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 화
“선배님, 어려운 부탁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남자가 술잔에 술을 따르면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남자는 바로 강훈이었다.
“감사는 뭐…이럴 때 서로 돕고 하는 거지. 아마 자리가 안 났으면 나도 집어넣기 힘들었을거야.”
강훈이 술을 따라주는 남자는 그의 대학교 선배로 뉴월드그룹 기획실장으로 있는 정종인이었다.
“아닙니다. 선배님이 도움이 없었다면 들어가기 힘들었을 겁니다.”
“가족이기는 하지만 내 동생이 좀 까칠하거든…들어갔다고 해서 마음 놓으면 안 돼. 아마 단단히 벼르고 있을거야.”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정종인은 로이스가 빈자리로 들어갈 수 있게 도움을 주었는데 이건 그가 뉴월드 회장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요새 프레쉬푸드는 어때? 밖에서 이야기 들으니까 좀 복잡한 것 같은데…”
정종인의 말에 강훈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의 말처럼 요새 분위기가 많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강훈의 할아버지 강영남.
그동안 경영일선을 지휘하면서 프레쉬푸드를 국내 1등 식품기업으로 만들어낸 그가 건강 악화로 인하여 경영에서 잠시 물러났다.
강영남에게는 3남 1녀가 있었는데 자신이 프레쉬푸드 전체 지분의 40%를 가지고 있었고 자식들에게는 15%씩 나누어 주었다.
자신이 죽으면 자식들에게 지분을 10%씩 나누어주면서 형제끼리 화목하게 회사를 운영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 점을 강조했었고 자식들 역시 분명히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가 병으로 쓰러지자마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회장이 경영에 참여가 어렵자 실질적인 회사 운영은 장남인 강학우의 지휘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와 똑같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다른 자식들이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이다.
강영남의 막내딸이자 강훈의 고모인 강신애는 큰 오빠인 강학우의 편을 들었고 둘째인 강민구, 강훈의 아빠인 강민태가 한 편이 되었다.
프레쉬푸드는 절반으로 나누어지다시피 해서 파벌 싸움과 정치가 심하게 이루어졌는데 아버지인 강민태가 그 일로 정신이 없어 실질적인 로이스의 운영은 강훈이 거의 전담하고 있다시피 했다.
아버지는 정신이 없었지만 강훈은 오히려 편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자기 마음대로 회사를 주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사건건 아버지에게 보고하고 검사를 맡았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신만의 세상이 된 것이다.
“저는 어른들 일은 잘 모릅니다. 이렇게 선배님들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자그마한 회사나 운영할 생각입니다.”
집안의 일이었다.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강훈은 적당히 말을 돌렸다.
“그것도 좋지. 그런데 로이스가 작은 회사는 아니지 않나?”
“뉴월드 백화점에 비하면 구멍가게나 마찬가지죠. 형님은 나중에 뉴월드 백화점에서 큰일을 하실 예정이시잖아요.”
“에이, 큰일날 소리하지마. 형이 들으면 나는 바로 회사에서 짤릴 거야.”
정수아의 오빠이자 장남인 정종현은 그룹의 부회장으로 경영을 배우고 있었는데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로 정종인은 그의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떨었다.
“아, 동생분이신 정수아 씨는 성격이 어떤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입점 준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수아? 큰 형이랑 똑같아. 백화점과 같은 서비스업에서는 유도리가 생명인데 많이 부족하지.”
“그렇군요.”
“아직 결혼을 안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뉴월드 정도면 여러 군데서 혼담 많이 올 것 같은데 아직 인연이 없었나 보군요.”
“혼담이야 많이 왔지. 그런데 미국에서 살다와서 그런지 자신은 정략결혼 하지 않고 자신은 연애 결혼을 할 생각이라고 하더군.”
“연애 결혼이요?”
“어, 꿈 같은 이야기지.”
“네, 그렇긴 한데 저도 연애 결혼을 꿈꾸고 있어서 무슨 마음인 지 이해는 되네요.”
“하하, 소문에 너는 연애가 아니라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건 형님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크흠. 그런데 언제까지 우리 둘이 술을 먹는 거야? 술 맛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지금 들어오라고 할까요?”
“내가 이래서 너를 좋아해.”
강훈은 인터폰을 들어서 마담에게 연락하고 정종인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애 결혼을 꿈꾸고 있다…잘하면 뉴월드 사위로 들어갈 수도 있겠는데?’
****
“로이스가 시식회에 나온다고?”
[ 어, 방금 팀장님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렇게 결정된 것 같아 오빠. ]
“이번 프리미엄 식품관은 광주, 전남 지역 맛집만 참여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 그렇기는 한데…본사에서 직접 집어 넣었나봐. 아무래도 로이스에서 따로 로비를 한 것 같아. ]
“그래?”
[ 늦게 말해줘서 미안해. ]
“아니야, 자기도 방금 알았다면서 시식회 잘 준비해서 이기면 되지. 알려줘서 고마워.”
[ 그래, 나 이제 일해야 겠다.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오빠. ]
“그래, 고생해.”
전화를 끊은 나는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로이스에서 참석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로이스의 맛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 가게의 돈카츠는 로이스에 밀리지 않는다.
시식회에 들어가면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었다.
걱정이 있다면 로이스에서 로비를 해서 맛을 무시하고 뉴월드 백화점에 입점하는 것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준비는 해야겠다.”
나는 요즘 로이스 상황이 어떤 지 궁금하여 오랜만에 부산에 있는 양혜원 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점장님 안녕하세요.”
[ 아, 안녕하세요. ]
“잘 지내셨죠?”
[ 아니요, 잘 못 지내고 있어요. ]
평소같았으면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을 양혜원 점장인데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못했다.
“왜? 무슨 일 있으세요?”
[ 오늘 쉬는 날인데 사무실에 나와서 보고서 쓰고 있어요. ]
“쉬는 날에요?”
[ 네, 매출 떨어진 이유 작성해서 보고하라고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떨어졌지. 다른 이유가 있나요? 억지로 이유 생각해 내려니까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
“저런 고생이 많으십니다.”
[ 아, 가뜩이나 인건비 줄이라고 압박 와서 사람 줄이는 바람에 근무시간에는 보고서 쓸 시간이 없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쉬는 날 나와서 하고 있어요. ]
“그건 좀 심하네요.”
[ 진짜 요새 회사 돌아가는 게 말이 안 되요. 저도 그냥 점장님 퇴사할 때 퇴사할 걸 그랬어요. ]
내가 알기로 그녀는 원래 징징거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전화로 이렇게 까지 말을 할 정도면 생각보다 로이스가 타이트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요새 그거 말고 로이스 본사에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 본사에요? ]
“네, 사실 저희가 뉴월드 백화점 입점 준비하고 있었는데 로이스에서도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 아, 그러고 보니 본사 메뉴개발팀에서 셰프 한 명을 섭외했다고 이야기 들었어요. ]
“세프요?”
[ 네, 점장님도 작년 인기 메뉴였던 크림파스타돈까스 기억 나시죠? ]
“네, 알고 있습니다.”
크림파스타돈까스는 코로나가 터지기 전 여름에 개발한 신메뉴로 당시 유명한 셰프에게 부탁하여 만들어낸 신메뉴로 돈까스와 파스타를 한꺼번에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인기를 많이 얻었던 메뉴였다.
물론 돈까스와 파스타를 동시에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주방에서는 죽는 소리를 내었는데 그래도 판매량이 많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신메뉴였다고 평가를 많이 받고 있었다.
[ 그때 그 메뉴 반응이 너무 좋아서 정식 메뉴로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장용철 셰프를 임시로 채용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
“그 셰프 자기 가게도 따로 있지 않나요? 나름 유명했던 것 같은데…”
[ 파스타 쪽에서는 유명하죠. 그런데 코로나로 가게 매출 타격이 심해지니까 방송 출연을 많이 늘린 것 같아요. 방송에서 인지도 높으니까 본사에서는 그거 이용해서 로이스 홍보하려고 영입 한 것 같구요. ]
“이번에 광주점 입점하는데 시식회를 진행하거든요. 그가 직접 올 수도 있겠네요?”
[ 아마 그럴 것 같은데요…그런 건 메뉴개발쪽에서 전담 하니까요. ]
“갑자기 머리가 아파지네요.”
[ 힘내세요. 아, 그러고 보니까 알로하도 방송 출연하는 거 봤어요. 너튜브에 편집본 올라왔던 데요? ]
리얼맛집탐방은 너튜브에서 하이라이트 편집으로도 영상을 올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을 본 것 같았다.
“네, 이번에 최강자전 출전 했거든요.”
[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저도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혹시 저한테 가맹점 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 ]
양혜원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회사 생활이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가게를 창업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가게 하시게요?”
[ 최근에 일이 너무 힘들어서 이런 저런 고민하고 있어요. 점장님 방송 보니까 창업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혹시 상담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
그녀는 예전부터 일을 잘 했었다. 그녀 정도면 믿고 가맹점을 내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고민해야할 부분도 있었다.
“네, 제가 시식회 준비 때문에 이번주에는 정신이 없어서 이거 끝나고 따로 연락 한 번 드릴게요.”
[ 네, 알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
그녀와 전화를 끊은 나는 주방으로 향했다. 어쩌면 시식회에 강력한 대적 상대가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형우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이번 시식회에는 조형우와 내가 참석하여 조리를 하기로 했는데 그는 자신의 실력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여줄 생각에 들떠 하고 있었다.
“누가 나온다고?”
“장용철이라고 서울에서 유명한 파스타 가게 셰프라고 해요.”
“돈카츠 가게 뽑는데 파스타 전문점이 왜 끼어들어.”
“그렇기는 한테 거기도 커틀렛 이런 거 돈카츠 비슷하게 만들더라고요. 로이스에서 예전에 섭외를 했었는데 이번에 약간 자문 느낌으로 회사에 들어간 것 같아요.”
“음…그렇군.”
“뭐, 저희가 맛에서 밀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생각해서 빡세게 준비는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걱정하지마. 내가 거기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맛있게 만들어 볼테니까.”
“네, 실장님만 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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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님을 믿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이 되기는 했다. 장용철이 운영하는 가게나 SNS에 들어가서 평가를 살펴보았는데 방송에 많이 출연한 덕분인 지 이미지가 많이 좋았다.
‘잘하면 이런 것도 영향이 있겠는데?’
광주에서 알려진 가게,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이름이 있는 가게.
이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비록 장용철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가게가 로이스랑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의 노하우가 로이스와 협업 한다고 하면 뉴월드 입장에서는 좋아할 것 같았다.
‘방송을 앞당길 수도 없고 말이야.’
아직 돈카츠 최강자전 1등은 발표되지 않았다. 만약 1등으로 우리 가게가 발표가 된다고 하면 어느 정도 비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했고 당장 시식회는 내일 모레로 다가왔다.
‘머리가 아프군. 운동이라도 하고 와야겠다.’
쇼파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기니 머리만 아프고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몸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트레이닝 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지하 1층에 있는 헬스장으로 향했다.
좋은 아파트에 살아서 좋은 점이 있다면 왠만한 부대시설이 아파트 단지 안에 다 있다는 것이다.
유치원, 독서실, 스크린 골프, 탁구장은 물론 헬스장과 샤워장도 있었는데 비록 얼마 간의 돈을 내고 사용해야 하지만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헬스장은 등록해두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운동을 하고 있었다.
런닝머신을 뛰면서 답답했던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눌렸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