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 화
“다른 여자?”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의아했다.
“네, 솔직히 말해도 저는 진짜 괜찮아요.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 관심 생기면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영문을 모르는 그녀의 말에 나는 속이 답답했다.
“단비야,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해?”
내 말에 단비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오늘 백화점에서 어떤 여자 목걸이 사주시는 거 봤어요. 혹시 유진이 때문에 억지로 저 만나고 있는 거면 저는 진짜 괜찮아요. 그냥 편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요.”
나는 이제야 단비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알았다. 백화점에서 은정이와 같이 있었던 모습을 그녀가 보았던 모양이다.
“아, 그거 오해야. 오늘 백화점에서 만난 사람 내 동생이야.”
“동생이요?”
동생이라는 나의 말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친동생 은정이.”
“동생이랑 그렇게 안 친하다고 하셨잖아요.”
“아…이번에 동생이 조카를 임신했거든 목걸이는 임신 축하선물로 사준 거야.”
“아…”
내 말에 단비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오빠. 저는 그것도 모르고 괜히 오빠가 저랑 다른 사람 사이에서 저울질하시는 줄 알았어요.”
나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동생이랑 전혀 안 닮으셨던데요? 진짜 동생이라고 하나도 생각도 못 했어요.”
“우리 남매 보면 다들 그렇게 말해.”
나는 아빠를 닮고 은정이는 엄마를 닮았다. 예전에 친구들도 은정이를 보면 나를 전혀 닮지 않았다고 많이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왜 아까 전화로는 그렇게 말씀 안 하셨어요? 그냥 동생이랑 백화점 갔다 왔다고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저에게 무언가 숨기는 것 같아서 더 의심했던 것 같아요.”
단비의 말에 나는 조금 고민이 되었다.
무언가 내가 원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그냥 선물을 주기로 마음 먹었다.
“잠깐 이쪽으로 올래?”
나는 단비를 데리고 내 차로 갔다. 차에 탄 후 뒤쪽에 두었던 선물을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이게 뭐예요?”
“선물이야. 백화점에서 너 주려고 산 거야.”
“진짜요? 뜯어봐도 돼요?”
선물이라는 말에 그녀는 자그마한 쇼핑백에서 물건을 꺼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확인했는데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하고 놀라서 나에게 말했다.
“목걸이네요?”
“어때? 마음에 들어?”
그녀는 내가 준 목걸이를 꺼내서 목에 가져다 대고 거울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녀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비싼 물건이라 그런지 제값을 했다.
“그런데 저한테 이거 왜 주시는 거에요?”
목걸이를 이리 저리 살펴보던 그녀가 갑자기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는데 순간적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이렇게 비싼 거 저한테 왜 주시냐구요.”
“어…그게…”
본래라면 그녀에게 진지하게 고백을 할 시간이었지만 왠지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나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
“오빠, 저 좋아하세요?”
그녀의 돌직구 발언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붙잡은 팔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나에게 물었다.
“이거 저 좋아한다는 의미 맞죠? 그래서 이거 사주신 거 맞죠?”
그녀는 짖굳은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는데 이미 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 맞아. 나 너 좋아해.”
더이상 고민하지 않고 말을 내뱉고 나니까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요? 언제부터 그랬어요?”
“응?”
“빨리 이야기 해주세요.”
그녀는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듯 나를 보고 웃으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어, 처음부터 좋아했던 거 같아.”
사실 그녀와 제대로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녀의 집에서 밥을 먹고 난 후였다. 영화를 보다가 조용히 누워서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이 시간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전에는 그녀가 별로였다는 것은 아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단비에게 호감은 계속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좋아했다고 말했다.
“진짜요? 그런데 왜 그동안 말을 안 했어요? 저 성격 엄청 급한데 솔직히 좀 답답했어요.”
“그랬어? 미안.”
“뭐, 이해는 해요. 유진이가 저랑 베스트 프랜드니까…고민을 했던 거죠?”
“그런 이유도 있지.”
앞으로 성민이는 계속 볼 사이인데 아무래도 사귀었다가 헤어지면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면 이제 오늘부터 우리 1일 인거 맞죠?”
“어, 맞아.”
내 말에 그녀는 머리를 살며시 들어 올리고 나에게 목걸이를 건네 주었다.
“그럼 이거 걸어주세요.”
그리고 나에게 등이 보이게 몸을 돌렸는데 그녀의 하얀 목선이 보이자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그녀에게 목에 걸어주었는데 그녀는 목걸이를 다시 거울에 비춰보더니 아이처럼 웃었다.
“마음에 들어?”
“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거 이니셜 D가 꼭 단비 너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서 그걸로 골랐어.”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오빠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사주었다니 너무 기뻐요.”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나의 여자친구라고 생각하니 그동안 왜 망설였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이제 우리 밥 먹어요. 저 배고파요.”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 아홉 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백화점이 끝나는 시간이 8시였기 때문에 그녀의 퇴근 시간은 8시였다. 배가 고프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래? 그럼 밥 먹으로 가자. 내가 맛있는 곳 찾아놨어.”
“아, 아니에요. 우리 그냥 어디 가지 말고… 집에서 배달시켜 먹어요.”
“집에서?”
“네, 사실 오빠가 저 어장 관리하는 줄 알고 스트레스 받았거든요. 오늘은 집에서 편하게 밥 먹고 싶네요.”
“뭐? 어장관리?”
나는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보면 그녀도 나를 좋아해서 질투를 한 것 같았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네,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배달 먹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나는 그녀의 말에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고 했는데 단비가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차에 시동은 왜 걸어요?”
“응? 너희 집으로 가려고…”
“저희 집에요? 그냥 여기서 시켜 먹으면 되잖아요.”
“아…”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아직 말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집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오빠, 진짜 집 청소 안 하셔서 그렇구나?”
“어…맞아. 집이 너무 더러워. 그러니까 우리 집은 다음에 가자.”
나는 그녀의 말에 맞춰서 변명을 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집은 금방 치우면 되죠. 저번에 저희 집 깨끗한 거 보셨죠? 배달 올 때까지 집 청소 도와줄게요.”
그녀는 말과 함께 차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담비야. 할 말이 있는데…사실 우리 집 여기 아니야.”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기는 내가 예전에 살던 집이야.”
나의 솔직한 고백에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살던 집이라니 오빠 진짜로 이사했어요?”
“응, 사실 나도 최근에 집을 구했거든.”
“진짜요?”
“저번에 단비가 집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동산 관심 있게 보고 있었는데 마침 괜찮은 집이 싸게 나와서 바로 이사했어.”
“그랬군요. 그럼 집 사신 거에요?”
“어, 매매로 샀어.”
내가 집을 샀다는 이야기에 자신도 집을 샀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축하를 해주었다.
“우와, 오빠, 축하드려요. 그런데 왜 바로 말씀 안 하셨어요.”
“아, 집 산 거 아직 부모님은 모르시거든. 다음 달이 아버지 환갑이라 그때 서프라이즈로 알려드리려고 했어.”
사실 이사는 이미 7월에 해서 살고 있었지만 나는 최근에 집을 샀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였다. 그녀가 나의 여자친구가 되었지만 나는 그녀에게도 로또 당첨 사실을 알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헐, 부모님에게도 말씀을 안 드렸어요?”
“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
“집은 어디로 구하셨는데요?”
“집? 첨단.”
“첨단이요? 저희 집 바로 근처네요?”
그랬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스테이트힐 아파트는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단비의 집과 가까웠다.
“어, 가깝지.”
“그랬구나…그럼 가까우니까 앞으로 더 자주 볼 수 있겠네요.”
“그래, 맞아.”
“그래서 집에 안 들어가려고 했구나…사실 아까 처음에 오빠가 집에 못 들어가게 막았을 때 드라마처럼 막다른 여자 물건이 막 널 부러져 있는 상상을 했었어요. 바보 같죠?”
“헐, 진짜?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는걸?”
“아까 말했잖아요. 그냥 스트레스 받아서 이것저것 안 좋은 생각들이 계속해서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상관없어요. 이제 제 남자친구 잖아요.”
“그래, 그런 걱정하지마. 나는 단비 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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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오빠 여기 사는 거 맞아요?”
“어, 왜?”
나는 그녀를 데리고 지금 살고 있는 스테이트 힐로 왔다. 이왕 집을 샀다고 말했으니 제대로 자랑하고 싶었다.
사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어서 답답한 것도 있었는데 그녀에게 말을 하고 나니 조금은 속이 시원해진 것 같았다.
차를 타고 주차장으로 들어가자 그녀가 놀란 듯이 말했다.
“여기 광주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잖아요. 아까 매매라고 안 했어요?”
“맞아. 집 샀어.”
“예전에 저희 회사 부장님이 청약으로 여기 들어오게 됐다고 얼마나 자랑했는데요. 제 친구들도 결혼하면 여기서 살고 싶다고 엄청 많이 말했어요..”
“그랬어?”
“헐, 36층까지 있네요? 오빠 집은 몇 층이에요?”
“우리 집은 33층이야..”
“대박. 저 고소 공포증 있는데 어떻게 하죠? 엄마 집이 15층인데 거기도 무서웠어요. 그런데 여기는 2배가 넘는 거잖아요.”
나는 층수를 확인하고 벌벌 떨고 있는 그녀가 귀여웠다.
“에이, 괜찮아. 나도 높은 거 무서워 하는데 조금 살다 보니까 적응이 되더라.”
“그래요?”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녀가 넓은 집을 보고 감탄사를 내 뱉었다.
그녀는 집을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나는 그녀를 데리고 창가로 갔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가로 가서 커텐을 젖히자 불빛으로 도배되어있는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강에 빛이 반사되어서 그런지 아름다웠다.
“우와, 오빠. 너무 예뻐요.”
“그렇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이야.”
그녀는 창가를 바라보면서 너무 황홀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니 데리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나중에 이런 집에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래? 그럼 여기 들어와서 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