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48 화 >
퇴근하고 나서 성민이 알려준 가게로 향했다.
분위기가 괜찮은 포차였는데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서 강성민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네, 안녕하세요. 제수씨.”
성민의 와이프인 최유진도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는데 두 번 보는 거여서 그런 지 저번 보다는 덜 어색했다.
“정훈 씨, 이쪽으로 앉으세요.”
인사를 마치자 단비 씨가 내 의자를 빼주었는데 이 곳 술집의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발그레 붉어진 볼 때문인지 그녀의 분위기도 조금은 다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강성민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는데 왠지 목이 타서 물을 한 잔 마셨다.
“김정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늦게 오다니. 무슨 소리야. 일 끝나자 마자 바로 달려 왔구만.”
“왜? 단비 씨 보고 싶어서?”
나는 성민의 말에 어이 없어서 웃었다.
“뭔 소리 하는 거야. 술 많이 먹었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강민에게 한 소리 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단비 씨가 말했다.
“저 안 보고 싶으셨어요?”
“네?”
갑작스러운 그녀의 돌직구에 당황스러웠던 나는 당황해서 말을 하지 못했는데 그녀의 커다란 눈이 몇 번 깜빡이는 것을 보고 대답했다.
“아,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셨죠?”
“네.”
평소에도 밝은 그녀였지만 이상하게 오늘 따라 그녀의 몸이 내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느낌이었는데 전해 오는 향수 냄새 때문인 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자자, 정훈이도 왔으니까 우리 짠 하는 거 어떨까요?”
“좋아요!”
성민이는 잔에 술을 한 잔씩 따르더니 건배를 제의했다.
*****
“자, 짠하자 짠.”
벌써 몇 잔 째 먹었는 지 모르겠다. 성민이 자기들은 먹고 있었고 나는 늦게 나왔다고 하면서 술을 계속 권했는데 연속으로 마시고 있었다.
“정훈 씨, 괜찮으세요.”
단비 씨가 그런 나를 걱정해 주었는데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정훈 오빠는 술 마셔도 얼굴이 잘 안 변하시네요.”
최유진의 말에 성민이 동조했다.
“맞아. 정훈이 술 잘 먹어. 생각해보니까 우리 친구들 중에서 정훈이만 술 마시고 주사 부리는 거 본 적 없는 것 같아.”
“그래요?”
“어, 나는 체질이 좋은 건지 술이 쎈 편이야.”
성민의 말처럼 난 술이 강한 편이었다. 소주 2병 정도는 마셔도 그렇게 취한 줄 몰랐는데 그것 때문에 예전에 강훈의 술부심에 대결을 벌인 적도 있었다.
“부럽다, 저는 술 마실 때는 괜찮은데 다음날 머리가 엄청 아파요.”
“나도 나도. 가끔 술 마시고 쓰러져 있으면 나비가 막 배 위에서 올라와서 누워 있어.”
“진짜? 너무 귀엽다.”
‘나비?’
단비 씨가 유진의 말에 동조했는데 나는 그녀가 말하는 나비가 무엇인 지 궁금해졌다.
“나비가 뭐예요?”
“아, 나비는 제가 기르는 고양이에요.”
“고양이 기르셨어요?”
“네. 보여드릴까요?”
그녀가 동물을 기르고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는데 핸드폰으로 자신의 고양이를 나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조합 된 귀여운 고양이였다.
“예쁘죠?”
“네, 그러네요.”
나는 그냥 평범하게 말했는데 나의 반응에 그녀가 시무룩 하게 말했다.
“고양이 안 좋아하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생각해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동물을 기르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개나 고양이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좋냐고 물어보면 고양이가 더 좋을 것 같았다.
고양이가 얌전하니 신경이 덜 쓰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고양이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나비가 귀여운 짓도 엄청 많이 해요. 실제로 보시면 더 좋아하실 거에요.”
“네.”
그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민이 다가와 나를 불렀다.
“정훈아, 화장실 가자.”
화장실 가고 싶으면 혼자 가면 되지, 왜 나를 부르나 이상했는데 밖으로 나가더니 녀석은 담배를 하나 꺼내서 입에 물었다.
이제 보니 담배가 목적이었다.
“아씨, 내일 출근하기 싫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 저녁, 평소 같으면 술 약속을 잡을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게 왜 오늘 갑자기 술 마시자고 한 거야.”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너 때문에.”
“나? 내가 뭐 잘못했냐?”
“너, 나한테는 솔직히 말해. 단비 씨 한테 마음 있어, 없어?”
“마음?”
이제 보니 나와 단비 씨의 관계가 궁금해서 술을 마시자고 한 것 같았다. 하긴 벌써 소개팅을 한 지 꽤 되었는데 별다른 관계의 진전이 없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네 마음 네가 모르면 어떡해.”
“아니, 요새 가게 때문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가게?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장사가 좀 잘 돼서 바빴어.”
“그래? 그건 다행이네. 근데 그거 여자 입장에서는 변명인 거 알지?”
“그런가?”
“여자는 바빠도 자기 챙겨주는 사람 원한다고 근데 말하는 거 보니까 마음은 조금 있나보다?”
호감? 당연히 있었다. 단비 씨는 예쁘고 성격도 좋아서 같이 있으면 편했다.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거면 됐어. 근데 이 자식아. 너 저번에 내가 좀 꾸미고 다니라고 했지.”
“왜? 이상해.”
“그래, 머리 스타일도 좀 바꾸고 그 좆 같은 안경도 좀 벗고. 예전에 지현이 만날 때는 잘하고 다녔잖아. 너 이렇게 다니는 거 단비 씨한테 실수하는 거야.”
“오늘은 일하고 왔잖아.”
“그래, 오늘은 봐줄게. 대신 다음에는 신경쓰도록.”
성민의 말에 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 여자친구인 지현을 만날 때는 머리부터 시작해서 옷 입는 것 까지 많은 준비를 했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게 맞았다.
나이가 드니 이제는 나의 이런 모습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는 것은 변명일 수도 있다.
좋아하면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말이다.
“그래, 알았어.”
****
“단비야, 정훈 오빠. 어떤 것 같아? 마음에 들어?”
“어, 좋은 사람 같아.”
단비는 처음에 소개팅을 받을 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동안 몇 번의 연애를 했었는데 그 끝이 좋지 못 했기 때문이다.
바람 핀 나쁜 남자도 있었고 겉만 번지르 한 사기꾼도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만나고 나니 연애에 조금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는데 가장 친한 친구인 유진이가 결혼한다고 하니 자신도 이제는 연애가 아닌 결혼을 전제로 진지한 만남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엄마,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
“갑자기?”
“어, 딱 그런 느낌 있을 꺼 아니야. 아빠랑 결혼해야겠다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말이야.”
“음...아빠랑 처음 연애 할 때 차를 타고 가는 데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로 땅을 집고 신호등을 건너고 있었거든? 그때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옆에 있던 다른 차들이 할머니에게 빨리 가라고 빵빵 거리기 시작하는 거야.”
“응, 위험했네.”
“그때 아빠가 차에서 내리더니 할머니를 부축해서 신호등 잘 건널 수 있게 도와 드렸어.”
“그래? 아빠가 착한 일 했네. 근데 그거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지. 그때 엄마가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저렇게 다정하게 도와줄 정도면 나중에 엄마가 늙고 병들어도 저 사람은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이야.”
“아...”
하긴 지금도 아빠는 자신과 엄마에게 엄청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나쁜 남자한테 끌리지 말고 착한 남자 만나. 만나 보면 착한 남자가 진국이야.”
그 이야기를 들어서 일까?
단비는 그래서 소개팅을 받아들였다.
만나기 전에 돈카츠를 아이들에게 무료로 나눠준 이야기도 들었고 정훈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게 리뷰도 많이 봤는데 다녀간 사람들이 너무 친절해서 좋았다고 많이 말했다.
실제로 만나보니 그랬었다. 착하고 배려심 많고 선을 지킬 줄 아는 남자 말이다.
그런데 좀 답답한 느낌도 있었다. 그 전에 만났던 남자들 같으면 어떻게든 선을 넘어 스킨쉽을 하려고 했을 텐데 아직 손도 못 잡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시간이 좀 지나자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한테 관심이 없나?’
그래서 유진이에게 말을 했는데 그녀가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이다. 덕분에 오늘은 마음먹고 그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했는데 잘 먹혔는 지는 모르겠다.
****
술자리가 끝나고 나는 단비 씨를 택시를 타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요.”
“네, 저도 재미 있었어요.”
그녀가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아서 걱정 되었는데 기분은 좋아 보였다.
그녀의 아파트로 가기 위해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작은 리어카에 할머니 한 분이 열심히 박스를 줍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계속 올리던 박스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것을 본 나는 도와드리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할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민국, 나라의 일 때문일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는 아버지의 당부 때문일까? 요즘 부쩍 이런 일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널 부러진 박스를 열심히 줍고 있었는데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단비 씨도 와서 도와주었다.
양이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주울 수 있었는데 할머니는 고맙다면서 연신 인사를 하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머니를 도와주고 그녀의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니 왠지 헤어지기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일은 출근하시죠?”
“그럴 것 같아요.”
“네,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저는 집에 가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들어가는 것을 보려고 서 있었는데 왠지 그녀가 들어가지 않고 미기적 대고 있었다.
“아, 고양이 좋아한다고 하셨죠. 들어가셔서 저희 나비 보고 가실래요? 엄청 귀여운데.”
“나비요?”
갑작스러운 고양이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그러겠다고 할 뻔 했는데 갑자기 단비 씨를 누군가 불렀다.
“단비야!”
나는 고개를 돌아봤는데 그 사람을 본 단비가 놀라서 소리쳤다.
“엄마!”
“그래, 이분은 누구시니?”
“아, 안녕하세요. 김정훈이라고 합니다.”
단비 씨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고 나도 갑자기 등장한 그녀의 어머니에 당황했다. 그녀는 혼자 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요. 여기서 모하고 있어.”
“이제 들어가려고.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너가 연락도 안 되고 걱정되서 반찬도 가져다 줄 겸 살살 걸어 와 봤지. 근데 데이트 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여기까지 오셨는데 들어가서 커피 한 잔 하시고 가세요.”
이제 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걸어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커피 제안에 나는 조금 망설여 졌다.
그때 단비 씨가 등 떠밀면서 말했다.
“정훈 씨,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괜찮으니까 들어가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어머니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향했는데 단비의 엄마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 지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냥 보냈어. 뭐하는 사람인 지 궁금했는데.”
그녀의 말에 단비는 터벅터벅 걸어가는 정훈의 뒷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착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