
“그래, 집에 들어가면 깨톡해.”
단비와의 전화를 끊고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시식회가 중요하다가 생각했는데 그녀의 말을 들으니 시식회가 끝나고 있을 PPT도 중요해 보였다.
‘약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