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22 화 >
제대하기 전까지는 대학교 때 그렇게 공부를 하지 않았다.
“야, 너도 이제 학과에 얼굴 좀 비춰야지. 교수님한테 잘 보여야지 학점도 좋게 받아.”
성민의 권유로 교수님들에게 얼굴을 비추려고 3학년 초에 과 MT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 제수씨를 만났던 모양이다.
“맞아, 생각해보니까, 정훈이 너 학교 다닐 때 렌즈 잠깐 꼈었지? 유진이가 그때 봤나 보다.”
“어, 생각해보니 나도 기억 날 것도 같다.”
사실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뻘줌할까봐 그냥 생각나는 척 했다.
“그때 저희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술도 마시고 게임도 하고 했잖아요.”
“그랬나?”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기억이 있는 것도 같았다.
“야, 유진아. 근데 생각보다 디테일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 그때 좀 훈훈한 선배님이라고 생각해서 이름이랑 기억하고 있었지.”
“뭐? 훈훈?”
그녀의 말에 친구들은 다들 웃었다. 은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다들 서로가 외모로는 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훈이가 무슨 훈남이야. 흔남이겠지 흔한 남자.”
“아니야, 지금도 안경 벗으시고 헤어 스타일만 좀 바꾸면 괜찮으실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예전에 누가 했던 말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까. 너 그때는 왜 안경 벗고 다녔냐?”
“그거, 지현이 때문이잖아. 지현이.”
박지현. 나의 대학교 시절 여자친구 이름이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귀었는데 그녀가 안경 끼는 것보다 벗은 게 더 잘생겼다고 해서 한동안 렌즈를 끼고 다녔었다.
“와, 그 이름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지현이와는 2년 정도 만났는데 동갑내기여서 친구들과도 술도 마시고 친하게 지냈었다. 그래서 친구들도 잘 알고 있다.
“가만 있어 봐. 야, 김정훈. 너 지현이랑 헤어진 이후로 여자친구 사귄 적 없지 않냐?”
호영의 말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았다. 중간에 썸 비슷하게 데이트 한 적은 있었지만 정식으로 교제까지 이어진 적은 없었다.
박지현이 나의 마지막 여자친구가 맞았다.
“그런 것 같은데...”
“와, 진짜 불쌍한 놈이 여기 있었네. 대학교 졸업하면서 여자까지 졸업해 버리다니.”
“뭐라고?”
“너 설마...아직도 지현이 못 잊어서 다른 여자 안 만나고 있는 거 아니지?”
현호의 이야기에 나는 잠시 헤어질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그녀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서 만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후에 내가 로이스에 입사해서 정신이 없었고 그녀도 학원과 독서실에서 두문불출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서로 이별하기로 했다.
나쁘게 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 그녀가 생각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립다거나 이런 감정은 아니었다.
후에 그녀가 공무원에 합격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서 축하 인사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헤어진 과거의 연인 사이였으니까.
“야, 벌써 5년 전 이야기다.”
“안 되겠다. 다른 놈들은 알아서 잘 만나니까 걱정 안 되는데 너는 형이 좀 나서야겠다. 유진아. 혹시 주변에 괜찮은 친구 없어?”
“친구?”
“어, 내가 정훈이 저놈 예전에 니가 봤던 훈남 만들어 놓을게. 친구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음...괜찮은 애가 있기는 한데...한 번 물어볼게.”
성민의 말에 나는 손사레를 쳤다.
“야, 됐어. 제수씨, 부담스럽게 왜 그래.”
“아니에요. 안 그래도 친구 중 한 명이 요새 외롭다고 했거든요. 오빠도 알지? 단비.”
“아, 단비씨? 단비 씨는 정훈이에게 주기 너무 아까운데...”
아깝다는 말에 현호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왜? 예쁘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성격도 좋아. 저번에 한 번 만났는데 진짜 착하시더라.”
“그럼 정훈이 말고 나 해주라. 저놈은 관심 없는 것 같으니까.”
솔직히 나는 지금 여자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솔로로 오래 살았는데 가끔 외로울 때가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여자친구가 없어서 편하다고 생각한 날이 더 많았다.
또 지금 가게를 비롯해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여자를 만날 때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야, 나는 괜찮아. 현호 해줘라. 현호.”
“저놈은 안 돼. 술 취하면 또 여친한테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할 걸?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됐어.”
“야, 아니야. 우리 진짜 끝났어.”
현호는 여자친구와 오래 만났는데 맨날 싸우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진짜로 헤어졌다고 어제 단톡방에서 듣기는 했는데 좀 있어 봐야 할 일이었다.
“잠깐 같이 찍은 사진이 여기 있었는데...”
내가 거절하자. 최유진은 핸드폰을 뒤지면서 친구의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진짜로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고 했는데 사진을 찾았는지 그녀가 내 앞에 핸드폰을 내밀었다.
“진짜로 안 하실 거에요?”
나는 그녀의 끈질김에 한숨을 쉬면서 핸드폰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진짜...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성의를 봐서 이번만 소개팅 받을게요.”
****
딸랑딸랑
나는 부동산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은 토요일 집을 계약하는 날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내 담당 공인중개사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네, 안녕하세요.”
“매도자분도 지금 오시고 계시다고 하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네. 주십시오.”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다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아마 집을 매매한다는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사기공화국이라고 불리는 사기가 판치는 나라가 아닌가.
당장 포털사이트에 부동산 사기라고 검색하면 수백 가지의 부동산 사기 방법들이 나온다. 다행인 것은 그런 사기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하기 위해 최소한의 확인사항들도 나와 있다.
물론 이렇게 준비를 해도 사기를 치는 도둑놈들이 있기 때문에 머리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는 했지만 막상 실전이 되니 몸이 긴장감으로 떨려왔다.
딸랑딸랑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한 남성과 여성이 들어왔는데 아마 내게 집을 파는 매도자와 상대편 공인중개사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좀 늦었습니다. 이 쪽이 매수자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젊으시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집을 파는 남자는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 인 것 같았다.
“그럼 매매 절차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공인중개사가 설명해주는 대로 등기부등본, 건축물관리대장 등을 전부 보면서 서류상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상대방 신분증도 확인하여 진짜 이 집의 주인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그렇게 몇 번의 확인 절차를 거친 후 계약서를 작성하였는데 미리 공인중개사를 통해서 누수와 하자와 관계된 특약, 잔금 시 담보 말소와 같은 기본적인 특약을 말해두어서 나는 추가로 집어 넣을 만한 내용이 없었다.
“그...잔금 일자는 7월 10일이 금요일이라 그때 했으면 좋겠는데 매수자님 생각은 어떠세요?”
보통 잔금을 치루는 날 이사를 한다. 그리고 이사는 금요일에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주말 동안 짐을 정리하고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떠나서도 나는 투룸의 계약이 7월 10일까지로 되어 있어서 그 날짜면 나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 날 잔금 치루고 이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세세한 세부내용들의 작성이 끝나고 다음은 서명하고 도장 찍는 일이었다. 공인중개사가 알려주는 대로 나와 매도자는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이제 매수자님께서 계약금 입금하시면 됩니다. 총 7억 5천 5백만 원에서 저번에 가계약금 5백만 원 입금 하셨으니까. 7억 5천만 원의 10%인 7천 5백만 원 입금하시면됩니다.”
나는 공인중개사의 말에 따라 핸드폰 어플을 열어 계약금을 입금하였다.
한 번에 큰돈을 계좌이체 하는 것이지만 저번에 일성전자 때문에 8천만 원을 입금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무뎌졌다.
“입금했습니다.”
“매도자님, 확인해주시겠어요.”
“오케이, 들어왔습니다.”
“그럼 이제 계약은 성사되었습니다. 이제 잔금일에 잔금만 치루고 이사만 하시면 되겠네요.”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집 파는 것 때문에 머리 아팠는데 그래도 좋은 매수자님 만나서 일이 잘 풀린 것 같습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악수나 한 번 하시죠.”
“네,”
악수를 마치고 나자 나에게 집을 판 남자가 지갑을 꺼내면서 말했다.
“집은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제가 분양 받고 거의 안 살아서 깨끗하거든요. 그래도 혹시 궁금한 것 있으시면 저한테 연락 주십시오. 이거 제 명함입니다.”
< 법무법인 초원, 변호사 남현성 >
“네, 죄송합니다. 저는 명함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저는 혹시 연락할 일 있으면 중개사님 통해서 하겠습니다.”
지갑에 명함이 있기는 했다. 예전에 로이스에 다니던 시절 만든 점장 명함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퇴사했으니 그걸 쓸 수는 없었다.
‘명함도 하나 새로 만들어야겠다...’
매도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나를 담당했던 공인중개사가 옆으로 다가왔다.
“저, 사장님. 저번에 대출 안 받는 다고 하셨죠? 혹시 법무사는 정하셨어요?”
“법무사요?”
“네, 보통 대출 받으시면 은행에서 법무사를 소개해주는데 아직 안 하셨을 것 같아서 알아봐 드릴까요?”
“아, 그래 주시겠어요?”
나중에 잔금을 다 치루고 나면 이 집이 내 집이라는 등기 등록을 해야 하는데 셀프로 하는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너무 복잡하여 그녀의 말처럼 법무사를 통해서 맡길 생각이었다.
공인중개사에게 부탁을 하였는데 옆에 있던 변호사 남현성이 나섰다.
“제가 잘 아는 법무사가 있는데 연결해 드릴까요?”
****
“PD님, 아까 낮에 강화정씨가 읽었던 돈까스 소년 사연 기억나세요?”
SBC에서 강화정의 파워타임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는 안용현 PD는 작가의 말에 낮에 있었던 사연을 떠올렸다.
“어...기억 하지. 감동적인 이야기잖아.”
“그거 지금 게시판에 반응이 너무 좋은데요?”
“그래? 어디 봐봐.”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 가게 사장이 훌륭하다는 내용과 소년이 대견하다는 내용이 도배되고 있었다.
하루에 보통 20~30개 정도의 글이 올라오는 것이 보통인데 벌써 100개를 넘어가는 것을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자극하는 사연이었던 모양이다.
“이거 편집해가지고 라디오 사연으로 올리면 어떨까요? 라디오 홍보도 되고 괜찮을 것 같은데...”
너튜브가 활성화된 이후 방송국마다 자신의 방송을 편집해서 하이라이트 형식으로 올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라디오도 거기에 발 맞춰 사연이나 생방송 중 특이한 일들을 편집해서 올리곤 했는데 작가의 말처럼 너튜브에 올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거 괜찮네. 근데 그 가게 진짜로 있는지 확인해봐. 사연 가지고 조작하는 사람들 많잖아.”
“아까 방송 끝나고 경품 지급 건 때문에 확인해봤는데 진짜 있는 가게였어요.”
“그래? 그럼 편집해서 한 번 올려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