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 화
음식처럼 개인적인 취향을 많이 타는 것도 없다.
오이를 좋아해서 된장에 아득아득 씹어 먹는 사람이 있지만 볶음밥 속 섞여 있는 오이 알갱이도 귀신같이 찾아내어 골라내는 사람도 있다.
유당분해효소가 없어 우유를 못 마시는 사람도 있고 또 우유에 씨리얼을 넣어 아침마다 챙겨 먹는 사람도 있다.
매운 것을 잘 먹고 못 먹고 느끼한 것을 잘 먹고 못 먹고 하다못해 짠 것을 느끼는 강도의 차이까지 취향을 비교하면 한도 끝도 없다.
심사를 진행한 테스터들 역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평가지는 무언가 이상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비슷 할 텐데…’
일단은 처음에 테스터들을 지원받을 때 돈카츠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받았었다. 그러니 메뉴에 대한 선호도는 다 높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평가지가 7점 이상의 높은 점수를 주었는데 유독 3개 평가지는 5점 이하의 낮은 점수를 준 것이 눈에 띄었다.
물론 맛은 개인의 취향이니까 점수를 낮게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3개 평가지는 유독 무등산돈까스에는 1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
‘무등산 돈까스만 10점, 나머지는 5점 이하…’
무등산 돈까스는 광주 무등산에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가게로 2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맛집이었다.
커다란 등심을 얇게 튀긴 돈까스에 양배추에 주먹만 한 밥 거기에 스프까지 전통적인 경양식 돈까스 집이었는데 나름 광주 사람들에게 알려진 맛집이었다.
강혜정도 그동안 몇 번 가보고 싶었는데 이번 촬영을 빌미로 처음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린 평가는 ‘기대가 너무 컸다.’였다.
‘솔직히 말해서 알로하나 다른 곳이 더 맛있었어…’
6개 매장을 개인적으로 순위를 매기면 무등산돈까스는 5위, 6위 정도 할 것 같았다. 실제로 3개를 제외한 다른 평가지에서 무등산돈까스는 낮은 점수인 7점과 8점을 주로 받았다.
그때 아까 같이 밥을 먹었던 정훈의 말이 떠올랐다.
‘심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티가 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지…혹시 식당 주인에게 테스터인 것 들켜서 일부러 좋은 점수 준 거 아니야?’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왠지 더 안 좋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거 PD님에게 빨리 알려야겠어.’
“혜정 씨, 거기서 뭐 하세요.”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잠시 자리를 비운 작가 황효진이었다.
“아, 작가님. PD님, 지금 어디 계세요?”
“지금 편집실에 계실 거예요. 오늘부터 촬영분 편집 들어간다고 하셨거든요.”
“그럼 저랑 지금 같이 편집실로 가요. 확인 해야 할 게 있어요.”
****
“그러니까…점수가 조작된 것 같다는 거지?”
회의실에는 프로그램 제작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장민웅 PD와 작가인 황효진, 허보람, 그리고 강혜정이 앉아 있었다.
장민웅이 조작이라는 말을 언급하자 황효진과 허보람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장민웅도 마찬가지였다.
촬영이 잘 되어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이제 편집만 하면 됐었는데 갑작스럽게 조작에 관련된 의혹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직 조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점수가 이상하기는 해요. 이것을 보세요.”
강혜정은 평가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
“여기 보시면 테스터를 진행한 이 세 사람은 무등산돈까스에는 1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줍니다. 그런데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높은 점수를 주었던 알로하에는 3점과 4점을 주잖아요.”
“차이가 좀 크긴 하네…”
“네, 제가 느끼기에 이거는 일부로 무등산돈까스의 점수는 올리고 알로하는 낮추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가? 보람아, 이거 테스터들 어떻게 받았지?”
“저희 가끔 스튜디오 촬영하면 방청객 신청받잖아요. 그렇게 받았어요.”
“방송국 게시판에?”
“네.”
“그럼 무등산돈까스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평가해줄 사람 집어넣었을 수도 있겠네?”
“그럴 수도 있는데…지원자가 생각보다 많아서 테스터들은 제가 직접 랜덤으로 뽑았습니다.”
잘못하면 자신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었기 때문에 허보람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보람의 말에 PD는 머리가 아파졌다.
아무리 랜덤으로 뽑았다고 하지만 무등산돈까스에서 부정을 저지르려고 마음먹었다면 신청자를 늘리면 얼마든지 테스터로 집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과 다른 플롯으로 촬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신경 쓰기에도 바빴다. 설마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효진이 생각은 어때? 무등산돈까스가 부정을 저지른 것 같아?”
“음…부정까지는 모르겠는데…제가 먹었을 때도 확실히 무등산돈까스는 1등은 아니었어요.”
메인작가인 황효진은 사전답사를 진행할 때 대본 작성에 참고하기 위해 가게에서 음식의 맛을 다 보았다.
그때 자신도 가장 맛있는 집은 알로하로 뽑았는데 그래도 평가에서는 2등을 했으니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무등산돈까스가 1등인 것에 대한 것은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이상했다.
“그래? 일단은 사실 확인이 먼저니까. 이 평가지 작성한 세 사람 연락처 가지고 와 봐.”
이미 촬영한 분량이 상당했다. 잘못하면 이게 다 엎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장민웅은 머리가 아찔했다. 마음이 불안해서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직접 이야기해 보시려고요?”
강혜정의 말에 장민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프로그램 제작자인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러자 강혜정이 말했다.
“혹시 죄수의 딜레마라는 말을 알고 계세요?”
“죄수의 딜레마?”
“네, 저도 최근에 책에서 봤는데 보통 검사들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추정은 되나 아직 죄가 확인되지 않은 용의자들에게 자백을 받아낼 때 많이 하는 제안이라고 합니다. 지금 상황에 쓰면 좋을 것 같아서…”
“어떻게 하는 거지?”
“일단 의심이 되는 테스터들을 방송국으로 불러서 서로 다른 방에 두는 겁니다.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점수를 조작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다 같이 조사하고 있다고 말이죠.”
“그럼 자신들은 하지 않았다고 잡아떼지 않을까?”
“그리고 또 말하는 겁니다. 만약 지금 솔직하게 사실을 말해 준다면 아직 방송이 시작되기 전이니 고소까지는 진행하지 않겠다고 말이죠. 하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자백해서 조작이 밝혀진다면 추가 조사를 해서 자백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엄벌을 처하겠다고 말이죠.”
“심리적인 압박을 주는 거군.”
“네, 조작에 가담했다고 의심되는 세 사람이 일행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압박하면 한 명 정도는 진실을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군. 그럼 전화로 말할 것이 아니라 이쪽으로 불러서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강혜정은 이 일이 깔끔하게 해결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PD와 다르게 차라리 자신이 지금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방송이 나가게 된 후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프로그램이 폐지될 수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김정훈이 심사위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평가지를 보고도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밥은 다음에 나도 사야겠네.’
****
“은기야! 여기다.”
“어, 그래. 정훈아.”
오랜만에 쉬는 날 나는 차를 타고 은기를 데리러 왔다. 같이 갈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 차가 좋기는 하다. 저 멀리서도 번쩍거려.”
“그래? 그 맛에 외제차 타고 다니는 거지. 대신에 너는 얼굴이 번쩍거리잖아.”
녀석을 볼 때마다 하는 이야기지만 잘생겼다. 괜히 대학교 때 과탑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선우도 배우도 지망생이어서 잘생긴 편이었는데 은기도 그에 못지않았다.
나도 안경을 벗고 헤어스타일을 바꾼 후 훈남 소리를 듣고 있기는 했지만 은기와 같이 있으면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빨리 가자. 담양까지 가려면 좀 늦을 수도 있겠다.”
은기와 오늘 만난 이유는 모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은기의 권유로 가입했는데 광주에서 나름 이름이 알려진 인플루언서들의 친목모임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SNS에 글을 올려 나는 1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가질 수 있었다.
전에는 가게 사진이나 메뉴를 주로 올렸는데 차를 구매한 이후로는 자동차나 내 얼굴 등의 일상적인 사진도 많이 올렸다.
이 부분에서 은기가 많이 도와줬는데 확실히 그전보다 팔로워가 더 빠르게 늘어났다. 많은 사람이 개인적인 사진에도 관심을 많이 보내주고 있어서 부담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장점이 더 많았다.
이번에 신메뉴인 체다모짜카츠를 빠르게 알릴 수 있었던 이유가 SNS에 힘이 컸다.
최소 팔로워가 10만 명 이상인 인플루언서들이 메뉴 홍보를 도와주었는데 다른 때보다 전파 속도가 엄청 빨랐다.
또 그 글을 보고 블로그로 퍼가거나 방문하는 너튜버들도 있었는데 덕분에 빠른 시간에 시그니처 메뉴로 정착하고 있었다.
사실 도움에 된다는 말에 모임에 가입하고 나서 별다른 인사는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은기를 따라 나섰다.
차를 타고 광주를 벗어나 담양으로 향했는데 가을이라 조금 쌀쌀했지만 그래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너는 이런 것 안 할 성격인데 자주 참석했었나 보다?”
내가 아는 은기는 원래 이런 모임을 잘 하는 성격이 아니다. 대학교 때도 딱 우리 친구들하고만 친하게 지냈으니까 말이다.
“어, 그렇기는 한데 나도 나중에 숍 차리려면 지금부터 인맥을 넓혀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생각해보니 녀석은 예전부터 자신의 헤어숍을 가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었다. 예전에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니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구나. 숍은 언제 차리는데?”
“아직은 돈을 좀 모아야 해.”
“그래? 나중에 좀 부족하면 말해. 내가 빌려줄게.”
“빌려준다고?”
내 말에 은기는 놀라는 표정이었는데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SNS 팔로워를 늘리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제는 능력이 되니까 부담이 안 되는 선에서 어느 정도는 빌려줄 마음이 있었다.
“됐다. 원래 친구끼리는 돈거래 하는 거 아니라는 마인드다.”
“그래? 나도 많이는 안 빌려줄 거야. 그냥 조금 부족하면 말하라는 거지.”
“그래도 마음만 받을게. 나중에 가게 망하면 돈만 잃어야지 친구를 잃을 수 없잖아.”
“미친, 시작도 전에 망할 생각 하고 있네. 너는 그냥 가게 하지 마라.”
그렇게 은기와 이야기를 하면서 차를 달렸는데 어느 정도 갔을까? 꽤 크기가 큰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 이렇게 큰 카페가 있구나.”
“요즘에는 도시 외곽에 이런 카페 많이 있잖아. 주말에는 주차할 곳도 없고 사람 바글바글해서 정신없어.”
“그래? 너 여기 와 봤어?”
“어, 여기 사장님도 우리 모임 회원이야.”
“그렇구나. 여기도 돈 많이 벌겠는데?”
카페 정면에는 잔디가 깔렸고 꽤 많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제법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기도 매출 잘 나올 거야. 들어가자.”
차에서 내려 카페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누군가 은기를 불렀다.
“은기 씨,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트레이닝복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였는데 큰 덩치에 클러치백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네, 오늘은 친구 차를 얻어 타고 와서 좀 일찍 왔습니다.”
“그렇군요. 이분이 저번에 새로 가입하신 친구 분이신가요?”
“네, 안녕하세요. 상무지구에서 알로하라고 하는 돈카츠 식당을 하고 있는 김정훈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이거 동종업계 사람을 만나니까 반가운데요. 저는 운림동에서 무등산돈까스라고 하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배병호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