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장: 최후의 승자
“황제는요?”
레나와 함께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그녀가 질문을 던져 왔다.
로만 제국 아이단 황제에 관한 것이었다.
“대전에 있습니다.”
“라이도 아직 보지는 않았다고 했죠?”
“예. 왕녀님과 함께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현재 황궁 대전에 유폐돼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와 레나는 그를 만나고자 황궁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별다른 낌새는 없던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대전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셈이니까요.”
“하긴, 황제 그자라면.”
내가 보고 느낀 그대로였다.
황제는 도망가지 않았다.
슈라우드 군이 황도를 점령한 직후 대전으로 들어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문 너머로도 그가 지닌 기운의 존재는 확실히 느껴졌다.
즉, 그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와 레나의 당도를.
“우리 여기 오랜만이네요.”
“근 6년 만일 겁니다.”
로만 황궁에 발을 들인 것은 황제 즉위식이 마지막이었다.
그때를 기준으로 계산해도 벌써 6년 가까이 지난 셈이었다.
“일개 왕녀 신분으로 여기 발을 들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
“시간만 그렇게 된 게 아니지요. 왕녀님께서도 완전히 다른 분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요, 많이 달라졌죠.”
그사이, 레나는 모든 면에서 달라졌다.
물론 공식적인 지위 자체는 여전히 왕녀 그대로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입지는 천지 차이였다.
현재 그녀는 슈라우드 왕국의 국왕이나 다름없었다.
1왕자 크리스토퍼의 반란 이후 오브리가 국왕은 사실상 2선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지금은 그저 적절한 선위 타이밍만 재고 있을 뿐이었다.
또, 앞으로 에펜시아 대륙의 리더가 될 예정이기도 했다.
제국을 무너뜨린 슈라우드였다.
그리고 레나는 그런 슈라우드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비록 전성기의 황제만큼은 아닐지언정 대륙의 리더가 될 자격은 충분했다.
그녀의 행보에 따라 그 이상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 있고 말이다.
“이 모든 게 라이 덕분이고요.”
“과찬이십니다.”
“아니, 전혀요. 단 한 치의 과장도 없이요.”
레나의 눈빛과 목소리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녀 말마따나 단 한 치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은 절절한 진심을.
그렇기에 나도 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레나…….”
그때였다.
이 어색함을 자연스럽게 넘겨 줄 인물이 등장했다.
“이것도 오랜만이네. 오빠가 애칭으로 날 부르는 거.”
레나에게 오빠라 불릴 유일한 인물, 바로 1왕자 크리스토퍼였다.
반란 실패 직후 제국으로 망명했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레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도에서 빠져나가려던 것을 붙잡아 뒀습니다.”
“고마워요, 라이. 덕분에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줄일 수 있겠네요.”
정확히는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드러냄을 당한 것이었다.
제국군의 패전 직후, 크리스토퍼는 황도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황도 내 슈라우드 정보원들의 주요 마크 대상이었다.
당연히 그의 움직임은 실시간으로 포착되었고, 곧장 체포에 들어갔다.
그의 버팀목이었던 제국은 이미 몰락의 길에 들어선 뒤였다.
더욱이 크리스토퍼에게는 제대로 된 경호조차 부재했기에 이렇다 할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왕자를 잡아들였고, 여기 황궁에 가둬 두었다.
그러고는 레나가 대전으로 가는 길목에 미리 대기시켜 둔 참이었다.
그의 양옆에 무릎 꿇고 있는 나로움 부자와 함께.
“그게…….”
“왜 그랬는지는 묻지 않을게. 이제 와 물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니까.”
크리스토퍼는 레나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있었으니까.
“대신 죗값은 제대로 치르게 될 거야. 최소 오빠가 죽인 오빠 동생들이 저승에서 활짝 웃을 수 있을 정도까지는.”
죄의 무게는 엄중했다.
크리스토퍼는 선을 넘어도 한참이나 넘어섰다.
그는 오브리가 국왕을 유폐하고 협박한 것으로도 모자라 제 손으로 2왕자와 3왕자를 참살했다.
모두 본인이 왕위에 오르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 목적이 달성됐다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왕위는커녕 역적이 되어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끝내 이렇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지은 죄에 걸맞은 값을 치름이 당연했다.
“하, 한 번만 용…….”
“혹여라도 용서 같은 건 입에도 담지 마. 그날 이후로 아바마마는 잠도 잘 못 주무시고 계시니까.”
레나에게 용서의 마음 같은 건 터럭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상을 원하는 그녀였다.
“라이.”
“예, 왕녀님.”
“극지대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노스페라투가 전부 소진됐고, 또 엘프들이 터전을 왕국 내부로 옮기게 됐으니까요. 해서 처분이 애매한 자들을 묶어 한 번에 보낼 예정입니다.”
“그럼 이자들도 전부 그쪽으로 보내 버리세요.”
크리스토퍼와 나로움 부자의 남은 삶이 결정되었다.
이들은 이제 극한의 추위, 그리고 살을 저미는 칼바람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북방 극지대 경험자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삶은 차라리 죽음만 못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카밀라와 테페슈에게 확실히 전해 줘요. 적어도 이자들만큼은 내 허락이 있기 전까지 마음대로 죽어서도 안 된다는 거.”
심지어 죽음조차 크리스토퍼의 의지를 벗어났다.
아무리 스스로 죽음을 원한다 해도 죽을 수 없었다.
레나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꿈벅꿈벅.
당장은 어떤 상황인지 몰라 눈만 꿈벅이는 크리스토퍼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깨닫게 될 터였다.
자신이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에 빠졌다는 사실을.
“거기서 뭘 잘못했는지, 그게 얼마나 큰 잘못인 건지 한번 찬찬히 생각해 봐. 몸은 힘들더라도 시간만큼은 차고 넘칠 테니까.”
“…….”
“그럼 잘 가.”
저벅저벅.
그렇게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는 크리스토퍼를 뒤로한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당초 목적지인 대전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이내 당도할 수 있었다.
지난 세월 나와 레나의 최종 목표로 군림해 온 그자가 있는 곳에.
“왕녀님!!”
쿵! 쿵! 쿵!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시면 왕녀님과 슈라우드 왕가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다만, 곧바로 조우한 것은 아니었다.
대전의 문고리를 돌리기 직전, 한 인물이 또다시 눈길을 잡아끌었다.
레나 앞에 무릎째로 기어 와서는 애원과 동시에 쿵쿵 머리까지 박아 대는 자였다.
도저히 시선을 주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있었네요. 카일 이반.”
그의 정체는 카일 이반이었다.
좋게 말하면 황제의 수족, 실제로는 황제의 개라 불리는 자.
그런 자가 황제의 대전 앞에서 황제의 대적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문 너머 대전 안쪽까지 다 들릴 만큼 커다랗고 애절한 목소리로.
“패전 직후 몰래 빠져나가려 했었습니다. 나름 황도 탈출까지는 성공했는데, 결국 멀리 가지 못하고 잡히더군요. 그래도 왕녀님께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 여기 두고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라이. 못 봤으면 괜히 궁금할 뻔했어요.”
나와 레나 모두 카일과도 연이 적지 않았다.
황제의 말을 직접 전하던 자이다 보니 오히려 황제보다도 더 많이 마주했다.
당시 묵혀 두었던 비꼬는 말투와 건방진 태도 등을 떠올리면 괜히 더 밉상일 수밖에 없었다.
“전부 털어놓겠습니다! 아이단 저자가 시킨 비열한 짓거리들부터 로만의 치부까지 제가 아는 바를 전부 다! 분명 왕녀님께서도 흡족해하시리라 자신합니다!”
그랬던 자가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비굴함을 보이고 있었다.
시원하다기보다는 되려 눈살만 더 찌푸려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는 나만의 감상이 아니었다.
“저와 저희 가문만 살려 주시면 왕녀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걸 내어 드리겠습니다. 소인, 아이단의 곁에서만 25년입니다. 뭐든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흠, 목숨만 바라는 게 아니었네요? 분명 조금 전까지는 살려만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그, 그것이…….”
“어째 믿음이 잘 안 가는 것도 같고.”
레나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카일이 다시금 바닥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아닙니다! 제가 머저리 같은 놈이라 생각이 짧았습니다. 목숨만,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나머지는 오롯이 왕녀님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정말 살려만 주면 내가 원하는 걸 다 내어 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설령 제가 모르는 것이라 해도 무슨 수를 써서든 알아낸 뒤 왕녀님께 보고 올리겠습니다. 정말입니다!”
“흐음…….”
“부디 살려만 주십시오! 뭐든 다 하겠습니다!”
쿵! 쿵! 쿵! 쿵!
어찌나 열정적으로 찧어 대는지 이마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를 본 레나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살려 주죠.”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왕녀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요. 절대 잊지 말고, 지금 당장 가서 보고 올릴 주제들부터 정리해 놔요. 그거 보고 다음 처우도 결정할 생각이니까.”
“명 받들겠습니다!”
살려 주겠다는 레나의 한마디에 카일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웃는 얼굴 위로 피가 잔뜩 번진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연출됐으나, 정작 카일 본인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거의 180도에 가까운 인사를 남긴 뒤 미친 듯 달려갔다.
한시라도 빨리 레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함이었다.
끄덕.
하지만 그래서였다.
나를 향해 끄덕여지는 레나의 고개를 보지 못한 것은.
“알겠습니다.”
끄덕임의 의미는 명확했다.
굳이 말로 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로써 그의 여생 역시 추위와 칼바람의 한복판을 거닐게 되었다.
그렇다고 레나가 허언을 뱉은 것도 아니었다.
레나는 분명 말했다.
살려 주겠다고.
단지 어떻게 살려 주겠다는 말을 끝까지 아꼈을 뿐이다.
따라서 그가 어디로 가서 살게 되든 그것은 레나의 발언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럼 가 볼까요?”
무엇보다 카일이 어찌 되는지 따위 하등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나와 레나가 만날 인물이었다.
우리가 여태 쉬지 않고 전력으로 달려온 이유?
결국, 이 인물 하나를 마주하기 위함이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달칵.
그렇게 대전의 문이 열렸고,
“왔군.”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을.
“네, 왔답니다. 황제.”
로만 제국의 황제 아이단.
그는 모든 것의 발단이었다.
나의 회귀부터가 그러했다.
내 회귀는 결국 어둠의 정령석을 구해 오라는 황제의 명령으로부터였다.
여기에 크리스토퍼의 쪼잔한 탐욕이 더해져 라인하트 영지에 대한 수작으로 이어졌다.
한데, 이를 미리 알게 된 레나가 소식을 전해 주었고, 원래라면 임무 수행 중이었어야 할 내가 급히 라인하트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회귀라는 시나리오가.
“결국 이렇게 됐네요.”
회귀를 통해 나는 일개 자작령의 16살 차남으로 돌아갔다.
단, 소드마스터에 도달했던 과거의 경험은 여전히 뇌리에 각인된 채였다.
더구나 이 값진 경험에 어둠의 정령력이라는 최상의 변수까지 추가되었다.
그렇기에 시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씩 바꿔 나갈 수 있었다.
원래라면 몬스터 웨이브에 전사했을 에릭스 브란부르크의 목숨을 살렸고, 그럼으로써 라인하트 영지의 힘을 키웠다.
그 직후 왕도 아카데미로 향하여 여러 인재를 내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 레나와의 인연도 다시 쌓았다.
이를 통해 레나에게 닥칠 비극을 저지했으며, 동시에 그녀를 유력한 계승권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시켰다.
그러자 레나는 지닌 바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세력을 키웠고, 나는 기적과도 같은 업적들을 세워 그 성장을 가속화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끝내 도달할 수 있었다.
슈라우드의 국왕, 그리고 대륙 최강이라는 정점의 자리에.
그리고 지금 이렇게 서게 되었다.
최대의 적이자 최종 목표인 황제 아이단 앞에, 최후의 승자라는 타이틀을 달고서.