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52 화 >
‘받을까? 말까?’
솔직히 고민이 되었다.
지현이는 공부, 나는 취직, 서로 해야 할 일이 바빠 헤어지기로 결정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친구로 지내기로 했었다.
원래부터 친구 사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막상 헤어지고 나니 사귀기 전처럼 편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지게 되고 설날과 추석에 가끔 안부 문자 정도만 하다가 더는 연락이 없게 되자 그냥 연락처를 지웠었다.
“정훈이 맞구나?”
내가 구청 로비에서 전화로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는데 돌아보니 지현이가 서 있었다.
“어, 지현아.”
“사실 아까 보고 네가 맞나 조금 긴가민가 했었어. 그래서 전화해 본 건데 진짜 오랜만이다.”
“아, 나도 그랬어.”
“치, 그럼 바로 연락했어야지.”
내 말에 지현이는 입을 삐죽거렸는데 원래 그녀가 삐졌을 때 자주 하는 표정이었다.
“아, 할머니 배웅해 드리느라...”
“맞다. 그 할머니는 누구셔?”
“우리 가게 단골 손님이셔. 여기 가게 때문에 일 있어서 왔다가 만나서 그거 신청하는 거 도와 드렸어.”
“그랬구나. 안 그래도 너 가게 오픈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래? 누구한테?”
“현호.”
생각해보니 그녀는 나를 만나기 전에 원래 현호랑 더 친했었다. 애초에 우리를 연결시켜 준 것이 현호였으니까 말이다.
“너는 그동안 잘 지냈어? 저번에 경기도에 있다고 했잖아. 언제 내려 왔어?”
“여기 온 지 한 6개월 됐어. 타지에서 혼자 지내려니까. 너무 외롭더라고.”
“혼자 있으면 외롭기는 하지. 상현이도 맨날 그 소리 하더라.”
“맞아.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라 시간 있는데 같이 점심 먹을래?”
“점심?”
같이 밥을 먹자는 이야기에 좀 고민이 되었다. 그녀는 원래 쿨한 성격이어서 그런지 헤어졌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로 지내자고 말한 것도 그녀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그녀와 단 둘이 밥 먹는 건 좀 부담이 되었다.
만나서 할 이야기라고 해봤자. 지난 추억 이야기 일 것이니까 말이다.
“아, 아니야. 가게 일 때문에 가 봐야 돼서 다음에 먹자.”
“가게? 무슨 일 있어?”
“지금 확장 공사 하고 있거든 여기 위생과에 그거 신고하려고 온 거였어.”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미안.”
“괜찮아. 다음에 먹으면 되지.”
“그래, 시간 되면 다음에 보자.”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서구청을 나왔다. 갑작스럽게 그녀를 만나서 조금 당황스러웠는데 헤어진 지 오래돼서 그런 지 이제는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예전에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을 때 그녀는 우울한 얼굴일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확실히 얼굴이 좋아졌다.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
7월 24일 금요일.
< 형님, 오늘 천장 작업 들어갑니다. >
안 서방은 매일 공사 진행 과정을 나에게 알려줬는데 공사는 특별한 문제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가게에 들어가는 자재들 색상도 정해서 알려주었기 때문에 내가 크게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없었는데 덕분에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렇다고 마냥 놀 수도 없었다. 나는 따로 가게 오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니폼은 검은색이 좋겠다.’
가게에 공사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번 기회에 직원과 알바들 근무복을 맞추었다.
처음에 가게를 운영할 때는 조촐하게 시작했기 때문에 너무 화려하지 않은 자율복으로 일하라고 말했었다.
나도 주방에 들어갈 때는 로이스에서 일할 때 입었던 주방복을 입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알로하라는 이름을 알려야 할 때.
정식으로 일할 복장이 필요했다. 거기에 더해서 직원들의 명찰까지 새로 만들었다.
요새는 인터넷으로 잘 되어 있어서 주문만 하면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힘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나씩 준비를 해 나가니 가게가 아니라 마치 회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아, 명함도 하나 파야겠다.’
일전에 변호사 남현성과 명함을 교환해야 할 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가게도 넓히고 홍보도 적극적으로 해야 하니 어떻게 보면 명함은 필수였다.
‘거기에 홍보물 제작까지.’
나는 한승이와 생각한 런치 세트 홍보물의 제작도 업체에 맡겼다. 눈에 확 띄게 부탁했는데 걱정이 있다면 아직 로이스가 어떤 오픈 이벤트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가능성 높은 것은 저번에 생각했던 파스타 증정이었지만 강훈이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으니 다른 이벤트를 들고 올 수도 있었다.
‘아이고, 머리 아프다. 오늘은 좀 쉴까?’
신경을 너무 써서 그럴까? 머리가 조금 아픈 것 같았는데 나는 쉬기 위해서 침대에 누웠다.
그때 문득 횡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에 보니 집에 뭐가 없구나.’
투룸에 살던 짐을 가지고 40평이 넘는 집에 들어왔다. 집이 텅텅 비어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냉장고랑 필요한 가전 제품들을 사기는 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래, 시간 있을 때 몇 가지는 더 사자.’
이사하고 나서 다른 것은 별로 사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 한 가지 꼭 사고 싶은 것은 있었다.
바로 TV였다.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그동안 컴퓨터 모니터와 연동되는 작은 TV로 봤었는데 넓은 거실에서 커다란 TV로 보는 것을 꼭 해보고 싶었다.
“쇼파에 누워서 TV 보면 완전 재미있겠지.”
TV와 쇼파를 사기로 마음 먹은 나는 샤워를 하고 집 밖을 나왔다. 냉장고 같은 것은 눈으로 보고 안 사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TV는 눈으로 보고 사고 싶었다.
화질은 모니터로 보는 것이랑 직접 보는 것이랑 다르니까 말이다.
쇼파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으로도 주문이 가능하지만 직접 가서 앉아보고 느끼는 체감은 다르다.
이것을 느꼈던 것은 바로 가게 의자를 구매할 때였다.
가게 의자는 인터넷으로 구매했는데 분명히 리뷰에는 푹신하다고 적혀있었는데 막상 구매하고 가게에 온 의자를 확인해보니 딱딱함 그 자체였다.
****
< 일성 디지털 랜드 >
집을 나온 나는 일성 전자의 전자 제품 판매점으로 갔다.
그래도 일성 전자의 주식을 1억 원이나 들고 있는 나였다.
비록 본전 근처에서 놀고 있으며 아직 나에게 큰 수익을 주지는 않고 있었지만 이왕 사는 거 ‘여기서 구매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커다란 유리로 된 문을 밀고 들어갔는데 의외로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없네?’
사람이 없는 게 신경 쓰였는데 다른 일을 하고 있겠지 하는 생각에 나는 일단 주변을 둘러 보았다.
‘맞다. 전자레인지랑 청소기도 있어야 하네.’
둘러보다 보니 또 필요한 게 눈에 보였다.
전자레인지는 혼자 사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는데 이사하고 귀찮아서 집에서는 배달만 시켜 먹어서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청소기도 투룸에 있을 때는 빗자루로 대충 쓸면 됐었는데 지금은 집이 너무 넓어져서 꼭 필요한 가전제품이었다.
‘온 김에 다 사 가지고 가자.’
어떤 전자레인지를 살까? 고민하면서 있었는데 뒤 쪽에 문이 열리면서 3~4명의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다가 온 사람은 판매 사원으로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오자 담배 냄새가 확 느껴졌다.
‘담배 피고 왔나 보구나.’
“고객 님,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아, 전자레인지 보고 있었어요.”
“네. 둘러 보시고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남자는 나의 대답에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다른 영업 사원들이 있는 쪽으로 등을 돌려서 가버렸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어떤 제품이 좋다 같은 설명을 해줄지 알았는데 등을 돌려서 가는 그에게 조금은 실망했다.
하지만 나도 서비스 종사자로서 어떤 느낌인 지 이해는 되었다.
평일 낮. 그것도 남자 혼자 와서 전자레인지를 보고 있으니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오래 일한 직원과 알바생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데 숙련되게 일하는 것과 불친절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간혹 오래 된 식당에 들어가면 아줌마들이 인사를 할 때 뒷 말을 줄이는 경우가 많다.
매일 수백 번 그동안 일하면서 수천, 수만 번, ‘어서오세요.’를 외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인사를 건성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인사를 하다 보면 가게에 들어오는 고객들은 ‘어서’까지 밖에 듣지 못 한다.
물론 이런 것을 듣고 ‘아주머니가 바쁜가 보네.’처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불편해 하고 이 가게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한 번 그렇게 느낀 고객님 들은 다음에 다시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여기서는 가전제품을 안 사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처럼 말이다.
이미 수많은 고객을 겪어본 저 판매 사원은 나 같은 유형은 비싼 제품을 사지 않는 사람이라고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말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지만 그 말의 늬앙스에서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
“뭐, 보러 왔대.”
“전자레인지 보러 왔는데 그냥 구경 하러 온 것 같아요.”
“그래? 철수야, 네가 가봐라.”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이야기나 하시죠. 그래서 그 친구 코인으로 얼마 버셨다고요?”
디지털 랜드 신입사원 김철수는 영업에는 관심 없고 코인 이야기만 하고 있는 선배들을 보면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는 되었다.
자신들은 일성전자의 정식 직원도 아니었고 매장 판매를 맡기 위해 고용된 계약직들이었다.
판매 금액에 따른 일정 수수료를 월급으로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돈일 될 만한 고객들만 상대로 영업을 하는 것이 스트레스도 덜 받고 효율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저런 선배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고객들의 상대는 신입인 자신이 해야 했다.
하지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연습이야.’
선배들은 계약직 판매원으로 만족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판매를 잘하면 일성전자 영업팀 정직원으로 전환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나중을 위해서 경력을 쌓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객 님, 궁금하신 것 있으세요?”
김철수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으면서 고객에게 다가갔다.
“아, 전자레인지 보고 있는데 다 거기서 거기 같은데 가격 차이가 좀 있네요.”
“아, 이 제품 같은 경우에는 절전 기능과 스팀 기능이 있어서 다른 제품과 가격 차이가 좀 있으세요.”
“스팀 기능이요?”
“네, 뜨거운 수증기를 이용해서 간단한 찜 요리나 만두나 호빵과 같은 간편 식품 조리가 가능합니다. 혹시 집에서 전자레인지로 요리를 많이 하실까요?”
“아니요. 그냥 밥 데우거나 하는 정도 인데.”
“그러시면 이쪽에 있는 제품이 괜찮으실 것 같아요.”
김철수는 고객의 말에 가격이 저렴한 제품을 소개해 주었다.
“이거요?”
“네, 이게 여기 있는 조리시작 버튼으로 시간이 추가 되어서 조작 버튼도 간단하고 간단히 음식만 데워서 드시는 정도면 가격도 저렴해서 쓰시기에 아무런 문제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거기에 이 제품 같은 경우에는 일성 카드 가지고 계시면 추가로 10% 더 할인 받아 보실 수도 있으세요.”
“감사합니다. 괜찮은 것 같네요.”
“그럼 이거로 구매 하시겠어요?”
“음...생각을 좀 해볼게요.”
김철수는 열심히 설명 했지만 고객이 사지 않자 조금은 실망했다. 하지만 고객 님 앞에서 티 내지는 않았다.
“네, 괜찮습니다. 다른 제품도 궁금하시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 제가 TV도 보려고 왔는데 1층에는 없네요. 2층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