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 화
정수아의 말에 회의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 버렸다.
특히 이야기를 꺼냈던 표주환의 얼굴은 굳었는데 다른 팀장들은 정수아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프리미엄 식품관을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맛집 거리 조성입니다. 거리라고 하니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백화점에 맛있는 가게들이 많다는 이미지를 만들어서 고객들을 유치할 생각입니다.”
정수아의 설명에 팀장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표 팀장님의 말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닙니다. 백화점에서의 영업을 생각해서 규모나 브랜드 경쟁력을 생각 안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맛이 있고 고객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고려하고 볼 생각입니다. 경력만 가지고 판단 할 것이었으면 저희가 이렇게 모여서 회의할 필요는 없겠지요.”
표주환의 말에 혹시나 알로하가 제외될까 봐 걱정하고 있던 단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브랜드가 우리 뉴월드와 어울리는지, 영업 외에 다른 리스크는 없는지, 시장에서 브랜드 반응은 어떤지, 잘 생각해 보시고 의견을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마케팅이나 지원팀 등 다른 팀장님들도 회의 참석하라고 말씀드린 것이니까 말이죠.”
“네, 알겠습니다.”
“다른 의견은 없나요?”
정수아의 말에 누군가 손을 들었는데 마케팅 팀의 신우영 팀장이었다.
“보니까 알로하 같은 경우 경력은 부족하더라도 어려운 아이들을 도운 가게라는 대외적인 이미지가 좋습니다. 저희 뉴월드도 정기적으로 심장병이 있는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점을 부각해서 홍보를 한다면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다른 의견은 없나요?”
정수아는 다른 의견을 물었는데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던 팀장들은 의견을 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단비는 왠지 초조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알로하가 예선 탈락을 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원래 이런 곳에서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그녀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회의장에 아무도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 않아서 본 사람이 없었지만 그때 정수아와 현단비의 눈이 마주쳤다. 단비는 갑자기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는데 그때 정수아의 입이 열렸다.
“뭐죠?”
정수아의 말에 여러 팀장의 시선이 단비에게 꽂혔다. 표주환은 네가 왜 나서느냐면서 눈치를 주었는데 지금 단비는 어떻게든 알로하를 알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안녕하십니까. 저는 식품팀 대리로 있는 현단비입니다. 지점장님께서 의견을 말씀해보라고 하셔서 손을 들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말해보세요.”
“제 기억에 저번에 지점장님이 직원들에게 도시락을 사주셨을 때 돈카츠 브랜드가 알로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점장님이 사주셨기 때문에 상당히 기대하면서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역시나 엄청나게 맛있었습니다. 보통 돈카츠는 시간이 지날수록 눅눅해지는 음식인데 상당히 시간이 지났어도 뛰어난 맛을 유지하고 있는 알로하라면 푸드코트 형태나 포장, 두 가지 모두 고객님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수아가 알로하에서 포장해간 돈카츠는 직원들에게 나누어졌는데 당시 근무를 하고 있던 단비도 도시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는 알로하라는 글씨가 적힌 포장을 보고 엄청 반가워하면서 넘어갔는데 이걸 이렇게 이야기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 그 돈카츠가 저거였어?”
“그래, 맛이 있긴 했어.”
단비의 말에 팀장들은 그제야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알로하를 칭찬했다. 괜히 나섰다가 욕을 먹을 수도 있었는데 의외로 주변 분위기가 나쁘지 않자 단비는 안도했다.
그때 정수아가 말했다.
“눈썰미가 있는 직원이 있었네요. 맞습니다. 그때 제가 사온 돈카츠가 알로하였습니다. 사실 저도 먹어보지 않았으면 표 팀장과 같은 의견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직접 먹어본 결과 다른 브랜드와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알로하는 일단 통과시키려고 하는데 다른 의견 있으실까요?”
정수아가 통과를 결정했다. 다른 의견은 나오기가 힘들었다.
“다른 의견이 없으신 것 같으니 알로하는 1차 서류 통과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브랜드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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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제야 좀 한가하네.”
강혜정은 오랜만에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총 6개의 가게 촬영을 모두 끝냈다.
보통 일주일에 2번의 촬영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최대 3번까지 촬영을 하느라 평상시보다 그녀도 바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기존과는 다른 진행 방식이었기 때문에 준비도 더 많이 했었어야 했다. 신경을 많이 썼지만, 결과물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았다.
그날 촬영이 잘 됐는지 안 됐는지는 작가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촬영하는 내내 작가와 PD들 표정은 좋았다.
방송이 잘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편집까지 완료하고 방송 후 시청률표를 확인해야 제대로 된 결과를 알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누구에게 온 전화인지 확인을 했는데 전화기에 뜬 목록을 보고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 어, 혜정아. 지금 통화 가능해? ]
“어, 단비야. 말해.”
[ 우리 밥 어디가 좋을까? ]
“나는 아무대나 상관없어.”
[ 그래? 먹고 싶은 거 없어? ]
“어, 요즘에 맛있는 거 많이 먹었거든 너 먹고 싶은 걸로 해.”
[ 음…나도 딱히 생각해둔 게 없는데…]
“그럼 그냥 너희 오빠 가게 가자.”
[ 우리 오빠? 최근에 거기서 촬영했잖아. ]
“그렇긴 한데. 맛있어서 또 먹고 싶네.”
[ 그래? 그럼 이따가 오빠 가게에서 보자.]
“그래, 근데 너 기분이 좋아 보인다? 오빠 가게에서 밥 먹자고 해서 그런 거야?”
[ 아, 좋은 일이 있었거든 그거는 이따가 만나서 이야기해 줄게. ]
전화를 끊은 강혜정은 예전에 만난 단비를 떠올리면서 웃음 지었다. 원래도 밝은 아이였지만 최근에 이야기를 나누면 더 행복해 보였다.
짐을 챙겨서 점심을 먹으러 나가려고 했는데 그녀의 눈에 바쁘게 걸어가는 메인작가 황효진이 보였다.
“작가님, 어디 가세요?”
“아, 심사 결과 나와서 PD님 보여 드리려고요.”
사실 출연한 가게들은 잘 모르지만 이미 첫 촬영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블라인드 테스트는 진행되고 있었다.
총 10명의 테스터들이 심사를 진행했는데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결과가 나온 모양이다. 작가의 손에는 브랜드 순위가 적힌 순위표가 몇 장 들려있었는데 그녀는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진짜요? 어디가 1등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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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른 것 사드리려고 했는데…”
“아, 제가 일부러 여기 오자고 했어요. 저번에 정말 맛있게 먹었거든요.”
“네, 저번에는 가게 소개 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단비에게 연락해서 강혜정과 약속을 잡았다. 그래도 우리 가게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녀가 노력해 준 것을 알고 있기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다.
“아니에요. 저는 제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PD와 작가님이 촬영이 잘 됐다고 하니까 방송에도 아마 잘 나올 거에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도 기대된다. 첫 방송은 언제 시작이라고 했지?”
나와 강혜정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단비가 말했다.
“음…내가 알기로 아마 11월 20일이 첫 방송이라고 알고 있어.”
“그래? 아직 결과는 안 나왔지.”
“어…아직은 안 나왔어.”
“제발 우리 가게가 1등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오빠?”
“그건 당연하지. 1등 하면 가게 더 알릴 수 있으니까. 결과는 아마 가게들 다 소개한 마지막 방송에서 공개되겠죠?”
“네…그런 것으로 알고 있어요.”
“혹시 돈카츠 1등 끝나면 다른 메뉴도 최강자를 가려라 진행 하나요?”
“네, 시리즈 느낌으로 계속 가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군요. 근데 다음에 하실 때는 블라인드 테스터를 일반인들 말고 다른 사람들로 해야 할 것 같아요.”
나의 말에 단비가 물었다.
“왜?”
“아, 내가 가게에서 보니까 이런 심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티가 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딱 보니 심사하러 온 지 알겠던데요? 다음에는 좀 더 전문가들을 고용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빠, 눈썰미가 좋은데? 그걸 안 단말이야?”
“나 예전에 아울렛에서 일했잖아. CS 많이 받아봐서 대충 보면 알 수 있지.”
“우리 백화점 브랜드 사람들도 오빠 같았으면 좋겠다. 본사에서 CS 점검 블라인드로 다녀가면 맨날 감점 받았다고 연락받아. 그럼 사유서 써야 해서 스트레스 장난 아니야…”
“그래? 백화점이니까 더 깐깐하게 보는 것일 수도 있지.”
“그런가? 아 맞다. 오늘 축하할 일이 있어.”
“축하?”
“오빠 백화점 1차 서류 테스트 통과했거든. 아마 오빠한테 곧 연락 갈 거야.”
“진짜?”
“어, 우리 지점장님이 여기 돈카츠 드셨나 봐. 맛있다고 칭찬하시던데?”
솔직히 지원하기는 했지만, 경쟁 상대들이 워낙 대단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역 프리미엄 맛집을 구성한다고 해서 전국 단위로 유명한 브랜드들이 많이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단비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점포를 많이 가진 매장들도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리 가게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단 서류는 통과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거, 다행이네.”
“어, 이제 방송에서 1등 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뉴월드 본사에 더 알로하를 어필할 수 있을 거야.”
“그래, 근데 이거 음식 대접한다고 모셔놓고 너무 우리 이야기만 하는 것 같은데…죄송해요.”
나는 우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강혜정이 신경 쓰였다. 하긴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겸 식사를 제안했는데 너무 우리 둘이 떠들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사이 좋은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아까 말씀하신 건 PD님에게 이야기 들려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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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은 커플이야.’
식사를 마치고 방송국으로 돌아온 강혜정은 아까 만난 두 사람을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최근에 연애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었는데 사이좋은 커플을 봐서 그런지 그녀도 연애가 하고 싶어졌다.
‘가을이라 그런가?’
날씨가 부쩍 추워져서 그런 이유도 있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을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되면 실망하지 않을까?’
방송 결과에 대해서 상당히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는데 자신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두 사람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상당히 애를 먹었다.
1등 무등산돈까스
2등 알로하
아까 작가를 통해서 건네받은 순위표를 그녀는 아직도 가지고 있었는데 알로하는 1등이 아닌 2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점수로는 큰 차이가 없는 2등이었지만 2등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미 출전한 가게들의 음식을 다 먹어본 자신이었다. 자신이 먹었을 때 알로하가 가장 맛있는 가게였다. 그래서 1등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입맛은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결과가 나왔는데 어쩔 수 없지.’
강혜정은 작가에게 순위표를 건내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잠시 다른 일을 보러 간 것 같았다.
그녀는 작가의 테이블 위에 순위표를 올려두려고 했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 리얼맛집탐방 : 돈카츠 최강전 심사표 >
심사한 테스터들의 테스트지를 모아놓은 파일이었는데 그것을 보자 사람들이 어떤 가게에 어떤 평가를 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용히 파일을 들어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내용을 살펴보던 그녀는 무언가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만, 이거 점수가 이상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