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 화
강진에 있는 시골 집 앞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었다. 원래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밭이었는데 대나무가 너무 늘어나 집까지 침범하자 아버지가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시멘트를 부어 공터로 만들었다.
그 뒤로 농기계나 자동차를 놔두는 주차창처럼 되어 버렸는데 평상시 같으면 아버지의 트럭 한 대만 있겠지만 지금은 차가 더 주차 되어 있었다.
‘고모들은 벌써 오셨나 보네.’
나는 차에서 아빠, 엄마에게 줄 선물을 꺼냈는데 그때 내 차가 들어오는 것을 엄마가 봤는지 나를 마중 나오셨다.
“정훈이 왔구나.”
“네, 엄마. 저 왔어요.”
“차는 많이 안 막혔어?”
“네, 주말인데 생각보다 차 별로 없던 데요?”
그동안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가면서 모임 금지 같은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확진자가 조금 줄어들어서 9월 중순부터 10인 이하의 모임은 허락해 주고 있는 상태였다.
놀러 가는 사람이 많아서 주말에 도로가 좀 막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덜 막혔다.
“그래, 다행이네.”
“고모들은 다 오셨어요?”
“어, 고모들도 아까 도착해서 지금은 다들 커피 한잔 하고 있어. 너도 들어가자.”
“네, 잠시만요.”
나는 차 트렁크를 열어서 준비한 선물을 엄마에게 전해 줬다.
“이게 뭐니?”
“건강보조식품이에요. 거기 검은색은 홍삼 성분이 들어가서 아빠가 먹으면 좋고 빨간 것은 엄마 거에요.”
건강보조식품이라는 말에 엄마가 관심을 보였다.
“갑자기 생일도 아닌데 이걸 왜 사 왔어.”
“엄마, 아빠도 이제 건강 신경 쓸 나이잖아요.”
내 말에 엄마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여태까지 이런 것을 사다 준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 그럴 만했다.
“고마워 아들. 배고프지? 점심 먹고 왔어?”
“네, 오다가 간단하게 빵 먹어서 별로 배 안 고파요.”
“그래, 그럼 들어가자.”
나는 엄마와 같이 선물을 들고 집 안으로 향했는데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모이게 되신 거에요?”
“이제 곧 아빠 환갑이잖아. 첫째 고모가 가족끼리 언제까지 안 보고 살 거냐고 아버지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예전처럼 다시 지내자고 하시더라.”
“아, 그랬군요.”
“어, 아버지도 그러자고 하셨고…고모들 일로 신경 많이 쓰셨잖아.”
원래 처음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땅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첫째 고모였다. 아버지는 처음에 할아버지가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땅을 돌아가시자마자 자식들이 팔아버리는 건 옳지 않은 것 같다고 반대하셨다.
그 가운데 다툼이 있었고 할머니가 여동생들하고 다투지 말라고 말씀하셔서 결국 아버지는 땅을 나누고 여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고모들이 원래 가지고 가야 할 몫이었기 때문에 주는 것이 당연했지만 아버지는 자신들만 생각하는 고모들의 이기적인 모습에 실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물론 그때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도 되었다.
첫째 고모는 아들 민교가 아이를 가지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결혼을 하게 돼서 돈이 필요했고 둘째 고모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셨는데 그때 당시 부동산 경기 침체로 임대료도 내기 어렵다고 죽는 소리를 하셨다.
막내 고모도 아들 영진이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등록금이 많이 들어가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언니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서먹서먹하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살아 계셨기 때문에 얼굴은 보고 지냈는데 1년 정도 후에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그 후로는 서로 연락도 자주 안 하시고 몇 년은 만나지도 않으셨다.
아버지는 항상 그것을 신경 쓰셨는데 지금이라도 고모들이 사과하고 화해를 했다고 하니 아버지 마음이 편하시다면 그것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화해하셨다니 다행이네요.”
****
“진짜 정훈이 맞니?”
집에 들어가 고모들에게 인사를 하였는데 고모들은 바뀐 나의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다. 예전에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뀐 나의 모습에 적응이 안되는 것이다.
렌즈를 맞춘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안경을 벗고 다녔다. 매일 아침에 렌즈를 갈아 끼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연애도 시작해서 단비에게 잘 보이고 싶고 또 SNS에서 훈남 사장님이라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주다 보니 귀찮더라도 계속 외모를 가꾸게 되었다.
“네, 저 정훈이 맞습니다.”
“예전이랑 얼굴이 완전 달라졌다. 라식 수술 한 거야?”
“아니요. 요즘에 렌즈끼고 다니고 있어요.”
“그래? 인물이 훨씬 산다. 진짜 잘했다.”
막내 고모는 특히 나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나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잘생겼다고 칭찬을 해주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얼마 전에 미소도 라식수술 했거든 확실히 안경끼고 다닐 때랑 차이가 있더라고 혹시 너도 수술 생각 있으면 고모한테 말해. 거기 원장님이 고모 아는 지인이라 싸게 해줄 거야.”
“네, 감사합니다. 고모.”
“잠깐만, 형님. 그건 뭐에요?”
내가 막내고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둘째 고모는 내가 사 온 선물에 관심을 보였다.
“아, 이거 정훈이가 저랑 그이 먹으라고 사왔나봐요.”
둘째 고모는 궁금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선물을 확인했는데 내용물을 보고 놀랐다.
“어, 나도 이거 먹으려고 했던 건데.”
“그래요?”
“네, 이게 갱년기 여자들한테 엄청 좋다고 하더라고요. 나이 먹으면 얼굴 붉어지고 그러잖아요. 이게 그거 가라앉혀 주는데 좋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고모와 엄마들은 나이가 비슷했는데 건강보조식품에 관심을 보이셨다.
“정훈이가 철이 들었네. 엄마한테 이런 거 사다 줄 생각도 다하고…”
나는 고모가 나의 정성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아니에요. 아직도 속 많이 썩여요.”
엄마는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지만 웃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정훈아, 그런데 철은 들었는데 센스가 없다. 오늘 고모들 오는 거 알았으면 고모들도 하나씩 챙겨주면 좋잖아.”
둘째 고모는 약간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는데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러는 다른 사촌들도 오랜만에 보는 큰아버지 댁에 빈손으로 온 것 같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센스가 없었네요. 고모는 성일이가 안 사주던가요? 대원 그룹 취직했다면서요. 거기 연봉 많이 주잖아요.”
성일이는 고모의 아들이었는데 은정이에게 그가 대원그룹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고모에게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자신의 아들에게 받으세요.’라는 늬앙스로 말했는데 고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돈은 많이 주는거 같더라. 근데 확실히 대기업이라 그런지 주는 만큼 일을 시키더라고 이런거 사러 갈 시간이 없어. 토요일도 원래 출근하러 가는 건데 겨우 시간 냈다고 하더라.”
“아…네…그런데 성일이는 어디 갔어요?”
“아까 민교, 영진이랑 집에 있기 답답하다고 읍내 구경한다고 드라이브 갔어. 나간 지 얼마 안 됐어. 너도 집에 있기 심심하면 따라가서 바람이나 쐬고 와.”
하긴 대도시에서 자라고 생활한 사촌들이었다. 엄마를 따라서 내려오기는 했지만 이런 논과 밭밖에 없는 시골에 무슨 재미가 있을까? 이해는 되었다.
그래도 나이가 비슷해서 어렸을 때는 친하게 지냈던 사촌들이었다. 못 본지 좀 되었지만 어떻게 변했을지 좀 궁금하기는 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운전하고 내려와서 좀 피곤하네요. 집에서 쉬고 있을래요. 곧 오겠죠.”
****
그렇게 고모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자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저녁을 먹기 위해 상을 놓고 모두 둘러 앉았는데 첫째 고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장사는 잘 되니?”
첫째 고모는 어렷을 때부터 약간 무게가 있으시고 무서운 느낌이 있었는데 그녀가 질문하자 약간 긴장이 되었다.
“네, 잘 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가게에 가보려고 했는데 일이 바빠서 가보지 못했네. 다음에 시간나면 한 번 들리마.”
“네, 감사합니다.”
“미소에게 들었는데 쬐그만하다고 하던데….”
오픈하고 나서 은정이가 사촌인 미소랑 같이 가게에 온 적이 있었는데 막내 고모는 그때 가게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인데 조그맣다는 이야기에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 예전에는 작았으니까.’
굳이 가게를 넓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를 대신해서 엄마가 나섰다.
“가게 장사가 잘 돼서 이번에 옆으로 확장 공사 헀어요.”
“확장 공사?”
“네, 손님이 기다릴 정도로 장사가 잘 돼요.”
“그래요? 나도 그럼 다음에 미소랑 가봐야 겠네요.”
“네, 맛도 엄청 맛있다고 소문이 났어요. 다음에 꼭 가서 드셔보세요.”
작다는 막내 고모의 말이 서운했던지 엄마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요새 코로나 때문에 장사 힘들다고 하던데 무리해서 확장한 거 아닌 가 모르겠다.”
둘째 고모는 나의 가게 사정을 걱정해 주었는데 나는 괜찮다고 말해 드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첫째 고모가 말씀하셨다.
“만나는 사람은 있니? 이제 서른 넘었으니까 너도 슬슬 결혼해야지.”
“아…결혼은 아직 생각이 없어서 좀 있다가 하려고요.”
아직 단비씨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는 말씀드리기 좀 빠른 것 같아서 둘러댔는데 바로 잔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정훈이 네가 장남인데…빨리 결혼해서 안정을 찾아야지.”
“네, 좋은 사람 생기면 결혼 하려고 마음 먹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예전에 민교 결혼할 때 너무 빨리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그때 그때 결혼시키길 진짜 잘한 것 같아.”
“맞다. 언니. 민교네 집값 많이 올랐다면서?”
첫째 고모의 말에 이번에는 막내 고모가 관심을 보였다.
“어, 이번에 좀 올랐지.”
“얼마나 올랐는데?”
“처음 샀을 때보다 한 4억 올랐지.”
“헐, 진짜? 엄청 많이 올랐다.”
막내 고모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둘째 고모가 여동생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애는 부동산에 진짜 깜깜이구나. 아파트 가격 오르기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그래?”
“광주만 해도 30평 신축 아파트 가격이 6억, 7억 넘는다. 수도권이면 10 억은 그냥 넘어가지.”
“광주도 많이 올랐네?”
“그래서 나도 걱정이야. 성일이도 결혼 곧 할텐데…그래도 광주에 집 한 채 마련해줘야지. 형님도 정훈이 결혼 시키려면 부지런히 돈 모으셔요. 애 전세값이라도 보태 줘야 할 것 아니에요.”
둘째 고모는 걱정이 된다는 듯 엄마에게 말했다.
이미 집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고모를 보면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어두워지는 엄마의 표정을 보니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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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나와서 소화도 시키고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왔는데 먼저 산책을 하고 있는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집에 오고 나서 고모들과 이야기 하느라 아빠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는데 아빠가 나를 보더니 입을 여셨다.
“가게는 별일 없지?”
아까 괜찮다는 이야기를 고모들에게 했지만 직접 듣고 싶으셨는지 다시 물으셨다.
“네, 가게 장사는 잘 되고 있어요.”
“그래…광주 집 값이 그렇게 비싸냐?”
아까 고모들에게는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신경이 쓰였나 보다.
“요새 좀 많이 오르기는 했죠.”
아빠는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나에게 말하셨다.
“그래도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네가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데리고 와라. 아빠가 도움 줄 테니까.”
무슨 말인가 했더니 결혼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미 오천만 원을 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돈을 내가 가게를 넓히는 데 썼다고 생각하셔서 집을 살 돈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에 아빠랑 엄마도 노후 자금 정도의 돈 밖에 없다.
그런데도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를 속이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걱정을 좀 덜어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