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 화
“오, 마지막에 꿀도 집어 넣는 구나.”
“네, 은근히 들어가는 재료가 많죠?”
“어, 맛있는 것에는 역시 이유가 있네.”
밥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난 후에 그녀가 직접 참깨 소스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들어가는 재료가 제법 많았다.
애초에 그녀도 인터넷 블로그에 있는 레시피를 보고 따라 한 것이라 내가 가게에서 블로그를 보고 해도 되지만 그냥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그녀에게 직접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니 가게에 바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그녀가 만든 참깨 소소는 맛이 있었다.
특히 가게에서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양배추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기존에 시중에서 파는 소스를 쓰는 것과 다르게 재료 준비며 배합이며 만드는 데 제법 시간이 들어갈 것 같았다.
가뜩이나 한승이 혼자 주방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이것까지 작업을 추가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무리였다.
물론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판 하는 소스처럼 가게에서 소스를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 의뢰하여 소스를 만들어 내면 된다.
아직 해본 적이 없는 길이지만 프렌차이즈를 생각하면 언젠가는 도전해야 하는 길이었다.
‘이번 기회에 한 번 알아보자.’
소스를 만드는 것까지 보여준 그녀는 이제 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녀를 따라서 정리를 도왔다.
“내가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그럼 오빠, 여기 있는 것들만 냉장고에 넣어주세요.”
“어, 알았어.”
나는 그녀가 참깨 소스를 만들기 위해 꺼내 놓은 재료들을 차근차근 냉장고에 넣고 있었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단비야, 그런데 냉장고에 맥주가 엄청 많네?”
냉장고 한 쪽 구석에는 맥주캔이 엄청 많이 있었는데 차곡차곡 쌓인 양이 꽤 되었다.
“아, 오빠. 잘 드신다고 해서...혹시 몰라서 준비했어요.”
“그랬구나...그럼 지금 같이 한 잔 할까?”
“음...사실 그 제가 하고 싶다는 게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오빠랑 단둘이 영화 보면서 맥주 마시고 싶었어요.”
“영화?”
“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혼자서 보기는 좀 무서웠거든요.”
“공포 영화야?”
무섭다는 말에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나는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하지만 공포 영화는 잘 못 본다.
어렸을 때부터 피곤하거나 지쳤을 때 잠이 들면 가위에 자주 눌렸는데 그때 꼭 귀신이 나타났었다.
흰색 옷에 검은 머리로 눈을 가린 귀신이었는데 내가 처음 본 공포 영화에서 나온 귀신이었다.
그 뒤로 가위에 눌리고 나타날 때마다 귀신이 나타났는데 내가 봤던 공포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꼭 그 귀신이 재연을 했다.
가위에서 깨어나면 그 느낌이 너무나 안 좋았기 때문에 되도록 공포 영화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공포 영화는 아니에요. 좀비물인데 혹시 싫어하세요?”
좀비물이라는 이야기에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TV 안방에만 있는 거 아니야?”
“네. IPTV로 보면 돼요. 사실 저번에 구매 했는데 못 보고 있었어요.”
“어...그랬어? 그래...그럼 같이 보자.”
“그럼 방에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맥주랑 안주 준비해서 갈게요.”
“그래.”
****
나는 다시 그녀의 안방으로 들어왔다. 아까처럼 조용히 침대에 앉았는데 아까 단 둘이 앉아 있었던 일이 떠올라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
나도 남자였다. 아직 그녀와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자칫 잘못해서 분위기에 휩쓸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도 같았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야옹~”
소리는 침대의 아래 쪽에서 들리고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침대를 덮고 있는 커버를 들추자 어두운 곳에서 밝게 빛을 내고 있는 눈동자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금방 침대 밖으로 나왔는데 갈색, 검은색, 흰색 점박이 무늬가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고양이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지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런 고양이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네가 나비구나.”
나는 이 고양이가 단비가 저번에 말한 고양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양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고 있었는데 단비가 맥주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비야! 안 보여서 어디 갔나 했더니 방에 있었구나.”
“어, 침대 밑에서 숨어 있었나 봐.”
“네, 원래 잠잘 때 침대 밑에서 자요.”
“그래?”
“저 쪽 방에 침대랑 만들어 줬는데 꼭 그러더라고요. 아마 바깥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바깥 생활?”
“네, 나비는 원래 아파트 근처를 배회하던 유기묘였거든요. 제가 불쌍해서 사료 챙겨주다가 그냥 데리고 살기로 했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밖에서 생활한 것 치고는 엄청 온순한 것 같은데?”
나는 내 품에서 조용히 안겨 있는 나비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렇죠? 원래 고양이는 낯선 사람 무서워하는데 나비는 개냥이여서 그런 지 사람을 별로 안 무서워 해요.”
“그렇구나. 그런데 왜 이름이 나비야?”
“그냥 제 이름이 단비 잖아요. 저랑 같이 비자 돌림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때 나비가 생각났어요.”
“오, 잘 지은 것 같아.”
그래도 고양이가 같이 있어서 일까?
아까 단 둘이 방에 있었을 때보다 어색한 것은 줄어든 것 같았다. 그때 그녀가 침대 옆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병원처럼 자그마한 테이블이 나왔다.
“우와! 이거 뭐야?”
“어때요? 괜찮죠? 이렇게 하고 영화보면 먹으면서 볼 수 있어요. 오빠가 이 쪽으로 누우세요. 제가 저 쪽으로 갈게요.”
나는 그녀의 제안에 나비를 내려 놓고 어색하게 침대에 누웠는데 자리를 잡자 그녀가 불을 끄고 영화를 틀었다.
“으...재밌겠다. 근데 혹시 제가 놀라면 소리 지를 수도 있으니까. 오빠 너무 놀라지 마세요.”
“어, 그래.”
그녀는 벌써부터 영화를 볼 생각에 신난 것 같았지만 은은하게 전해 오는 향수 냄새 때문인 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앞에 있는 맥주를 마시면서 마음을 다 잡았는데 곧이어 영화가 시작하자 나는 영화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나와 다르게 단비는 영화에 잔뜩 집중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영화 중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좀비들 때문에 좀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나름 영화가 재미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 맥주를 같이 마시던 단비가 조용해져서 무얼 하나 쳐다봤더니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같이 영화를 보자고 하고 잠이 들어버린 그녀가 재미있었지만 이해는 되었다.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침부터 내가 온다고 청소하고 마트도 다녀오고 요리까지 하느라 피곤했을 것이다.
거기에 맥주까지 한 잔 했으니 잠이 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나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날까 봐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고 영화의 소리를 줄여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영화가 끝날 때 쯤 단비가 일어났는데 그녀는 나에게 사과를 했다.
“아, 미안해요. 오빠. 제가 깜빡 잠들어 버렸네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많이 피곤한 것 같아서 깨우지는 않았어.”
“그래요? 저 막 침 흘리고 그런 거 아니죠?”
“어, 안 그랬어. 근데 나 이제 가야겠다. 너무 늦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이랑 챙겼는데 그녀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너무 빨리 잠에 들었나 봐요. 영화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안나요. 꼭 보고 싶었던 건데...”
“나도 그래. 다음에 내가 같이 또 봐줄게.”
“진짜요?”
“어, 이렇게 같이 밥 먹고 영화 보니까 너무 좋다. 우리 다음에 또 하자.”
“네, 저도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쉬는 날 맞춰서 또 데이트 해요.”
“그래, 그러자.”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 썸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면서 생각보다 그녀를 더 좋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친구의 지인이다 보니 연애를 시작하는 것에 신중했었는데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다음에 제대로 준비를 해야겠다.’
****
“이거 맛이 어때?”
“이게 뭐에요?”
“참깨 소스.”
나는 한승이에게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제 단비의 집에서 만든 참깨 소스를 조금 챙겨서 가게로 가지고 왔다.
출근하자마자 주방으로 가 한승이에게 맛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반응은 좋았다.
“오, 이거 엄청 맛있는데요?”
“그렇지? 샐러드 드레싱으로 쓸까 하는데 어때?”
“좋아요. 그 전에 흑임자보다 훨씬 맛있는 거 같아요. 어디서 사셨어요?”
“이거? 산 거 아니야. 만든 거야.”
“만드셨어요?”
“어, 블로그에 있는 레시피 대로 만든 건데 조금만 더 발전시키면 아주 맛있을 것 같아.”
나는 한승이에게 레시피를 보여줬는데 그것을 본 한승이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근데 이거 레시피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 어차피 레시피에는 저작권이 없어.”
레시피에는 저작권이 없다.
창작의 결과물이 아닌 그 전 단계인 아이디어의 한 단계로 보기 때문이다.
특별한 요리가 인기를 끌게 되면 그것과 비슷한 식당들이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요리 레시피를 처음 만든 원작자에게는 안 좋은 일이지만 이런 좋은 레시피를 가져다가 장사를 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건 다행이네요. 근데 이거 작업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요? 우리 양배추 많이 줘서 샐러드 드레싱으로 나가는 양이 상당하잖아요.”
그동안 양배추 드레싱을 직접 만들지는 않았는데 한승이는 주방의 작업이 추가되는 것을 걱정하였다.
“걱정하지 마. 이거는 소스제조공장에 OEM으로 맡길 거야.”
“OEM이요?”
“어, 우리가 공장에 레시피 전해주면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주는 걸 OEM이라고 하거든 이번 기회에 한번 해보려고.”
“오, 그럼 직접 안 만들어도 되겠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너는 걱정할 필요 없어.”
직접 안 만들어도 된다는 말에 한승이는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때 홀에 있던 전화기가 울렸다.
아직 하연이가 출근 전이어서 나는 홀로 나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돈카츠 전문점 알로하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너튜브에서 먹방하고 있는 쭈영이라고 합니다. 오늘 거기서 먹방을 촬영하려고 하는데요. 혹시 가능할까요? 다른 손님은 안 보이게 저만 촬영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