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장: 최후의 승자(2)
“그렇군. 결국 이렇게 됐어. 이런 결말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는데 말이야.”
“상식적으로만 따지면 그럴 만도 해요.”
비단 황제만이 아니었다.
슈라우드가 제국을 꺾는 결말은 누구도 상상치 못했을 터였다.
심지어 전쟁의 승리를 넘어 제국 자체를 뒤집어엎는 결말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절대성이란 그만큼 대륙 전체를 관통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황제 당신의 오판이기도 합니다.”
“내 오판?”
끄덕.
“당신은 분명 라이를 봤어요. 적잖은 관심도 가졌고요.”
레나가 눈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그녀의 지적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 나갔다.
“어디 그뿐인가요? 라이가 행한 기적들을 수도 없이 겪어 보기까지 했어요. 그것도 당사자의 입장에서.”
“…….”
“그런데도 당신은 끝내 라이의 진가를 몰라보더군요. 어쩌면 나보다 당신이 더 절실하게 느꼈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내가 라이오넬을 몰라봤다?”
그러자 황제의 시선 또한 나를 향했다.
얼핏 아무런 감정도 내포하고 있지 않은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얼어붙은 동공의 표면 아래에서 들끓는 황제의 복잡한 감정들을.
그 들끓음이 오롯이 나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또 전부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나로서는 나름 상당한 평가를 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따지고 보면 황제 입장에서도 억울할 만한 부분은 존재했다.
그가 나를 얕잡아 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소드마스터임이 밝혀진 뒤, 그는 나를 상대함에 있어 오히려 과하다 싶은 전력을 투입했다.
당장 바로 다음인 이베리아 평원 전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전투에 황제가 투입한 전력은 소드마스터 하나에 6서클 대마법사 하나였다.
보통의 왕국이 지닌 마스터급 전력을 투입한 것이다.
적어도 상식적으로는 과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단지 그러고도 자꾸만 한 끗 차이로 나를 놓친 것일 뿐.
“네, 아니랍니다. 오늘의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어요. 라이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분명 모자랐다고 말이죠.”
문제는 이 한 끗 차이의 누적이었다.
이 한 끗 차이의 반복이 나를 계속해서 성장시켰다.
그리하여 제국이 지닌 최후의 보루에 다다르게 하였다.
가이덴 드라이슬러 말이다.
그랜드 소드마스터이자 대륙 최강자인 그가 나를 막아선 것이다.
하나, 결국 그마저도 나를 붙잡지는 못했다.
나는 끝내 가이덴까지 넘어서고야 말았다.
그리고 대륙 최강의 자리에 우뚝 섰다.
제국의 악몽, 나아가 제국의 재앙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당신은 틀렸어요, 황제.”
“…….”
“그리고 졌어요, 라이에게.”
레나의 말대로였다.
상식적인 면이 어떠하든 결국 결과가 증명하고 있었다.
황제는 오판했으며, 그렇기에 제국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그래, 졌지.”
황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복잡하게 들끓던 그의 눈빛이 조금씩 비워지기 시작했다.
어둠을 통해 전해지는 바는 그러했다.
황제의 감정이 점차 공허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왕녀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역시 전부 집어삼키려나?”
제국은 무너졌다.
그렇다면 이제 에펜시아 대륙의 새로운 질서를 논할 차례였다.
그리고 그 중심은 제국을 무너뜨린 슈라우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장은 생각 없답니다.”
“당장은 없다라……. 왜지? 불가능은 아닐 텐데?”
현재 슈라우드의 힘은 엄청났다.
제국을 무너뜨린 핵심 전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와 내 사람들, 그리고 그리핀 군단.
이 전력이면 왕국 몇 개쯤 찜쪄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니, 굳이 다 갈 필요도 없었다.
나 혼자 카오를 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동력이 갖춰진 내 힘이라면 그 어느 왕국도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경거망동하는 즉시 왕도의 창공에 거대한 암운이 드리우게 될 테니 말이다.
불가능이 아니라는 황제의 말은 이를 가리켰다.
“급하게 집어삼키다 보면 결국 체하는 법이니까요, 당신처럼.”
그럼에도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는 당장 제국의 자리 전부를 슈라우드로 대체할 생각이 없었다.
자칫 과욕이 될 가능성 또한 배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되려 그쪽의 가능성을 더 크게 잡는 것이 레나의 판단이었다.
물론 나를 비롯한 핵심 전력이 그대로이기는 했다.
하지만 왕국 내부 사정이 너무 좋지 못했다.
전쟁의 장기화, 이 과정에서 쏟아진 제국의 물량 공세를 버티느라 왕국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 전부를 다 집어삼키려다가는 사레에 걸릴 수도 있었다.
잘못하면 기도질식에 이를지도 모르는 위험한 사레에.
하고자 하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굳이 적잖은 위험부담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또, 천천히 간다고 해서 못 갈 것도 없어 보이네요. 실력에는 나름 자신이 있는 편이라.”
일개 왕녀에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레나였다.
한숨 돌린다고 해서 그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더구나 앞으로 대륙에는 대대적인 질서 개편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 대규모 격변이 수반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
제반 조건마저 레나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레나의 말마따나 천천히 간다고 해서 못 갈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런가…….”
이런 레나의 확신을 접한 직후였다.
황제의 눈빛이 완전히 비워졌다.
이윽고 전부 내려놓은 것이다.
복잡한 감정으로 들끓던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텅 빈 공허뿐이었다.
“그래, 정답은 결국 승자의 것이겠지. 틀렸기에 내가 패한 것일 테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본인이 처한 패자로서의 현실을.
“하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나? 이 정도는 승자의 아량에 기대 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끄덕.
“기왕이면 이 자리에서 마무리하고 싶군.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편하고 익숙한 자리라서 말이야.”
그리고 부탁했다.
마지막에 관한 것이었다.
본인의 마지막 말이다.
“그게 바람이라면.”
레나는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주는 그녀였다.
“그럼 하늘에서 지켜보겠네. 두 사람이 그려 가는 대륙은 어떤 작품이 될지.”
“기대해도 좋아요. 분명 재미있는 그림이 될 테니까.”
까득.
그렇게 황제가 마지막 인사를 남긴 직후였다.
무언가 캡슐 같은 것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원지는 바로 황제의 입속.
주르륵.
이내 소리에 따른 효과 또한 도드라졌다.
굳게 다물어진 황제의 입가를 타고 핏줄기가 새어 나온 것이다.
“부디…… 그러기를 바라지…….”
잠시 후, 이 핏줄기가 입가를 넘어섰다.
그러고는 턱을 지나 황좌에 앉아 있는 그의 무릎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황제의 온몸으로 번져 나가고 있는 죽음의 기운처럼 말이다.
“최소한 제국의 몰락이, 쿨럭, 억울해지는…… 일은, 쿨럭, 없도록…….”
이윽고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했다.
“부디…….”
그리고 진정한 끝을 맞이했다.
황제의 목숨도, 그리고 제국의 운명도.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패배자의 고개와 함께.
* * *
아이단 황제가 죽었다.
그리고 로만 제국이 몰락했다.
이로부터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대륙의 질서가 무너진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절대 패권의 시대는 저물었다.
에펜시아 대륙에는 이제 3강의 시대가 도래했다.
마이바크와 테네시아, 그리고 슈라우드.
각각 제국의 동부와 남부, 그리고 서부를 먹은 왕국들이었다.
단번에 배 이상의 영토 확장을 달성한 세 국가가 선도자로 급부상한 것이다.
물론 이 안에서도 차이는 존재했다.
대륙 사람 아무나 잡고 세 왕국 중 어디가 가장 강하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무조건 하나였다.
슈라우드.
사실상 제국을 홀로 무너트렸다고 봐도 무방한 왕국.
그러고도 핵심 전력은 여전히 건재했으며, 그렇기에 제국 서부를 넘어 중부까지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한 왕국.
그리고 대륙 최강자를 보유한 왕국.
이론의 여지는 없었다.
최강은 무조건 슈라우드뿐이었다.
다만, 가장 눈에 띄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3강의 반열에 오른 국가 중 슈라우드는 오히려 눈에 가장 덜 띄었다.
제국의 몰락 후 5년이 지난 현재까지 대외적인 활동 자체가 거의 없었다.
무슨 겨울잠에라도 빠져든 곰 같달까?
그만큼 슈라우드가 펼치는 대륙 차원의 행보는 잠잠했다.
-오늘 아침에 세계수가 가지를 뻗었다고 하더라.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아인 녀석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다행이네.”
-그런 것 같더라고. 어쨌든 겨울바람 일족도 왕국 내에 완전히 자리 잡았으니, 이걸로 정리 작업은 끝난 셈이야. 이제 내부적으로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어.
통신구 너머로 들려오는 사네의 목소리.
그는 현재 내게 왕국 내 여러 소식을 전해 주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네의 말대로였다.
슈라우드는 그간 내부 정리 작업에 몰두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를 수습하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경제를 회복시켰다.
징집된 병사들을 농토로 돌려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필요한 만큼의 보상도 제공했다.
또, 차지한 로만의 땅을 슈라우드 체계 내로 흡수한 뒤, 논공행상에 따라 이를 분배했다.
동시에 기본적인 체제 자체에 대한 개편도 잊지 않았다.
영토가 족히 5배는 늘어남에 따라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나아가 드워프와 엘프의 이주 및 정착 작업도 진행했다.
둘 다 나에게 하사된 기존 나로움 후작령 내에 자리 잡았으며, 오늘에서야 이 작업들이 전부 마무리된 참이었다.
이렇듯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온 슈라우드였다.
여기 드는 자금이야 제국과 황궁을 털어 여유롭게 마련했다지만, 인력 부족만큼은 딱히 해결책이 없었다.
레나와 사네, 그리고 마학연 출신 관료들이 날밤을 까며 매달리는 방법 외에는 말이다.
자연스레 대외적인 부분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던 여건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오늘 아침 겨울바람 일족의 완벽한 정착을 끝으로 내부 정리가 일단락되었다.
세부적인 것들이야 아직 조정이 남았겠으나, 더는 웅크리며 실속만 다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가 지닌 힘을 외부로 발산할 차례였다.
제국을 대신하는 에펜시아 대륙의 새로운 리더로서.
-그보다 슬슬 도착할 때쯤 되지 않았어?
“어, 다 왔어. 마침 저기 보이네.”
슈아아아~
지금 내가 카오를 타고 비행 중인 것도 그 일환이었다.
슈라우드가 새로운 리더로서 대륙에 선보이는 첫 행보의 일환.
“전해 준 정보대로 대략 5만쯤 되겠네. 도리토드 후작이 이끌고 있다 했지?”
-맞아. 나름 대륙 동남부를 평정한 조디아크네 왕국 제일 검이니 뭐니 하는데, 뭐 어차피 네 앞에서는 딱히 의미 없을 테고.
대륙 동남부의 끝자락에 위치한 조디아크네 왕국이란 곳이 말썽이었다.
이곳에서 전쟁을 삼가라는 우리의 권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무려 5만이나 되는 병력을 출병시켰다.
물론 지난 5년간 우리가 조용히 지내기는 했다.
여타 왕국 간 일들에 따로 개입한 적도 없었다.
따라서 우리 권고를 그저 말뿐인 것으로 받아들일 여지는 충분했다.
그냥 형식적인 말 몇 마디 늘어놓는 정도로 말이다.
“로만 왕국은?”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이번 권고는 그 형식 안에 실질을 담고 있었다.
조디아크네 왕국의 선전포고 대상이 비공식적이기는 해도 우리 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만 왕국.
제국에서 왕국으로 강등된 이곳이 바로 그 대상이었다.
-거기 사정이야 우리가 더 잘 알잖아. 최대한 끌어모았다는데 채 5,000이 안 돼. 차라리 없다고 보는 편이 더 나을 거야.
바뀐 것은 단순히 명칭에서 그치지 않았다.
국력을 상징하는 모든 척도가 격하되었다.
영토는 1/15로 축소됐고, 군사력은 그 이상으로 쪼그라들었다.
죽을 힘을 다해 끌어모은 병력조차 채 5,000도 안 되는 것이 그 방증이었다.
심지어 국왕조차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아이단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아니 올려진 이가 니바스 3황자인 것이다.
사실상 로만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대신 안전만큼은 우리가 담당해 주었다.
우리 때문에 그간 다른 국가들도 로만을 직접 건드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한데, 이번에 조디아크네란 곳이 이 비공식적인 관계를 애써 무시하고는 전쟁을 선포했다.
아무래도 5년이라는 시간의 침묵이 길기는 길었던 모양이었다.
“그 정도면 됐어. 어차피 뒷정리 용도로 쓰기에는 5,000도 많아.”
그렇다면 이제 제대로 보여 줄 차례였다.
슈라우드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 힘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단 한 치의 의구심조차 품지 못하도록 철저하고 처절하게.
“자, 그럼 내려간다.”
-아아, 끊기 전에 잠깐만. 브로든 교수님…… 아니, 용병부단장님이 너 남쪽으로 내려온 김에 꼭 한번 들러 달라셔.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완전히 잡혀 사시네. 결혼 전에는 그 흔한 안부 연락 한 번 안 하던 양반인데.”
-자유시간을 위한 핑계가 필요하다나 뭐라나. 어쨌든 난 분명히 전했다.
“사모님은 나도 무서운데……. 일단 알았어. 이것부터 끝내고 생각해 볼게.”
-그래. 그럼 제대로 손 좀 봐줘, 라이. 다시는 기어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물론.”
그렇게 사네와의 통신이 마무리됐다.
그리고.
“가자, 카오.”
“카오오오~!!”
카오의 강하가 시작되었다.
조디아크네 왕국 5만 병력 전체를 뒤덮는 거대하고도 찬란한 암운과 함께.
나아가 이는 서막이기도 했다.
앞으로 에펜시아 대륙을 지배할 어두운 질서의 서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